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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가톨릭문화원 원문보기 글쓴이: 익명회원 입니다
축일:11월4일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O.F.S. San Carlo Borromeo Vescovo Saint Charles Borromeo St.Caroius Borromaeus, E Arona, Novara, 1538 - Milano, 3 novembre 1584 Father of the Clergy; Apostle to the Council of Trent Canonized :1 November 1610 by Pope Paul V Carlo = forte, virile, oppure uomo libero, dal tedesco arcaico 신학생,교리교사의 주보성인
이탈리아 밀라노의 대주교.성 가롤로 보로메오는 추기경 주교직의 쇄신에 앞장선 가톨릭 개혁자 중의 한 사람입니다. 아로나의 귀족가문출신으로 일찍부터 사제직에 뜻을 두었으며,민법과 교회법을 공부하였고, 1559년 외삼촌인 교황 비오 4세에 의해 발탁되어 1560년 추기경 및 밀라노의 대주교로 성성되었습니다.
트리엔트 공의회(1562-1563년)의 제3회기 및 마지막 회기에서 교황을 보좌하였으며, 공의회 정신을 반영하여 본당신부를 위한 로마 교리 문답서 "로마 공교 요리 (公敎要理)"를 초안, 감수하였습니다.
밀라노로 돌아오자 스스로 가톨릭 개혁의 기수로서 교구에 급진적인 개혁을 단행하여, 성직자와 평신도의 도덕및 예절을 강화시키고 교구 업무의 원활을 기하였습니다.
또한 예수회를 지원하여 예수회 성직자 교육을 위한 신학원을 설립하였습니다. 그의 개혁은 교구 내에서 커다란 반감을 일으켰으나,"밀라노 교회문서"(1582)에 수록되고, 그 후 자주 인쇄된 그의 개혁 주장은 이탈리아,독일, 특히 스위스의 주교들이 개혁활동을 추진하는데 있어 표준이 되었습니다.1610년 시성되었습니다. -오늘의 말씀에서
성 가롤로 보로메오(1538-1584년)는 길베르토 보로메오 백작과 교황 비오 4세의 동생 마르가리타 메디치 사이에 태어난 전형적인 귀족이었다. 그가 22세 때에 아직 사제품도 받지 않았던 시절에 그의 외삼촌인 교황 비오 4세로부터 추기경으로 임명되었고, 이를 계기로 삼아 성직자의 교육을 완수하기에 이르렀다. 그후 그는 밀라노에서 학업을 계속하여 민법과 교회법의 박사가 되었으며, 교황의 외교사절로서 활약하였다.
또한 그는 트렌트 공의회의 재소집과 공의회의 운영에 지도자로서 훌륭한 공을 세웠다. 그는 밀라노의 교구장으로서 강도 높은 개혁을 단행하여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는 평가를 들었다. 그는 개혁운동의 일환으로 성직자와 평신도의 윤리와 생활 개선을 위한 운동을 전개하는 제도적인 보완 등등 그의 재임기간에 교구 시노드와 여섯 차례의 관구 공의회를 개최하여 교회를 현대화한 탁월한 주교였다.
그는 가톨릭 개혁운동의 기수 가운데 한 분이며, 학문과 예술의 수호자였으며, 탁월한 성직자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가 비록 권력을 가까이 하고 지냈지만 권력을 남용한 적이 없다는 평을 들은 것이 최고의 영광일지도 모른다. 그는 46세의 일기로 이승의 생을 마감하였다.
성 카롤로 보로메오의 이름은 종교 개혁 이후 가톨릭 교회의 쇄신 운동과 직결되어 있다. 그는 프로테스탄트의 종교 개혁 시기에 살았으며 말라노 대교구의 개혁을 주도했고 트렌트 공의회의 말년에는 온 교회의 개혁에 손을 뻗쳤다.
