퐁퐁 묻힌 수세미
이 댁엔 아이가 여러 남매시군요.
어떻게 아시나요?
빨랫줄에 걸린 양말짝 보고 알지요.
어릴 적 이런 노래를 불렀더랬다. 제목도 부른 이도 모르지만 노랫말과 음은 생생하게 남아 있다. 어른의 나는 빨래를 널며 때때로 이 노래를 중얼거린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곤 한다. 아이가 여럿이 아니더라도 한꺼번에 빨래를 하면 양말짝이 수두룩할 수밖에 없지요…. 그때 내 손과 빨래 바구니엔 양말이 가득하다. 무지개 수준만큼 다양한 색상과 무늬, 빨래를 걷어 갤 때쯤엔 꼭 한 두 개쯤은 어딘가로 사라지고 없는 양말들. 다음엔 똑같은 양말만 사야지 생각하지만 늘 양말은 제각각이다.
어쩌면 어렸을 적엔 제법 짝짝이 양말을 신었을지도 모른다. 마당을 가로지르는 빨랫줄을 빈틈없이 채워도 자리는 모자랐다. 아이가 여럿이다 보면 안타깝게도 넘치는 것은 빨랫줄에 오르지 못한 무수한 양말짝뿐이다. 모자라는 것은 수만 가지쯤 되지만 새삼스럽지 않다. 형제가 많다는 건 그런 것이다. 모자란 것이 너무도 많아서 더러 귀찮거나 짜증나거나 슬픈 감정을 마주하게 되는 것 말이다.
어린 시절에 가족이 많다는 건 가질 수 없는 것을 욕망하고 그 욕망이 좌절되고 더 이상 욕망하지 않는 것을 배우게 되는 일이다. 그건 빨랫줄에 걸린 양말짝을 보고 재미처럼 가족 수를 ‘척’ 알아맞히는 누군가의 놀이와는 달리 양말짝을 빨며 느끼게 되는 현실이기에 쉽게 지워질 수 없다. 연필이며 노트며 사소한 학용품 하나 더 내 것으로 갖기를 소망하는 자그마한 마음은 가끔 내 형제를 한 눈으로만 보게 하고 하늘의 해와 달과 친구하고파 진다는 걸, 알 리 없다.
학교에서 보내오는 가정통신문은 매번 가정의 행복과 평안을 궁금해했고 그 방식은 늘 ₩였기에 등교를 하는 아이의 등이 결코 펴지지 않았다면 그것은 등 속에 숨겨진 날개 때문이 아니라, 손에 쥐어지지 않는 동전들 몇 개가 가져온 결과였다. ₩를 얼마큼 가졌는가를 묻는 가정통신문을 쥐는 날이면 몰랐던 세상에 대해 알게 된다. 생활수준 차이를 인식하게 되고 가지지 못한 것의 종류와 가짓수를 알아가게 된다. 학교는 수시로 호구조사를 했고 매번 새로운 가전제품이 출시될 때마다 집에 있느냐고 물어댔다. 열심히 가정통신문을 읽어보지만 동그라미를 표시할 항목은 많지 않았다. 형제수를 묻는 항목은 보기가 사라져 기타로 답해야 했고 보유한 전자제품 항목은 정답을 빗겨간 시험지처럼 ×표시가 많았다. 어쩌면, 양말을 그렇게 많이 사지 않아도 되었다면 전자제품 하나쯤 살 수도 있었으리라.
옛 기억에 빠지며 잠시 감성에 허우적대는 것도 한결같다. 감성의 절정은 역시 노래, 오랜 기억을 따라 2절을 읊조린다.
이 댁엔 아이가 하나뿐이시군요.
외롭지 않을까요?
저 하늘에 해와 달 세상엔 친구가 많잖아요.
정말 해와 달은 친구가 되어 줄까, 생각했던 어린 시절의 나는 사라지고 노래만 남아 나를 뒤흔든다. 아, 이 노래는 산아제한 정책과 발맞춰 나온 노래가 아닐까. 2절 가사는 특히나 ‘하나’를 강조하던 산아제한 표어를 떠올리게 한다. 음을 소거하고 눈으로 가사만을 훑어보면 정책 표어 같다. 표어의 목적과 기능을 생각하고 노래를 불렀던 시대를 생각하니 의심은 확신으로 굳어진다.
