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체육1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제26회 이길용 체육기자상을 받았다. 국내 유일한 발롱도르(Ballon d'or) 선정위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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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원석의 삼위일체]배드민턴② '셔틀콕의 황제' 박주봉을 말한다
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550&aid=0000000007

<'셔틀콕의 황제' 박주봉이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을 앞두고 출전한 대회에서 경기하는 장면. 사진=연합뉴스>
한국 배드민턴은 그동안 세계 정상급의 경쟁력을 발휘하면서 수많은 스타를 배출했다. 그 가운데 단 한명의 레전드를 뽑자면 아마도 박주봉(53.현 일본 배드민턴 국가대표팀 감독)을 첫 손에 꼽는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보기 힘들듯 하다. 그는 한국 배드민턴이 진정한 세계 열강의 대열에 들어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개인적으로도 오랜 기간 최정상의 자리를 지켰다. 적어도 배드민턴이라는 종목에서는 '한국의 박주봉'이 아니라 '세계의 박주봉'이었다. '셔틀콕의 황제'라는 그의 별명은 과찬이 아니라 사실 그 자체였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을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한 뒤 그해 국제 배드민턴계의 최고 영예로 꼽히는 '허버트 스칠 상'을 수상한 것이나 2001년 세계배드민턴연맹(BWF)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것은 선수로서 그가 얼마나 영예로운 위치에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지도자의 길에 들어선 뒤 영국 말레이시아 일본 대표팀을 두루 거친 그가, 그토록 자부심을 가졌던 태극마크를 단 후배를 가르칠 기회를 얻지 못한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었다(2004년 아테네 올림픽을 앞두고 몇달간 단기간 대표팀내 복식코치를 했던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이때는 정식 대표팀 코칭스태프가 아니라 일종의 대표팀 집중훈련을 위한 인스트럭터였다고 보는 것이 맞다).
배드민턴 레전드 박주봉의 이야기는 두편으로 나눠서 진행된다. 첫 편은 배드민턴을 사랑했던 부친의 영향을 받은 '전주 꼬마'가 전세계를 호령하는 '셔틀콕의 황제'로 은퇴하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본다. 다음 주에 포스팅될 두번째 이야기는 '지도자 박주봉'을 다룬다. 지난 해 리우 올림픽에서 '노 골드'에 그친 한국을 제치고 박주봉 감독은 일본에 사상 첫 올림픽 금메달을 안겨주면서 극적인 대비를 이뤘다. 이제 2020 도쿄 올림픽에서 일본 배드민턴을 이끄는 박주봉 감독과 우리 태극전사들이 운명적인 마지막 맞대결을 준비하고 있다. 후편은 그런 이야기를 그리게 될 것이다.
이 글을 쓰기 위해서 박주봉 감독과 두차례 전화 인터뷰를 가졌다. 한번은 부친의 사십구재를 위해서 일시 귀국했던 한국에서 진행됐고(박주봉의 배드민턴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줬던 부친 박명수 선생은 지난 2월 2일 세상을 떠났다) 또 한번은 박 감독이 일본으로 돌아간 뒤 국제전화로 이뤄졌다.

◇헌신적인 아버지, 위대한 아들을 만들다
박주봉의 배드민턴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이는 그의 부친이었다. 이것은 운명이었다. 고교시절 연식정구 선수로 활동했던 아버지에게서 뛰어난 신체조건과 운동신경을 박주봉은 물려받았다. 부친 박명수 선생은 자신이 재직중인 전주 풍남초등학교에서 배드민턴부를 창설해서 지도를 맡았다. 박주봉은 1971년 이 학교에 입학하면서 배드민턴과 본격적인 인연을 맺는다. 박주봉의 배드민턴 인생내내 부친은 그에게 아버지이면서 스승이었고, 친구였으며, 동반자였고, 매니저였으며, 영원한 후원자였다. 당시만 해도 배드민턴은 그리 대중적인 운동이 아니었지만 박주봉은 아버지가 강당에서 선배들을 지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라켓과 친숙해지게 됐다. 타고난 재능이 있었으니 이미 형들과 경기를 해도 능히 이길 수 있었다. 5학년때인 1975년 부산에서 열린 전국소년체전에서 전라북도 대표로 출전해 단체전 우승을 차지했다. '셔틀콕의 황제'는 이렇게 서서히 그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박주봉에게 과연 부친은 어떤 존재였는지를 물었다.