그는 말라노의 귀족 가문에 속해 있었으며 막강한 메디치 가문과도 관계가 있었지만 자신을 교회에 바치고자 했다. 그의 외삼촌 인 메디치의 추기경이 1559년 비오 4세로서 교황에 당선되자 아직 평신도이며 젊은 학생인 칼롤로를 부제 추기경 겸 밀라노 대교구의 행정관으로 임명했다. 그의 높은 지식 수준으로 그는 바티칸과 관련된 여러 가지 중요한 임무를 맡았고 후에는 교황령의 행정을 전담하는 국무성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형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카롤로는 신품을 받을 결심을 확고하게 했는데, 친척들은 그에게 결혼할 것을 강요했다. 그는 25세에 사제로 서품되었고 얼마 되지 않아 곧 밀라노의 주교로 승품되었다. 그러나 트렌트 공의회에서의 일 때문에 그는 공의회가 끝날 때까지 밀라노에 자리를 잡지 못했다. 10년 전에 보류되었던 공의회를 1562년에 다시 열도록 교황에게 권고한 것은 카롤로였다.
카롤로는 무대 뒤에 숨어서 몇 번씩이나 깨질 위기에 있는 공의회의 회기를 지속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는 마지막 단계에서 스스로 전체의 일치의 임무를 맡았다. 후에 카롤로는 결국 밀라노 대교구에서 그의 모든 시간을 바치는 것이 허용되었다.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상황은 극히 암담했다. 성직자에게나 평신도에게나 가톨릭 신자 생활의 모든 국면에서 필요로 하는 개혁은 그의 모든 부주교들의 지방 공의회에서 시작되었다. 주교와 다른 성직자들을 위한 뚜렷한 규범이 제시되었다. 만일 신자들을 좀더 나은 생활로 돌아서게 하려면 먼저 주교와 성직자들이 좋은 모범을 보이고 그들의 사도 정신을 새롭게 해야 하는 것이다. 카롤로 성인 자신이 좋은 표양을 보이는데 앞장 섰다. 그는 자기 수입의 대부분을 자선 사업에 충당하고 스스로 모든 사치를 피하며 자신에 대해 엄한 보속을 했다. 그는 자신의 부귀와 명예, 존경과 영향력을 희생했다.
1576년 전염병과 기근 속에서 그는 매일 6만 명에서 7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먹여 살리려고 애를 썼다. 이 일을 위해서 그는 엄청난 액수의 돈을 빌렸고 그것을 갚는 데 수년이 걸렸다. 전염병이 극도에 달했을 때 그 도시의 관리들은 도망갔지만 카롤로는 그대로 남아서 병자들과 죽어 가는 사람들을 돌보았으며 궁핍한 사람들을 도와 주었다. 그의 막중한 직책에 따르는 과중한 업무와 노력은 그의 건강을 해치기 시작하여 결국 그는 46세에 세상을 떠났다.
카롤로 성인은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였다. 또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으며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 주었다." (마태오 25,35-36)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했다. 카롤로 성인은 자신의 이웃 안에서 그리스도를 보았으며 자기의 양떼들 가운데서 가장 미소한 사람에게 베푼 사랑이 바로 그리스도에게 베푼 사랑임을 알았다.
"나그네 길에 있는 교회는 교회 자체로서나, 인간적이며 현세적인 제도로서나 언제나 필요한 이 혁신을 계속하도록 그리스도께 불리었다. 시대의 여러 가지 상황에 따라, 도덕에 있어서나 교회 규율에 있어서나 교리의 표현 방법에 있어서 -이것은 신앙의 유산 자체와는 엄연히 구별되는 것이다- 정확하지 못한 것이 보존되어 왔다면 적당한 시기에 바로 적당하게 혁신되어야 할 것이다." (일치 운동에 관한 교령, 6항) -성 바오로 수도회에서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가 마지막 교구 회의에서 한 강론에서 (Acta Ecclesiae Mediolanensis, Mediolani 1599, 1177-1178)
이렇게 말하고 저렇게 행동하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우리 모두 약한 사람들임을 나는 시인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원한다면 쓸 수 있고 우리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수단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제는 백성들이 요구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고 또 응당히 그러해야 할 정결하고 천사 같은 행동을 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필요한 수단들 즉 단식, 기도, 그리고 악한 이들과의 교제 및 해롭고도 위험한 우정을 피해 버리는 일과 같은 수단을 별로 사용하려 하지 않습니다.
