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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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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스크랩 이준경(李浚慶)의 묘 ... 붕당정치를 예고하다.
이장희 추천 0 조회 108 14.09.13 10:4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이준경    李浚慶

 

 

 

 

 이준경(李浚慶. 1499~1572)은 조선 중기의 문인으로 호(號)는 동고(東皐)이다. 이준경은 연산군 5년(1499)에 태어나, 선조5년(1572)에 죽으니 향년 74세이었다.

 

 

 

 

 

 

 

 

 

 

 

 

 

 

 

 

 

 

 

 

 

 이준경은 1504년(연산군10) 갑자사화(甲子史禍)에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연루되어 6세의 어린나이로 유배생활을 하다가  2년만에 중중반정(中宗反正)으로 풀려나게 된다. 그 후 과거에 급제한 뒤 여러 사화(史禍)를 겪으면서 영의정에까지 오른다.

 

 

 

 

 

 

 

 

 

                                               이준경의 예지력

 

 

 

 이준경은 홍문관(弘文館) 관리의 후보 명단에 자신의 아들 이름이 오르자 제외시키고, 키 작은   재상으로 불리던 오리 이원익(梧里 李元翼)을 추천하는 등 인재를 차별하지 않고 관리로 등용한다. 또한 명종이 갑자기 승하하자 宣祖가 즉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백성들 사이에서 " 임진왜란을 예언한 이준경" 등 그의  예지력에 관한 여러 전설이 전하는 것으로 보아 당대의 위상을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 있다. 도술에 관심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속리산( 俗離山)을 지키는 산신령이 바로 이준경의 혼령이라고 한다.

 

 

 

 

 

 

 

 

 

 

 

 

                                                       동고유소  東皐遺疎  .. 붕당의 예언

 

 

 

 

 

 이러한 이준경이 사림파(士林派)가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으로 갈라지기 전에 붕당(朋黨)의 출현을 예언한 일화는 유명하다. 1571년 (선조4) 당시 영의정이었던 이준경은 선조에게 유차(遺箚 ...죽음에 임해 올리는 약식 상소문)를 올려  " 지금 벼슬아치들이 이런저런 명목으로 붕당(朋黨)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는 대단히 큰 문제로서 나중에 반드시 나라가 고치기 어려운 환란이 될 것입니다." 라고 주장하였다.  동고유소(東皐遺疎)이다.

 

 

 

 

 

 

 

 

 

 

 이러한 이준경의 동고유소(東皐遺疎)는 당시 사대부들의 중심에 서있던 이율곡을 지목한 것으로 받아 들여졌다. 이율곡도 宣祖에게 글을 올린다. "조정이 맑고 밝은데 어찌 붕당(朋黨)이 있겠습니까? 이는 임금과 신하를 갈라 놓으려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음에 임하여서는 그 말이 착한 법인데, 이준경은 죽음에 이르러 그 말이 너무 악(惡)합니다...' 만일 신하 중에 사사로이 붕당을 짓는 자가 있으면 재상의 지위가 있을 때 명백하게 임금에게 아뢰어 이를 없애지 않고 왜 이제 죽어가면서 분명치 않은 말로 사람을 어육(魚肉)을 만들려 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4년 후 1575년 을해당론(乙亥黨論)으로 사림파가 동인, 서인으로 갈리자 사람들은 이준경의 혜안에 탄복하였다. 이율곡은 이를 부끄러워하면서 당론의 균형을 잡는 것을 평생의 과업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리고 정철(松江 鄭徹)은 이준경의 관직을 삭탈해야 한다고 했으나, 유성룡(柳成龍)이 " 大臣이 죽음에 임하여 드린 말씀인데 불가하면 그 옳고 그름을 가리면 그만이지 관작을 추탈할 것까지야 있겠는가? 이제 만약 그 관작을 추탈하면 국체에 해가 될 것 같다"고 반대하였다. 그래서 유야무야되었으나, 이준경이 죽은 지 3년 후인 1575년(선조 8)에 과연 동,서 분당이 일어났다. 

 

 

 

 

 

 

 

 

                                                                 

 

 

 

        

                                                            

 

 

 

 

 

                                                                  이준경과 이율곡의 차이

 

 

 

 

 

이러한 견해의 차이는 선배, 후배 사림의 시국관의 차이에서 말미암은 것이었다. 이준경은 선배 사림의 대표이고, 이율곡은 후배그룹의 대표라 할만 하였다. 이준경은 이율곡이 지나치게 따지고, 남을 신랄하게 비평하는 것을 싫어했다. 중종 시절 조광조가 급진적인 개혁을 시도하다가 기묘사화가 일어난 것을 경계하였다. 반면에 이율곡은 당시의 정국이 무너지기 직전의 초가집같으니 빨리 개혁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경장론(更張論)이다.