"배드민턴 선수로 대성하기까지 입문부터 내 모든 것을 보살펴 주셨다. 어린 시절 처음 라켓을 잡은 것도 아버님의 영향이었고 선수로 성장하면서 마음가짐, 훈련에 임하는 태도 등 이런 세세한 것들을 다 아버님의 영향을 받았다. 초중고 시절은 물론이고 대학이나 실업선수로 뛸 때에도 아버님은 내가 출전하는 국내대회를 따라다니면서 보살펴주셨다. 아마도 야구에서 최동원이나 선동렬 선수들의 부친이 그런 역할을 했다고 들었는데 나에게도 아버님은 스승이자 매니저였던 셈이다. 내가 마음을 다스리지 못할 때에는 따끔하게 야단도 치셨다. 내가 고교시절 일본에서 우승을 했을 때를 계기로 '배드민턴 매거진'이라는 일본 잡지사가 매달 아버님의 전주 집으로 책을 보내줬다. 그게 아버님이 돌아가신 이후에도 지금껏 계속되고 있다. 일어에 능하셨던 아버님은 그 잡지에 나오는 내 기사는 물론이고 배드민턴의 최신 전술이나 흐름에 대한 기사들도 일일이 번역해서 나에게 주셨다. 내가 일본 대표팀 감독을 맡은 이후에는 그 잡지에 내 관련 기사가 나오는 횟수가 많아질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도 다 일일이 번역하시는 것을 말년의 낙으로 삼으셨다."
박주봉을 한체대로 직접 스카우트했던 박기현 대한배드민턴협회 회장은 박명수 선생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1982년 내가 조교로 있을 때 주봉이를 스카우트하기 위해서 두달 사이에 전주를 7~8번을 왔다갔다 했다. 주봉이가 6남매중 막내였는데 부친이 막내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다. 장학사였던 부친이 운동도 하면서 공부도 시키기 위해서 한체대 입학을 강력하게 원하셨다. 전북 연고인 원광대가 배드민턴을 하는데 그리로 안가고 서울에 보낸다고 해서 (지역)교육감에게 혼도 나셨다고 했다. 막내의 진학 문제때문에 가슴 속에 사표를 두고 다니셨다고 한다. 부친의 의지가 없었다면 한체대에 오기 힘들었을 거다. 주봉이가 훌륭한 부친 아래서 가정교육을 잘 받아서 인성이 좋다. 기량도 기량이지만 지금까지 그렇게 인성이 좋고 자기 몸관리를 철저하게 하는 선수를 본 적이 없다."
박주봉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지만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잠시 고민에 빠진다. 배드민턴이 워낙 비인기종목이다보니 테니스로 종목을 바꿀 것을 심각하게 고려하게 됐다.
"배드민턴 선수로 정식 등록해 활동한 것은 초등학교 3학년때부터였다. 하지만 이미 초등학교를 들어가기 전부터 라켓을 잡기는 했다. 배드민턴을 좋아하셨던 아버님의 영향이었다. 당시 학교의 주번 형들이 (교사인)아버님 점심 도시락을 가지려 집으로 왔다. 그러면 내가 주번 형을 따라서 학교로 가서 같이 배드민턴을 치곤했다. 내가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 머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 당시만 해도 배드민턴은 그리 대중적인 운동도 아니었고 올림픽 종목도 아니었다. 그래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더 인기가 높은)테니스로 바꿀까 고민을 하기도 했다. 이런 결정을 어린 나 혼자 할 수는 없었고, 아버님이 최종적인 결론을 내렸다. 결과적으로는 배드민턴을 계속하기를 잘한 것같다."

<박주봉의 부친 박명수 선생(왼쪽)이 1991년 제29회 대한민국체육상 경기부문 상을 아들을 대신해 받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박주봉은 배드민턴 지정학교인 전주 서중학교에 특기생으로 진학했고 이후 전주농고에 입학해 배드민턴 선수의 길을 계속 가게 됐다. 고교 시절부터 그는 슬슬 '사고'를 치게 된다. 1학년때인 1980년 4월 대구에서 열린 전국종별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고교 1학년이 선배들을 제치고 우승을 차지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이어 한일 고교 교환경기에 출전해 일본 고교랭킹 1위인 3학년생과의 맞대결에서 승리해 큰 화제가 됐다(이때부터 일본 배드민턴 잡지사가 박주봉의 전주 집으로 책을 보냈던 것이다). 이런 눈부신 성과에 힘입어 고교 1학년으로는 유일하게 대표팀에 선발돼 태릉선수촌에 처음 들어가게 됐다.