또 어떤 사제는 성무일도를 바치려 성당에 들어가거나 미사 봉헌을 준비하려고 할 때 그 마음에서 즉시 하느님으로 부터 떨어져 나가게 하는 숱한 잡념들이 흘러 나온다고 투덜거립니다. 그런데 그 사제는 성무일도를 바치고 미사를 봉헌할 시간이 다다르기 전 제의방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어떻게 마음 준비를 했으며 또 마음을 집중시키기 위해 무슨 방도를 취했습니까?
한 가지 덕행에서 또 다른 덕행에로 어떻게 나아갈 수 있는지에 대해 듣고 싶습니까? 예를 들어 성당에 있을 때 한 번 마음 집중을 잘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다음 번에 어떻게 더욱 집중하여 하느님의 마음에 드시는 예배를 바칠 수 있겠습니까? 내 말을 들어주십시오. 당신 안에 미소한 신적 사랑의 불이 점화되면 그것을 즉시 바깥으로 보여 주거나 거기에다 바람을 세게 불어넣지 마십시오. 오히려 당신 마음의 용광로가 작아지거나 열기가 식지 않도록 그것을 닫아 두십시오. 말하자면, 할 수 있는 잡념을 피하고 하느님께 바짝 붙어 쓸데없는 잡담을 멀리하십시오.
당신은 설교하고 가르치는 임무를 지니고 있습니까? 이 임무를 잘 완수하기 위해 필요한 것을 배우는 데에 힘쓰십시오. 무엇보다도 먼저 당신의 생활과 행동 자체가 설교가 되도록 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이 당신이 이렇게 말하고 저렇게 행동하는 것을 보고 당신의 말을 비웃고 고개를 내젓기 시작할 것입니다.
혹 사목이 당신의 임무입니까? 그렇다고 해서 당신 자신의 일들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다른 이 들을 위해 당신 자신을 송두리째 바치면서 당신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으면 되겠습니까? 물론 당신이 맡은 영혼들을 돌보아야 되겠지만 당신 자신의 일들을 잊어버릴 정도까지 하면 안된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형제들이여, 성직자들에게 있어선, 모든 활동에 앞서고 그것과 함께 가고 또 그것을 뒤따라야 하는 묵상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는 점을 깨달으십시오. 예언자는 말합니다. "주여, 당신께 노래하고 묵상하리이다." 형제여, 성사를 집행할 때면 그 행하는 바에 대해 묵상하십시오. 미사를 봉헌 할 때면 봉헌하는 것에 대해 묵상하십시오. 성당에서 시편을 노래할 때면 그에 대해 묵상하십시오. 영혼들을 지도할 때면 그들이 무슨 피로 씻음 받았는지 묵상하고 "모든 일을 사랑으로 처리하십시오." 그렇게 한다면 매일같이 닥쳐오는 무수한 난관을 쉽게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이렇게 하면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와 다른 사람들 안에서 태어나게 할 힘을 갖게 될 것입니다.
성 가롤로 보로메오는 16세기에 있어서 가장 훌륭한 성인 중의 한 분이다. 그는 일생동안 모든 영혼의 가장 위대한 목자였고, 특히 트리엔트 공의회에 공헌한 바가 컸고 또한 그의 사도적 교훈은 지금까지 우리에게 큰 감명을 주고 있다.
그는 1538년 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 태어났다. 양친은 둘 다 귀족 출신이었다. 가롤로는 어려서부터 기도를 즐겼으며 그 중에도 교회의 전례(典禮)에 남다른 흥미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신학을 연구하기로 결심하고 처음은 밀라노에서, 후에는 파비아에서 공부했다. 그의 두뇌는 좋은 편이었으나 결코 우수한 성적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반면 진실한 노력가였으며 탁월한 결단심의 소유자였다. 그는 그 당시 예술이나 운동에도 열중해 스스로 바이올린을 켜기도 하고 경기도 하고 사냥도 했으나, 나중에는 점차 유흥을 버리고 신학 연구와 기도에 몰두하게 되었다.
