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디어 줄라이홀에 가보다
우리나라에서 음악에 미쳤다고 할 정도로 음반과 오디오에 모든 것을 쏟아붓는 대표적 인물을 꼽으라면 아마 많은 이들이 시인이자 방송인 김갑수씨를 꼽을 것같다. 멸종된 엘피 음반을 수만장씩 모으고, 조금이라도 더 나은 `궁극의 소리'를 위해 수없이 오디오를 바꿈질 하는 사람. `언젠가는 나도'라고 오디와 음반을 모아놓은 전용 공간을 꿈꾸는 이들이라면 김갑수씨의 음악 감상실은 정말 솔깃한 공간일 것이다. 도대체 누가 3만장의 LP 음반에, 수천장의 CD에, 엄청난 가격의 오디오를 이 사람처럼 모으겠냐는 말이다. 그것도 재벌도 아닌데.
김갑수씨가 평생 모은 음반과 오디오로 꾸민 작업실 `줄라이홀'은 개인이 모든 것을 쏟아부어 만든 음악의 신전이랄 수 있다. 왠만한 아파트나 가정집에선 도저히 자신이 모은 모든 것을 펼쳐놓을 공간이 없어 서울 시내를 뒤져 찾아낸 천장 높은 지하실에 그는 자기만의 성을 만들었다. 그리고 왜 이렇게 음악을 사랑하며, 오디오와 엘피에 모든 것을 걸고 이런 공간을 만들었는지 책 <지구위의 작업실>을 펴내기도 했다.
그 책 <지구위의 작업실>을 읽으면서 이 현실을 벗어난 듯한 공간에 가보고 싶다는 호기심이 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 자신은 비록 음악과 오디오에 그리 큰 관심이 없지만 이 정도 열정과 투자를 한 곳이 어떤 느낌인지 확인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윤광준씨의 책들에서 김갑수씨의 지독한 음악 사랑이 여러번 언급되어 그러잖아도 궁금하던 터이기도 했다.
일하고 있는 신문사에서 `LP음반의 세계'에 대한 기사를 쓰게 된 김에 오래된 이 호기심을 해결하자는 `사심'이 발동했다. 엘피 음반 수집이라고 하면 김갑수씨 아닌가. 일면식도 없던 터에 그의 저 작업실을 갈 기회와 구실이 생겼으니 바로 연락하고 줄라이홀로 향했다.
줄라이홀은 평범한 주택가 골목에 있었다. 마포 한 아파트 단지 부근, 식당과 업소들이 입주한 평범한 상가 건물 지하였다. 어둑한 계단 아래로 내려가니, 김갑수 선생이 문을 열고 맞이한다. 문을 열자마자 안을 가득채운 엘피 음반들이 보인다.
정말 음반의 바다였다. 제법 넓은 공간에 빈틈없이 음반이 꽂혀있었다. 회현동이나 청계천의 음반가게들보다도 더 음반이 많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서자 어느 곳으로 시선을 돌려도 음반들이 압도해왔다.
사진으로는 저곳의 공간감을 느끼기 어렵다. 그닥 넓어보이지 않은 것은 모든 벽이 꽉 차있어서다. 높은 천장도 소리 효과를 위해 붙인 스틸로폼 때문에 높아보이지 않는다.
사진 속 오른쪽 벽을 보자.
엘피, 엘피, 엘피...
천장의 저 스틸로폼은 그 모습이 꼭 도시의 빌딩숲을 연상시킨다. 맞다. 그래서 제품 이름도 `스카이 라인'이다. 오리니날은 방석만한 한 판에 10만원 가까이한다. 만져보면 돌처럼 단단하다. 저 천장을 모두 오리지널로 채우기 어려워 많은 부분은 비슷한 카피 제품으로 김선생이 붙였다고 하다. 직접 붙이느라 고생이 대단했다는데, 그런 정성이 밴 공간이 주인에겐 남다를 것이다.
오디오광들이라면 오디오부터 들여다 볼 법하다. 이름만 듣던 명기들의 종합선물세트다.
