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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8. 주현절 넷째 주일
예배 시편 / 시편 133편 1-3절
찬송 / 96장 · 온 세상이 캄캄하여서
성서 / 신명기 8장 1-14절, 로마서 12장 1-15절
말씀 / 이 시대의 풍조를 본 받지 말고
주님께서 당신들을 낮추시고 굶기시다가, 당신들도 알지 못하고 당신들의 조상도 알지 못하는 만나를 먹이셨는데, 이것은, 사람이 먹는 것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당신들에게 알려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신명기 8장 3절)
여러분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십시오.(로마서 12장 2절)
김윤식 목사
Ⅰ
한 인류학자가 아프리카 부족의 문화와 관습을 연구하고 있었답니다. 어느 날 그는 마을의 아이들과 작은 게임 하나를 하기로 했습니다. 바구니 하나를 준비해서 사탕을 가득 담고는, 나무 밑에 두었지요. 그리고 멀리서 나무로 달려와 먼저 도착하는 아이에게 그 사탕을 주기로 했지요. 아이들은 모두 줄을 서서 신호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그때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겼지요. 인류학자가 출발을 외쳤을 때, 아이들은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모두 서로의 손을 잡고 나무를 향해 함께 달렸습니다. 아이들은 동시에 함께 도착해서 사탕을 나누고, 행복하게 먹었지요. 그때 인류학자가 아이들에게 너희는 왜 다함께 도착했는지 물었답니다. 아이들은 한목소리로 “우분투”라고 외쳤습니다. 우분투, “내가 존재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있기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은 결코 혼자서는 제대로 된 인간이 될 수 없다는 말이지요. 사람이란 마땅히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우분투를 외친 것은, 누군가 사탕들을 독차지하면 다른 아이들이 슬플 텐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냐고 오히려 반문한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은 혼자서 전력질주 하듯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적어도 성서에는 그런 길이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한 사람이 아니라, 공동체의 일원으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워가도록 부르십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를 함께 기다리며, 준비하고, 세워가는 공동체입니다. 우리의 신앙과 기도가 나를 위한 신앙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애쓰는 보다 넓고 성숙한 신앙이 될 수 있도록 주님께서 인도하여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Ⅱ
오늘 우리는 구약성서에서 신명기의 말씀을 받아 읽었습니다. 구약성서에서 가장 앞에 있는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 다섯 권을 오경이라고 부르지요. 신명기는 오경의 마지막에서 하나님께서 조상들과 맺은 언약과 출애굽을 회상하고, 시내산 광야에서의 경험을 기억하고 새로이 종합합니다. 또한 신명기는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의 앞에서 장차 다가올 미래를 내다보고, 앞으로 다가오는 시대에 대해서 어떻게 준비하고 맞이해야하는지 알려주고 있지요. 그러니까 신명기는 선조들의 역사와 과거를 정리하고 종합하는 끝이면서 동시에 미래를 준비하고 맞이하는 시작이 되는 책입니다.
신명기는 말 그대로 하나님의 명령, 곧 하나님의 말씀을 담고 있는 책입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 낸 지도자 모세가, 이제 가나안 목전에서 더 이상 불순종과 우상숭배 같은 잘못을 범해서는 안 된다고 전하는 경고를 담고 있습니다. 신명기에서 모세는, 자신의 세대는 이제 지나가더라도 새로운 세대는 똑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면 좋겠다는 절절한 호소를 전합니다. 모세의 가르침은 무엇이었을까요? 신명기 6장 4절에 그 핵심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들으십시오. 주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오, 주님은 오직 한 분뿐이십니다. 당신들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모세의 호소는 너무도 선명하고, 간결하고, 분명했습니다. 모세의 가르침은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는 것이었습니다(신 6:1-9). 신명기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에서 복을 누릴 것이고, 하나님을 배반하면 심판당할 것이라는 모세의 호소가 선명하고, 분명하게 담겨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받아 읽은 신명기 8장에서도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모든 명령을 잘 지키라고, 그러면 조상에게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서 잘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을 전합니다. 그러면서 모세는 백성들과 함께 광야에서의 경험을 회상합니다. 광야란 어떤 곳입니까? 광야는 한 마디로 사람이 살아가기 어려운 곳이지요. 먹을 것이 없고, 마실 물이 없는 정말 힘겨운 곳입니다. 그렇지만 모세는 광야에서의 시간을 새롭게 돌아봅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우리를 단련시키셨고, 우리의 마음을 살펴보셨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광야는 하나님께서 자녀를 가르치는 부모와 같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가르쳐 주신 곳이었다고 고백하지요.