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국기가 휘날리는 국민학교 운동회와 새끼 돼지
1950~60년대 국민(초등)학교 운동회 날은 그 고을의 잔칫날이다.
6.25전쟁 후 사회가 불안하여 안정이 안 된 상태이기 때문에 경기 놀이문화는 커녕 모두 다 하루 삼 시세 끼 해결이 농촌에서는 가장 급선무이었던 시절이다.
그래서 도시 시골 모두다 국민학교 운동회 날은 즐거운 날이요, 그 날만은 동네어른들은 일손을 놓고 거동할 수 있는 자는 시골학교 운동회 구경을 일년 중 기다려지는 행사이다. 그래서 집안에는 식구들 간에 역할 분담을 하기도 한다. 한사람은 아침 일찍 학교에 가서 하루 점드락 햇빛이 비치지 않고 나무 그늘에서 구경할 수 있는 곳이나, 운동회 구경 시야가 가장 좋은 곳을 차지하여 가마니때기를 미리 깔아 놓고 식구들을 기다리는 역할이 가정마다 정해져 있었다.
시골에서는 양명일(설날과 추석) 빼고는 어린이들에게는 가장 기다려지는 날이다.
어린시절 가장 좋은 날은 그날 하루는 마음 푹 놓고 논밭에서 일하지 않고 쉴 수 있고 맛있는 떡과 과일 등을 먹어 볼 수 있으며 새 옷도 얻어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학교 운동장 하늘에는 처음 본 만국기가 펄럭이었고, 교육 재정이 어려운 시절이라 운동장에는 하얀 석회가루를 뿌릴 형편이 안 되어 새끼줄로 줄을 띠고 그 자리를 호미나 막대기로 학생들을 동원하여 소위 트랙을 그리고 팠다.
처음으로 보고 들어보는 마이크와 연결된 스피커 소리가 너무나 신비스러워서 어린 눈으로 아무리 살펴봐도 신기함은 풀리지 않았다. 나는 운동장에서 좀처럼 경기에 집중할 수 없어서, 마이크와 스피커가 있는 교장선생님이 계신 곳까지 옆걸음을 치면서 겨우 도착하여 살금살금 기어서 마이크가 있는 책상 아래까지 도착하는데 성공했다. 초등학생의 작은 키에 앉아 있으니 단상에 계신 어른선생님들 눈에는 보일 택이 없다. 그런데 눈에 띠는 검은 상자 주위에서 우리 집에서는 맡아 보지 못했던 냄새가 나고 그 검은 상자는 땀을 뻘뻘 흘려서인지 걸쭉한 액체가 흥건히 상자 아래 부분에 고여 있었다.
나는 우선 냄새가 하도 신기해서 코를 최대한 바짝 대고 맡아보니 역시 의문이 풀리지 아니하여 너무 가까이 밀착시킨 탓에 턱 끝에 그 액체가 묻어 쓰라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어 의문을 뒤로하고 턱의 이물질을 사정없이 비비면서 우리학급 응원석으로 돌아왔다.
지금 생각하니 검은 상자는 밧데리였고 걸쭉한 액체는 밧데리 액으로 살갗에 닿으면 상처를 입히는 유독성 화합물질인 황산이었다.
학생들의 유니폼은 남녀 똑같이 검정 빤츠(반바지)에 하얀 런닝구(러닝셔츠)였고, 그 검정 빤츠 양옆에는 하얀 줄 헝겊을 되박아 조금은 산뜻하고 역동적인 느낌을 주는 운동복이었다. 각 팀의 구분은 홍군과 백군 또는 홍군과 청군으로 구분하여 팀의 표시는 하찌마끼(머리띠)로 표시하여 남녀 다같이 머리에 띠를 두르는 것이 유일한 팀 표시였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홍군은 살며시 사라지고 청.백으로 바뀌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홍색은 공산주의를 상징하는 대표적 색깔이어서 청.백으로 교체되었다고 생각이 든다.
하찌마끼는 처음에는 안팎이 단일 색으로 만들어서 팀이 바뀌면 또 다른 색의 머리띠를 구입해야 했는데 그 후 조금 발달하여, 한쪽은 청색 다른 쪽은 백색으로 만들어 본인이 청팀에서 다른 백팀으로 바뀌었어도 바로 뒤집어 두르면 됐기에 조금은 편리했다. 전교생 단체경기를 할 때 어떤 친구는 경기 도중에 살짝 팀 머리띠를 바꾸고 아군으로 위장하여 적을 공격하는 얌체친구도 있었다.