"고등학교 다닐 때는 나가는 대회에서 일등을 하는 것만이 목표였다. 하지만 대표선수로 발탁된 뒤로는 더 큰 꿈을 가지게 된 것같다. 당시만 해도 배드민턴에 대한 여건이나 지원이 상당히 열악했다. 선배 선수들은 국제대회에 출전할 기회조차 없었다. 국제대회에 나가지 못하다보니 우리 수준이 세계와 비교해 어느 정도 되는지 알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1980년대 초반만 해도 한국 배드민턴은 '우물안 개구리'나 마찬가지였다. 박주봉은 한국 배드민턴이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는 '터닝 포인트'를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고교 3학년이 된 1982년 그는 선배 이은구와 짝을 이뤄 덴마크오픈에 출전하게 된다. 한국 남자배드민턴의 첫 국제대회 출전이었다. 이 대회에서 박주봉-이은구 조는 예상을 깨고 깜짝 우승을 차지하는 대이변을 연출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이듬 해 뉴델리에서 열린 아시안게임에서도 박주봉은 복식과 단체전에서 각각 동메달을 따내면서 한국 배드민턴은 서서히 세계를 향한 비상을 시작한다.
"1981년이 되서야 처음으로 황선애 선배가 전영오픈에서 우승을 차지하면서 한국 배드민턴이 세계에도 어느 정도 통할 수 있구나 하는 가능성을 알게 됐다(황선애의 개인 단식 우승은 한국 배드민턴의 첫 주요 국제대회 우승으로 기록된다). 그 덕분에 이듬해인 1982년에 이은구 선배와 내가 남자선수로는 처음으로 국제대회에 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배드민턴협회에서 여자 선수들이 보여준 가능성을 보고 남자들도 테스트를 하기 위해 국제 대회 파견을 결정한 것이다. 우리는 첫 대회였던 스웨덴 오픈에서 8강, 두번째 대회인 덴마크 오픈에서 우승, 마지막 전영오픈에서 3등을 차지하는 성과를 거뒀다. 남자 선수들도 충분히 국제 경쟁력이 있음을 확인하는 소중한 계기가 됐다."
◇본격적인 전설의 시작 그리고 바르셀로나의 영광
박주봉과 첫 국제대회 우승을 일군 복식 파트너 이은구는 6년 선배였다. 그래서 좀 더 효율적인 파트너십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왔고 1983년부터 1년 선배인 김문수(현 성남시청 감독)와 새롭게 복식조를 구성하게 됐다. 박주봉-김문수의 복식조합은 환상적인 시너지 효과를 내면서 이후 10년간 파트너를 유지하게 됐고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을 포함해 수많은 금자탑을 쌓게 된다.
"나는 고교 1학년때 대표팀에 뽑혔는데 김문수 선배는 대학교 2학년때쯤 발탁됐으니 대표팀 입문은 내가 조금 빠른 편이었다. 1983년에 이은구 선배가 은퇴하면서 내 복식파트너를 찾는 것이 중요한 이슈가 됐다. (1년 위였던)성한국 선배(전 국가대표팀 감독) 김문수 선배와 번갈아 가면서 대회에 출전하게 됐다. 성 선배와 나선 말레이시아오픈에서는 준우승을 했고 김문수 선배랑 나간 월드컵 대회에서는 우승을 차지했다. 결국 이 대회를 계기로 김 선배와 복식조를 구성하게 됐고 이후 10년간 인연이 이어졌다. 우리 조합의 최대 장점은 오른손잡이인 나와 왼손잡이인 김 선배의 시너지였다. 당초 대표팀에서는 이런 좌우 조합을 의도해서 우리를 복식조로 구성한 것은 아니었지만 막상 이렇게 파트너가 되자 우리는 좌우 콤비의 위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됐다. 당시만 해도 한국은 배드민턴 후발국이었는데 우리가 내세운 좌우 콤비가 승승장구하자 중국이나 인도네시아같은 강국에서도 이 복식 모델을 따라오게 됐다. 내가 전위를 맡아서 네트플레이를 담당했고 스매싱과 점프가 좋은 김 선배가 후위를 맡았다. 우리 콤비는 공격뿐만 아니라 수비도 안정적이어서 좋은 성적을 계속 낼 수 있었다."

