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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W : 믿음 BIW : 책망하라 AG : 성도
TS : 믿음이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축복으로 당당하게 징계하고 책망하는 것이다.
행복의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사람
한 청년이 유럽의 공동묘지를 구경하면서 비문을 하나하나 읽어 보았습니다.
그 중의 한 비문은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습니다.
“죽은 것이 아니라 다만 잠들었을 뿐이다.”
다른 비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일어나서 인사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영국의 문호였던 버나드 쇼는 이런 유명한 묘비명을 남겼습니다.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어.”
유럽인들은 죽은 비석 앞에서 문상하러 온 이들에게 행복과 웃음을 주려고 노력합니다.
유럽인들은 살아서도 행복한 말을 하고, 죽어서도 웃음이 넘치는 말을 할 줄 아는 위트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소중한 삶이 우물쭈물 덤덤하게 살기에는 너무 억울합니다.
재미있고, 행복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루에도 수없이 대뇌이면서 살았으면 합니다.
행복한 말 한마디는 큰 위로와 삶의 용기를 가져다줍니다.
오늘 하루의 삶에도 성령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위로와 격려와 행복과 웃음과 감동을 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P4.
저가 나이 60이 넘어서 70을 바라보는 인생을 살아오면서 느끼는 것이 하나 있다면 누구누구의 잘못을 지적하고 책망하고 가르치려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되겠구나 하는 것이다.
젊었을 때에는 교회나 성도들이나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과감하게 지적하고 책망해야 옳은 삶인 줄로 알았었다.
그런데 이제 좀 더 나이 먹고 인생을 살아보니 저 자신부터 누군가에게서 책망을 듣거나 야단을 듣거나 나를 향하여 무언가를 가르치려 한다는 생각이 들면 상당히 고통스러움을 느낀다.
이제는 지적받고 싶지도 않고 더더구나 누군가를 지적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그저 묵묵히 그를 위하여 기도해 줄 뿐, 내가 무슨 능력이나 권세가 있어서 그를 책망하거나 가르치려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앞선다.
이제는 싫은 소리를 듣는 것이 정말로 싫다.
언제 하나님 앞으로 부르심을 입을지 모르지만, 앞으로 하나님 앞에 설 때까지 좋은 소리만 들어도 모자란 인생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격려하고 위로하고 은혜를 끼치는 소리만 듣고 살아도 모자란 인생인데,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시험에 들게 하면서까지 살아야겠나 하는 마음이 앞선다.
내가 싫은 소리를 듣기 싫어한다면 똑같이 다른 사람에게도 싫은 소리를 해서는 안 되지 않나? 생각을 해 본다.
가능하면 격려하고 위로하고 감사하고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작은 은혜에 아멘으로 화답하며 살아가려고 애써본다.
오늘 우리의 영원한 주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고 계실까?
언제나 사랑과 은혜와 긍휼과 자비를 베풀면서 한 영혼이라도 더 많은 영혼을 구원하여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고 확장시켜 나가시려는 예수님께서 그 당시 사회 지도층에 있는 이들에게 어떤 말씀을 하시고 계실까?
예수님께서 그 당시 사회 지도층들을 향하여 하시는 말씀은 오늘을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 어떻게 살라고 권면하시는 말씀일까?
D4.
① 바리새인의 초대에 응하시는 예수님.
37절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므로 들어가 앉으셨더니”라고 기록하신다.
모든 바리새인들이 다 똑같지는 않겠지만, 대부분의 바리새인들은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고 배척한다.
나사렛 촌 동네 출신으로 말씀을 잘 가르치고 각종 능력을 행할 수 있는 다양한 능력을 지닌 랍비나 선지자의 한 사람으로 인정할 뿐이다.
여러 랍비나 선지자들 들 중에 특출한 능력을 지닌 사람으로 인정할 뿐이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시던 중에 바리새인 한 사람이 자기와 함께 점심 식사하자고 제안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얼마든지 바리새인의 제안을 거절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바리새인의 제안을 수락하여 바리새인의 집으로 들어가신다.
왜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으시고 바리새인의 집으로 들어가셨을까?
