동지 무렵 찾아온 추위가 겨울다웠다. 한 해가 달랑 일주일 남은 십이월 넷째 주 토요일이었다. 토요휴무일이기도 했지만 어제 방학에 들었기에 이튿날 아침은 좀 느긋했다. 햇살이 퍼져갈 즈음 나는 집을 나섰다. 용원으로 다니는 757번 직행버스를 타고 진해로 넘어갔다. 버스는 진해구청 앞을 지나 웅천으로 갔다. 웅동농협을 거쳐 안청해오름 아파트가 나왔다. 그 다음 마을 의곡에서 내렸다.
봄이나 가을에는 산을 높이 올라 숲의 정기를 받아오기 좋다. 여름에는 물이 철철 흐르는 계곡을 찾아 발을 담그고 더위를 식혔다. 겨울에도 산이나 계곡을 찾아도 되지만 나는 행선지를 바꾸기도 한다. 겨울이면 나는 산보다 강가나 바닷가를 즐겨 걷는다. 다른 계절보다 해발고도를 낮추어 평지를 걷는 셈이다. 자외선이 그렇게 따갑지 않은 겨울이다. 춥다고 실내에만 움츠려 있어서는 안 된다.
버스에서 내린 의곡마을은 마천주물공단과 인접했다. 건너편에는 영길마을과 흰돌메공원이 보였다. 영길 앞 바다는 오래전 황포돛대 가사를 쓴 사람의 창작 모티브가 된 갯마을이다. 이제는 신항만 배후기지 건설로 해수면 상당 부분은 매립되었다. 나의 의곡에서 안성마을로 가는 해안도로를 따라 걸었다. 언덕 군데군데에 갈비집이나 모텔이 보였다. 신항만 배후기지는 매립토를 정비 중이었다.
아스팔트가 포장된 길이긴 해도 차량은 아주 드물게 지났다. 산모롱이를 돌아가니 아늑한 포구 안성마을이었다. 개발에 밀려 포구의 기능을 상실해 어선은 한 척도 없고 썰물로 드러난 갯벌에는 갈매기들만 바글거렸다. 낮은 고개를 넘으니 청안마을 역시 포구의 기능은 잃어버렸다. 마을 뒤로는 근래 들어선 고층 아파트가 숲을 이루고 있었다. 마을에서 빤히 건너 보이는 곳이 안골포왜성이었다.
나는 안골포마을까지 가 보았다. 마을 앞에는 진해만 양식장에서 건져 올린 굴을 실어와 한창 까고 있었다. 즉석에서 생굴을 팔기도 하고 요리해서 팔기도 했다. 마을 앞 해안선 따라 굴 여러 채 작업장이 줄지어 있었다. 나는 마을 안길을 지나 낮은 고개로 올라갔다. 나는 안골포왜성으로 오르는 길 곁의 산마루 해송나무 아래서 쉬었다. 신항만의 웅장한 크레인과 부대시설이 한 눈에 들어왔다.
언덕에서 조금 오르면 안골포왜성이다. 나는 수 년 전 한 차례 오른 적이 있어 이번에는 찾지 않을 셈이다. 동진해 바닷가는 왜구가 자주 출몰했다. 신라하대 성흥사와 성주사를 창건한 무염국사는 왜구를 물리친 스님으로 알려졌다. 안골포와 웅천의 왜성은 임진왜란 때 왜구가 조선인의 노동력을 착취해 쌓은 성곽이다. 우리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축조된 석성은 울산 서생이나 거제 장목에도 있다.
나는 산마루에서 가져간 도시락을 비웠다. 이어 신항만 배후에 예전부터 있던 길 따라 용원으로 향했다. 수로 건너 신항만 매립부지는 추운 날씨에도 작업 인부들이 조경수를 손질하고 있었다. 좁은 수로가 모롱이를 돌아가는 지점에 용원활어센터였다. 제철을 맞은 생대구가 많이 보였다. 올겨울은 아직은 예년보다 따뜻했다. 남해안 해수 온도가 높아 대구어장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았다고 들었다.
새벽녘 경매를 끝낸 대구는 시장바닥에 펄떡이고 있었다. 대구는 알을 지닌 암컷보다 고니가 불룩한 수컷이 한 금 더 나갔다. 내장을 꺼낸 대구를 널어 꼬들꼬들 말리는 곳도 있었다. 선창 한 켠 여러 가지 조개를 파는 자리도 있었다. 청어 시세는 아주 쌌다. 나는 한 할머니가 다듬어 놓은 조기새끼 한 무더기와 파래를 한 줌 샀다. 할머니 말로는 겨울 한 철만 진해만에서 잡히는 조기라고 했다.
인도 허황옥이 머나먼 뱃길에서 안착한 곳이 망산도다. 그 곁이 용원 버스종점으로 가덕도를 오가는 마을버스가 다녔다. 신항만 건설 이후 가덕도는 이제 섬이 아니다. 거가대교와 별도로 연륙교가 이어졌다. 부산 하단으로 오가는 광역시 시내버스도 다녔다. 그런 속에 창원역까지 운행하는 좌석버스도 있었다. 버스종점에서 잠시 서성이자 내가 타고 갈 버스가 들어왔다. 짧아진 겨울해가 비스듬했다. 11.1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