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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파랑 길은 해피한 길(네 번째)
<구룡포→월포해변, 2017. 5. 27∼28>
瓦也 정유순
해파랑 길 네 번째 출발점인 구룡포읍 장길리는 동쪽바다를 끼고 있는 해안지역으로 수산업이 주업이다. 원래 마을이름은 ‘장구의 목’처럼 생겨서 장구목마을이었는데, 북쪽의 생길리와 합쳐지면서 두 마을의 이름을 따서 장길리가 되었다고 한다. 방파제 안으로 해상펜션이 있어 휴식을 취하면서 낚시를 즐길 수 있는 시설이 있고, 성화대 같은 등대가 바다 쪽으로 경계를 이룬다. 장길리낚시공원을 벗어나 하정리해안으로 넘어가는 길은 우거진 풀 섶을 해치며 나간다.
<장길리 낚시공원>
<수상펜션>
하정마을 해변에도 파도에 밀려온 해초들이 가득한데 해안의 물가에서는 사람들이 막대기에 갈고리를 달아서 우뭇가사리를 열심히 찍어낸다. 지금이 제철이라고 한다. 우뭇가사리는 한천의 원료로 쓰이는데 젤리나 양갱 등에 이용되고 있으며, 식이섬유소가 풍부하고 저칼로리 웰빙식품으로 각광받고 있다. 참고로 지난번 울산 쪽에서는 장대갈고리로 미역을 채취하는 광경을 보았다.
<하정마을 해변>
<우뭇가사리>
장밋빛 붉게 물든 언덕을 지나 솔밭 길을 지나면 멀리 구룡포항이 보인다. 구룡포는 아홉 마리의 용이 승천한 곳이라 하여 이름이 붙여졌다. 1923년 일제가 구룡포항을 만들고 동해 어업을 점령한 침탈현장으로, 지금도 각종 어획물들이 모이는 곳이다. 그 중에서도 문어와 겨울이면 별미로 각광 받는 과메기는 구룡포를 더 찾게 하는 요인인지도 모른다.
<장미>
<구룡포항 원경>
<구룡포 전통시장>
구룡포전통시장에서 시장 구경 좀 하다가 우측 골목으로 나가면 가까운 거리에 구룡포 일본인가옥거리가 있다. 동쪽의 끝이라 일본이 가까워서 그랬는지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사람들이 많이 건너와 거리를 형성하고 살았던 곳이다. 일본식 이층집이 근대화의 유물로 지정된 곳에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며 일본식 의상을 빌려 입고 왜식 체험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선다. 보존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무엇을 보여주고 알려야 할 것인가는 문화적 역사적으로 분명하게 구분해 볼 필요가 있다.
<일본인 가옥거리>
<기모노 여인>
<근대화유물로 지정된 가옥>
또 일본인가옥거리 중간에는 구룡포공원이 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청년들이 왜색(倭色)을 없애기 위해 구룡포공원에 있던 일본인 송덕비와 신사(神社)를 철거하였고, 공원 입구 계단 옆에는 구룡포항을 조성할 때 기여한 왜인(倭人)들의 이름이 새겨진 120개의 돌기둥을 시멘트로 덮어버렸는데, 일본인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이름들을 다시 복원했다고 한다. 우리에게는 수치심이 가득한 침탈의 역사가 이곳을 찾는 일본인에게는 자긍심을 불어넣는 번영의 역사로 비칠 것 같다.
<구령포공원 계단>
구룡포 주상절리는 용암이 분출하다 그대로 멈춰버린 형태인데, 파도는 거품으로 묻어 버린다. 모진 겨울을 이겨낸 인동덩굴은 꽃이 필 때는 흰색이었다가 수분(受粉)이 되면 노란색으로 변한다고 하여 금은화(金銀花)라고 하는데 해안가를 수놓는다. 바다의 안녕을 비는 해신당(海神堂)도 밀려오는 파도를 어쩌지 못한다. 바위의 소나무는 아예 파도에 눌렸는지 바위에 누워버렸다. 바닷가는 피서객들이 모여들고 바다 멀리 석유를 캐내려는지 시추탑(試錐塔)이 움직인다. 한반도의 동쪽 끝 석병리 다무포에서 바삐 오전을 마감한다.
