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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촉발된 광주학생운동은,
11월 12일 전국적인 학생 시위로 확대되어 이듬해까지 전국 320여 학교,
54,000여 명이 참여한 대규모 학생운동으로 발전하였다
. 이 운동은 3·1운동에 버금가는 독립운동으로 멀리 쿠바 동포사회에서 후원금을 보내올 정도로 국내외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퇴학 처분, 형사처벌을 받았던 학생들 상당수가 1930년대 독립운동을 이끌었고
, 이들의 불굴의 항일 정신은 광주서중학교와 광주사범학교 학생들이 조직한 비밀결사인 무등회와 무등독서회로 이어졌다.
특히 무등독서회는 연합군의 상륙작전에 도움을 주기 위해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로 유명하다.
무등회원 4명이 옥중 순국하였고, 무등독서회원은 10개월 동안 유치장에서 갇혀 고문받다가 해방 다음 날 출옥하였다.
광주학생운동을 이끈 단체는, 1926년 11월 3일 결성되었다 해체된 ‘성진회’라는 비밀 조직이었다.
성진회는 결성 직후 경찰에 조직이 노출되자 이듬해 초 자진 해산하고,
학교급별로 독서회를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조직화하였다.
그러다 1928년 4월 식민 지배체제를 비판하는 유인물을 살포하였던 광주고보 5학년 이경채가 6월 초 학교 당국으로부터 퇴학 처분을 받았던 ‘이경채 사건’이 발생하였다. 학생들이 이에 동맹 휴학에 들어가는 등 조직적으로 저항하였고, 다음 달 7월에 ‘맹휴중앙본부’가 결성되었다. 맹휴중앙본부가 1929년 11월 학생시위를 조직적으로 이끌었다. 성진회 결성부터 이경채 사건, 맹휴 중앙본부 결성에 이르는 과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이가 나주 출신 정우채이다.
광주학생독립기념관 2층 전시실에 그가 옥중에서 모친에게 보낸 애절한 편지와 옥중에서 결의를 다지며 썼던 ‘시(詩)’가 진열되어 있어 더욱 정우채가 누구인가에 궁금함을 자아낸다.
2. 일본인 교장 배척 운동을 전개한 보통학교 생도
정우채는 호가 금하(錦下)로 1911년 11월 6일 나주군 반남면 신촌리 747번지 백양마을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곳은 마한의 왕궁터가 있었던 곳으로 알려진 자미산성 바로 밑이다.
1917년 일제는 이곳 가까이 있는 신촌리 9호분에서 임나일본부 흔적을 찾으려고 발굴을 시도하였으나 오히려 독자적 마한 유물들이 출토되어 당황하여 더 이상 발굴을 하지 못하였다.
이때 출토된 것이 국보로 지정된 신촌리 9호분 금동관이다.
마한 왕도의 정체성 계승의식이 확고한 부친 하동 정순규와 전의 이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정우채의 장남 찬준의 설명에 따르면, 정우채의 조부 정복현은 큰조부 정창현과 ‘쌍효자’로 소문났었다고 한다. ‘남화학교’를 세워 신학문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던 정복현은,
나주, 영암 등 인근 선비들과 ‘시사(詩社)’를 조직하였다. 겉으로는 ‘시회(詩會)’였지만, 일제의 감시를 피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시사’ 회원이 1919년 3·1운동 때 만세 시위를 준비하였으나 기밀이 누설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자, 밤에 자미산 정상에 올라 횃불(봉화)를 올려 독립 의지를 널리 알렸다고 한다. 이 무렵 조선 중기에 결성된 금강시사의 전통이 복설되었다. 이 시사의 속간 서문 글을 독립운동가 유혁의 부친 유흥인이 작성하고 있는 것에서 그 시기를 짐작할 수 있다. 시문에 밝았던 정순규는, 정인보 등 중앙의 훌륭한 문인, 유흥인 등 지역의 문사 등과 ‘반양시사’를 1920년대 중반 결성하였다. 정우채가 일찍 ‘시인’으로 이름을 날렸던 것은 이러한 환경의 영향과 깊은 관련이 있다.