바리새인들의 속셈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틀림없이 무언가 꼬투리를 잡고 시비를 걸고 흠잡으려고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바리새인이 자기 집에서 점심 식사 같이하자는 제안을 수락하신 것일까?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집요하게 무언가를 꼬투리 잡을 것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신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속셈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기꺼이 바리새인의 제안을 수락하시는 것은 바리새인들도 죄인이요 죄를 용서받아야 할 대상이요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대상이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면서 구원을 베풀어야 할 대상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온천하보다 귀하다고 하는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을 버리고 인간의 몸을 입고 성육신하여 지구촌으로 찾아오신 분이기 때문에 그 대상이 자신을 향하여 온갖 말로 험담하고 비난하고 시비를 걸고 있는 바리새인이라 할지라도 그 바리새인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인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바리새인의 초대에 응하시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에게 올바른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전하시기 위하여 기꺼이 바리새인의 초대에 응하시는 것이다.
신앙인들은 어떤가?
상대가 어떤 사람이든 누군가가 커피라도 한 잔 하자고, 식사 한 번 같이 하자고 제안해 온다면 기꺼이 응할 수 있을까?
이것저것 계산하지 않고 기꺼이 그들의 초대에 응할 수 있을까?
반가운 사람, 보고 싶은 사람이 제안해 온다면 기꺼이 응해 줄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거나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어떤 목적으로 나를 이용하려고 제안해 온다면 쉽게 응할 수 있을까?
나를 헤치려고 온갖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들, 나에게서 무언가를 트집을 잡고 함정에 몰아넣으려고 하는 원수들, 지금까지 패가 망신당하도록 온갖 악행을 저지른 악인들이 어느 날 커피라도 한잔하자고, 밥이라도 한 번 같이 먹자고 제안해 온다면 기꺼이 기분 좋게, 행복하게 응할 수 있을까?
그 사람의 꼴도 보기 싫은데, 그 사람을 생각하는 자체가 기분이 상하고 화가 치밀어 오르는데, 그와 한자리에 앉아서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태연하게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면서 이야기할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진수성찬의 호화로운 음식을 제공한다고 해도 거절하고 싶다.
응하고 싶지 않다.
그와 같은 장소에 있다는 것 자체부터 밥이 목으로 넘어갈 것 같지 않다.
무엇을 먹고 마셔도 곧바로 체해서 넘어질 것 같다.
어쩌면 바리새인과 예수님의 관계가 이런 관계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입어야만 하는 죄인이고,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구원하시려고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다는 사실이다.
예수님께서는 기꺼이 바리새인의 초대에 응하시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의 그릇과 인간의 그릇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무리 신앙이 탁월한 목사라고 하더라도, 목사도 사람이기에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미워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런 사람과 한자리에 앉아서 커피를 마신다, 밥을 먹는다는 것이 여간 곤혹스럽기만 하다.
신앙인은 마땅히 예수님의 마음, 예수님의 심장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데, 예수님의 마음과 심장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니 목사들도 항상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먹어야만 살 수 있는 연약한 존재이다.
목사들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먹지 못하면 한 시도 살아갈 수 없이 쓰러질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이다.
그러면 이 바리새인은 왜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는 것일까?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지도 않고 좋아하기도 않으면서 왜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여 점심 식사를 같이 하자고 제안하는 것일까?
도대체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는 것일까?
이 바리새인은 다른 바리새인과 달랐을까?
이 바리새인은 다른 바리새인과 달리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고 고백한 사람일까?
오늘 본문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보면 이 사람도 여타 다른 바리새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도 왜 어찌하여 예수님을 식사 자리에 초대하는 것일까?
이 바리새인도 다른 바리새인들처럼 예수님에게서 무언가 고소할 수 있는 꼬투리를 찾기 위한 목적으로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집으로 들어가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바로 손과 발을 씻는 것이다.
중동 지역의 특성상 유대인이라면 어느 누구나 집안으로 들어가면 으례껏 손과 발을 씻는 것이다.