1970년대 보건사회부・대한가족계획협회 포스터, 화살표 모양의 도로에 얹어져 ‘1981년 1,000불 국민소득의 길’을 향해 뻗어가는 문구의 시작은 ‘딸・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다. 그것이 국민소득 1,000불을 달성하리라는 인식은 ‘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는 60년대 표어보다 구다 구체화된 목표를 설정하였지만 둘만으로도 천불 달성은 실패였던 모양이다. 다시 하나만을 부르짖었고 1985년 가족계획캠페인은 ‘셋이 되면 행복의 양은 줄어듭니다’라며 “셋부터는 부끄럽습니다”라고 외쳤다.
나는 부끄러웠나. 하나는 외롭지 않을까요? 내 행복의 양이 줄어든다 생각했었나. 노트 하나 더 가진다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었나. 와, 많다. 저 하늘의 해와 달이 더 좋아, 그랬었나.
노랫말이 닫힌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건 노래였을까 표어였을까. 오래도록 이 노래를 부르며 하나라도 외롭지 않다, 가족이 곧 부끄러움으로 내 안에 자리잡은 건 아닐까. 그러면 그건 온전한 내 느낌과 마음일까. 옛날 일은 까맣게 잊은 듯 등장한 출산장려정책 포스터 ‘하나는 외롭습니다’에선 해와 달은 친구가 될 수 없음을 결정지어주는 듯 울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애처롭다. 이 포스터를 본 아이 중에서도 ‘하나’만을 외치던 그 포스터처럼 다른 종류의 결핍과 까닭모를 죄책감을 느꼈을지 모른다. 6~7년대 표어와 구별되지 않는 “아이 셋이면 군면제!”라는 플래카드를 보게 되었다면 어떤 노래가, 어떤 표어가 저 정책을 위해 나풀거리고 있었을지 목적을 위해 무엇을 배척하며 어떤 형태의 언어가, 결코 스며들지 않는, 찔러넣는 말이 쏟아졌을까 생각해 본다.
목적을 위해 가치는 사라진 채 수단으로 가득한 표어 속에서 내가 잃어버린, 잊어버린 기억을 찾는다. 가족이, 형제가 많다가 결핍과 욕망과 만나 부끄러움에 질척이며 얼른 가족에서 떨어져 나오기를 소원하던 그때!
어른의 나가 ‘가족이 많다는 것을 인식한 경험은 설거지다. 가족과 떨어져 생활하던 시절 홀로 밥을 먹은 후였다. 두어개 그릇과 수저를 씻었다. 그릇 두 개를 씻고도 수세미에 묻은 퐁퐁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러니 세제를 말끔히 털어내기 위해 그릇 두 개의 시간보다 더 길게 주방에 머물렀다. 뒷날에도 여전히. 너무도 자연스럽게 세제를 왕창 묻혀 설거지를 한 탓이다. 며칠을 ‘털피’가 되었다. 부주의해서 실수를 저지를 때면 엄마는 언제나 ‘털피’라고 했다. 하지만 부주의함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낭비는 더더욱 아닌데 많은 형제들과 살다보면 아끼는 일은 습관처럼 몸에 익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따위 세제는 어쩜 그렇게 푸욱, 푹 써버렸을까. 며칠 동안 귓가에 울리는 털피 소리와 함께 설거지를 하던 난, 깨달았다. 그것이 습관이라는 것을. 나는 늘 그만큼의 세제로 설거지를 했었다. 늘 양말짝만큼 넘치는 그릇을 씻어야 했기에 세제 한번으로는 모자랐던 몸에 밴 기억. 오랜 시간 많은 가족과 함께 하며 습득된 것이었다.
이젠 그릇 두 개 만큼의 퐁퐁을 써야지 생각하면서 울컥 스쳐가는 감정이 있었다. 그건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세제를 덜어내는 것이 가족에 대한 정을 지우는 것이 아님에도 더러 징글징글했던 많은 가족이었음에도 그 많은 가족에게서 떨어져 나왔다는 느낌에 강렬하게 사무쳤던 그 날. 그리움이란 단어를 생각하면 어김없이 초록빛 퐁퐁과 수세미가 뒤따른다. 그렇기에 내 삶에서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란 퐁퐁 잔뜩 묻힌 수세미다.
첫댓글 어릴적이 생각나네요~^^
가끔은 그립기도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