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운여정-
경희추풍慶熙秋風
-표민웅-
깊은 가을이다. 추수를 기다리는 들녘은 황금 물결, 온 산은 노란 저고리와 붉은 치마를 입혀 놓은 듯, 단풍이 아름답다. 바라보기만 해도 메마른 우리 마음에 따듯한 불을 지펴 줄 것 같다.
1953년과 1956년 봄, 서울과 부산에서 만난 우리들은 경희의 옛 궁터에서 꿈을 키워 왔다. 봄에는 벚꽃, 개나리꽃등 봄꽃 속에서, 여름에는 달콤한 아카시아꽃 향기가 풍기는 녹음이 짙은 산속에서, 가을에는 불타는 단풍을 즐겼다.(사진#1) 졸업 후 65년의 세월이 흘러 만추晩秋의 경희궁터를 찾으니 어찌 감회가 없으리오!!
조선조 후기 르네상스를 이끈 다산 정약용은 그의 '수종사水鍾寺유람기'에서 '어렸을 때 노닐던 곳에 어른이 되어 온다면 하나의 즐거움이고, 곤궁했을 때 지나온 곳을 현달賢達하여 찾아온다면 또 다른 즐거움이며. 홀로 외롭게 지나가던 곳을 맘에 맞는 친구들과 함께 오면 이 또한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라고 회상하였다.
인생의 황혼을 맞이하여 경희의 옛 궁터에서 학창 시절 청운의 꿈을 같이한 친구들과 졸업 65주년에 함께 오니 어찌 아니 즐겁지 않겠는가!
우리는 경희궁을 떠난 후 새로운 세계에 도전하느라 바쁘게 보낸 삶의 여정을 통하여 자기의 세계를 발견하면서 인생의 즐거움을 맞이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졸업 40주년인 1999년 가을부터 5년에 한 번씩 추억여행을 하였다.
그해 9월 16일엔 3일간, 충남 예산의 추사秋史고택과 해미 읍성, 서해안 국립공원 변산반도 채석강과 내소사, 부여의 정림사지, 낙화암, 백마강과 고란사, 공주의 공산성과 무열왕릉, 마곡사 등 백제의 문화, 역사 유적지를 두루 순방하였고,
2004년 10월 45주년에는 영암 월출산과 왕인 박사 유허지, 담양의 정송강 유적지, 해남의 고산 윤선도 녹우당과 초의선사의 대흥사, 강진의 다산초당을 찾고 호남의 인정풍물을 음미하였다. 특별히 녹우당을 지키는 고산의 종손인 윤형식 6회 선배를 찾아 고산에 대한 숨은 이야기를 듣기도 하였다.
2009년 10월, 50주년에는 세계 제1의 조선공업을 이룬 홍석의 공과 장병수 공의 노고가 깃든 울산 현대중공업을 견학한 후 신라 천년의 역사지 경주의 토함산 석굴암, 감포해변의 문무대왕 수중릉. 초가와 기와가 어울린 전통 고가古家가 잘 보존된 양동마을, 안동 퇴계의 도산사원, 류성룡의 하회마을, 신립 장군의 격전지 충주의 탄금대와 고구려 중앙탑, 수안보 미륵사지와 청풍명월의 고장인 청풍호반과 문화재단지, 퇴계와 두향의 사랑이 깃든 단양 8경의 옥순봉, 구담봉의 경관을 즐겼다. 퇴계 이황 선생, 서애 유성룡, 회재 이언적(양동마을) 등 조선의 대표적인 유학자를 만나기도 하였다.
그리고 지난 2014년 55주년에는 부산, 거제, 통영과 이순신 장군의 삼도수군 통제사가 있었던 한산도, 남해와 목포 등 남해안과 다도해 경관도 다녀왔다.
산수傘壽의 나이가 된 2019년 6월 졸업 60주년 기념으로 서부 캐나다 벤쿠버와 빅토리아 그리고 록키 산을 다녀 왔고(사진#2) 10월에는 산야가 수려하고 순후한 인심의 고장 강원도의 명승지를 찾았다. 강원도! 산은 깊고 강물은 산허리를 휘감고 돌며 흘러가는 산수가 수려한 고장, 4계절이 아름다운 설악과 오대산 가을 단풍, 동해 추암 촛대 바위, 삼척 죽서루, 경포호 월출과 정송강, 양사언, 허균 등 시인묵객들이 경치에 취해 시를 읊은 정자와 계곡이 아름답다. 특히 대표적인 우리나라 여류 문인 신사임당과 허난설헌의 전설같은 사랑 이야기, 서정적인 단편 향토작가 가산 이효석은 우리에게 감동과 안타까움을 더해 주었다.
이렇듯 문화와 역사의 추억으로 교직交織된 우정의 여행이야말로 우리들 황혼의 인생길을 더욱 더 아름답게 수놓았지 안했을까... 가는 곳마다 접해 본 향토의 정미와 순후한 인정, 그리고 통일시대를 염원하는 짜릿한 동족애 등... 이런 상념들은 이 가을에 새로운 창조적 생명력으로 다가올 것만 같아 가슴이 벅차오른다.
이제 졸업 65주년, 망백望百을 소망하는 우리는 그리움을 안고 함께 여행을 떠난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애틋한 정을 안고 추억여행을 떠난다.
그동안 다섯 번에 걸쳐 2박3일의 국내 유명 역사 유적지와 아름다운 경관지를 다녀왔으나 마음은 청춘이지만 몸은 마음같이 따르지 못하니, 당일 하루 코스로 우리의 근세 역사가 품어 있는 서울의 고궁들과 젊었을 때 사랑과 낭만이 가득했던 남산을 찾는 것으로 65주년 여행을 하게 되었다.
이제 우리들은 사회에서 한발 물러나 세상을 관조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럴 때 여행의 추억은 앞으로 남은 삶의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저 구름 따라 떠나가는 나그네지만 이 여정을 통하여 하나의 역사, 하나의 문화, 아니 연면連綿하게 이어져 나가는 의미를 재음미하고, 재창조하는 여정이 되었으면 하는 소망은 비단 필자만의 소회는 아니리라.
봄이 설렘의 계절이라면 가을은 그리움의 계절이 아닐까. 석양을 맞은 인생길이기에...,
"인생은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선물로 맡겨진 시간의 길이"라고 이동원 원로목사님이 말씀한 바와 같이 인생은 ‘하나님이 주신 귀한 선물’이므로 가치있고 보람있는 삶이 아닐까? 가을이 깊어 갈수록 지나온 세월이 더욱더 그리워진다.
한때 우리의 은사였으며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지성인知性人이신 철학자 안병욱 교수는 그의 인생론에서 "인생은 자기의 길을 가면서 죽는 날까지 배우는 것이다. 그리고 부지런히 자기의 재능과 인격을 갈고 닦으면서, 자기 창조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이다."라고 설파하셨다. 우리의 영원한 삶의 지침이 된 교훈 ’깨끗하자, 부지런하자, 책임지키자.‘를 생활화하면서 우리는 그렇게 살아왔다고 자부할 만 하지 않을가!!?
만추의 계절, 우리는 영욕의 역사를 담은 경희궁을 걷는다.
흥화문(구 학교 정문)에서 숭정전으로 가는 길(사진#3)을, 잔디밭과 정원 일대를 가로지르는 산책로를 바람따라 흩어지는낙엽을 밟으면서, 하얀 겨울이 오면 우리는 다만 사라질 뿐이다. 새로운 인생길을 맞이하기 위해서...
-경희추풍慶熙秋風- 표운飄雲 표민웅- 2024.1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