이들은 깨끗하게 살아야 한다는 청결성 때문에 손과 발을 씻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청결성이 아니라 정결성 때문에 손과 발을 씻어야 하는 것이다.
좀 부유한 집에는 손님이 찾아오면 그 집의 하인이 물을 떠다가 손과 발을 씻을 수 있도록 배려해 준다.
그런데 오늘 이 바리새인의 집에는 그런 하인이 없었던 것같아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집으로 들어가면 으레껏 손과 발을 씻어야 정결하게 되고, 정결해야만 식사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38절에서 “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그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라고 그때의 상황을 기록하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에 일반적인 유대인들,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으레껏 손과 발을 씻는다는 것을 모르셨을까?
아니면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씻지 않으셨던 것일까?
예수님께서 그 바리새인을 향해 하시는 말씀 속에는 일부터 씻지 않으셨던 것으로 보인다.
②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속 마음을 아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39-40절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이중적인 삶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책망하고 계신다.
겉 사람은 번지르르하게 깨끗하고 정결하고 거룩하고 성결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의 속사람은 세상의 온갖 더럽고 추하고 악한 탐욕, 욕망, 죄악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고 책망하고 계신다.
겉과 속이 다른 이율배반적인 삶을 사는 것에 대하여 책망하고 계신다.
예수님께서는 겉 사람을 만드신 분이 속도 만들었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서 흙으로 사람을 만드신 삼위 하나님께서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주시면서 생령이 되게 하신 것이다.
겉사람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영혼도 만드셨고, 마음과 생각과 의지와 뜻과 계획도 만드셨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40절에서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말씀은 구제하는 삶 자체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겉 사람과 속 사람이 일치된 삶을 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겉과 속이 다른 이중적인 삶을 살지 말고 겉과 속이 같은 사람,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 언행일치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겉으로는, 말로는 그럴싸하게 어려운 이들을 구제하고 돕는 것처럼 가면을 쓰면서 속으로는 온갖 더럽고 추하고 악한 계획을 세워서 뭇사람들을 고통으로 몰아가는 이들이라고 책망하고 계신다.
예수님께서는 계속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책망하신다.
42절에서는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라고 말씀하신다.
43절에서는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라고 말씀하신다.
44절에서는 “화 있을진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십일조 헌금은 그럴싸하게 하면서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는 무관심한 사람들이라고 책망하신다.
항상 좋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섬김받기를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알고, 칭찬과 박수받기를 좋아하면서 낮은 자들을 은근히 무시하고 정죄하고 비난하고 심지어는 저주까지 퍼붓는 이들이라고 책망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향하여 평토장한 무덤과 같다고 책망하신다.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땅을 한 자 정도 깊이를 파서 시신을 넣고는 다른 땅과 같도록 흙을 덮어서 묻는다.
그러면 시간이 지나면 무덤인지 일반 땅인지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평토장한 무덤에는 뼈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무덤인지를 모르고 일반 땅인 것처럼 무심코 지나가다가 평토장한 무덤을 밟게 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시신을 만진 꼴이 되어 부정하게 된다.
부정하게 되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뭇 사람들이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을 받아서 하나님 앞에서 은혜와 사랑과 긍휼을 입을 수 없는 죄인으로 몰아가고 있다고 책망하시는 것이다.
③ 율법교사들을 책망하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책망하는 말씀을 옆에서 듣던 율법 교사들이 한 마디 거둔다.
45절에서 한 율법 교사가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라고 하면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토를 달고 나선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책망하신 말씀이 율법 교사들에게도 걸림돌이 되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책망하시는 말씀은 바리새인들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에게든지 도전하는 말씀이다.
율법 교사가 토를 달면서 나서려고 하자, 예수님께서는 역시 율법 교사들에게 책망의 말씀을 하신다.
46-52절의 말씀에서 예수님은 율법 교사들을 향하여 모질게 책망하신다.
“이르시되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 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드는도다. 그들을 죽인 자도 너희 조상들이로다. 이와 같이 그들은 죽이고 너희는 무덤을 만드니 너희가 너희 조상의 행한 일에 증인이 되어 옳게 여기는도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가 일렀으되 내가 선지자와 사도들을 그들에게 보내리니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며 또 박해하리라 하였느니라.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교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서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책망하신다.