정우채는 학령기가 되었을 때 학교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것은 부친이 식민지교육을 강화하고 있는 학교에 아들을 보내는 것을 망설였기 때문이다. 마을의 반계정(潘溪亭)에 세워진 반남학술강습소에서 한학과 더불어 근대 교육을 배웠던 우채는, 3·1운동 후 근대 교육을 통한 역량 축적이 중요함을 깨닫고 10리 밖에 있는 나주 공산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하였다. 하지만 일본인 교장 世良이 “일본의 天照大神이 단군 성조의 형님”이라는 궤변을 늘어놓자 이에 반발하여 교장 배척 운동을 전개하였다가 강제 휴학 조치를 당했다.1)
1년을 강제 휴학한 후 나주보통학교 4학년에 편입하였던 우채는, 1년 후 광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때가 1926년 4월이었다.
3. 광주고등보통학교 입학과 왕재일과 만남
1926년 4월 광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 정우채는, 같은 해 11월 3일 출범한 성진회라는 비밀결사에 참여하였다. 이 조직은 영암 출신 최규창의 하숙집에서 장재성, 왕재일, 정우채 등 16명이 결성하였다. ,
그가 광주고보 1학년 때 장재성, 왕재일 등 선배들이 주도한 비밀결사에 들어간 것은 어렸을 때부터 형성된 확고한 민족의식과 함께 성진회 결성 핵심 인물 왕재일과 만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우채는, 광주고보에 들어가자마자 하숙집에서 조선일보를 구독하였다. 신문 읽기를 좋아한 데다 이웃 신북 모산리에 사는 유혁이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하고 있었던 것도 또 다른 이유였다. 광주고보를 다녔던 구례 출신 왕재일은 가정 형편이 어려워 신문 배달을 하며 학비를 조달하고 있었다. 정우채와 고학생 선배 왕재일의 만남은 정말 운명적이었다.
그런데 시심(詩心)이 뛰어난 정우채는 1학년 재학 중 작성한 “단결하자”와 “우리는”라는 두편의 시가 조선일보 학생 문단 공모작에 당선되었다.
<단결하자>
나는 보았노라
약한 개미의 단결력을
단결력이 무엇보다 큰 것을
오 자본가의 **한
그**에*당하는 약한 동표
굶주리고 헐벗는 동포여
약한 개미의 단결을 보라
한 힘으로 못하면
두 힘으로 세 힘으로
오 자유에 굶주린 동포여
우리의 힘은 강할 것이다.
모이는 진리를 안다면 강할 것이다.
*** *** 합하고 합의하여
*** 큰 바닷물이 되지 않던가
우리도 적은 힘 합하고 합의하여
힘껏 앞으로 나아가면
우리도 큰 바다에 **의 바다에
가게 되리라
<우리는>
우리는
자유의 벌판으로 벌판으로 …
힘차게 달리는
기차의 운전수가 되자!!!
‘단결하자’, ‘우리는’이라는 시는 큰 반향을 던졌다. 특히 ‘단결하자’라는 시는 청년, 사회운동가로 명성을 떨치던 고향 대 선배 유혁이 평소 강조한 진화론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유혁은 민족이 단결하여 힘을 키워 독립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일관되게 설파하고 있었다.