<박주봉(앞쪽)-김문수 조가 1986 아시안게임에서 경기하는 장면. 사진=연합뉴스>
박주봉-김문수 조는 1985년 캐나다 캘거리에서 열린 4회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남자복식 우승을 차지했다. 한국 배드민턴의 첫 세계선수권 제패였다. 박주봉이 아직도 선수 시절 가장 감격스러웠던 순간중 하나로 꼽는 대회다. 박주봉은 유상희와 조를 이룬 혼합복식에서도 우승을 차지하면서 주요 국제대회 사상 첫 2관왕에 오르는 신기원도 세웠다. 이듬해 서울 아시안게임(놀랍게도 이 대회는 국내에서 열린 첫 배드민턴 국제대회였다)에서 박주봉은 남자복식 혼합복식(정명희) 남자단체 등 3관왕에 오르며 정점의 순간에 섰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의문점을 만나게 된다. 세계최강의 실력을 갖추고 있던 박주봉은 왜 단식에서는 이렇다할 성과를 내지 못했을까 하는 부분이다. '삼위일체' 1편에서 살펴봤듯이 한국 배드민턴이 단식보다 유독 복식에서 강한 이유, 또는 그런 전통이 만들어지는 것과 무슨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우선 박주봉 자신의 이야기부터 들어보자.
"1986 서울 아시안게임에서 3관왕을 차지했고 (그 전해)세계선수권에서 남복 혼복 모두 우승을 경험했다. 복식에서는 이제 더 이상 목표가 없었다. 당시 배드민턴이 올림픽 정식종목이 아니었기에 세계선수권대회가 가장 큰 대회였다. 나는 단식도 자신있었다. 아시안게임 단체전이나 토마스컵(세계 남자단체전)에 출전하면 나는 우리 대표팀의 단식 1번이자 복식 1번으로 나섰다. 단식 경기에서도 (세계 최강급인)중국이나 덴마크의 에이스랑 맞붙어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했다. 별로 밀린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또 그때는 내가 대학생이어서 체력적으로도 단복식 동시 출전에 큰 문제를 느끼지 않았다. 이후 (세계선수권 아시안게임의 연속 제패로)복식에 대한 목표가 없어졌기에 본격적으로 단식에 전념해 보자고 결심했다(당시 배드민턴협회는 아시안게임 단체전에서 박주봉이 남자단식 세계랭킹 1위인 자오지아화를 2-0으로 이기는 것을 보고 다음 목표로 단식 세계제패를 설정했다고 한다). 아시안게임 3관왕을 차지한 뒤 1986년 10월부터 단식으로 대회에 출전하며 테스트 기간을 가졌다. 1987년 1월 대만오픈에 단식으로 출전했는데 결승까지 올라갔다. 결승 상대는 그 유명한 말레이시아의 시덱 형제중 장남인 미시븐 시덱이었다(시덱 형제는 배드민턴 강국인 말레이시아의 국민적 영웅이었다. 1980~1990년에 이르는 기간동안 세계 최강급의 실력을 뽐냈다. 5형제였는데 모두 배드민턴을 잘 쳤다고 한다. 박주봉은 이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는 둘째,셋째로 구성된 시덱 형제 복식조와 자웅을 겨루게 된다). 첫 세트는 내가 이겼는데 두번째 세트때 허리 부상을 당했다. 경기중 제대로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억지로 간신히 경기를 마칠 수 있었다. 기권을 안한게 다행일 정도였다. 경기 결과는 물론 졌다. 다음 대회 일정이 일본오픈이었다. 일본오픈은 하필이면 아버님이 처음으로 내가 뛰는 국제경기를 직접 보기 위해서 찾아오셨던 대회였다. 하지만 허리부상이 너무 심해져서 결국 기권하고 말았다. 아버님은 정말로 크게 마음 아파하셨다. 귀국후 한약방을 데리고 다니시면서 내 치료와 재활을 위해서 백방으로 노력하셨다. 당시만 해도 협회는 부상당한 대표팀 선수들을 잘 돌보지 못할 때였다. 그런 지원이 미비했다. 결국 혼자 집에서 치료했다. 그런 상황에서 아버님은 '앞으로 니 몸 관리는 니가 알아서 해야 한다'고 당부하셨다. 결국 고민끝에 단식을 포기하기로 했다. 당시는 막 한체대를 졸업했을 때였다. 다시 한번 이런 부상을 당한다면 선수 생활 연장이 힘들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허리 부상 복귀 이후에는 다시 복식에만 전념하게 됐다."
이에 대한 박기현 배드민턴협회장의 증언도 있다. 박 회장은 "시덱과 경기하다가 다친 부상때문에 결국 단식을 포기하게 됐다. 원래 주봉이는 고 1때부터 단식 전문이었다. 단식으로만 쭉 했어도 충분히 세계 정상에 올랐을 것이다. (단식을 할 때도)템포가 빨랐고 (상대에게)보내는 코스를 다 읽고 있었다. 상대가 곤혹스러워할 수밖에 없는 곳으로만 셔틀콕을 보냈다"고 기억했다.