<인동덩쿨-금은화>
<해신당>
<바위에 누운 소나무>
<시추선>
다무포고래마을에서 해안 데크 길을 따라 강사리해안을 지나 대보리해안에 다다르자 호미곶등대가 있는 호미곶해맞이광장이 보인다. 금규(錦葵)라고도 불리는 당아욱이 붉은 낮별이 되어 반갑게 맞이한다. 파도는 잦아들지 않고 바위에 부딪히는 너울은 키를 더 높인다. 대보항은 국가어항으로 가자미와 문어가 많이 잡힌다고 한다.
<대보해안>
<당아욱>
<너울파도>
해안 길을 따라 다다른 곳은 21세기를 맞이하는 2000년도에 설치해 놓은 조형물 상생의 손이 한 개는 바다에서, 또 한 개는 육지에서 서로 마주보는 형태로 서있다. 해맞이광장에 우뚝한 호미곶등대는 높이 26.4m, 둘레는 아래 부분이 24m, 윗부분이 17m로 전국 최대 규모이다. 프랑스인이 설계하고 중국인이 시공하여 1908년 11월에 준공되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동외곶등대였다가 장기곶등대를 거쳐 2002년도에 호미곶등대로 되었고, 옆에는 1985년에 처음 문을 연 등대박물관이 함께 하고 있다.
<상생의 손>
<호미곶등대(우)와 국립등대박물관(좌)-네이버캡쳐>
해맞이광장에는 바다 위로 연결다리를 만들어 놓았고, 다리 끝에는 스카이워크를 만들어 놓았다. 들어가는 중간에는 이곳의 특산물 문어상이 있고, 입구에는 우리나라 영해(領海)를 표시할 때 기점으로 표시하는 ‘영해기준점’도 설치해 놓았다. 그리고 호미곶을 중심으로 춘분 하지 추분 동지에 해가 뜨는 방향을 표시한 지도가 동판으로 바닥에 표시되어 있다.
<문어상>
<영해기준점>
<계절별 해뜨는 방향>
호미곶의 유래는 조선의 풍수지리학자 남사고(南師古, 1509∼1571)가 쓴 동해산수비록(東海山水秘錄)에서 조선반도는 호랑이가 앞발을 들어 중국대륙을 향해 포효하는 형상으로 백두산은 코, 이곳을 꼬리에 해당한다고 묘사했다. 그러나 일제는 우리 민족정기를 말살하려는 일환으로 토끼꼬리로 비유했다. 그동안 장기곶(長鬐串) 등으로 불리다가 2001년 12월에 정식으로 호미곶(虎尾串)이 되었다.
<호랑이상>
호랑이꼬리의 정점을 돌아 안쪽해안으로 들어선 초입에는 독수리바위가 부리를 벌린 채 바다를 지킨다. 독수리바위는 오랜 세월동안 풍화작용으로 조각된 바위의 형상이 독수리부리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석양의 노을이 일품이란다. 과거에 이 지역은 풍파가 심하면 청어가 때로 밀려 나와 갈고리로 끌어들였다는 곳이다. 그래서 이곳 방언으로 까꾸리계(鉤浦溪, 구포계)라고 부른다.
<독수리바위>
그러나 영일만이 한 눈에 보이는 절경의 언덕에 청·일 전쟁과 노·일 전쟁을 승리를 거둔 일본이 조선의 침탈을 본격화 한 1907년 9월 조선의 어족자원을 조사하여 수탈 자료 수집 목적으로 온 일본수산강습소 소속 실습선인 ‘쾌응환호(快應丸號)가 좌초되어 3명이 조난(遭難)을 당하는 사고가 발생하자 일본의 강요로 세워진 기념비紀念碑)가 지금까지 이곳의 주인처럼 우뚝 세워져 있는 이유에 대해서는 좀처럼 이해하기 어렵다.
<쾌응환호조난기념비>
호미곶면 구만리를 지나 발산리로 오는 동안 해는 서산으로 더 기울고 포스코의 포항제철소가 점점 더 가까워진다. 포항제철소는 1968년 포항제철(주)이 설립되면서 영일만을 매립해 대일청구권자금으로 중화학공업인 포항제철소가 1970년부터 1981년까지 세워지면서 1차 산업인 농업중심과 경공업의 경제구조에서 철강과 자동차산업 등 중화학공업의 구조로 전환하는 계기가 이루어졌다.