‘단결하자’는 이 무렵 민족협동전선 열기가 서서히 나오고 있었던 것과도 관계가 있다. 어린 우채가 독립운동의 거대한 물줄기를 냉정하게 살피고 있음을 알게 된다. 왕재일은 정우채의 확고한 신념과 담대한 의지, 그리고 높은 통찰력을 확인하고 비밀결사 회원으로 추천하였다. 1926년 11월 3일 성진회 창립 멤버에 정우채가 참여하게 된 요인이다. 이후 정우채와 왕재일은 평생 동지가 되었다. 현재 93세임에도 왕성한 활동과 기억을 자랑하고 있는 정우채의 장남 정찬준은 왕재일과 관련된 여러 추억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4. 성진회 결성과 정우채
1926년 11월 결성된 성진회의 밑그림은, 1919년 광주 3·1운동을 주도하고 1923년 신우회라는 사회주의 사상단체를 결성한 강석봉이 그렸었다. 성진회 결성의 핵심 인물은 ‘조선공산당’ 중앙 검사위원장 후보로 선출된 강석봉을 비롯하여 강해석, 지용수, 한길상, 장석천, 강영석 등을 들 수 있다. 강석봉은 이보다 앞서 조직된 제3차 ‘조선공산당(소위M.L당)’ 광주 위원장을 맡았었다. 당시 광주에서 활동한 M.L당원으로는 위원장 강석봉을 비롯하여 지용수, 강영석, 한길상, 최용운, 강해석, 지방에서 활동한 이로는 유혁(영암), 조용남(영광), 국종덕(담양), 조명철, 주재학(화순) 등이 있었다.
M.L당 하부 조직으로 노동부, 농민부, 청년부(Y부) 등이 있었고, 특히 Y부에서는 청년 학생 조직이 있었다. 항일운동과 민족독립을 위해 투쟁해나갈 민족 지도자로서의 역량을 함양시키기 위한 청년들을 길렀던 Y부가 ‘성진회’를 지도하였다. 강석봉이 성진회 결성의 기초를 닦았다고 생각하는 까닭이다.
강석봉이 성진회 결성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은 다음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판결문 내용이다.
“대정 15년(1926년) 11월 3일 무렵 광주읍내 부동정 최규창의 하숙집에 회합하여 피고인 왕재일은, 일동에 대하여 조선 현상에서 조선 민족은 일본 제국 때문에 병합, 압박을 당하고 무산 대중은 자본 계급에 의해 착취, 압박을 당해 비참의 경우에 있으므로 우리들 학생은 일치단결하여 조선의 독립과 만인 평등의 공산제 사회의 건설을 도모하고, 이를 위해서는 먼저 공산주의의 이론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역설하니, 위 피고인 등 일동 이에 찬동, 협의한 후 즉시 동소에서 조선 내에서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한 공산제도를 실현시키고, 또 조선 민족을 일본 제국으로부터 독립시킬 목적을 가지고 ‘성진회(醒進會)’라고 한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이들이 사회주의 사상을 접하게 된 것은 강석봉이 1923년 비밀리에 조직한 신우회를 통해서였다. 이들이 신우회와 관련이 있다는 것은 여러 곳에서 확인되고 있다. 지용수, 강해석이 성진회를 지도하고 있는 모습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피고인 임주홍, 최규창, 김광용, 문승수, 정종석, 김인수, 주당석, 유치오, 하선철, 이동선, 박무길, 정귀석, 임종근은 공산주의자인 강해석, 지용수와 함께 소화 3년(1928년) 2월 11일 무렵 광주군 서방면 두암리 지용수 집에서 회합하고 강해석의 선동에 기초하여 피고인 가운데, 고등보통학교 또는 농업학교를 졸업한 자는 사회에 나가서 농민, 노동자에 대하여, 또한 사범학교를 졸업한 자는 교직에 취직하여 아동에 대해 공산주의의 선전, 보급을 도모하고, 재학한 자는 일반 학생에 대해 동 주의의 선전 보급을 위해 상호 연락 제휴하여 조선의 독립과 공산제도 실현을 위해 노력할 것을 합의함으로써 실행에 관해 협의했고…”
성진회 조직이 노출되는 것을 염려하여 1927년 3월 해산한 것으로 위장한 후, 1928년 2월 그 핵심 인물들이 지용수 집에 모였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모임을 강해석이 주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지용수, 강해석이 이들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증거라 하겠다. 성진회를 강해석이 이끌었다는 보다 확실한 증거가 있다.