<1990 베이징 아시안게임에서 혼복 우승을 차지한 박주봉(왼쪽)-정명희 조의 경기 모습. 사진=연합뉴스>
선수 생활을 시작한 이후 가장 큰 부상과 기나긴 재활 그리고 복식에서 단식으로, 다시 단식에서 복식으로의 전환 등으로 1987년은 박주봉에게 가장 아프고 암울했던 시기였다. 다시 복식으로 복귀한 박주봉은 1988 서울 올림픽에서 전시종목으로 시연된 배드민턴에 출전해 정명희와 혼합복식 우승을 차지했다. 하지만 이후 1989년 베이징 세계선수권대회,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에서 이전같이 화려한 성적을 남기지 못하는 부진에 빠지게 된다(아시안게임 혼복 우승만이 최고 성적). 이때부터 박주봉은 현역 은퇴를 심각하게 고려했다. 그런데 갑자기 변수가 생겼다.
"1990년 이후에는 베이징 아시안게임을 마지막 무대로 상정했다. 나는 한체대를 졸업한 뒤 조교로 후배들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당시엔 현역 생활을 마친 뒤 할 일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서 학교에 남아 강단에 서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어느날 갑자기 새로운 뉴스가 알려졌다. 베이징 아시안게임이 끝난 뒤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부터 배드민턴이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다고 발표한 것이 아닌가. 나에게도 새로운 목표가 생긴 것이다. 선수라면 누구나 한번은 꼭 밟고 싶은 최고의 무대가 올림픽 아닌가. 결국 나는 마음을 다잡고 바르셀로나 올림픽때까지는 뛰기로 결심했다."
마음을 가다듬은 박주봉은 1991년 덴마크에서 열린 세계선수권 개인전과 혼합단체전(수디르만컵)에 출전해 남자복식 혼합복식 단체전 우승에 기여했다. 그해 말에는 세계선수권 복식부문 최다 우승기록(5회)으로 기네스북에 오르는 경사도 이어졌다. 다음해인 1992년은 드디어 올림픽의 해였다. 당시 박주봉의 한국 나이는 28세. 기량은 농익어있었지만 체력은 절정기를 지나고 있었다. 박주봉 스스로도 바르셀로나의 무더운 현지 날씨를 고려하면 체력이 제일 변수가 될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대부분 언론이 배드민턴 남자복식의 금메달을 확실한 것으로 보도해 심적 부담도 커져만 갔다. 박주봉-김문수 조는 1회전을 부전승으로 통과한뒤 2회전(16강전)에서 중국의 첸강 조와 맞붙게 됐다. 박주봉이 지금도 올림픽 금메달의 최대 고비처로 꼽는 바로 그 경기다.
"2회전이 최대 고비였다. 나와 문수형은 그동안 수많은 국제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백전노장이었다. 경험이 너무 풍부했다. 그러나 올림픽은 전혀 달랐다. 긴장감이 너무 컸다. 어떻게 경기를 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1세트를 먼저 내줬는데 우리 두명은 경기가 진행될 때 그냥 의미없는 '파이팅'만을 외쳤던 것같다. (불리한 상황속에서)무엇을 어떻게 대응하자는 대화도 나누지 못할 정도였다. 2세트에서도 점수차를 뒤지다가 겨우 뒤집는데 성공했다. 휴식시간에 한성귀 감독님이 무언가 지시를 하시는데 그냥 '예,예'하고만 대답했던 것같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 3세트를 잡아내면서 어렵게 역전승을 거두며 최대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올림픽만을 목표로 2년 동안 그토록 어렵게 준비했는데 (출전)첫 경기에서 그만 탈락의 고배를 마실뻔 했다. 지금 뒤돌아봐도 아찔하기만 하다."
전열을 가다듬은 박-김 조는 준결승에서 말레이시아의 시덱 형제를 제압한 뒤 결승에서 인도네시아의 하루토노 조를 2-0으로 꺾고 대망의 올림픽 금메달을 차지할 수 있었다.
