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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택동을 마오쩌둥이라고 발음해야 한다는 사대주의!
영어 이름 존(John)은 독일에서는 요한(Johann), 불란서에서는 장(Jean)이라도 한다. 영어 이름 헨리(Henry)는 독일에서는 하인리히(Heinrich), 불란서에서는 앙리(Henri)라고 한다. 다들 자기 나라 음운에 알맞게 발음한다.
최성재
언젠가부터 북경을 베이징이라 하고 사천을 쓰촨이라 하게 되었다. 풍신수길을 도요토미 히데요시라 하고 덕천가강을 도쿠가와 이에야쓰라 하게 되었다. 최근에는 멀쩡하게 잘 쓰던 게놈을 한사코 지놈으로 쓰는 신문도 있다. 히로뽕을 꼭 필로폰이라고 하고 심지어 알레르기를 앨러지라고 혀를 꼬부린다. 스티로폴은 틀렸고 스티로폼이 맞다고 동경대 박사가 우기는 것도 보았다. 알레르기와 스티로폴은 독일어이고 앨러지와 스티로폼은 영어에 지나지 않음을 그는 모르고 있었다.
더 가관인 것은 현지음대로 쓴다면서 베네치아는 베니스라 한다. 영어식 발음에 지나지 않는 것을 무슨 대단한 학식이라도 되는 듯이 으시댄다. 불란서의 파리도 패리스라고 하려나. 모차르트의 세례명은 원래 볼프강우스 테오필루스(Wolfgangus Theophilus)였는데, 테오필루스는 아시다시피 그리스말로 '신의 사랑'이란 말이다. 이를 독일에서는 'Gottlieb'라 했고 라틴어로는 'Amadeus'라 했다. 뜻은 모두 동일하다. 이 중에서 'Amadeus'가 발음하기 좋았기 때문에 그냥 아마데우스라 했던 것이다. 왜 발음하기 좋았을까. 그리스말은 18세기의 일반 서양인에게는 너무 오래된 생소한 말이라 그걸 기억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영어 이름 존(John)은 독일에서는 요한(Johann), 불란서에서는 장(Jean)이라도 한다. 영어 이름 헨리(Henry)는 독일에서는 하인리히(Heinrich), 불란서에서는 앙리(Henri)라고 한다. 다들 자기 나라 음운에 알맞게 발음한다. 마이클 잭슨이 독일식으로 발음하면 미하엘 약존이다. 불란서 식으로 하면 미셸 작송이다. 나의 성은 최가인데, Choi라고 쓰면 미국인은 초이, 독일인은 호이, 불란서인은 솨라고 한다. 꼬이라고 발음하는 나라도 있다. 내가 눈에 도끼를 세우고 화를 내면 그들이 단 한 명이라도 최라고 발음해 줄까.
박세리를 Seri Pak이라 쓰고 이를 쎄리 팍이라고 읽으면, 신문 활자에 뽑으면 무슨 세련된 발음인 양, 영어 잘하는 듯이 누군가가 착각해 줄 듯한 느낌이 드는 모양이다. 원 발음을 중시한다면서 한국의 원 발음을 영어식으로 읽고는 즐거운 몽상에 빠진다. 김을 Kim이라 쓰고 꼭 킴이라고 발음한다. 'ㄱ'은 초성에서 무성음이라서 반드시 'K'로 써야 한다는 걸 크게 자랑하고, 개탄하고 이를 영어로 옮겨 놓고는 'ㅋ'으로 읽는다. 케네디를 왜 게네디라고 못할까. 클린턴을 왜 글린턴이라고 못할까. 같은 무성음인데. 영어의 폴(Paul)을 바울, 피터(Peter)를 베드로라고 한 빛나는 전통이 있지 않은가. 폴은 영어지만, 바울은 우리말이다.
동경은 우리말이지만, 도쿄는 일본말이다. 베이징은 중국말이지만 북경은 우리말이다. 광동은 우리말이지만 꽝뚱은 중국말이다. 중국인도 베이징을 페킹이라 하는 곳이 많다. 영어에서도 수백 년 이렇게 썼다. 이걸 중국이 국제적으로 베이징으로 고치는데, 40년이 걸렸다나, 50년이 걸렸다나. 그건 영어로 표기할 때 그렇게 하면 되고 우리말은 북경이다. 5백년 동안 쓴 우리 발음이요, 우리말이다. 중국인은 의연하여 한국의 지명을 모조리 자기 식으로 부른다.