“피고인 장석천은 수원고등농림학교를 2년간 수료 후 공산주의 연구를 목적으로 대정 15년(1926년) 3월 동경에 건너가 동경상과대학 예과에 입학했으나 4개월 만에 퇴학, 조선으로 돌아온 이후 전남청년연맹위원장·신간회 광주지회 상무간사 등을 역임한 공산주의자인데, 동 피고인은 강해석과 함께 소화 2년(1927년) 3월 중, 전기(前記) 성진회원 일부의 졸업을 기회로 하여 회원 전부를 광주 읍내 남문통 지나요리점에 초대하여 향응한 후에, 일동에 대해 회원 중, 학교를 졸업한 자는 장래 실(實)사회에 나가 공산주의 실행을 위한 사회 운동에 종사하여, 러시아와 같이 공산제 사회 실현에 노력해야 하며, 재학 중인 자는 동상의 목적 아래 더욱 결과를 공고하여 공산주의의 연구에 노력해야 한다고 설시함으로써 실행을 선동하고 , 다음으로 소화 4년(1929년) 1월 중, 동 피고인 집에서 피고인 여도현에 대해 우리 공산주의자는 종래의 노동쟁의, 소작쟁의 등의 경제적 계급 투쟁에서 방향 전환하여 혁명운동의 일반 정치적 투쟁으로 이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권설함으로 실행에 관해 협의하고…”
장석천과 강해석이 1927년 3월 성진회원의 졸업을 축하하는 자리를 이용하여 투쟁 방안를 제시하고 있는 장면이다. 장석천은 전남청년연맹 위원장 및 신간회 광주지회 상무간사로 강석봉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인물이다. 이러한 그가 강해석과 더불어 성진회원을 만나고 있는 모습은 이들과 관계가 깊음을 말해준다. 특히 성진회원들의 앞으로의 투쟁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바로 같은 시각인 1927년 3월 정남균의 집에서 성진회가 형식상 해체되고 있다. 이는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한 위장전술의 일환이었을 뿐 실제는 투쟁 방향성이 구체화되고 있음을 알려준다. 이들 성진회원들은 이미 신우회를 통해 사회주의 사상을 접하고 있었고, 신우회와 광주청년연합회 활동을 통해 강석봉, 지용수, 강해석 등을 잘 알고 있었다. 성진회는 ML파의 거두인 강석봉의 지도를 받았다. 강석봉의 지시를 받은 강해석과 지용수가 학생들과 직접 접촉하며 운동을 이끌어 나갔다. 이렇게 성진회를 지도하던 강해석은 1928년 4월 광주 학생운동의 전환점을 이루었던 ‘이경채(李景采)항일격문배포’에 관련되어 구속되어 3개월 옥고를 치른 후 7월 21일 면소 판결을 받았다. 학생운동 조직과 강해석이 연결되어 있다는 증거이다.
5. 이경채 사건과 맹휴, 그리고 퇴학
이경채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1928년 4월 송정청년회에서 활동하던 광주고보 5학년 이경채가 ‘조선독립선언문’ 등 격문을 제작하여 광주지역 학교에 보내고, 송정리 일대에 격문을 부착했다가 1928년 6월 9일 체포되어 구속되자마자 학교에서 이튿날 퇴학 처분을 하였다.
이경채의 퇴학 소식에 광주고보 학생들이 아직 진상이 드러나지 않았는데 퇴학 처분은 부당하다고 항의하며 1학년을 제외한 동맹 휴학을 결의하였다. 그러자 학교에서는 학교에서 동맹 휴학에 참석한 학생 300여 명 전원을 징계하였다. 이 맹휴가 광주사범과 광주농업학교의 연합맹휴로 발전하였다. 당시 3학년이던 정우채는 김기권·임주홍·최규창 등 2·3·4학년생들과 합의하여 학교측에 진정서를 제출하는 한편 동맹휴교를 주동하였다가 퇴학당하였다.2) 맹휴를 조직적으로 이끈 인물들 상당수가 성진회 회원들이었다.