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낮추셨고, 알지 못하는 음식인 만나를 먹게 하셔서 살아가신 은총의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모세는 하나님께서 만나를 먹이신 이유를 새삼스럽게 해석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나를 먹이신 이유는 단순히 그들에게 양식을 주셔서 생명을 연장하도록 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만나를 먹이신 이유는 바로 “사람이 먹는 것으로만 사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만나의 기적은 단순히 그들의 굶주린 배를 채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 곧 “하나님께서 그들을 친히 먹여주시고, 인도하신” 긍휼과 은총을 경험한 것에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만나는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해 주었을까요? 그들이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신비한 가루인 만나는 그들의 양식이 되었지요. 그런데 만나는 각 사람이 필요한 ‘만큼만’ 가져갈 수 있었습니다. 만나는 저 이집트의 피라밋처럼 정상에 있는 소수의 사람들이 독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나누어야만 하는 양식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만일 누군가 자신의 몫보다 많이 가져가 쌓아둔다면, 그다음 날 벌레가 생기고 악취가 풍겨 먹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누구든 쌓아둘 수 없었고, 모자라는 사람이 없이 나누어 먹을 수밖에 없는 것이 만나였습니다.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지 않고, 많이 거둔 사람도 남기지 않는 것, 바로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경험한 만나의 참된 의미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만나를 통해서 광야를 지날 수 있었지요. 만나는 그들의 양식이었고, 만나를 먹는 방식이 그들이 함께 살아가는 방식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만나를 통해 길들여진 제국의 방식을 버려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만나를 통해 나의 배만을 채우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절제하고 나눔으로 공동체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 것이지요. 비로소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만나를 통해, 자신들이 살아가는 것이 자신들의 뜻과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이웃의 관심과 돌봄으로 살아감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먹는 것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이웃과 함께 살아가는 풍성한 삶을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이제 모세는 만나의 의미를 기억한 뒤에, 이어서 다가올 미래를 내다보면서 광야와는 다른 새 시대에 다가올 어려움을 다시금 새삼스럽게 예견합니다. 모세가 예견하는 어려움은 다름 아닌 풍요입니다. 풍요가 왜 문제가 된다는 말일까요? 배불리 먹고, 좋은 집을 짓고, 소와 양이 번성하고, 은과 금이 많아진다면 교만한 마음을 지니거나,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일이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새로운 땅에서 새 시대에 광야와 달리 풍족한 생활을 하게 된다고 해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새로운 곳에서도 지키고 소중히 간직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사람은 먹는 것으로만, 내 배를 채우는 것으로만 살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만나를 나누어 먹었던 방식은 단순히 과거의 일이 아니라, 이제 새롭게 맞이하는 오늘과 내일의 방식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 이집트의 파라오의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 탐욕의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새롭게 부르신 공동체로 살아가려면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이웃의 사랑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그 중심을 잃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를 믿음과 소망과 사랑 안에서 지켜주실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자유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과 이웃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Ⅲ
오늘 우리는 신약 말씀으로 로마서 12장의 말씀을 받아 읽었습니다. 로마서 12장에서 바울은 말씀을 듣는 이들에게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살아있는 제물로 드리라”고 권면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드릴 합당한 예배”라고 말하지요. 그러면서 바울은 12장 2절에서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합니다. 이 구절에서 이 시대의 풍조를 따르는 것, 곧 시대에 순응하는 것과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는 것, 곧 변혁하는 것이 대조되어 있습니다. 순응과 변혁의 대비입니다. 여기서 시대의 풍조를 따르지 않고, 스스로를 새롭게 하는 것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신앙인들의 자기 개혁, 곧 교회가 교회다워지는 교회의 개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시대의 풍조를 따르지 않는 것, 다시 말해 교회의 본 모습은 무엇일까요? 먼저, 바울이 말하는 참된 신앙, 곧 참된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고 있는 지체”의 모습입니다. 