1558년 메디치의 추기경인 그의 외삼촌이 교황 비오 4세로 임명되자 가롤로의 운명에도 일대 변화가 생겼다. 즉 그는 이듬해 외삼촌에 의해 로마에 가서 겨우 22세의 약관의 몸으로 추기경이 되었던 것이다. 그때의 교황의 말씀을 소개하면 "그는 비록 나이는 젊으나 그의 성덕은 이를 보충하고도 남음이 있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는 사실과 같았다. 교황은 그를 언제나 자기 곁에 두기를 원해 지혜, 희생심, 교회에 대한 사랑이나 겸손 등 여러 덕행이 없으면 도저히 할 수 없을 만한 어려운 일을 명할 때도 종종 있었으나 그는 이러한 아름다운 덕을 온전히 구비하고 있었으므로 늘 하느님의 강복을 받아 훌륭히 모든일들을 완수할 수가 있었다.
게다가 그는 분주한 중에서도 시간을 내어 연구하고, 기도해 그이 덕은 나날이 성장했다. 후에 교황은 그를 밀라노의 대주교로 임명했다. 그러나 그는 로마에 있지 않으면 안 되었으므로 대리자를 밀라노에 파견해 그 교구를 다스리게 하고, 자신도 온 몸을 다 바쳐 노력했는데 특별히 교황의 위임을 받아 한때 중지되었던 트리엔트 공의회의 재개(再開)를 위해 열심히 일했다. 온전히 공의회가 계속 열려 교회를 위해 다대한 성과를 올리게 된것은 오로지 가롤로 주교의 알선과 기도와 희생에 대한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은 것이라 하겠다.
그 뒤 가롤로는 트리엔트 공의회 교리서의 편찬을 감독하고, 성서나 미사 경본이나 사제용 성무 일도서를 새로 간행하고 다시 교회의 행정이나 사제들의 생활은 물론 추기경의 생활에 대해서도 부심(腐心)하며 결정짓는 바가 많았다. 그리고 무슨 일이든지 실천 궁행하며 행동으로써 남에게 좋은 표양을 보여주며 매일 열심을 분발해 완덕으로 나아갔다.
2,3년후 그는 드디어 허락을 얻어 자기 교구에 부임했다. 그것은 트리엔트 공의회의 결정에 의한 교구의 회의를 개최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그 회의가 끝나자마자 별안간 외삼촌인 교황 비오 4세의 부고가 날아왔다. 가롤로는 새 교황의 선거 투표에 참가하기 위해 로마로 급히 달려갔다. 그것은 추기경으로서의 그의 책임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 선거에서도 큰 역할을 하여 성인과 같은 탁월한 인물을 교황위에 오르게 하였다. 그분은 비오 5세라 칭했고 후에 역시 성인품에 오르게 된 영예를 획득했다. 교황 비오 5세의 축일은 4월 30일이다.
교황 비오 5세도 가롤로를 고문으로 삼고 가까이 있으면서 일해 줄 것을 원했다. 그러나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결정한 사앟에 대한 개혁을 밀라노로 돌아가서 실천할 수 있도록 허락을 얻어 1566년 4월에 밀라노에 도착하자마자 즉시 필요한 개혁에 착수했다.
*성 비오5세 교황 축일:4월30일
그는 우선 사제들을 위해 현명한 규칙을 세우고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결정된 사항이 준수되도록 도모하고 신학교를 설립했는가 하면 수도원이나 교회 내의 혁신에도 주력했다.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은 어린이나 어른에게 종교심을 심어 주는 일이었다. 그는 온 힘을 다해 많은 선교사 양성에 노력했고 그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종교에 대한 열심은 뚜렷하게 증가되게 되었다.
이렇게 밀라노 대교구는 어느덧 점차 다른 교구의 모범으로 나타나게 되었고 이렇게 밀라노 교구의 성직자와 신자의 모범이 된 것은 바로 대주교 자신이었다. 그는 규율 엄정한 생활을 영위하며 자기의 수입은 거의 전부 교회나 빈민을 위해 소비하고 자신은 가난에 만족한 생활을 했다.