학교 당국이 학생들의 요구를 거부하고 오히려 학생들을 징계하자 6월 26일 2, 3, 4, 5학년 학생들은 교장에게 다음과 같은 진정서를 제출하고 맹휴에 돌입하였다.
광주고보 맹휴 요구사항
1. 교우회 획득에 관한 건
2. 학교 당국 교육 방침에 관한 건
3. 조선인 본위의 교육실현에 관한 건
4. 물리 화학 교실을 신축할 일
5. 교외 일반집회에 생도 자유 참가를 허가할 일
6. 4, 5학년생 급장 11인에게 명한 근신을 즉시 취소할 것
이들의 맹휴 요구조건을 보면 당시 조선 학생들이 가졌던 불만이 모두 압축되어 있었다. “교외 일반집회에 생도 자유 참가” 요구를 통해 학생들의 집회의 자유가 제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리, 화학 교실의 설치 요구는 일본인 학교인 광주중학교와 비교하여 현저히 시설이 낙후되어 있음을 말해준다. 한국어 문법 교육, 한국사 수업, 한국인 교원의 채용을 요구하였다. “조선인 본위의 교육 실현”을 주장하였다.
맹휴가 일어나자 당황한 광주고보 당국은, 주모자 12명 퇴학, 102명 무기정학, 나머지 참가 학생들에게 근신 처분을 내리는 등 강경 일변도로 나왔다. 이는 오히려 맹휴 가담 학생들을 자극하였다. 7월 10일에는 맹휴 활동을 효율적으로 이끌기 위해 최규창의 하숙집에 임주홍 등이 모여 ‘맹휴중앙본부’를 결성하였다. 중앙본부는 참모부, 통신부, 외교부, 회계부를 설치하여 조직적인 투쟁을 전개하였다. 심지어 지방 학생들의 결속을 위해 지방대표기관을 조직하였다. 맹휴 중앙본부는 학부형에게 통고문을 보내 맹휴의 정당성을 알리고 적극적인 지원을 호소하였다. 맹휴생에게는 끝까지 투쟁할 것을 알리며 결속을 다지고 있었다. 맹휴중앙본부의 결성은 장기적이고 효율적인 투쟁을 가능하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다. 학부형에게 보낸 맹휴 지도본부의 격문을 통해 맹휴의 성격을 엿볼 수 있다.
한・일합병 후 18년 이래 우리 민족은 일본 제국주의의 철제하에서 극도로 유린당하여왔다. 그들의 가혹한 경제적 착취를 감행하는 데에는 악독한 정치적 압박이 있고 그를 미식(美飾)하는데에는 음험한 문화적 기만이 있었다. 현하의 조선 교육은 그들의 만착(瞞着)3) 정책의 노골적 전형이다. (중략) 교장 시라이씨는 조선총독부 식민지 노예교육 정책의 전형적 이행자이다.(하략)
맹휴 지도본부의 구성원들은 자신들이 식민지 노예교육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나아가 이들은 맹휴운동을 항일 민족운동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단순히 교육 현실에 대한 항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인 전체가 일제의 압제 아래에 고통받고 있는 현실을 지적하였다. 이들은 “우리들의 맹휴의 자체에만 향한 승리가 아니다. 이 승리는 실로 우리 피압박 민족의 해방의 길이요, 소생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라고 하여 맹휴운동을 민족해방운동으로 간주하고 폐교를 각오한 결사 투쟁을 선언하고 있었다.
맹휴 중앙본부가 결성된 최규창의 하숙은 맹휴 대책강구회 위원인 최동문의 집이었고, 장재성과 최규창은 성진회원이었다. 또 맹휴 지도부에 등사판을 제공한 사람이 광주청년학원 교사 서재익이었다. 이런 면에서 맹휴 지도부가 광주청년연맹과 연계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농업학교의 맹휴 주동혐의로 실형을 받은 김재룡과 유상걸은 1927년 11월에 결성된 연구모임 구성원이었다. 이들은 농교의 맹휴 당시 선언서를 작성하는 등 주도적으로 활동하였다.