저 오디오 세트들만 작은 방은 하나를 가득 채우고 남을 면적이다. 턴테이블만 세 개.
앞에 놓인 저 클래시컬한 스피커가 보통 녀석이 아니다. RCA것으로 프랭크 시나트라 음반을 녹음할 때 스튜디오에 쓰던 50년대 것이라고 한다. 모든 오디오는 빈티지였다. 하이엔드가 없는 것이 오히려 눈길을 끌었다.
이 방안에서 오디오파일들이 가장 탐낼 물건은 이게 아닐까 싶다.
딱 보기만해도 클래식 스피커다. 어떤 물건일까?
스피커 명가 JBL의 것으로, 하스필드가 설계했다. 제이비엘의 하스필드는 스피커의 명기로 꼽힌다. 알텍, 웨스턴 일렉트릭 등과 함께 스피커의 최고 브랜드로 꼽히는 제이비엘 것들 중에서도 파라곤 등과 함께 간판스타로 꼽히는 빈티지 오디오다. 아쉽게도 저 스피커로 음악은 못들어봤다. 취재가 바빠...
김 선생은 귀찮은 손님에게 맛있는 커피를 대접했다. 이 공간 안에서도 부러운 공간.
▲ 사진=박미향 <한겨레> 기자
이제 본격적으로 엘피를 들여다볼 차례인데, 하도 많아 이야기를 하기가 불가능하다. 뭐가 있냐, 가 아니라 뭐가 없냐, 를 따지기조차 쉽지 않은 탓이다. 엘피의 매력은 뭔지, 엘피는 음악적 특성이 어떤지 이야기를 나누면서 동행한 사진기자 박미향씨가 이미지컷을 찍기 시작했다. 엘피를 바닥에 깔고 엘피 속에 사는 김선생의 이미지를 연출.
▲ 사진=박미향 <한겨레> 기자
김 선생이 `보물'로 칭하는 것이 사진 안에 있다. 맞춰 보시라.
정답은 저 유치원 의자다. 턴테이블에 판을 올릴 때 딱 알맞은 높이여서 다른 의자들로는 대체가 안된다고 한다.
그리고 저 벽에도 신기한 것 하나 발견.
사진 가운데 시커먼 상자 같은 바로 저 것. 오디오 역사의 초기에 등장했던 `축음기'다.
무슨 예쁜 앤틱 가구 같지만 위를 열면 턴테이블을 올리는 부분이 나오고, 아래를 열면 소리가 나온다.
김갑수씨의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그가 엘피 음반을 새로 얻게 되면 치르는 `의식'같은 과정이었다. 낡고 손탄 음반을 깨끗이 씻어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음반 닦기' 과정인데, 그 묘사가 무슨 제례 수준이었다. 그 부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하자 직접 시연해 보여줬다.
▲ 사진=박미향
우선 음반을 물로 씼고 천으로 닦는다.
정말 때가 찌든 음반이면 물에 하루 정도 담가 때를 불린 뒤 닦아낸다.
그런데, 음반을 물에 담그면 가운데 종이로 붙인 라벨이 떨어지잖는가?
그래서 나온 도우미가 요 것.
▲ 사진=박미향
저 파란 판대를 엘피 양쪽 라벨 부분에 밀착해 물에 젖지 않게 해주는 물건이다. 세상엔 정말 별 물건 다 있다. 필요는 수요를 낳는다는 것은 아무리 사소하고 좁은 분야에도 적용된다.
▲ 사진=박미향
이렇게 목욕시킨 엘피를 이제 본격적으로 세척할 차례. 전용 세척용액이 따로 있다. 때의 강도에 따라 종류도 여럿.
엘피를 전용진공청소기 VPi 위에 올려놓고 세척액을 뿌린 다음 솔로 문질러 거품을 낸다.
▲ 사진=박미향
거품이 다 일었으면 저 턴테이블의 암 같은 빨대로 용액을 빨아들인다.