율법 교사들, 토라 교사들은 613개의 계명, 율법을 지키게 하려고 각종 규례들과 규칙들과 조항들을 만들어서 가르치는 것이다.
이들의 가르침을 장로들의 유전이라는 이름으로 가르치는 것들이다.
이들의 가르침은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비롯한 모세5경과 모세5경 속에 담겨져 있는 613개의 계명을 주신 근본적인 이유와 목적을 곡해하여 그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죄인이 되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없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면 의인이어야 하는데, 613개의 율법 중에 단 하나라도 지키지 않으면 그 지키지 못한 하나의 계명 때문에 죄인의 신분이 되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율법 교사들은 자신들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율법, 계명의 규칙, 율례들을 만들어서 다른 사람들조차도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죄인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런 율법 교사들을 향하여 화가 있을 것이라고 책망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생명을 주시고 살리는 분인데, 율법 교사들은 하나님을 죽이는 분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교사들을 향하여 죄인들의 무덤을 만들고 피를 흘리게 만들고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도록 유혹하는 죄인들이라고 책망하고 계신다.
율법 교사들은 율법에 정통한 사람들이다.
율법의 지식이 넘쳐나는 사람들이다.
지식은 굉장히 중요하다. 그러나 그 지식이 삶의 윤택을 가져와야 하는 것이지, 그 지식이 올무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지식은 삶을 더 윤택하게, 더 자유롭게, 더욱더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데 유익을 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지식이 올무가 되고, 덫이 되고, 낭떠러지가 되고, 방해꾼이 된다면 그 지식은 백해무익한 것으로 전락하고 만다.
율법 교사들이 가지고 있는 율법에 대한 넘치는 지식이 결국 자기 자신들뿐만 아니라 서민들, 백성들까지도 올무가 되고, 덫이 되고, 낭떠러지가 되었다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이나 율법 교사들이나 서기관들이나 제사장들은 그 당시에 종교와 정치와 문화와 사회의 어르신들이요 마을의 유지들이요 훈장들이요 지도자들이다.
리더쉽을 가진 지도자들인데, 이들로 인하여 백성들의 삶이 윤택해지고 자유로워지고 더욱 더 하나님 앞에 진실한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에 걸맞게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가야 하는데, 도리어 악한 길로, 죽음의 길로, 심판의 길로 이끌어가는 형극이 되고 마는 것이다.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율법교사들은 외형적인 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들은 외적인 모습에 집중한다.
자존심이 강하고, 자기 줏대가 너무 강하다.
남에게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기를 좋아하고 뭇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그들에게 추앙받기를 갈망한다.
오늘날에 이런 바리새인들과 율법교사들, 서기관들과 아주 흡사한 이들이 세상에는 널려 있다.
오늘날 정치인들이 그렇다.
선거철만 되면 온갖 선심을 다하는 것처럼 간이고 쓸개고 다 내어줄 것처럼 떠버리고는 당선되면 나 몰라라 하는 정치인들,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냐고 딱 시치미 떼는 사람들의 모습이 꼭 바리새인들의 모습과 같다는 것이다.
온갖 죄에 연류되어 있으면서 자신이 억울하게 당하고 있다고 항변하는 이들이다.
본인들은 온갖 죄에 연루되어 있으면서 국민들에게 법을 잘 지키며 살라고 소리치는 이들이다.
자신들도 법을 잘 지키면서 국민들에게 법을 잘 지키면서 살아야 한다고 소리쳐야 정당하지 않나?
그런데 이들은 안하무인격으로 권력이나 권세를 가지고 있으면서 본인들은 법을 잘 지키지 않아도 되고, 힘없는 나약한 국민들만 법을 잘 지켜야 한다고, 법을 지키지 않으면 처벌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것이다.
교회에서 신앙이 탁월한 사람처럼 보이면서 가정이나 직장이나 사회에서는 개차반으로 살아가는 이들, 신앙과 실제 삶이 전혀 다른 사람들이 이런 사람들이다.