이경채의 증언 기록인 「투쟁경력」을 보도록 하자.
“1928년 7월 동맹휴교 때 다수 희생자(구속, 퇴학 학생을 말함)와 재학생 독서회원들과 장기 계획을 모의하였다. 시위할 때 제1선 학생진용이 체포되면, 제2선 학생진용이 앞으로 나가고, 제2선 학생진용이 체포되면 제3선, 그리고 제4선이 항쟁을 계승하는 것으로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러한 계획이 있었기 때문에 이듬해 11월 3일 일어난 시위가 오랜 기간 지속되어 전국적인 시위로 확산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경채 사건으로 촉발된 맹휴가 단순 수업 거부가 아니라 ‘맹휴중앙본부’라는 식민 지배체제를 무너뜨리려는 만세 시위를 조직적으로 준비하는 조직체의 결성으로 이어졌고, 이 조직체가 1년 넘게 치밀하게 준비한 것이 이듬해 11월의 광주학생운동이었다. 곧 11월 3일 광주에서 폭발하여 전국으로 확산된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이경채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경채 사건이 갖는 역사적 의의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그 맹휴를 촉발한 인물이 정우채 등 성진회 회원들이었다.
6. 광주학생운동과 투옥
정우채는 1928년 6월 맹휴 주동자라고 하여 학교에서 퇴학당하고 고향 반남의 금융조합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수사에 나선 경찰이 학생운동의 배후에 성진회 조직이 있음을 밝혀냈다. 성진회 창립 구성원으로 독서회 조직 및 이경채 사건 때 맹휴를 주도한 일 등이 모두 드러났다. 성진회 창립회원들이 차례차례 체포되고 구속되었다. 노근후처럼 성진회원은 아니지만 교사로 부임한 후 독서회 활동을 후원한 현직 교사 등도 체포되었다.
정우채는 경찰의 수사망을 피하지 않고 금융조합에서 근무하다 1930년 1월 6일 반남 주재소 경찰에 체포되었다.4) 그리고 나주 경찰서에서 간단한 조사를 받은 후 광주 경찰로 이첩되어 조사받고 1930년 7월 17일 예심을 거쳐 공판에 넘겨졌다. 1930년 10월 27일 광주지방법원 형사부에서 징역 2년 미결구류 일수 60일 본형 산입형을 선고받았다. 이때까지 그는 광주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이후 정우채는 항소하였는데, 대구복심법원에서 1930년 12월 22일, 1931년 4월 6일 2차례에 걸쳐 구류가 갱신될 정도로 재판이 오래 걸렸다. 1931년 6월 13일 징역 1년 미결구류통산 365일이 확정되어 출감하였다. 체포된 지 1년 6월이 지나서였다.
다음은 그가 대구형무소에서 모친께 보낸 옥중 서신으로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에 진열되어 있다.
사랑하여 주시는 어마님 전상서
어마님 못된 자식으로 얼마나 OO 풍야에 심화로 지나십니까. 자식은 귀엽다더니 저와 같은 불효자는 귀엽지 않겠지요. 모든 저와 같이 잘하든 동무들은 부모에게 심화를 끼치지않는데.
아…. 어마님. 이 자식의 죌까요. 만일 저에게 죄가 있다면 어린 것이 죄였겠지요. 어렸을 때 일이니 ①어마님 동편 해가 뜰 때나, 그날 해가 서산을 질 때나 할마님, 어마님, 아바님, 사랑스런 동생과 하고 긴 한숨과 흰구름 솜구름 떠도는 고향있는 곳을 바라며 그날 그날의 하루를 복축합니다. 아 … 어마님 안심하세요.
만일 어마님 심화하여 사시면 나의 꿈자리가 사나울 것입니다. ②지난 양력 7월 초에도 문득 꿈에 어떠한 어린 유아가 품안에 품겨 보였어요. 그애는 계집애였어요, 그랬더니 이래 지난 주에 ○○에 오셔서 순산하였다고 하셨어요.