이렇게 세척이 끝나면 다시 천으로 엘피를 닦는다. 그리고 잘 말려야 한다.
저 엘피 건조대는 김 선생이 직접 디자인해 철물점에서 맞췄다고 한다. 옆에 있는 동그란 도너츠같은 쇠붙이는 엘피와 엘피가 닿지 않게 띄워주는 간격 유지 보조물.
이 공간과 전혀 안 어울려 보이는 것도 있다.
음악감상실에 왠 현미경?
하지만 음악 마니아들에겐 의외로 꼭 필요한 물건. 턴테이블 바늘(카트리지)의 끝, 음반에 닿는 미세한 부분의 상태를 확인하는 도구다. 좋은 돋보기로도 얼마든지 가능.
그리고 개인적으로 무척 탐났던 것. 바로 눈이 꽂혔다.
절로 뚜겅이 닫히는 놀라운 자동 성냥통. 저 향로 성냥과 함께 얼마나 많은 음식점과 흡연자들이 세월을 보냈던가. 이제 거의 찾아보기 힘든 한 시대의 상징이다. 어디서 파는지 알면 가서 왕창 사놓고 싶다.
이곳 줄라이홀은 음악에 대한 지고지순한 사랑의 현장이다.
사람들은 물론 그래도 의아해한다. 도대체 왜 이렇게 많은 돈과 시간을 엘피와 오디오에 들이냐고.
그러나 생각해보면 참 무의미할뿐만 아니라 생각없는 질문일 수도 있다.
벤츠 자동차나 유명한 그림에 억대의 돈을 쓰는 것은 의아해하지 않으면서 왜 음반에 돈을 쓰는 것은 다르게 느끼는 것일까. 좋아하는 것에 애정을 갖고 열성을 쏟아붓는 것일뿐이다.
엘피는 이제 생산이 중단되었다. 사람들에게 엘피는 추억이나 향수를 일으키는 낡은 구닥다리 물건이다.
그러나 음악팬들에겐 엘피는 여전히 살아있다. 시디가 못주는 그 느낌, 수고롭더라도 훨씬 더 사람을 집중시키는 플레이 과정이 모두 음악이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여전히 시디로는 나오지 않고 엘피로만 존재하는 좋은 연주들이 수두룩하다. 그러니 음악 마니아는 엘피를 들을 수 밖에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엘피에는 아날로그적 감성울 부추기는 물건 자체의 매력이 있다. 그 매력의 맛을 들이면 엘피를 떠나지 못한다.
왜 엘피인가, 이 빤한 물음에 김갑수 선생은 오랜 세월 몸으로 체득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엘피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짧게나마 문답으로 소개한다.
구: 시디와 다른 엘피만의 느낌이란 무엇일까요?
김: 엘피는 하나하나가 모두 오리지널이고 고유한 것이에요. 끊임없이 손때가 묻고 상처가 생기고... 그래서 더 소중하죠.
구: 지금 엘피가 사라져가기 때문에 더 소중하게 느끼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중고 엘피가 세계를 왔다갔다하며 유통되는 것을 보면 아직도 엘피팬들은 상당해보입니다.
김: 얼마전에는 엘피 하나를 꺼냈다가 틀지 못하고 멍하니 계속 쳐다만보고 있었어요. 영국의 뮤지컬 배우가 평생 모은 엘피 중 하나였는데, 이 사람이 나이들어 세상을 떠난 뒤 시장에 팔린 것이 우리나라로 건너온 거죠. 엘피를 꺼내는데 그 속에 정전기 때문에 붙어있는 희끗한 머리카락이 있었어요. 그걸 보면서 그 영국 노인이 런던 자기 방에서 이 음반을 평생 들었을 모습이 떠오르는 거예요. 순간 너무 뭉클했습니다. 엘피에 인생이 있구나 라고 실감했죠. 실제 중고 엘피를 사면 별 것들이 다 나와요. 아이들 사진도 나오고, 납작하게 말린 꽃도 나오고, 음반에는 메모도 적혀있고, 사랑하는 이에게 준 것들이 상당해서 `디어~ 누구'라고 쓴 것들도 많아요. 이제 콜렉터들이 세상을 떠나는 세대들이 되었으니 그런 음반들이 나오는 거죠.