그러나 모든 성인의 경우와 같이 가롤로에게도 슬픔과 고통이 다가왔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성스러운 대주교를 공경하며 사랑해 드렸으나 그 중에는 그를 미워하며 그에게 복수하려고 하는 자도 전혀 없지는 않았다.
그들은 평소 불미한 생활을 하며 그의 거룩하고도 숭고한 생활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느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갖은 방법으로 그를 괴롭히며 급기야 참혹하게도 그를 없애버리려고까지 했다. 그리하여 암살을 도맡은 악한은 가롤로가 기도에 몰두하고 있을 때 그곳을 향해 총을 발사했다. 다행히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총알은 몸을 스쳤을 뿐 그는 아무 해도 입지 않고 무사할 수가 있었다.
그 후 계속해 커다란 재앙이 밀라노 시에 닥쳐왔다. 그것은 1579년 8월부터 이듬해 봄에 걸쳐 무서운 페스트가 창궐한 것이다. 피해는 말할 수 없이 컸다. 사망자는 계속 증가했고, 생존자는 두려움에 떨며 다른 곳으로 피난하려고 했다. 그러나 가를로는 용기를 잃지 않았다. 그는 백성들에게 예방법을 가르치고, 가난한 이에게 식량을 배급하고, 병자를 방문하고, 그들에게 고해 성사를 주며, 성체를 영하게 하고, 사망자를 매장하는 등 분골 쇄신 그야말로 대활약을 했다.
그리고 건강한 자들과 함께 하느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자신은 더욱 준열한 고신 극기를 행했다. 참으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활동한 그의 덕분으로 생명을 건진 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마침내 그처럼 맹위(猛威)를 휘두르던 전염병도 물러갔다. 이에 희생된 사람들은 무려 1만 7천 명이나 되었다. 그 후부터 시민들은 주교를 자기들의 구세주처럼 존경하고 변함없는 감사를 늘 드렸다. 이는 실로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던 중에 가롤로는 평소의 엄격한 생활과 격심한 활동막?인한 체력의 쇠퇴함으로 하느님께서도 이미 완덕의 절정에 도달한 그를 당신 품으로 불러들여 그에게 상금을 주시려고 하셨음인지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날이 다가옴을 느꼈다.
드디어 1584년 9월, 가롤로는 임종이 가까웠음을 알고 고요한 곳을 찾아가 묵상을 하며 선종 준비를 했다. 그럼에도 그는 허약해진 몸을 채찍질하며 할 수 있는데까지 일을 계속하다가 거룩한 성체를 마지막으로 영하고,11월 4일 미명(未明)의 46세에 마지막으로 "주여! 당신 종이 여기 대령했나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고요히 이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흰 대리석으로 건축된 밀라노의 유명한 성당 안에 안치되었다.
트리엔트공의회
1545∼1563년까지 약 18년간에 걸쳐 이탈리아의 북부 트리엔트(현 Trento)에서 개최된 공의회로 교황 바오로 3세에 의해 소집되었고, 율리오 3세를 거쳐 비오 4세의 재위기간에 폐회되었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대체로 다음의 3기로 구분된다. 아울러 불가타역 성서의 권위를 인정하였고, 성서의 해석권은 교회만이 갖는다는 점을 명백히 하였다.
② 제 2 기 : 제2기에는 제1기에 참여하지 않았던 독일지방의 주교들이 참석하였고,
③ 제 3 기 :
예딘(H. Jedin)이 "트리엔트 공의회는 프로테스탄트의 종교개혁에 대한 공의회의 신앙고백은 공의회가 폐막된 1년 후인 1564년 <트리엔트 신앙고백>
405년에 라틴어로 완역되어 가톨릭 교회에서 널리 사용된 성서(聖書)의 이름,
시편을 제외한 구약성서는 히브리어에서 직접 번역하였고, 1907년 성 비오 10세는 베네딕토회 수사들로 구성된 불가타 위원회를 로마에 설치하여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축일:9월30일
update.2004.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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