<백년초 꽃>
<접시꽃>
<포항제철소 전경>
설립 당시에는 정부투자기관이었으나, 1981년에는 정부출자기관으로 되었으며, 1998년 조강생산 기준으로 세계 1위의 철강회사로 발돋움 하였다. 그리고 2000년 10월에 완전 민영화가 되었으며 2002년 3월에는 포항제철(주)가 (주)포스코로 이름을 바꾸었고 지금은 명실상부한 국민기업으로 성장하였고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회사의 독립성은 의문이다.
<포항제철소 야경>
아침부터 몰아치기 시작한 너울파도가 기세 등등 하게 바람을 몰고 오지만, 길을 걷는 나그네에게는 그저 시원한 미풍이다. 곳곳에 아직도 청산되지 못한 일제강점기의 잔재(殘滓)를 빨리 청산하라고 파도는 거세게 몰아치는데 아무도 못 알아듣는 것 같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파도야 어쩌란 말이냐/임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파도야 어쩌란 말이냐/날 어쩌란 말이냐” 청마 유치환의 시 <그리움>이 여기에서는 이상하게 각색이 된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일제 잔재는/뭍같이 까딱 않는데…/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너울파도>
<너울파도>
청마는 통영의 어느 여인을 짝사랑하며 2십년 간 5천여 통의 답장이 없는 연서를 보냈다. 그 여인은 “뭍처럼 까딱 않는데” 청상의 여인과 기혼자인 청마는 유교적 가풍에 얽매어 더 이상 어쩌지 못하고 “사랑하는 것은/사랑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행복>이라는 글로 마음을 달랬고, 끝내는 교통사고로 숨을 거둔다, 그러자 그 여인 이영도는 “너는 저만치 가고/나는 여기 섰는데…/손 한번 흔들지 못하고/들어선 하늘과 땅/애모(愛慕)는 사리(舍利)로 맺혀/푸른 돌로 굳어라” <탑(塔)>이라는 시로 애절한 마음을 남겼다.
<하얀 해당화>
어제 저녁 포항죽도시장에서 싱싱한 생선으로 반주를 하고 다시 여정을 시작하기 위해 영일대(迎日臺)해수욕장으로 나간다. 1975년 북부해수욕장으로 개장하였으나 2013년 6월 국토지리정보원 국가지명위원회에서 영일대해수욕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백사장 길이 1,750m, 폭 40∼70m로 동해안에서 제일 큰 해수욕장이다. 포항 도심권에 위치하여 이용하기가 편리하다.
<영일대해수욕장의 아침>
이른 아침부터 수상제트스키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물살을 가른다. 백사장에는 어젯밤 폭죽놀이를 한 흔적들이 음식물쓰레기와 함께 주변을 어지럽힌다. 백사장에서 데크를 따라 약100m쯤 걸어가면 대한민국의 최초 해상누각인 영일대(迎日臺)가 있다. 이 누각에 올라서면 야경이 아름다웠던 포항제철소가 가까이 보인다.
<영일교>
<영일대>
<수상제트스키>
영일대해수욕장을 벗어나면 흥해읍 칠포해수욕장이 나온다. 하루에 약1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다는 백사장은 왕모래가 많이 섞여 있으며 주변 갯바위에서는 낚시도 가능하다고 한다. 경상북도가 칠포 유원지를 조성하여 호텔, 노래방, 편의점, 샤워장, 주차장, 공공화장실 등의 각종 편의시설을 완공해 놓았다. 칠포해수욕장에서 해당화가 핀 고갯길을 넘으면 칠포리마을이 있는 칠포해안이 또 나온다.
<칠포해수욕장>
해안 남단에는 소나무가 바위 위에 핀 꽃처럼 독야청청(獨也靑靑)하다. 흥해(興海)는 “항상 바다와 함께 흥한다”는 뜻이고, 칠포(七浦)는 수군만호전이 있던 곳으로 1870년(고종8년) 동래로 옮겨 가기 전까지 군사 요새로서 7개의 포대가 있는 성이라 하여 칠포성(七砲城)이라 불렀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칠포(漆浦)라고도 하는데, 옻나무가 많아서 라고도 하고 또는 해안의 바위와 바다색이 옻칠을 한 듯 검어서 연유한다고도 한다.
