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리와 초컬릿 공장'을 쓴 작가 로알드 달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최근 듣게 된 어떤 팟캐스트 때문이었습니다. 정확히 특정하자면 랩 가수 UMC가 세우고 운영하고 있는 XSFM 이란 팟캐스트 방송국의 프로그램중 하나인 성우 윤소라씨 진행의 '소라소리'라는 책을 낭독해 주는 팟캐스트 때문이었는데, 거기서 그가 쓴 단편 '손님'이란 것이 소개되어 듣게 되었고, 그리고 나서 로알드 달의 '맛'이란 단편소설집을 도서관에서 빌려 읽게 된 것이지요. 책을 읽어주는 이런 팟캐스트의 가장 좋은 점을 꼽자면, 물론 책 읽는 시간조차 없는 사람들에게 - 더 정확히 말하자면 딴짓 하느라 바쁜- 책을 '들려'줌으로서 독서와 같은 효과를 주는 것도 있지만, 이를 통해 독서욕을 격발시킨다는 데 있다고 하겠습니다. 일부러 책을 빌리러 도서관에 가야 하고, 그것을 대출 해 와서 책장을 넘기는 재미는 꽤 쏠쏠합니다. 아무튼, 로알드 달의 소설 중 특히 관심을 끈 건 '맛'이라는 단편이었습니다. 금융업을 종사하며 컴플렉스를 갖고 있는, 돈은 많으나 과시욕과 허영끼가 있는 사람이 당대의 미식가이며 와인 비평가인, 그러나 알고보면 교활하고 비열한 사람과의 사이에 벌어지는 내기를 둘러싼 이야기인데, 여기서 묘사되는 와인의 맛, 그리고 그 묘사 과정은 와인쟁이라면 아마 누구나 푹 빠질 겁니다. 그러나, 로알드 달은 절묘하게 이런 와인 전문가들의 '구라'를 매우 통렬한 방식으로 비꼬고 있는데, 이 점 또한 와인 애호가로서 동감하는 바였습니다. 같은 와이너리에서 나온 같은 빈티지의, 같은 품종의 와인도 병마다 맛이 다 다를 수 있다는데. 하하. 와인쟁이라고 스스로를 말하는 사람들은 한번 읽어볼만한 단편이어서 추천. 와인이 스너비한 술이라고 여겨지는 건 어디나 마찬가지인 모양입니다. 그런데, 와인에 대해 이런 식으로 환상을 입히게 되는 동력 역시 우리 자신이 갖고 있는 허영이라 할 수 있겠지요. 그런 면에서, 아무튼 지금처럼 와인 가격이 적어도 미국에서 크게 떨어지고 있는 것, 그리고 프리미엄 와인과 일반 테이블 와인 사이의 품질 간격이 지금처럼 좁았던 적이 없다는 전문가의 말들을 들으면, 와인이 다시 붐을 일으킬 만 하건만, 적어도 몇 년 전과 같았던 '영화'를 다시 누리긴 힘들 것 같네요. 제가 활동하고 있는 국내의 와인 관련 인터넷 카페들도 그 회원 수나 관련된 글들은 정체되었습니다. 아마 매일 매일 올라오던 포스팅 갯수를 가지고만 비교한다면 그 활동이 크게 위축됐다고 봐야겠지요. 와인이 이렇게 급격히 환상이 빠진 것은 역시 경제 탓일 거고... 적어도 미국에서는 그 자리를 크래프트 비어가 메꾼 것 같고, 한국도 크게 다르진 않아 보이고. 뭐, 그 덕에 미국 시애틀에서 살고 있는 이 와인쟁이는 비교적 괜찮은 와인들을 과거엔 생각할 수 없었던 좋은 가격으로 온갖 할인 매장에서 구매할 수 있다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긴 합니다. 최근에 따서 마신 와인 중 인상깊은 로제가 한 병 있었습니다. 피노 느와 포도로 만든 로제. 사실 피노는 꽤 까다로운 포도고, 재배 과정에서 쉬이 상하고 껍질이 얇아 병충해에 약하고, 수확 때도 더 신경써야 하고, 갑자기 확 익어버려서 수확 날짜를 다른 품종보다 더 쉽게 잡을 수 없는 등, 암튼 온갖 디스어드밴티지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도 피노 느와의 인기는 영화 '사이드웨이'의 흥행 성공 이후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미국 안에서 재배 면적이 크게 증가했습니다. 그러다가 맞은 서브프라임 사태는 세상을 크게 바꿔 버렸지요. 