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스러운 것은 파란만장한 반세기를 보낸 두 사람의 노후가 비극이 아니라는 점이다.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무척이나 다정해 보였다.
-목소리 녹음은 직접 했나요.
“그럼요. 내가 출연한 작품에 남의 목소리를 더빙해본 적이 없어요. 물론 몸은 정신없이 바빴지만 내가 촬영한 것에 어떻게 남의 목소리를 빌려요. 그래서 신 감독은 나보고 욕심이 많다고 그러죠. 심지어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에서 피아노 치는 것도 직접 했고, 가야금도 직접 했고, 승무도 내가 췄죠. 완벽하게는 못해도 조금씩은 다 했어요. 도움을 빌린다는 게 그렇게 싫었어요, 서툴더라도 내 손으로 직접 해야지.”
-말이 나온 김에 연출했던 이야기도 했으면 합니다. 감독을 왜 하고 싶었는지 궁금한데요.
“솔직히 내가 하고 싶었던 건 아니에요. 신필름에서 1년에 30여편을 제작하던 때니까 감독이 부족했던 거죠. 어느날 저 양반이 나보고도 감독 하나 하라고 그러더라고요. 처음에는 펄쩍 뛰었더니 아니라고 그만한 능력이 있으니까 한번 해 보라고 용기를 북돋아주는 거예요. 그래서 찍은 게 ‘민며느리’였는데 감독상은 못 타고 주연상만 탔죠.
지시에 따라 연기하다가 내가 남에게 연기를 시키려니 정말 어려웠어요. 그렇게 어려운 줄 몰랐어요. 차라리 내가 하는 게 낫지 얼마나 답답한지. 또 한 가지는 여성이 하기에는 체력이 딸릴 수 있겠다는 생각도 했어요. 그때만 해도 워낙 건강했으니까 한계를 느끼지는 않았지만 참 힘들더라고요. 촬영장소 헌팅을 갈 때도 ‘내가 왜 남자한테 지나’ 싶어서 꼭 따라다녔는데, 저 양반이 옆에서 보기에 피곤해 보였던 모양이에요. 편집은 직접 하지 말고 편집기사에게 맡기라고 하더군요.
원래는 편집도 내가 하겠노라고 우기다가 결국 양보했죠. 편집은 기사가 하고 나는 지켜보는 걸로. 왜냐하면 우선 저 양반이 편집을 남한테 맡기지 않아요. 내가 신 감독한테 편집을 배웠기에 저 양반을 따라하고 싶었던 거죠. 작품 ‘꿈’을 편집할 때 우리집에다, 그러니까 저 양반 처가에다 기계 갖다 놓고 방에다 필름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같이 이것저것 골라가며 편집을 했어요. 신 감독이 자르면 나는 옆에서 침 발라서 마그네틱 빡빡 긁어 가지고 아세톤으로 붙이고 그랬거든요. 그러다가 자연히 편집이 뭔지, 액션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배웠죠.”
-제가 당시 기사 한 토막을 읽어보겠습니다. ‘남편이 짜준 촬영대본 들고 촬영현장에서 레디고만 부른다는 세상의 소문에 적잖이 불쾌해 하다. 처음 8시간 동안 7신33커트를 척척 찍었다.’ 그런 시선이 적지 않았던 모양이죠?
“그랬어요. ‘배우가 무슨 감독을 하겠어, 남편이 콘티 다 짜준 거 갖고 나가서 찍겠지’, 그런 시각이었죠. 사실 내가 그 전에도 안 해본 게 없어요. 데뷔작인 ‘새로운 맹서’ 때도 내가 그림 그려가면서 스크립터를 했다니까. 원래 호기심이 많고 모험을 좋아하는 성격이에요. 콘티도 내가 다 짰어요. 신 감독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어요. 처음에는 자기가 뒤에서 봐주겠다더니 자기 일이 바쁘니까 그냥 무시해버리더라고. 솔직히 원망도 많이 했어요.”
“민며느리는 걸작이야”
-‘민며느리’ 다음에도 ‘총각선생’ ‘공주님의 짝사랑’ 등을 연출했습니다.
“‘총각선생’은 지금도 아쉬운 게 많아요. 도금봉이 맡은 역할이 수다쟁이 부인이어서 그 입만 클로즈업으로 잡고 싶었는데, 그때만 해도 카메라 기능상 그 수준의 클로즈업은 안 됐어요. 아무리 가득 들어가도 얼굴만 크게 나오지 입만 잡을 수는 없었죠. 그런 기계는 한참 지나서야 나왔죠. 요즘 영화에서는 눈만 잡기도 하고 그러잖아요. 그런 컷을 보면 ‘총각선생’ 생각이 나는 거예요. 아쉽죠.