교회에서 온갖 직분을 달고 살면서 그럴싸하게 신앙인처럼 포장하지만, 실제 삶의 현장에서는 전혀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사회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 중에 이런 사람들이 너무 많다.
오늘날 온갖 종류의 이단들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교회나 교단에서 교권주의, 물질주의에 빠진 일부 직분자들이 그렇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자들을 향하여 바리새인들이라고, 서기관들이라고, 율법 교사들이라고 부르면서 화가 있을 것이라고 책망하고 계신다.
진정으로 삼위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한 점 부끄러움이 없이 진정성을 지닌 신앙인의 삶을 살아야 예수님으로부터 책망받지 않고 오히려 칭찬 듣는 신앙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삼위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고 성실하고 정직하고 올바르게 살아가는 신앙인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④ 더욱더 곤경에 처해 지시는 예수님.
53-54절에 “거기서 나오실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거세게 달려들어 여러 가지 일을 따져 묻고,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을 책잡고자 하여 노리고 있더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본격적으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사두개인들과 율법학자들을 향하여 곧 사회의 지도층에 있는 자들을 향하여 책망의 말씀을 하심으로 인하여 예수님께서는 더욱더 큰 곤경을 당하는 처지가 되고 만다.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말씀은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율법교사들의 가슴에 꽂는 비수가 되고 말았다.
그렇지 않아도 이들은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트집을 부리면서 예수님에게서 흠집을 찾아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데, 예수님께서 책망하시는 말씀을 들은 이들은 더욱더 악해져 간다.
이들은 예수님을 죽일 수 있는 결정적인 트집을 잡으려고 두 눈을 불라리고 달려드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서 이런 반응이 일어날 것이라고 모르시고 그들을 향하여 책망하셨을까?
아니다.
예수님은 이미 그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를 명확하게 알고 계신다.
예수님께서 이들을 책망함으로 인하여 더욱더 좋지 않은 관계가 형성될 것을 이미 다 알고 계신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향하여 책망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이 어떤 길로 가야 할지를 너무나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한 치의 양보나 망설임도 없이 당당하게 지도층들을 향하여 책망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뭇사람들이 인정하건 인정하지 않건 상관없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백성들을 향하여 한치의 두려움이나 무서움없이 당당하게 책망하고 계신다.
신앙인들은 자신에게 억울한 일이 생길까 봐서, 자신에게 부당한 일이 다가올까 봐서, 주저주저하고 망설이면서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을까?
하나님 앞에서 주저주저하거나 망설이지 말고 정정당당하고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 의의 말씀, 심판의 말씀, 징계의 말씀을 선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뒤로 슬그머니 빠져나가고 있지는 않을까?
특히 교회에서 정치적인 발언을 하거나 설교를 하면 안 된다고 한다.
정교분리(政敎分離)라는 이상한 논리를 앞세워서 교회에서 특정 정당이나 특정 정치에 대하여 설교하면 안 되는 것처럼 착각한다.
정말 그럴까?
위대한 종교개혁자 칼빈은 정교분리가 아니라 정교일치를 주장하면서 몸소 실천하며 살았던 사람이다.
칼빈은 실제로 종교개혁자의 삶을 하면서 동시에 국가의 행정부 요직을 맡았던 사람이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만들어진 사람으로 태어나서 하나님의 의와 거룩함과 정직함과 정의와 공의를 위하여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답게,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종답게 살다가 떳떳하게 가야 하지 않을까?
한 번 왔다가 한 번 가는 인생이지만,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가느냐에 따라서 후대들에게 남겨지는 이름 석 자의 의미는 달라지는 것이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하는데, 자신의 이름 석 자가 어떤 의미로 남겨져야 할까?
만약에 예수님께서 지도층들의 불의를 보면서 당당하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책망하지 않고 지도층에 있는 이들의 기분이 맞추어 주는 말을 하면서 책망하는 것을 뒤로 미루었다면 예수라는 이름의 의미가 어떤 모습으로 남겨졌을까?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구세주로 메시야로 믿는 믿음으로 살면서 예수님을 본받고 흠모하고 추앙하는 이름으로 남겨졌을까?