어마님 집안이 불안하면 저의 꿈자리가 사나울 것입니다. 저는 다행으로 꿈을 잘 꾸지 않아요. 입소 이후 1개 성상이 되었으나 별로 꿈을 꾸어 본적이 없어요, 이는 몸이 건강한 소치이겠지요. 어마님. 만일 어마님이 심화하였사시면 절 모르는 어린 동생이 어쩌하겠으나, 저도 집안 일은 생각도 않고 몸만 건강히 하려고 합니다. 방산 외숙모계서도 자주 오시는 지 알고자 합니다. 보초 고모님 어린 애까지 무고하시며 대소 재절 일만 하옵시는 할머님도 어찌 지내시는 지 알고 싶습니다. 다른 고모님들도 자주 모여 할머님 서운케 하지 않으신지요. 대구의 참 추위는 대단하였읍니다만, 아무 탈 없이 지나갔지요. 어마님 안심하셔요. 어마님 나의 생각에 가울어지지 않게 하셔요. ③그리고 나의 책 참으로 나의 동생같이 날마다 사랑하는 책 다른 곳으로 떨어지지 않게 잘 간수해주셔요. 아무 것도 불편하지 않습니다. 사회보다는 못하겠지만요.
일천구백삼일년 양. 일월 십오일 불효자
1931년 1월 15일 대구형무소에서 수감 중 작성된 옥중 서신을 통해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1930년 7월 딸을 얻는 태몽을 꾸었는데 이레가 지나 딸 순산 소식을 들었다는 내용이다.(②)
유혁의 부친 유흥인의 제적부에, 정우채는 흥인의 둘째딸 우희(又羲 집에서는 또희라 부름)와 혼인하였고, 1930년 2월 22일 정우채와 우희의 혼인신고가 이루어져 있다. 정우채가 1월 6일 체포되었기 때문에 2월 22일은 혼인 날짜가 아니라 혼인신고 날짜임이 분명하다. 적어도 두 사람의 혼인은 1930년 1월 6일 이전일 가능성이 크다. 1930년 7월 하순에 딸이 태어났다면 1929년 7, 8월경 혼인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니까 신혼 초에 정우채는 체포되었다고 보아야 하겠다.5)
정우채 부친 정순규와 유혁의 부친 유흥인은 정우채의 조부가 결성한 일종의 민족운동 결사체인 ‘금강시사’와 정순규, 유흥인 등이 결성한 ‘반암시사’ 회원으로 서로 잘 알고 있었다. 전통적인 유교사상을 지녔지만, 신문화 수용에도 적극적이었던 정순규는 사회변혁을 주도하다 투옥되어 있던 흥인의 아들 유혁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다. 꼿꼿한 성정을 지닌 유혁의 여동생 우희는 오빠를 평생 존경하였다고 한다. 특히 1928년 8월 광주형무소를 거쳐 서대문형무소에 장남 유혁이 수감되는 등 집안이 힘든 상황이었지만, 유흥인은 광주고보 맹휴를 이끌다 퇴학당한 정우채를 사위로 맞이하였다. 하지만 정우채는 혼인하자마자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다.