‘공주님의 짝사랑’은 라디오 드라마로 히트한 작품을 영화로 만들었는데, 구중궁궐에 있는 공주가 민가에 몰래 나와서 암행어사같이 돌아다니면서 좋은 남자 만나 따라다니는 줄거리였어요. 그 영화 하면서 감독은 더 이상 못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어찌어찌 완성했죠. 우선은 연기를 해야 하니까 양쪽을 다 하는 게 벅찼고, 또 검열이 워낙 심했기 때문에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거든요. 연기만 하면 되는데 굳이 그런 것까지 신경쓰며 살아야 할 이유가 뭐가 있나 싶고요. 요즘만 같았다면 아마 계속 연출을 했겠죠. 그래서 요즘 영화인들이 부럽다니까요.”
이쯤해서 신상옥 감독에게 최은희씨의 연출실력에 대해 객관적인 평가를 듣기로 했다. 그는 최은희씨의 설명과는 달리, 감독이 부족해서 연출을 시켰다기보다 배우 출신 감독이 좋은 감독이 될 거라는 믿음에서 맡겼다고 했다. 연극을 오래한 데다 드라마투르기도 잘 알고 있으므로 메커니즘만 따라주면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는 회고다. 그는 당시 너무 바빴기 때문에 최은희씨가 만든 영화를 보지도 못했단다. 최근에야 ‘민며느리’를 보니 카메라도 좋고 핀트도 좋아서 놀랐다는 것. “민며느리는 걸작이야.” 신 감독의 단언이다.
(계속)
파란만장의 끝
-마지막 질문입니다. 두 분은 한때 이혼도 했지만 지금까지 살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신 감독은 총각인데 이혼 경험이 있는 최은희씨와 결혼했고요. 이혼 후 홍콩에 최은희씨를 만나러 갔지요. 수기를 보니 신 감독은 최은희씨가 죽은 줄 알았다가 북한에서 만난 것으로 돼 있던데, 거기서 다시 만난 느낌이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이 질문에는 신상옥 감독이 입을 열었다.
“고집을 부려서 그랬지. 이 사람도 고집이 대단하니까. 이혼 안 하겠다는 데 괜히 이혼해달라고 부추기고. 이북에 앉아서 또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고(웃음). 그러니 ×고집이지 뭐. 고집 때문에 망했어요. 고집이 세니까 그만큼 일했겠지만.
글쎄, 죽은 줄 알았다가 다시 만났을 때는, 뭐 아무 감정이 없었지. 우리 사이는 단순한 부부라기보다는 오랫동안 일을 함께해온 동지적 결합이라고 할까. ‘사랑한다’는 선은 벌써 넘은 상태였으니까. 우리 시대는 서로 사랑한다는 표현도 못했다고. 그렇지만 사랑하니까 하여튼 북한에서 데리고 나온 거지. 그렇게 지옥에서 만난 첫날밤에도 숙소에 들어가서는 따로따로 자자는 거야. 왜 그러냐고 물으니 ‘지금이라도 사랑하지 않으면 다른 방을 쓰겠다’ 이거지. 내가 한참 웃었어, 여기까지 와서 부부싸움을 해야 하나 싶고.
심 영 섭
● 1966년 서울 출생
● 서강대 생명공학과 졸, 고려대 심리학 박사과정 수료
● 제3회 ‘씨네21’ 영화평론상 수상으로 등단
● 고려대·상명대 영화학 강사
● 저서 : ‘영화 내 영혼의 순례’ ‘심영섭의 시네마 싸이콜로지’
여자가 다 그래. 심지어는 이혼도 의미가 없었어. 이혼 후에도 매일 만났는데 뭐. 작업실에 나가면 안 볼 수가 없지. 그렇게 이혼 안 했으면 이북에 잡혀가지도 않았죠. 그러니까 북한에서 여러 가지 상황을 판단해서 ‘이 사람들은 다시는 한국에 안 들어갈 사람이다’ 생각했기 때문에 납치한 거겠지.”
신 감독의 긴 이야기가 끝나고 최은희씨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우리가 그렇게 파란만장하게 50년을 같이 살았어요.”
정말 그랬다. 그처럼 파란만장하게 살아온 부부를 다시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한국영화사에서도, 또 한국현대사에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