아니면 비난하고 조롱하는 이름으로 남겨졌을까?
예수님께서는 뭇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든 뒤로 물러서지 않고 메시야의 삶, 구세주의 삶을 사셨기 때문에 뭇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아들로서 정의와 공의와 심판을 선포한 이름으로, 그러면서 구원과 은혜와 사랑과 축복과 위로와 격려를 베풀어주었던 이름으로 기억하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왜 이들에게 책망하시는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
잠언13:24애서는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라고 말씀하신다.
잠언19:29애서는 “심판은 거만한 자를 위하여 예비된 것이요 채찍은 어리석은 자의 등을 위하여 예비된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신다.
히브리서12:8-11애서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라고 말씀하신다.
곧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책망하셔야만 하는 이유는 이들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기 때문에 진정한 하나님의 언약 백성답게 살도록 하시기 위하여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란 사실이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예수님께서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들을 향하여 조목조목 책망하신다.
사실 나에게 싫은 소리 하는 사람, 책망하고 지적하는 소리를 하는 사람은 나와 어떤 모습으로든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나에게 싫은 소리도 하고, 책망도 하고, 잘못을 지적하기도 하는 것이다.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이라면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내가 무슨 짓거리를 하든, 내가 어떤 모습으로 살든 상관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나와 어떤 이유로든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하는 말이나 행동이나 살아가는 모습에 대하여 토를 달거나 지적을 하거나 책망을 하거나 심하면 징계까지도 하는 것이다.
위로하고 격려하고 은혜를 끼치고 사랑하는 것도 관계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하는 것이고, 미워하는 것도 관계가 있기 때문에 미워하는 것이다.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이라면 사랑할 이유도 없고, 미워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 당시 사회 지도층에 해당하는 바리새인들, 율법교사들, 서기관들, 사두개인들, 제사장들을 향하여 때로는 위로하고 격려하고 온갖 이적을 베풀면서 하나님 나라를 가르쳐 주시지만, 때로는 이들을 향하여 모질게 책망하시는 것이다.
때로는 정말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심한 모욕감을 주는 말씀도 서슴지 않고 하시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 유대인들은 자타가 공인하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메시야로 오신 분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사회지도층에 해당하는 이들을 향하여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당당하게 선포하고 계시는 것이다.
L4 & B4
오늘 예수님은 자신에게 불이익으로 돌아올 것을 뻔히 아시면서도 당당하게 사회 지도층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책망하신다.
그렇다면 신앙인들의 삶은 어떤가?
특히 사회지도층에 들어 있는 신앙인들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정치계와 법조계와 행정부와 문화계, 군대와 각 교육계에 지도층으로 들어가 있는 신앙인들이 많지 않은가?
한국교회의 교계를 벗어나서 일반 사회에 신앙인들이 구석구석에 포진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신앙인이 신앙인답게, 신앙인의 냄새를 풍기지 못하는 현실을 보면서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모른다.
바닷물은 죽은 물이 아니라 산 물이라고 한다.
바닷물이 죽은 물이 아니라 산 물이기 때문에 온갖 생명체들이 살아 있는 것이다.
바닷물이 죽은 물이 아니라 산 물이 되기 위해서 물의 0.3%의 소금이 있기 때문이다.
0.3%의 소금이 전체 바닷물을 죽은 물이 아니라 산 물로 만들어내는 원리이다.
예수님께서는 신앙인들을 향하여 세상의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신다.
0.3%의 소금만 있어도 바닷물이 죽지 않고 산 물이 되어 온갖 생명체가 살아가는데, 신앙인들이 널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더욱더 악해져 가는 현실이다.
거기에는 죄에 대하여 합당한 책망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좋은 게 좋은 일이지 않나.’라는 생각으로 책망해야 함에도 책망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불행한 일이다.
장로교의 좋은 점이 있다면 권징이 있다는 것이다.
권징은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워가는 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한 제도이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올바르게 세우기 위해서 반드시 권징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교회는 권징을 제대로 실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이 살아가는 현실이란 세계는 징계가 사라진 시대이다. 권징이 사라진 시대이다. 책망이 사라진 시대이다. 회초리가 사라진 시대이다.