경기 종목은 그 학급만의 독특한 청백 게임과 학급친구 끼리의 100m 경주와 학년에서 반대표 경주가 있었고, 상급학년(4.5.6학년) 중심의 매스게임으로는 오재미로 큰 종이 공 터치는 게임, 남학생중심의 탑 쌓기. 기마전. 줄다리기. 공굴리기 등이 있었다.
학부모 여자 경기로는 주로 바톤터치 게임이다. 출발 대기선에서 준비하시는 선생님은 어머니들에게 자기편 앞뒤 사람 얼굴을 잘 익혀 두었다가 꼭 그 사람에게 바톤을 주고받아야 된다고 몇 번이고 강조한다. 스타트를 알리는 화약총 소리가 ‘딱’하자 처음 들어본 총소리에 놀라 제자리에서 주춤하는 사람, 옆 사람 눈치는 보는 사람 등으로 운동장은 왁자지껄 해지기 시작한다. 그보다 더 웃기는 것은 달리면서 바톤 떨어뜨리기, 다른 팀에게 바톤 주기는 기본이고, 각자 뛰는 모습이 평소 걷는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목도리도마뱀모양 팔자거름을 하며 상체는 뒤로 젖히고 뛰기, 씨암탉 모습으로 무거운 엉덩이를 주체를 못하여 아장아장 뛰는 모습, 캥거루처럼 무거운 배를 손으로 받쳐 들고 연신 입을 벌려 헉헉거리면서 뛰는 모습들에 맞춰 운동장은 한바탕 웃음소리가 소나기처럼 몰려왔다 그치다를 반복한다.
게임은 친목을 도모하는 경기이므로 승패와 관계없이 모두다 참가 상품을 나누어 주었다. 상품으로는 농촌 가정에서 긴요하게 쓸 수 있는 통성냥 이나 빨래비누를 주어 경기 후 시상석에서 상품을 받고 운동장을 가로 질러 들어오는 아낙네들 입가에는 함박웃음 주체를 못하여 아직은 쨍쨍한 가을 햇빛에 하얀 이가 빛나고 있었다.
남자 학부형 경기로는 마라톤이었다. 경기코스는 지역 학부형들이 잘 알고 있는 적당 코스로 정한다. 내가 다녔던 금마국민(초등)학교의 경우는 얼마 전 백제역사유적지구 세계유산에 등재된 국보 289호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이 지정 코스였다. 우승자에게는 농촌에서 가장 유일한 농기구인 삽을 대상(大賞)으로 하고 그 외 참가자에게도 그 당시로는 푸짐한 상품이 주어졌다. 참가자 남자들의 복장은 대부분 시골에서 농사 짓는 농부들이어서 격에 맞는 운동복이 아닌 한복을 입고 고무신을 신고, 삽 한 자루 탈 욕심으로 참가하니 그 모습은 요즈음으로 상상하면 사극에 나오는 엑스트라의 무리로 그려진다. 결승선에 들어오는 사람 중에는 한손으로는 고무신짝을 다른 손으로는 자꾸 아래로 처지는 한복 바지가랑이를 움켜잡고 뛰어 들어오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옛날의 운동회 날은 10월에 주로 했는데 한글날이나 개천절에 행사를 하여 수업의 결손을 막고 지역 주민이 쉬는 공휴일로 정하여 많이 참석하도록 한 일련의 방법으로 생각되어 진다.
세월은 흘러 고등학교 시절에도 초등학교 운동회 행사는 큰 틀에서 벗어나지 않고 그 모양 그대로 지속되었다. 어느 해 인가 그때 운동회도 개천절로 기억이 된다.
그 날이 공휴일이어서 나는 집에 있었다. 우리 집에서는 가정경제의 부가가치 창출을 아버지는 돼지를 기르고 새끼를 내어 토실토실하게 키워 시장에서 파는 수입원이 큰 몫을 차지했고, 당연하게 아버지는 상당히 전문가셨다.
돼지우리 바닥은 시멘트로 시공을 해야만 돼지의 천연 습성인 주둥이로 땅을 파헤치는 것을 방지할 수 있으며 돼지우리 청결을 위해 청소하는데 최적이다.