구: 예전에는 엘피 모으기가 참 쉽지 않았던 것 같아요. 원판은 비싸고, 라이선스는 종류가 드물고...
김: 아시아권은 오히려 엘피가 멸종되면서 기회가 온 셈이에요. 전에는 원판 구하기가 정말 힘들었어요. 80년대 초반 대학시절에는 엘피를 너무 갖고 싶어서 미군들이 한국에 들고온 엘피를 구하러 동두천을 가곤 했어요. 이른바 양공주들이 미군 애인들한테 받은 엘피를 구하는 거죠. 판은 구해야 하고, 이렇게 해야되나 싶기도 하고... 참 정신적으로 난감했죠.(웃음)
구: 시디가 절대 못살리는 엘피의 맛이란게 어떤 걸까요?
김: 엘피로 들으면 똑같은 음악이 곰삭아 노골노골거려요. 그 맛이죠. 엘피는 음악이 귀하게 느껴집니다. 저는 `엘피를 튼다'가 아니라 `엘피를 연주한다'고 말해요. 조심해서 다루는 복잡한 과정이 다 음악에 들어가는 거예요. 음악이란 귀에 들리는 소리만이 아니거든요. 왜 공연장에서 들으면 음악이 더 좋을까요? 공연장까지 가고, 가서 다시 기다리고, 들어가서 분위기에 압도되고... 그런 과정들이 사람을 긴장하고 고조시키니까 음악이 더 강하게 파고들죠.
구: 그래도 이정도로 엘피를 사랑하시는 것을 보니 대단합니다.
김: 사람들이 저보고 어떻게 이렇게 하느냐고 하는데, 아주 간단해요. 다른 것을 안해요. 요즘에는 모든 것이 세월 따라 깊이가 달라지는 것을 느껴요. 엘피에는 너무나 많은 시간과 돈과 에너지가 들어요. 대신 음악이 얼마나 강하게 다가오는지 체험할 수 있을 겁니다. 음악이 인생에서 남는 여가 이상이라고 생각하는 분들, 음악에 많은 것을 걸고 싶은 분들이라면 엘피를 한번 해보라고 권하고 싶어요.
취재는 잘 끝났고. 기사는 <한겨레> 목요일치 섹션에 나왔다. 그리고 줄라이홀이란 곳에 대한 내 호기심도 충족됐다.
저 곳에 가기 전, 먼저 다녀온 적이 있는 저술가 하지현(건대 의대 교수, 신경정신과 전문의)에게 한번 물었던 적이 있었다. 하선생이 들려준 이야기는 이랬다.
"줄리아홀 대단한데요, 너무 압도되서 실감이나 소유욕은 안생겨요. 마치 내 옆에 줄리아 로버츠나 오드리 햅번이 앉아있는거 같다고 할까요?"
정확했다.
너무 별세계에서 부러워지지 않는, 부러워하기엔 너무 비현실적인 곳이었다. 줄라이홀은 부러워할 수 있는 선을 넘어섰다.
음악광인 우승현 네이버 뮤직팀장의 표현도 아주 흥미로웠다.
"1930년대 독일제 스피커가 "너 귀 수준이 어느정도냐"라고 호통치는 듯한 압박감이 있더라고요."
줄라이홀이란 곳에 대해 어떤 분들은 너무 이상하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다 이유가 있고, 재미가 있다. 그 재미는 온전히 스스로 만드는 사람의 몫이다. 모두가 김갑수씨처럼 할 이유도, 필요도 없지만 그런 열정만큼은 부러웠다. 내가 평생 저런 공간을 만들리는 없어도 나만의 `줄라이홀' 같은 것을 시도하면서 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엔 참 별 곳도 다 있다.
첫댓글 감사히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