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도군고금면척찬리 나의 국민학교친구들 중에는 원양 어선선장이
된 친구가 두명 있다.둘다 완도수산고등학교를 졸업했고,그중 우 H선장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군대에 갔다온 후 곧 원양어선을 탔다.2등 항해사였다.그런데,사모아해역에서
조업하던 중 태풍을 만나 조난을 당했고,그때 침몰한 선원들 23명을 구조했다.
이에 대한 공을 인정받아 선장으로 특진한 것이다.그때가 23세였다.
그는 세상 무서울 것이 없었다.내가 대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광주에 갔더니
천만원을 벌어왔다며 고금면은 말 할 것 없이 완도군에서 영웅이 되어 있었다.
광주에서그를 만난 나는 집사라고.지산동이며 법원근방을 데리고 다녔다.
당시 천만원이면 집세채를 살 수 있는 거금이었다.그런데도,그는 집을 사지않고
그까짓것 다음에 한번가면 천만원은 쉽게 벌 수 있는데 뭐하러 집을사느나며,
매일 술집.룸살롱에 가서 양주를 서너병씩마시고 팁을 몇십만원씩 주었다.
또양복한벌에 육만원짜리를 서너벌을 샀다.나는그 돈이 너무 아까와 같이 룸살롱에도
가지않았다.돈을 다 써버리고,그는 또 원양어선 선장으로갔다.
한편 우 M호는 군산수산전문대학에 진학했다.
거기서 같은 반 하루코(한국명.춘자)를 펜팔친구로 소개해주어서
대학4년 내내 그녀의 편지를 기다리 는즐거움을 가졌다.
우 M호는 재학중 군대에 갔고.그때도 나와 편지를 주고 받았는데,군대생활의 갈등을
자주해와서그를 위로 하느라 무진애를 썼고.병역의무를 마치고 원양어선을 탔다.
수산대학을 나왔기때문에 바로 선장이 되었다.배를 탄지 3년만에 귀국했는데.
그때 그도 천만원을 벌어왔다.그는 부산 서면에100평.
범일동에100평을 샀고,부산외곽 지역에 천평,이천평씩 땅을 샀다.
그렇게 십여년간 계속 투자했다.
그가 배를 타지않게 되었을 때 그는 거부가 되어 있었다.
그땅들이 열배,백배올랐기 때문이다.내가 1989년 풀무원 식품 지방사업 본부장으로
부산에 갔을 때,장전동 대성횟집에서 회를
샀다.그리고는 다시 광안리 룸살롱으로 가서 양주를 거니하게 샀다.
그리고그날밤광안리바다가보이는아름다운 아파트 안방에서 잠을 잤다.
우선장의 형중에는유명한 춤꾼이있다.동생이 돈을 많이 벌어 왔다는
소식을 듣고 그 에게 갔다.흰구두에 하얀 양복.흰 모자를 쓰고 동생에게 가서
돈을 달라고했 다.
이를 본 우선장이 "형님.당장에 가서 청바지와 헌구두를 입고 오세요"그리고는
형이 그 차림으로 오자 1톤짜리 트럭을
사주고,생선,과일등을 팔게 했다.그 형은 지금은 훨씬 더 큰 화물차를 사서
어느 정도 여유있는 생활을 하고 있다.
그때 펜팔 친구 하루꼬에 대한 이야기도 했다.
그리고는 부산에 냉동창고를 짓고 회사를 설립해서 회징이 되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잇다.
그후소식이 뜸했는데 작년 2017년 4월 자서전 출판기년회때 화환과 축의금을 보내서
나를 격려해주었다.또,우 M선장은 2011년 10월 고금국민학교 개교 100주년때 1억원을
기부하기도 했다.한편 우 H선장은 지금까도 집도 없이 떠돌아 다니고 있다.
얼마전 우리 고등학교 동기 이완식이를 잠실역에서 만나 우선장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했다.
그 똑똑한 친구가 인생의 길을 잘못들었다고 안타까워 했다.
고향사람들과 연락도 되지 않고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인생에서 항상 젊은게 아니고,
인생을 멀리보고 성실하게 살았어야하지 않을까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돈벌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것도 아닌데,
그는 젊은 시절 내가 집을 사라고 데리고 다녔던 일을 기억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