돼지우리막은 가랫장에 어른 팔뚝 정도 굵기의 통나무를 어미돼지가 빠져나올 수 없을 정도로 대못으로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단단히 박아 둔다.(이렇게 해야 힘센 돼지가 밀고 나오려 해도 대못의 방향과 돼지가 미는 힘의 방향이 같아서 통나무는 끄덕 없다.) 이렇게 돼지우리를 만들어 놓아야 통풍이 잘되어서 돼지우리는 언제나 뽀송뽀송하고 열이 많은 어미 돼지에게 선선해서 좋다. 또 어미돼지가 새끼를 낳으면 새끼돼지들은 헐렁한 돼지우리의 통나무 사이로 들랑날랑하는 유일한 출입구이다.
이때 어미돼지는 새끼돼지들을 일일이 냄새를 맡아서 자기 새끼가 아니면 바로 물어 죽이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래서 새끼돼지가 가축병원을 갔다 오거나 영양상태가 부실한 경우에는 따로 격리를 시켜 죽을 쑤어서 먹이는데 어느 경우이던 잠깐이라도 어미 곁을 떠나서 다시 우리에 넣을 때는 어미의 오줌을 새끼 몸에다 듬뿍 발라서 넣어줘야 어미가 자기새끼로 인식하여 아무 탈이 없다.
그 해에도 돼지 새끼는 여덟. 아홉 마리로 기억 된다. 아버지는 동생들 운동회 구경을 가시면서 오늘 집에서 돼지 새끼 감시를 잘하라고 몇 번이고 당부하시고 학교로 가셨다.
나는 “예”하고 돼지우리를 대충 훑어보니 어미돼지는 누워있고 새끼들은 이열 횡대로 엎어져서 어미젖에 매달려 열심히 빨고 있고 숫자도 얼핏 보아 맞는 것 같다. 나는 안심하고 햇살은 따갑고 그늘은 시원해서 문턱을 베개 삼아 잠을 청하니 금방 꿈속으로 들었다. 한참 낮잠을 곤히 자는데 별안간 돼지 새끼 우는 소리에 잠이 깨어 벌떡 일어나서 돼지새끼를 세어보니 세 마리가 없어졌다. 정신이 번쩍 들어 평소 잘 드나들었던 앞뒷밭을 찾아보기로 했다. 우선 앞밭의 수수밭으로 갔다. 세수 대야를 방망이로 쎄게 치면 그 소리에 놀라서 새끼들이 수수밭 밖으로 나오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세수 대야가 깨지도록 쳐도 돼지 새끼는 보이지 않았다. 혹시 세수 대야 소리에 돼지 새끼들이 놀라서 야생의 본능처럼 수수밭 덤불 사이에 머리를 쳐 박고 있을 것 같아 세수 대야는 치지 않고 수수밭 고랑에 앉아서 돼지새끼 움직이는 소리를 탐지하기로 했다. 아무리 기다려도 돼지새끼소리는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고 어느 불쌍한 오누이의 전설이 우리를 슬프게 하는 수수밭 전체가 붉은 호랑이피로 얼룩진 수숫잎들의 흐느끼는 소리만 들릴 뿐이다.
혹시 이웃집 다른 어미돼지 한테 갔을까 확인하려고 이웃집을 담장 사이로 가보니 돼지새끼는 보이지 않고 가끔 꿀꿀대는 새끼 돼지 소리만 들린다.
나는 그 집 꼬마이름을 부르면서 우리집 돼지새끼 혹시 갔는냐고 외쳐 봐도 아무런 인기척이 없어서 대문 쪽으로 가서 확인 하려는 순간에 누가 안에서 돼지새끼가 오긴 왔다는 대답이었으나 그 쪽도 지금 한참 달콤한 낮잠을 즐기는데 왜 깨웠냐는 식의 볼멘소리였다.
나는 미안해서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돌아 서려는데, 때는 오후 서너 시쯤이어서 토담 벌어진 틈에 햇빛이 사람의 눈과 그리고 머리카락이 동시에 클로즈업되어 보였다.
가을바람은 그 사람의 머리카락을 살랑살랑 부채질하였고, 눈은 햇빛의 입사각을 바로 반사각으로 내 눈에 그대로 쏘아 순간 나는 멍하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나는 상대방이 그 집 여고생 딸이라는 직감이 되었고, 담 벽 안쪽의 사람도 내가 남학생이라는 것을 사전에 감지한 것 같아서 쉽게 말하지 못하고 얼버무린 답을 보낸 것으로 판단된다.
어스름할 때 아버지는 그 집에 가셔서 돼지 새끼는 모두 가져 오셨지만, 지금도 가을 하늘에 만국기가 펄럭이는 초등학교 운동회를 보면 토담 사이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수수밭의 붉은 호랑이 피처럼 지워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