이런 발음은 우리 조상이 한자를 들여오면서 무려 2천년 동안 갈고 다듬어 완전히 우리말로 바꾸었다. 그 복잡한 한자를 불과 300여자의 한글로 바꾸어 쓸 수 있게 만들었다. 한번 들으면 기억할 수 있게 만들었다. 모국어 음운과 전혀 다른 단어 하나를 외기는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수십 번 수백 번 되풀이해도 외워지지 않는다.
서세원과 신은경의 '좋은 세상 만들기'에서 노인들이 'SBS' 발음을 못하는 촌극을 보고 전국민이 박장대소를 하면서 즐기던 것을 생각해 보자. 에스비에스, 이것은 우리 음운에서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어려운 발음이다. 천 번 만 번 들어도 우리 발음에 귀와 입이 완전히 고정된 사람에게는 기억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를 서울방송이라고 해 보자. 그러면 노인들이 한 번만 듣고도 대번에 외우고 평생 잊어 버리지 않는다. 서울방송과 SBS가 다른가. 이를 노인들에게 꼭 발음시켜 보고 ABC도 모른다고 놀릴 것인가. 그건 파렴치한 짓이다.
이런 저런 사정을 잘 알고 우리 조상들은 한자를 들여 오면서 수만 자의 한자를 아주 간단한 발음 몇 개로 고정시켜 버렸다. 한 번 듣고 두 번 들으면 외울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엄청난 조상의 지혜이다.
현지 발음은 그 말을 써야 하는 사람이 배워서 그 나라 사람과 얘기할 때 쓰면 된다. 우리끼리 말하는데 굳이 들으면 잊어 버리고, 들으면 잊어 버리고 하는 것을 억지로 발음해 내면 우월감을 느끼고 그렇지 못하면 열등감을 느끼고 하는, 본말이 전도된 괴이한 짓을 할 필요가 없다. 발음은 형식이고 뜻은 내용인데, 평생 단 한 번도 써 먹지 못할 발음을 정확히 한다며 내용은 알지도 못하고 끙끙대는 일을 우리 조상들은 참으로 어리석게 보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 역관들이 중국어를 못했던 게 아니다. 중국어, 거란어, 만주어, 몽골어, 일본어 다 기가 막히게 잘했다. 설령 말은 못해도 사신끼리 만나면 한문 필담으로 동양 삼국은 얼마든지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모택동은 우리말이지만, 마오쩌둥은 중국말이다. 등소평은 우리말이지만 뎅샤오핑은 중국말이다. 중국말 중에 북경의 보통화이다. 장개석은 원래 이름이 장카이석이다. 이를 북경의 보통화도 장졔스라 할 뿐이다. 이를 기어코 장졔스라 표기해야 밥맛이 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이태리의 로마를 미국 사람은 백이면 백, 만이면 만, 로움이라고 한다. 이태리 사람도 영어로 말할 때는 로마라 하지 않고 로움이라고 한다. 여기에 대해 시비를 거는 사람도 스스로 주눅이 드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일본인은 커피를 고히라고 하고 호텔을 호떼루라고 한다. 이를 아나운서 선발할 때 제대로 발음하는지 시험한다. 원음으로 발음하는 자는 감점이다. 참으로 현명한 국민이다. 원음은 영어로 할 때 정확히 하면 된다.
미국, 영국, 독일 이 세 나라를 원음대로 발음한다고 '더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오브 어메리커'니 '더 그레이트 브리튼'이니 '도이칠란트'니 하는 사람은 대한민국 사람 중 한 명도 없다. 참 잘하는 일이다. 일본을 '니폰'이니 '니혼'이니, 중국을 '뒹귁'이니 '둥궈'라는 사람도 하나도 없다. 이것도 참 잘하는 일이다.
언제부터 우리가 아니 한국의 지식인들이 혀를 꼬부리며 잘난 척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창피하고도 우습게도 일제식민지 통치 때부터였다. 신학문을 일본어로 배우게 되면서부터 일본의 지명과 인명을 우리 식으로 읽다가 막상 일본어를 배우게 되면서 일본 발음을 알게 되자 급속도로 일본의 지명과 인명을 원음대로 발음하게 된 것이다. 일반 서민들, 신학문을 배우지 못한 선비들, 일본어를 아주 잘하되 표시 내지 않는 사람들은 여전히 동경, 대판, 대마도, 북해도, 이등, 명치, 덕천, 소서, 가등, 풍신이란 말을 썼다.
