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2장에 기록된 이 중요한 사건은 하나님의 구속 계획의 본질에 대한 심오한 진리를 드러내는 모형론적 의미가 풍부하게 담겨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주님의 뜻에 순종할 준비를 하고 순종적이고 신실하게 모리아 산으로 향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의 죄를 위한 궁극적인 희생 제물로 바치실 것을 가슴 아프게 예표합니다(요한복음 3:16).
아브라함과 이삭이 산에 올라갈 때 이삭은 희생양에 대해 물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예언자적 통찰력으로 "내 아들아, 하나님께서 번제용 어린 양을 직접 마련하시리라"(창 22:8)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선언은 세상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참 어린양, 즉 자신의 아들을 실제로 내어놓아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준비하심에 대한 강력한 상징입니다.
절정의 순간, 아브라함이 아들을 죽이려고 칼을 들었을 때 주님의 천사가 개입하여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죽이지 말라 명령했습니다. 이삭 대신 덤불에 잡힌 숫양을 하나님이 주신 희생 제물로 바쳤습니다(창 22:13). 이 대속 행위는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자신을 바쳐 우리의 죄에 대한 형벌을 짊어지고 아버지와 나눌 화해의 수단을 제공하실 더 위대한 대속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예고합니다(고후 5:21, 벧전 2:24).
또한, 이 사건의 장소인 모리아 산은 수세기 후 예루살렘 성읍과 성전이 세워질 바로 그 장소이기 때문에 큰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대하 3:1). 이 성스러운 장소 근처에서 그리스도는 궁극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아브라함이 이삭을 희생할 뻔한 예언적·모형적 함의를 성취하셨습니다.
따라서 이삭의 희생에 대한 기록은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우리의 구속을 위해 제공하신 그분의 신실하심, 그리고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출하기 위해 그분이 가실 대장정을 드러냅니다. 이 심오한 이야기를 묵상할 때, 자신의 아들을 우리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기꺼이 바치신 아버지의 헤아릴 수 없는 사랑과 우리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버리시고 그분 안에서 영생을 얻게 하신 아들의 사랑을 떠올리게 됩니다.
이삭의 희생은 풍부한 모형론적 상징성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위대한 이름 중 하나를 계시하는 데에도 중요합니다. 바로 여호와 이레의 개념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살리고 숫양을 대신 바치도록 하신 하나님의 개입의 여파로 그 장소를 "여호와께서 공급하시리라" 또는 "여호와 이레"라고 명명했습니다(창 22:14). 이 이름에는 구속사적 의미뿐만 아니라 심오한 성경적·신학적 함의가 들어 있습니다.
"공급하시는 주" 또는 "살펴 보시는 주"로 이해될 수 있는 여호와 이레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섭리라는 신성한 속성, 즉 자신 백성의 필요를 신실하게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강조합니다. 이삭 희생제사의 맥락에서 하나님의 공급하심은 숫양의 대속을 통해 보여지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대속적 속죄와 직접적인 유사성을 가질 뿐만 아니라 구속사 전반에 걸쳐 하나님의 백성의 필요를 돌보고 공급하겠다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약속이라는 더 넓은 주제를 강조합니다.
또한 여호와 이레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인류 역사에 대한 그분의 주권적 관할하심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주님은 자신이 세우신 구속 계획의 복잡한 작용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보시고" 알고 계십니다. 이 사건에서 하나님의 미리 보심은 이삭의 희생제사와 방불한 행위와 그리스도의 궁극적인 희생 사이의 복잡한 연관성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이러한 신적 속성은 성경 전체에 마치 융단처럼 짜여져 있으며, 하나님께서 구속 계획을 조율하여 궁극적으로 예수님의 오심, 죽음과 부활로 이어집니다.
주님은 자신의 백성이 처한 곤경을 멀리하거나 무관심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들의 필요를 공급하시며 자신의 완전한 지혜와 영원한 목적에 따라 그들을 인도하십니다. 이삭 희생제사의 맥락에서 여호와 이레의 의미를 묵상할 때, 우리는 세상의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궁극적인 준비를 하셨음을 알고 주님의 변함없는 공급과 신실하심을 신뢰하도록 격려받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