<칠포리마을과 해변>
<소나무바위>
마을을 가로지르는 칠포천을 건너 사다리 같은 계단을 오르면 해오름전망대가 나온다. 해오름은 포항-울산 고속도로가 완전 개통한 것을 계기로 포항·울산·경주 3개 도시가 함께하는 동맹의 이름이다. 이 세 도시는 모두 한반도에서 해가 가장 먼저 뜨는 지역이면서 대한민국에 산업화를 일으킨 <산업의 해오름>지역이라는 점과 대한민국 경제 재도약의 <해오름>이 되겠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해오름전망대 전경>
<해오름전망대>
해오름전망대 아래에는 촛농이 녹아 쌓여 이루어진 것 같은 바위가 바다에 발목을 담근 길을 따라 가면 흥해읍 오도리(烏島里)가 나온다. 오도리는 1914년 한가심이, 검댕이, 섬목과 같은 자연마을을 합하여 오도(烏島)라 칭하였다. 오도(烏島)는 원래 부둣가에서 100m 거리에 위치하며 3개의 커다랗고 질펀한 검정색 바위로 되어있는 바위섬인데, 마을이름은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한 가지 안쓰러운 것은 아직도 일제의 잔재인 부락(部落)이라는 용어를 안내판에 버젓이 쓰고 있는데 ‘마을’로 고쳤으면 한다.
<촛농(?)바위>
<오도리와 칠포리 경계해변>
오도리 해변을 지나 펜션이 있는 언덕을 넘는다. 누렇게 익은 보리밭 건너에는 로마의 원형경기장인 콜로세움(Colosseum) 같은 건물이 눈길을 끈다. 지나면서 살펴보니 <인 스튜디오 촬영셋트장>이다. 오솔길을 따라 고개를 넘으면 또 다른 오도리 해안이다. 해당화 향기가 코끝을 스치고 어느 어촌과 다름없는 오도리 해변은 풍어를 기원한다.
<인 스튜디오 촬영셋트장>
오도리를 지나 청하면 청진리에 다다르니 어제부터 걸은 해변 대부분에는 화려하게 만발한 송엽국이 자태를 뽐냈는데 유독 이곳에서 눈에 들어온다. 휘황찬란한 꽃 색으로 발길이 멈춰지기도 한 송엽국(松葉菊)은 아프리카 케이프타운이 원산지로 우리나라에 언제 들어 왔는지는 모른다. 꽃잎이 솔잎처럼 날카롭고 꽃모양이 국화와 비슷하다고 송엽국이라고 부르는 모양인데, 속명은 ‘람프란서스’라고 한다.
<송엽국>
청진1리 방파제 부근에는 연인바위가 있다. “선사시대 때 이 지역 부족장의 딸 해수기는 다른 부족과 오랜 전쟁에 패하여 여기 대곶이 해변으로 도망 오다가 추격군의 머리에 화살에 맞아 중상을 입는다. 이 광경을 본 마을 청년 무돌은 추격군을 물리치고 해수기를 구하였지만, 다시 보낸 추격군의 포위에 100일 동안 저항하다 죽으면서 그 애틋한 마음으로 서로 입 맞추며 꼭 껴안은 채 바위로 굳어 연인의 영원한 사랑을 이루었다”는 전설바위이다.
<연인바위>
흰색 붉은색 접시꽃이 핀 해안의 언덕을 지나면 청하면 이가리 해변이다. 해변에는 벌써 피서 나온 사람들로 붐빈다. 숲에 둘러 싸여 아늑한 해변에는 텐트가 들어섰고, 엄마 따라 나온 어린이들은 자연 속에서 몸과 마음이 여물어 간다. 바다에 솟은 붉은색 바위는 어깨에 소나무를 심었다. 이가리해변을 지나면 월포해수욕장이 나온다.
<이가리해변>
<접시꽃>
<붉은바위>
<물놀이 하는 어린이들>
월파해수욕장은 물이 맑고 수심이 얕으며 주변에 민박이 가능하다. “난류와 한류가 교차하는 곳으로 동물성 플랑크톤이 많아 꽁치와 놀래미가 많이 잡히던 곳이었는데, 몇 년 전부터 놀래미와 꽁치의 수가 많이 줄어들어 요즘은 보기 힘들다”고 낚시하던 주민이 말한다. 방파제와 갯바위에는 낚시꾼들이 많이 몰려 있는 모습이 보인다. 새벽에는 일출이 장관이고 금방 잡아온 횟감과 해수욕을 하면서 조개를 잡을 수 있어 가족단위로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월포해수욕장>
<월포해수욕장 맨발 걷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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