개인적인 말이라서 미안하지만, 필자의 부모님은 두 분 다 일본인들이 거의 외국인인 줄 모를 정도로 일본어를 잘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분은 한번도 우리말을 하시면서 도쿄니 오사카니 쓰시마니 호카이도니 이토니 하신 적이 없었다. 반드시 우리 발음으로 말씀하셨다. 왜 그렇게 하는지에 대해서도 한 번도 말씀하신 적이 없었다. 그분들에게는 그게 너무도 당연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버지는 일본에서 만난 사람을 얘기할 때, 일본 사람 이름이 나와서 혹 일본 발음을 하게 되면, '다나까 한자로는 전중'이라고 반드시 알려 주셨다.
우리말에 외국어 단어를 되도록 원음에 충실하여 많이 섞어 쓰는 사람은 얼치기인 경우가 99%이다. 1% 정도 그 외국어를 아주 잘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들은 안타깝게도 그 얼에 양 귀신이나 중국 귀신이나 일본 귀신이 쓰인 분들로 무식한 사람을 버러지 취급하는 교만하기 짝이 없는 분이시다. 99%의 얼치기들은 그런 말을 쓰는 스스로를 대견해 하고 남들이 자신이 얼치기가 아니라 도사인 줄 착각해 주길 바란다. 1%의 도사는 도사이긴 도사로되 도사 세계에서는 겨우 말석을 차지하고 있는 엉덩이에 뿔이 난 도사들로서 산소가 희박한 높은 산 정상에서 무식한 자들을 한없이 깔보면서 세상을 까마득히 내려다보며 고독을 즐기는 분이시다. 알고 보면 대단히 무식한 자들이다.
해방 후에는 영어를 제대로 배우게 되면서 영어 발음을 우리말에 정확히 쓰는 것에 엄청난 시대적 소명을 갖는 자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게 되었다. 외국에 살다 온 사람들은 이미 우리말이 된 단어들에 개탄을 금치 못했다. 학회에 신문에 방송에 줄기차게 바른 지식을 전파했다.
마침내 중국의 지명과 인명까지 원 발음대로 교과서에 신문에 싣기 시작했다. 영어는 학교에서 이윽고 거의 모든 국민이 다 배워서 원음으로 교정된 발음의 영어 단어는 그런 대로 외워지지만, 중국어를 배우는 사람은 극소수라 그것이 99.99%의 국민에게 외워질 리가 없다. 교과서를 쓰는 양반도 신문 기사를 쓰는 양반도 마찬가지이다. 극소수의 중국어 배운 사람 외에는 수십 번 들어도 잊어 먹을 수밖에 없다. 수도 없이 찾아보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중학교 지리부도엔 한자도 괄호 안에 집어넣지 않고 지명을 모조리 중국말로 바꾸었다. 중국 지명을 중국식으로 발음하면 중국 전문가인 줄 착각해 주길 바라는 신문 기자 양반들이 어찌나 많은지. 실은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한국의 큰 신문사에조차 중국 전문가는 한 명이 있을까 말까 한다.
삼국지를 한 번만 읽으면 현재도 두루 쓰이는 중국 지명을 아무 노력도 없이 줄줄 외우게 되는데, 이렇게 잘 알고 있는 지명과 중국말로 표시된 지명을 연결할 재주가 없다. 졸지에 유식한 사람을 도리어 열등감이 가득한 무식한 사람으로 만들게 되었다. 참 웃기는 것 중 하나가 '만주는 우리 땅' 이렇게 호기롭게 말하면서 압록강, 두만강만 건너면 모조리 아리까리한 중국말 지명으로 바꾼다. 지린, 헤이룽, 옌벤 -- 멀쩡한 길림, 흑룡, 연변을 두고 해괴한 짓을 하고 있다. 그런 말은 중국인하고 말할 때나 쓰면 된다.
한글 창제의 뜻을 새겨 보자.
최만리를 욕할 줄은 알면서(암기 수준), 자기가 오늘의 최만리임을 모르는(이해와 응용, 비판, 창조 모두 밑바닥) 자가 바로 오늘날 한국의 지식인이다. 특히 대학교수와 신문기자가 그렇다.
한글 창제의 가장 큰 뜻은 어문일치이다. 말과 글을 일치시키면 인간의 사고 능력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비약한다. 그 어려운 한문도 우리말로 쉽게 풀어 써서 노비에게 읽어 주면 순식간에 그 지적 수준이 수십 년 한문을 읽은 주인과 비슷하게 된다. 어떤 외국어를 수십 년 배웠지만 원서를 평생 한 권도 제대로 못 읽은 사람과 그 외국어는 전혀 모르지만 원서를 맛깔 난 우리말로 번역된 책을 천 권 읽은 사람 중에서 누가 더 똑똑할까. 어문일치는 이렇게 보통 사람들을 얼마든지 실질적인 석학으로 만들 수 있다. 민초를 가르치는 바른 소리(훈민정음)는 바로 어려운 말을 쉽게 표현하여 보통 사람을 지혜롭게 만드는 데 있다.