아마 이 때의 충격은 대공황이나 한국의 IMF 때와도 비견할 수 있을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늘 소비를 미덕으로 삼던 나라의 국민들이 갑자기 소비를 멈추니 어떻게 될 수 있는가를 저는 똑똑히 지켜봤고, 와인이라는 쪽으로 시야를 좁혀 보았을 때, 수많은 와이너리들이 폭망하는 것도 보았으니까요. 살아남은 와이너리들은 새로운 어려움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와인 소비 자체가 줄어들었으니, 어떤 식으로든 자구책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지금까지 스너비하게 고개를 뻣뻣하게 세우고 있는 와인이란 술이 고개를 팍 숙였습니다. 적어도 미국에서는. 그리고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꽤 훌륭한 와인들이 저소득층을 위한 할인 매장 같은 곳에까지 풀려나올 정도가 돼 버렸습니다. 이른바 눈물의 땡처리였던 것이지요. 그리고 저는 그런 걸 통해 적지 않은 와인을 적정선 훨씬 아래의 가격으로 집어올 수 있었고, 그중엔 보관이 잘못돼 버린 것도 드물게 있었지만 암튼 즐겁게 와인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조금의 죄책감을 안주로 삼아서. 밴시 Banshee 는 세 명의 대학 친구들이 모여 만든 와이너리입니다. 피노느와에 특화되어 있는데, 이 와이너리에서 나왔던 2013년산 피노 느와 로제를 병당 $4.50 에 구한 건 솔직히 미안하기까지 한 일이었습니다. 이 와인은 와이너리에서도 병당 20달러는 줘야 하는 와인이었으니까요. 피노 느와답게 짙지 않은 페일 핑크. 피노느와의 특성상 입에서 침이 넘치도록 하는 산도와 검불딸기, 꽃향기가 매력적이면서도 뭔가 자기 존재감이 확실한 그런 와인이었습니다. 아이들의 저녁을 코스트코에서 산 피자와 치킨 베이크 같은 것들로 때워주면서, 저는 닭가슴살 샐러드를 메뉴로 골랐는데, 여기에 맞춰 뭐 한 잔 할까 하다가 이 녀석을 열었더랬습니다. 아이들은 응접실에서 북적거리고, 저는 혼자 뒷마당 패디오에 나와 느긋하게 와인 한 잔 하는 재미가 꽤 쏠쏠하더군요. 여유로웠고... 원래 모든 술이 그렇겠지만, 사실 와인도 그렇게 폼 잡고 마실 게 아닌 듯 합니다. 일 하고 나서, 땀 흘리고 나서, 맥주처럼 벌컥벌컥 들이킬 수는 없겠지만, 일 때문에 지쳤던 몸과 마음에 여유를 준다는 마음으로 '싯 백 앤 릴랙스 Sit back and relax' 하는 마음으로 마신다면... 오래전부터 생각했던 것이지만, 노동의 구슬땀이야말로 와인의, 그리고 모든 술들의 가장 좋은 안주가 아닌가 싶습니다. 뒷마당으로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식히고, 와인의 여유를 즐깁니다. 그러면서 사회에 대해서도 생각해봅니다. 몇달 전까지만 해도 병당 20달러는 줘야 했던 와인이 5달러도 채 안 되는 가격으로 풀려 버렸습니다. 그리고 우린 이것을 시장의 원리라고 말합니다. 수요와 상관 없는 생산, 그리고 도박과 진배없는 투자... 여기에 소비의 환상을 심어주는 마케팅. 우리가 사는 사회는 참 많은 것을 낭비하는 사회이긴 한 것 같습니다. 뭐, 그 덕에 저는 지금 꽤 괜찮은 평을 받았던 와인들이 '경쟁에서 밀려나' 염가 매장으로 쫓겨온 것들을 골라 소비하고 있습니다만, 문득 이것이 지금 한국 고용시장의 현실과도 비슷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문득 하면서 가슴이 저리기도 했습니다. 스펙은 너무나 좋은데 그들을 써 줄 곳은 없는 상황. 그래서 저임금 노동시장으로 밀려나는 학력인플레의 현실. 와인을 바라보면서도 왜 그 생각이 그리도 겹쳐 들던지. 시애틀에서... |
출처: Seattle Story 원문보기 글쓴이: 권종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