정우채가 옥중 태몽으로 만났던 딸은 태어나자 곧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제적등본에 딸의 흔적이 없다. 장남 찬준은 1932년에 태어났다. 장남에게 꿈 이야기를 했더니 태어나자마자 죽은 누이가 있었다는 얘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편지에 “어마님 동편 해가 뜰 때나, 그날 해가 서산을 질 때나 할마님, 어마님, 아바님, 사랑스런 동생과 하고 긴 한숨과 흰구름 솜구름 떠도는 고향있는 곳을 바라며 그날 그날의 하루를 복축합니다.(①)”라 하는 데서 가족을 한없이 그리워하는 안타까움을 서정적으로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그는, 감성이 풍부하여 적지 않은 시를 썼다.6)
다음 시는, 대구형무소에서 지은 추엽송(抽葉頌)이다. 추운 겨울에 냉방인 대구형무소의 참상과 망국의 설움을 죽음으로 항거하겠다는 결의를 다진 내용이다.7)
찬바람 시린 벽에 북풍은 몰아치고
애달프다 달빛만 철창에 걸렸구나
북악재 야윈 솔도 눈서리 견디거늘
소나무는 어인 일로 만고에 향기로 울고
7. 독립운동에 앞장선 정우채
정우채와 유혁은 거의 비슷한 시기 출옥하였다. 유혁은 출옥하자마자 영암 운동 세력의 구심점이 되어 농민운동 조직을 정비하여 유명한 영보농민운동을 이끌었다. 유혁의 영향을 받은 정우채는 전남노농협의회 재건위원회에서 활동하였다.
농민운동과 더불어 정우채는, 어린이 잡지 ‘아히생활’의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고향에서 ‘자미사(紫微社)’라는 모임을 만들어 문일평이 지은 ‘반만년사’와 일본잡지 ‘문예전선’ 등을 읽으며 민족의식을 고양시키다 6개월 가까이 나주경찰서 유치장에서 갇히기도 하였다. ‘자미사’는, 정우채의 생가 뒷산 이름 ‘자미산’에서 따 온 것이다. 마한왕국의 왕궁터라는 전승이 있는 자미산에서는 지금도 매년 10월 천신제를 올린다. 유치장에서 나온 정우채는, 향리에서 야학을 개설하여 문맹 퇴치 운동을 전개하였다.
항상 “어떤 이념이나 체제라 할지라도 사람의 목숨보다 우위에 있는 가치는 없다”라고 하여 생명 존중 사상을 으뜸으로 삼았던 그는, 해방 후 광주학생운동동지회를 중심으로 광주학생운동 정신 선양에 온 힘을 쏟았다. 광주학생독립운동 동지들이 공동 집필한 “타오르는 횃불”을 비롯하여 한국일보, 전남매일신문, 전남일보, 동아일보 등 언론에 광주학생운동의 역사적 경험을 증언하는 대담 및 글을 기고하였다.8) 그의 묘는 대전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있다.
(모친께 보낸 옥중 편지) |
(정우채가 지은 옥중시) |
1) 일본인 교장을 배척운동 한 것이 나주보통학교 재학 때였다는 의견도 있으나 후손이 펴낸 “금하 정우채 지사 略傳”에 따라 공산보통학교 때의 일로 정리한다.
2) 맹휴 주동자로 학교 당국이 최초로 징계할 때 퇴학 처분을 받은 27인 명단이다. “나봉현, 김부득, 정동화, 서두평, 이채래, 이종표, 유기화, 김영찬, 양병우, 김기수, 양병전, 허창두(이상 5학년), 고인석, 이대기, 김창주, 김시성, 최규창, 변진설, 김시철, 김재을, 최창진, 신도순(이상 4학년), 오쾌일, 정우채, 김병옥(이상 3학년). 박현규, 김시탁(이상 2학년)
3) 만착(瞞着) : 사람의 눈을 속여 넘김.
4) 동아일보 1930.1.11
5) 정우채의 장남은 부친의 혼인 날짜는 정확히 모른다고 하였다.
6) 목포 해안의 아침(호남평론2권 제9호), 나의 얼굴(호남평론2권 제11호), 병자년(호남평론 2권 제12호) 등의 시가 있다.
나의 얼굴
“나는 거울을 사랑한다./ 가버린 님이 주신 거울을/
슬플 때나 기쁠 때나/ 나의 얼굴을 그대로 비추어주므로
(하략)
7) 이 시는 함께 복역하던 나승규, 최규창, 문승수(광주농업학교 재학 중 성진회 결성 참여) 제의로 지었다고 한다.
8) 정우채는 1983년 건국훈장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정부로부터 받았다.
글쓴이 박해현
초당대 글로벌화학기계과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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