 

 

 

출처관(出處觀)도 달랐다. 율곡은 왕이 개혁하고자 하는 뜻이 있으면 나와서 돕고, 그렇지 않으면 돌아가 후진이나 양성하겠다는 태도이었다. 반면에 이준경은 정치적 상황이 어떻건 간에 왕을 도와 經世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을해당론(乙亥黨論) ...조선 당파정치의 출발점

 

 

 

 

 

붕당정치를 예언하며 이준경이 죽은 지 4년이 지나, 을해당론(乙亥黨論)이 벌어진다. 1575년(선조 8. 을해년), 삼사(三司)의 인사권을 가진 이조전랑(吏曺銓郞)이 누가 될 것인가의 문제로 사림파들 사이에서 의견이 갈라진다. 

 

 

김효원(金孝元)을 지지하는 동인(東人)과 인순왕후(仁順王后)의 동생인 심의겸(沈義謙)을 지지하는 서인(西人)으로 갈라지는데 이 것을 을해당론(乙亥黨論)이라고 한다.   김효원의 집이 서울 동쪽 건천동(乾川洞)에 있었고, 심의경의 집이 서울 서쪽인 정릉(貞陵)에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당시 조선은 인사권이 삼정승(三政丞)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이조판서(吏曺判書)에게 있었다. 그 중에서도 삼사(三司)관리들의 인사권은 이조판서의 전횡을 방지하기 위하여 이조전랑(吏曺銓郞)의 전권으로 주어졌다. 삼사(三司)란 청요직(淸要職)이라는 별칭으로 불리울만큼 모든 관리의 非理를 감찰하고 탄핵하는 사정(司正)부서이었다. 

 

 

이러한 제도적 장치가 있었기에 三司는 정승,판서에 대하여 소신껏 감찰하고 탄핵할 수 있었으며 , 또한 전랑(銓郞)의 전임자에게 후임자의 추천권이 주어졌다. 전랑자천제(銓郞自薦制)이다. 

 

 

 

 

 

 

 

 

 

 

 

 

 

 

 

 

 

 

 

이 때 이율곡은 두 당을 화합시키려는 조제(調濟)를 제기한다. 그는 불과 4년전 이준경이 동고유소(東皐遺疎)를 통하여 붕당의 출현을 예언하였을 때 자신의 경솔한 대응과 불찰을 후회하고 있었다.

이율곡은 양비론(兩非論)이 아니라 양시론(兩是論)을 주장하면서 양쪽의 화합을 위하여 진력하지만, 오히여 세상에 옳은 것은 하나뿐이라는 공격을 받는다.

 

 

이율곡은 동인의 김효원을 함경도 경흥부사(慶興府使)로, 서인의 심의경을 경기도 개성유수(開城留守)로 보내려 조정한다. 이 때 東人이 들고 일어 난다. 이유인 즉 "경흥은 오랑케의 땅과 가까운 곳으로 선비가 기거할 곳이 못 된다."라는 것이었고, 이는 받아들여 졌다. 

 

 

 

이 반대 논리가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받아 들여졌다는 사실은 조선 지배층의 인식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음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임진왜란의 수난과 병자호란의 치욕이 이미 시작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어찌 되었건 이율곡은 본인의 意志와는 상관없이 서인(西人)이 되어버렸다.

 

 

 

 

 

 

 

 

 

 

 

 

 

 

 

 

이준경이 죽었다는 부음을 전해 듣고 북경으로 사신가는 길에, 판서 오상(吳祥)은 다음과 같은 시(詩)를 지어 슬픔을 달랬다.

 

 

 

 

공재종사택재민    功在宗社澤在民      공적은 나라에 남고, 은혜는 백성에 끼쳤으니

능전종시독사인    能全終始獨斯人      끝내 온전한 인물은 홀로 이 분 뿐이었네

불대백년공의정    不待百年公議定      백년도 못 가서 여러 의논이 정해 질 것을

시비하누지중신    是非何累地中身      시비를 가리는 소리 어찌 땅 속의 몸에까지 미칠소냐.

 

 

 

 

 

 

 

 

 

 

                               이수광(李粹光)의  지봉유설(芝峰類說) 

 

 

 

 

"公은 노성(老成)한 체통과 몸가짐 때문에 후배들과 맞지 않은 점이 많았는데, 당시 사람들에게 거슬리는 경우가 많았다. 죽은 뒤에도 헐뜯는 말이 그치지 않았는데, 지금 재상으로서의 업적을 말하면 공이 제일이라고 한다. "

 

 

 

 

 

 

 

 

 

 

 

 

 나이 어린 이준경 형제가 귀양을 살 때의 일이다.  어느 추운 겨울 날, 몸에 이가 끌어 형제는 잠을 설쳤다. 兄은 옷을 벗어 이를 잡느라 애를 썼는데, 이준경은 좋은 방법이 있다며  옷가지를 모두 모닥불에 태워 버린 채 벌벌 떨고 앉아 있었다. 마침 그들을 살피던 官員은 그 꼴을 보고 새 옷을 입혀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준경은 재물욕이 없어 청백리로 뽑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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