교회의 장로나 권사나 집사나 성도가 교회에서 돌이킬 수 없는 죄를 범하여 교회에서 권징을 실시하면 다른 교회로 옮겨버리면 그것으로 끝난다.
목사가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돌이킬 수 없는 죄를 범하면 교회에서 파면하면 다른 교회로 옮긴다든지, 교회를 새로 개척하면 그것으로 끝난다.
노회에서 목사를 권징하면 교단을 탈퇴하여 다른 교단으로 옮겨버리면 그것으로 끝난다.
그러기 때문에 권징은 교회와 교단과 노회에서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성경에 비추어서 권징을 실시하는 것인데, 이에 순복하지 않고 법정투쟁을 하거나 교회를 다시 개척하거나 교단을 탈퇴하여 다른 교단에 가입하면 그것으로 끝나버리는 것이 현실이다.
교회에서도 교회에 분란이 생기고 시험에 들고 교회가 다투고 싸움이 일어나고 급기야는 교회가 너무 큰 상처를 입으면서 갈라질까 봐서, 다른 성도들에게 피해를 주거나 교인수가 줄어들까 봐서 권징을 실시하지 못하는 불행한 사태가 되고 말았다.
성지순례를 다니면서 초대교회에서는 권징을 아주 엄격하게 실시했던 현장을 목격하게 된다.
수찬정지나 출교를 넘어서 심지어는 사형까지도 실시했던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교회에서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믿음으로 살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반드시 징계하는 설교를 해야 하는데, 그런 설교를 하면 시험에 든다고 징계하는 설교를 하지 못하는 것이다.
소위 부흥한다는 교회는 권징하는 설교보다는 즐길 수 있는 설교, 웃을 수 있는 설교, 기분을 좋게 하는 설교를 해야만 성도들이 은혜받았다고 하면서 좋아하고 많이 모인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진정한 은혜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그저 기분이 좋으면, 웃고 떠들 수 있으면 은혜 많이 받았다고 호들갑을 떠는 것이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인기를 위해서라면 결코 책망하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하나님의 언약 백성답게 살아가도록 하기 위하여 지도층들을 향하여 아주 심하게 책망하는 말씀을 전하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앙인들도, 주님의 피로 값 주고 산 교회들도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때로는 당당하게 책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믿음으로 세워진 교회요 성도이기에 마땅히 예수님의 삶을 10000/1이라도 닮아가는 삶을 살기 위해서 책망해야 할 때는 주저하지 말고, 망설이지 말고, 뒤로 물러서지 말고 책망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위로하고 격려하고 사랑과 위로와 은혜와 축복을 넘치게 부어주시는 분이지만, 때로는 반드시 주님의 나라와 교회의 유익과 질서를 세워가기 위하여 공의와 정의를 실현하시기 위하여 심판하고 징계하시는 분이다.
신앙인들과 주님의 몸된 교회는 삼위 하나님으로부터 책망이나 징계나 심판을 받지 않도록 오직 삼위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와 뜻과 섭리를 따라서 오직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신앙인들에게는 책망과 심판과 징계보다는 위로와 격려와 상급을 마음껏 주시고 싶어하는 마음이 들도록 신앙인답게, 빛된 삶, 맛을 내는 소금의 삶을 살면서 예수그리스도의 좋은 향기를 풍겨낼 수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그러기 위해서 늘 말씀과 기도와 감사와 찬양과 헌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신앙인의 삶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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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흐르는 물에 떠내려가는 사람의 마음은 조급합니다..
그러나 언덕에 서서 흐르는 물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은 여유롭고 평화롭습니다..
내게 미움이 다가 왔을때 미움 안으로 몸을 담그지 마십시오..
내게 걱정이 다가왔을 때 긴 한숨에 스스로를 무너뜨리지 마십시오..
미움과 걱정은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지나가 버리는 것일 뿐입니다..
미움 걱정 떨쳐 버리고 새로운 마음으로 즐겁게 보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