한글로 어떤 소리든 표현할 수 있게 한 목적은 크게 둘인데, 첫째는 우리말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고, 둘째는 한문이 아닌 중국어나 다른 외국어를 배울 때 발음을 정확하게 하기 위해서 즉 발음기호로 사용하기 위한 것이다(동국정운). 이건 오늘날도 그대로 적용된다. 외국어를 배울 때 한글을 발음기호로 사용하면 아주 멍청한 사람도 제법 그럴 듯하게 발음을 잘한다. 이를 옛날에 중국의 사성을 표시하기 위해 방점을 찍었듯이, 외국어마다 한글을 약간 변용하여 쓰면 원음을 거의 완벽히 표기할 수 있다.
우리말이 된 외래어는 원음으로 표현할 이유가 전혀 없다. 그것은 보통 사람을 깔보기 위한 수단밖에 안 된다. 스스로 무식을 탄로시키는 행위밖에 안 된다. 그는 외국어와 외래어도 구별 못하는 자이고 한 언어의 음운은 그 언어 사용자들간에 수천 년 수만 년에 걸쳐서 굳게 약속한 바를 모르고 있는 자이다.
우리 음운에 맞게 하여 누구나 한 번 들으면 기억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미국'하면 즉시 기억할 것을 유치원생한테, 노인한테 '더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오브 어메리커'라고 혀를 꼬부려서 정신적 테러를 가하는 것은 오로지 자기들끼리만 한문을 배워서 길이길이 서민들 위에서 군림하려던 최만리를 필두로 한 대부분의 양반과 흡사한 심보이다. 오죽 서민들이 열등감과 아니꼬움을 느꼈으면, 흥부가 박을 타서 부자가 되자마자 제목도 읽지 못하는 한문 서적을 선반에 줄줄이 꽂아 두었을까.
이렇게 하자. 중국과 일본의 지명과 인명은 한자로 표시하고 우리식 한자음으로 읽자. 일본인의 인명은 대개 4자이므로 그 성만 두 자 쓰면 될 것이다. 일본인은 우리와 달리 성이 10만 개나 되므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성만 써도 혼동이 안 된다.
다른 나라의 외래어는 국어학자를 비롯하여 여러 학자들을 중심으로 어떤 원칙을 정하는 게 좋을 듯하다. 예를 들어 어느 나라든 관계없이 로마자의 무슨 자는 한글의 무슨 자로 한다는 단일한 원칙을 정하되, 가능하면 단순하게 하여 외국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한 번 들어도 기억하기 쉽게 하면 좋을 것이다. 또 필요하면 아예 '미국, 영국, 백림, 남가주' 하는 식으로 한자말로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꾸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이건 중국이 모조리 그렇게 하고 있는데, 중국과 어느 정도 보조를 맞추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발음은 아주 발음하기 쉽게 하는 일본을 참조하고 뜻은 중국을 참조하는 게 좋을 것이다.
문제는 이미 우리말이 된 외래어이다. 이것은 언어의 사회성을 존중하여 그대로 쓰도록 하자. 외국어를 배우는 사람은 그 외국어 발음을 정확히 배워야 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 경우도 한국식 어투가 조금 들어가는 것은 전혀 관계가 없다. 외국인이 정확히 알아들을 수만 있다면, 이 경우도 발음에 주눅들 필요는 없다. 인도인, 필리핀인, 독일인, 프랑스인 보고 미국식 발음을 못한다고 아무도 핀잔주지 않는다. 내용이 훨씬 중요하다. 한국식 어투가 있는 형식도 자랑거리가 될 수 있다. 세상에 당당한 사람보다 아름다운 사람도 드문 법이니까.
전세계 개고기의 95% 이상을 먹을 게 확실한 중국인한테 개고기 먹지 말라고 협박하는 세계인은 아예 없고 이제 개고기 먹지 말자고 굳게 다짐하는 중국인도 전혀 없다. 스스로 주눅이 들어 고개를 못 드는 한국인이 제일 만만하니까, 줄기차게 두들겨 맞고 나라 안에 내분이 끊이지 않는다.
줏대를 세우자. 남의 원칙에 나를 맞추지 말고 남의 원칙을 일부 또는 필요하면 과감히 받아들이되 내 원칙을 확고하게 정립하여 당당히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줏대이다.
(2001. 11. 23.)
최성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