언제나 교회의 중심이요, 머리는 그리스도입니다. 교회는 언제나 어디서나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따르는 공동체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공동체는 서로에게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 모습을 닮아가는 공동체입니다. 또한, 바울은 교회의 구성원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신령한 선물로 여기는 사람들이라고 고백하지요. 12장 6절부터 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따라, 우리는 저마다 다른 신령한 선물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령, 그것이 예언이면 믿음의 정도에 맞게 예언할 것이요,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또 가르치는 사람이면 가르치는 일에, 권면하는 사람이면 권면하는 일에 힘쓸 것이요, 나누어 주는 사람은 순수한 마음으로, 지도하는 사람은 열성으로, 자선을 베푸는 사람은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내가 하는 것도, 다른 사람이 하는 것도, 크고 작은 것에 관련 없이 모두 하나님이 지체들을 통해서 하시는 일이라는 고백입니다. 이러한 참된 신앙, 곧 교회의 모습을 한마디로 말하면 사랑의 공동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짓 없이 사랑하되 악한 것을 미워하고, 선한 것을 굳게 잡고, 서로를 사랑으로 다정하게 대하며, 서로 존경하고, 소망을 품고 즐거워하며, 환난을 참고, 꾸준히 기도하고, 서로의 필요를 채우고, 손님을 대접하며, 박해받는 자들의 편에 서고, 기뻐하는 자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자와 함께 우는 것이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며, 우리가 그 지체라는 구체적인 증거입니다.
그렇지만 바울이 본 받지 말라고 강조한 ‘이 시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이 시대가 무엇인지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 시대란 아마도 참된 신앙과 교회가 추구해야 하는 반대 모습일 겁니다. 교회의 모습과 반대로 말해 보자면,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는 시대이며, 자기들이 섬기는 맘몬과 우상과 탐욕의 종살이 하면서, 그것들을 따르고 닮아가는 시대입니다. 자기가 우선이 되고, 남은 신경 쓰지 않는 시대겠지요. 가난하고, 약하고, 약한 자보다는 부한 자, 높은 자, 큰 자와 강한 자를 중요하게 여기는 시대이며, 모두가 남을 누르고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시대입니다. 그러한 이유로 사랑과 배려와 존중이 아니라 경쟁과 시기와 다툼이 가득한 시대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본받지 말아야 할 바울의 시대의 모습이며,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의 교회가 새롭게 변해야만 한다면 어떻게 변해야 할까요? 바울이 말한 것처럼 이 시대의 풍조는 본받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교회가 교회다워지는 것은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는 것,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한 뜻을 언제나 구하는 것입니다. 다만, 교회만큼은 내가 아니라 우리를 생각하고, 강자가 아니라 약자를 생각하고, 미움과 경쟁이 아니라 사랑을 생각하고 실천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의 모습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최근 코로나를 지나면서 교회에 대한 비판과 반성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수십 년 전부터 교회는 위기를 말했지만, 이제는 정말로 교회가 변화해야만 생존할 수 있다는 목소리는 점점 커져가고 있지요. 어쩌면 교회가 겪고 있는 진통은 남의 일도 아니고, 피할 수도 없고, 함께 겪을 수밖에 없고, 이제는 변화에 참여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시대가 아무리 변하고, 기술이 발전하더라도 교회에는 변하지 말아야 하는 중심이 있습니다. 바로, 신앙생활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시대가 변하더라도 변함없이 신앙생활에서 정말 중요한 것,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우리 자신이 주님의 몸 된 교회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공동체라는 생각입니다. 참된 신앙이란 너는 어떻게 되든 나만 잘되면 상관 않는 반사회적이고 비인격적인 바람과 기도가 아니라, 함께 주님의 몸 된 공동체를 세워가는 노력이며, 나의 신앙과 기도가, 우리의 신앙과 기도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때에 따라 필요한 것으로 우리에게 채워주시는 주님께서,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지 않고, 많이 거둔 사람도 남기지 않았던 함께 살아가는 지혜를 우리에게도 베풀어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또한, 만나를 통해 사람이 먹는 것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과 이웃의 사랑으로 살아감을 깨닫게 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도 절제와 나눔이 있는 성숙한 믿음을 더욱 채워 주시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이 세대를 본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완전하고 선한 뜻을 잘 분별해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사랑의 마음으로 교회답게 세워가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함으로 우리의 삶을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마땅한 예배로 드릴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