"올림픽 금메달이 확정된 뒤에는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냥 너무 좋았다. 누구나 원하는 최고의 무대, 최고의 자리에 섰다는 생각에 그 이상의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나란히 남자복식 여자복식 우승을 차지한 코리아남매가 스포츠서울 1면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사진=스포츠서울>
◇최정상에서의 은퇴 그리고 복귀, 또 다시 은퇴한 셔틀콕의 황제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최정상의 순간에 선 박주봉-김문수 조는 전격적인 은퇴 선언을 한다. 스포츠서울의 바르셀로나 현지취재단 보도를 한번 인용해 본다.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처음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배드민턴의 남자복식 금메달조 박주봉(28.한체대 조교) 김문수(29.부산진구청)가 불굴의 투혼으로 금빛메달을 일궈낸 뒤 은퇴를 선언했다. "후배들에게 길을 터주고 싶다"는 박주봉은 특히 8월 22일 결혼식을 올리는 약혼녀(이수진 23)에게 금메달을 선물해 무엇보다 기쁘다고 활짝 웃었다. 박-김 조는 1983년 첫 복식을 이뤄 출전한 각종 대회에서 29회 우승을 거두며 승률 99%를 자랑, 복식의 무적으로 군림해 왔다. 올림픽을 1년여 앞둔 시점에 박주봉이 아킬레스건 부상을 입었고 김문수는 연습중 어깨부상으로 선수생활을 포기하기 직전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노장들은 지난해 겨울부터 이번 대회 직전까지 뼈를 깎는 강도 높은 훈련으로 체력을 보강하고 어느덧 부상도 완쾌됐다. 6개월여 이상 하루 6시간 이상 땀을 흘렸다. 이들의 피눈물나는 노력은 금메달로 결실을 보았다.'
<스포츠서울 1992년 8월 5일자 참조>
바르셀로나 올림픽을 끝으로 현역 은퇴를 선언한 박주봉은 일상으로 돌아갔다. 모교인 한체대에서 조교로 학생을 지도하는 생활이 이어졌다. 그런데 배드민턴협회에서 박주봉에게 먼저 현역 복귀를 타진했다. 1993년 버밍햄에서 열렸던 세계혼합단체전(수드리만컵)에서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서 박주봉의 합류가 필요하다는 것이 협회의 판단이었다. '박수를 받으면서 정상에서 은퇴했던' 그에게는 쉽지 않은 요청이었다. 고민끝에 7개월여만에 다시 현역에 복귀한 박주봉은 한국의 대회 2연패를 이룬 뒤 다시 대표팀에서 은퇴하게 된다.
"올릭픽에서 금메달을 딴 뒤 은퇴를 결심했다. 최고의 자리에 있을 때 은퇴하자는 것이 나와 아버님의 일치된 생각이었다. 은퇴하고 나서 반년 정도가 지난 뒤 배드민턴협회에서 혼합단체전 출전을 위해서 복귀를 요청했다. 한체대 은사인 박기현 선생님(현 배드민턴협회장)이 당시 배드민턴협회 전무이사를 맡고 있었다. 스승의 청을 거절하기 힘들었다. 최고의 순간에 명예롭게 은퇴했다고 생각했기에 복귀 결심을 하기 힘들었다. 사실 (애틀랜타 올림픽 출전을 위해서)두번째 복귀를 결심할 때보다 이때가 더 마음을 정하기 힘들었다. 복귀에 대한 부담감도 컸다. 결국 수드리만 컵을 우승한 뒤 (당초 협회와의)약속대로 다시 은퇴를 하게 됐다."
두번의 은퇴끝에 박주봉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한체대에서 지도자 수업도 받으면서 조교 전임강사 등을 지내며 후배들을 지도하는데 힘을 쏟고 있었다. 그런데 또다른 변수가 생겼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혼합복식이 처음으로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것이다. 박주봉은 정명희와 함께 혼복조를 이루고 있던 1992년 당시만 해도 부동의 세계랭킹 1위였다. 바르셀로나 올림픽때 혼복이 정식종목이었다면 금메달이 유력했던 상황이었다. 혼복에서 올림픽 금메달을 따지 못하고 은퇴했던 것은 올림픽 정식종목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지만 박주봉 개인에게도 상당한 아쉬움으로 남아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데 배드민턴협회에서 애틀랜타 올림픽 혼복을 겨냥해 박주봉에게 또 한번 복귀 요청을 하게 된다.
"바르셀로나 올림픽을 앞두고 사실 나는 남복(김문수)과 혼복(정영희)에서 모두 세계 1위였다. 혼복쪽이 경기력면에서 더 탄탄하다는 평가도 있을 정도였다. 바르셀로나때 혼복이 정식종목이었다면 2관왕도 가능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애틀랜타 올림픽을 앞두고 한국대표팀의 혼복 에이스는 김동문-길영아 조였다. 그런데 협회는 김동문-길영아 조가 4강권은 확실히 갈 수 있지만 보다 확실하게 금메달을 따고 싶다는 판단을 했던 것같다. 그래서 나의 복귀를 요청했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혼복이 채택됐다는 말을 듣고 혼자 속으로 '아, 드디어 혼복이 올림픽에 들어가는구나'라는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개인적으로도 1992년에 혼복이 없었던 것에 대한 아쉬움도 있었다. 협회의 강력한 요청도 있었고 내 자신의 미련도 남아있었기에 결국 두번째 현역 복귀를 결심하게 됐다."
박주봉의 현역 복귀가 결정된 뒤 과연 누가 그의 짝으로 올림픽에 나갈 것인가가 배드민턴계의 큰 이슈가 됐다. 협회는 박주봉에게 심은정(당시 25.담배인삼공사)을 추천했다. 박주봉은 자신의 한체대 제자인 나경민(19.한체대)을 선호했다. 좀처럼 양자의 의견이 좁혀지지 않았다. 당시 분위기를 생생하게 느껴보기 위해서 연합뉴스 기사를 한번 인용해 본다.
'내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금메달 획득이 확실시되는 배드민턴 황제 박주봉이 혼합복식 파트너 선정을 놓고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황제의 고민은 자신의 의견과 대한배드민턴협회의 의견이 다르기 때문. 박주봉은 한체대 제자인 나경민과의 올림픽 동행의사를 대내외에 공개했다. 박주봉이 나경민을 선택한 이유는 ▲단식 세계 5위가 입증하듯 공격력이 좋고 ▲자신이 직접 가르쳐 호흡이 잘 맞는데다 ▲아직 10대로 젊기 때문에 40도를 육박하는 올림픽 일정에서 부상이 잦은 심은정에 비해 걱정이 없다는 것. 협회의 의견은 다르다. 한성귀 대표팀 감독은 ▲나경민의 나이가 아직 어려 올림픽 같은 큰 무대에서 제 실력 발휘가 어렵고 ▲공격력은 앞설지 몰라도 경기를 풀어가는 노련미와 수비에서 뒤질뿐만 아니라 ▲단식 기대주인 방수현을 위해서라도 나경민이 단식에 전념해 세계 1,2위인 수지 수산티(인도네시아)와 예자오밍(중국) 중 한명을 꺾어줘야 한다는 3대 불가론을 제시하고 있다.'
<연합뉴스 1995년 11월 29일자 참조>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박주봉이 복식 금메달을 따는 순간 전주 집에서 경기를 보던 가족들이 환호하는 장면. 당시 올림픽 메달 후보집에서는 언론 카메라가 이런 식으로 대기하고 있었다. 사진=연합뉴스>
협회와 '셔틀콕의 황제'는 전례없는 갈등을 겪었다. 결국 박주봉이 태릉선수촌을 스스로 떠나는 홍역을 치른 끝에 애틀랜타 올림픽 혼복 출전조는 박주봉-나경민으로 최종 확정된다. 이 갈등 과정을 비교적 상세하게 언급하는 이유는 애틀랜타 올림픽 이후 지도자의 길로 들어선 박주봉이 결국 한국 배드민텀 대표팀 코칭스태프로 합류하지 못한 많은 이유 가운데 하나가 이때 단초가 생겼을 수도 있다는 필자의 개인적인 판단때문이다. 당사자인 박주봉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자.
"협회에서는 처음에 내 짝으로 길영아를 해주겠다고 했다. 그렇지만 내가 고사했다. 후배(김동문)의 파트너를 뺏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후에 심은정 라경민 두명이 후보가 됐다. 협회는 심은정을 추천했고 나는 한체대 제자이기도 한 라경민과 하고 싶었다. 협회와 나는 (혼복 파트너에 대해서)합의를 못했다. 그래서 내가 두 선수와 각기 파트너로 대회를 치러본 뒤 최종결정을 내리기로 했다. 심은정과는 4개 대회, 라경민과는 6개 대회 정도를 각각 나간 것같다. (두 선수와 각각)실전을 경험하고 나서도 내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라경민과 파트너과 되고 싶었다. 하지만 여전히 협회는 심은정을 선호했다. 내가 라경민을 우선시했던 이유는 첫째 심은정이 팔꿈치 부상이 있었다. 만일 올림픽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부상이 재발되면 큰 일이었다. 나도 어렵게 현역 복귀를 결정한 상황아닌가. 둘째 복식에서는 쇼트 서비스가 매우 중요한데 라경민의 쇼트 서비스 능력이 심은정의 그것보다 낫다고 판단했다. 나와 협회의 의견대립은 좀처럼 해소되지 못했다. 결국 나는 라경민과 한조를 이루지 못한다면 복귀를 취소하겠다는 방침을 협회에 통보했고, 협회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심은정을 파트너로 하지 않는다면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결국 나는 태릉선수촌에서 짐을 싸서 나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날 밤 태릉을 나오는데 눈물이 주룩주룩 흘렀다. 내가 이러려고 대표팀에 복귀했는지 스스로가 한심하기만 했다. 나는 그냥 (현역)선수도 아니고 은퇴해서 지도자 생활을 하고 있던 상황에서 협회가 먼저 요청해 복귀했는데 그냥 선수 취급하는 것에 서운한 마음도 있었다. 내가 태릉선수촌을 나간 뒤 협회가 발칵 뒤집혔다고 한다. 우여곡절끝에 (선수촌을 나온 뒤)이틀이 지나서 협회가 라경민과 혼복을 뛰라고 최종 결정했다. 나도 며칠이 지난 뒤 선수촌에 복귀했다. (한성귀)감독님에게 정중하게 사과를 했다. 당시 김중수 코치(현 대한배드민턴협회 부회장)에게 따끔하게 야단도 맞았다. 이제 (파트너 선정에 대한)모든 것을 잊고 올림픽 준비에 매진하기로 했다."
애틀랜타 올림픽은 한국이 지금까지 역대 올림픽에서 최고 성적을 거둔 대회로 남아있다. 금메달 2개(혼복 김동문 길영아, 여단 방수현)와 은메달 2개(혼복 박주봉 라경민, 여복 길영아 장혜옥)의 수확을 거뒀다. 하지만 당초 강력한 금메달 후보로 기대를 모았던 박주봉-나경민 조는 혼합복식 결승에서 김동민-길영아 조와 만나 패했다. 박주봉은 은메달에 그쳤고 금메달은 후배의 몫이 됐다. 애틀랜타 올림픽을 마친 박주봉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흐름속에 다시 한번 은퇴를 선언했다. 이번에는 진짜, 영원히, 선수로서 코트와의 완전한 작별이었다. 스포츠서울 애틀랜타 올림픽 현지 취재단은 '황제 박주봉 역사속으로'라는 제목의 기사로 이렇게 당시 분위기를 전하고 있다.
'박주봉(32.한체대 교수)이 아쉬움을 남기고 씁쓸히 정든 코트를 떠났다. 금메달을 안겨주겠다는 코트 복귀의 변대로 승승장구하며 올림픽 결승에 진출했던 그는 마지막 은퇴경기에서 후배들에게 영광을 넘겨주고 철옹성처럼 보이던 정상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는 경기후 "후배들이 금메달을 따줘 가슴 뿌뜻하게 물러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가슴속에는 이날의 패배가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충격으로 남을지도 모른다. (중략, 라경민과 파트너 선정 이후)박주봉은 6개 국제대회를 석권하며 세계1위로 부상, '역시 배드민턴 황제'라는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박주봉에게는 반드시 금메달을 따내 주위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가중돼 왔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솔직히 부담감을 지울 수 없었다"고 토로하고 "특히 열심히 뛰어준 경민이에게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금메달을 놓친 소감에 대해서는 "우리나라 팀이 모두 결승에 올랐을 때 이미 금메달을 딴 이상으로 기뻤다"고 말했다.' <스포츠서울 1996년 8월 3일자 참조>
<1996 애틀랜타 올림픽 혼복 은메달을 끝으로 완전은퇴한 박주봉의 소식을 전한 스포츠서울 지면. 사진=삼위일체>
애틀랜타 올림픽 이후 20년의 세월이 지났다. 박주봉은 '그 은메달'의 의미에 대해서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은메달이라는 결과는 물론 아쉽기는 하다. 하지만 결승에서 우리 선수끼리 만나니 (내 스스로)긴장감이 떨어졌다. 만일 중국이나 다른 국가 선수들과 결승에서 만났다면 (결과가)달랐을 것같다. 후배들과 결승전에서 대결을 해야 하니 내 입장도 미묘할 수밖에 없었다. (결승전을 앞두고)연습을 열심히 하기가 그랬다. 한국은 여복과 혼복이 함께 결승에 올랐는데 혼복 전날에 여복 결승전이 먼저 열려서 응원을 갔다. 응원에서 돌아와서 체육관에서 몸이나 좀 풀어보려고 했는데 그런 분위기가 아닌 것같았다. 그냥 하루종일 쉬다가 결승전에 나갔다."
'셔틀콕의 황제'는 이제 현역으로서 코트와 영원한 작별을 고하고 지도자의 길에 들어선다.
('위원석의 삼위일체' 배드민턴 레전드 박주봉 두번째 편은 4월 20일 오전에 포스팅됩니다. 다음 편에서는 현역 은퇴 이후 지도자 박주봉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기사제공 위원석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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