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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신자로서 알아야 하는 미사] 31. 미사 해설 - 말씀 전례 (7) 말씀 전례 중 복음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또한 사제(부제)의 영과 함께.
부제 또는 사제가 말한다.
✛ ( )가(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이렇게 말하며 책과 이마와 입술과 가슴에 십자 표시를 한다. 다른 모든 이도 이마와 입술과 가슴에 십자 표시를 한다. 교우들은 환호한다.
◎ 주님, 영광 받으소서.
복음 낭독 전 주례 사제와 교우들은 다음과 같이 계응을 주고 받습니다. 말씀 전례는 복음환호송 다음에 “복음”으로 이어집니다. 복음이란 단어에는 “복된 소식”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교우분들께서 이미 아시다시피 신약 성경 중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말씀을 담은 4복음서(마르코, 마태오, 루카, 요한) 중에서 낭독됩니다. 복음은 부제와 사제만이 봉독할 수 있습니다. 복음 봉독 시 미사 전례에 참석하는 이들은 사제 또는 부제가 ‘( )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라고 말하면 ‘주님 영광 받으소서.’라고 화답합니다. 이때, 신자들은 이마와 입술 그리고 가슴에 작은 십자성호를 긋습니다. 이는 듣는 복음을 머리로 생각하고, 입으로 복음 말씀을 전하며, 마음으로 간직하고 몸과 마음으로 믿어 말과 행동으로 실천하겠다는 믿는 이들의 고백이고, 의지의 표현입니다.
예식서에서는 사제가 복음 낭독 바로 전에 다음의 기도를 바치도록 제시합니다.
사제는 제대에 허리를 굽히고 속으로 기도한다.
✛ 전능하신 하느님,
제 마음과 입술을 깨끗하게 하시어
합당하게 주님의 복음을 선포하게 하소서.
이 기도는 사제가 속으로 외우는 기도이기에, 신자분들께는 생소한 기도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을 낭독하는 사제가 다음과 같은 기도로 복음을 선포한다는 점은 우리가 어떠한 마음과 자세로 복음을 전해받아야 하는지 일러줍니다. 복음 전 사제의 기도를 응용한다면, “제 마음을 깨끗하게 하시어 합당하게 주님의 복음을 전해 듣게 하소서.”의 내용으로 묵상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내용은 전례법적인 요소는 아닙니다. 그러나 복음을 듣기 전 다음과 같은 기도로 마음을 모으고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다면 복음이 낭독되는 시간은 따분한 시간이 아닌, 우리 마음 안에 친히 오시는 그리스도를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도 “복음”에 대한 설명이 계속됩니다. [2023년 1월 1일(가해)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세계 평화의 날) 대전주보 4면, 윤진우 세례자요한 신부(사목국 차장)]
[가톨릭 신자로서 알아야 하는 미사] 32. 미사 해설 - 말씀 전례 (8) 말씀 전례 중 복음 (2)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전례 개혁의 일환으로써 복음은 주일미사를 기준, 3년 주기(가해, 나해, 다해)로 배분되었습니다. 그리고 평일미사를 위해서는 이와 병행하여 2년(홀수해, 짝수해)을 주기로 배분하였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매일미사 앞표지에 보면 해당연도가 가해인지, 나해인지, 다해인지 표기되어 있는데, 이는 독서의 배분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특별히 복음 배분에 있어서 연중 주일에는 공관복음을 기준으로 ‘가해’에는 마태오 복음서, ‘나해’에는 마르코 복음서, ‘다해’에는 루카 복음서를 낭독합니다. 이 중 ‘나해’에는 마르코 복음서는 분량이 짧기 때문에 연중 17-21주일에는 요한복음서로 보충하고 있습니다. 주일 독서의 경우는 독서와 복음의 연관성을 고려하였으나, 평일 독서는 주일과 대축일의 성경내용을 보충하는 것이므로 연관성의 조화를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특별히 이러한 전례규정은 미사에 참석하는 모든 신자들이 3년에 걸쳐 성경의 중요한 부분을 들을 수 있게 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생활 속에서 실천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입니다.
미사 중 복음 낭독이 끝나면, 사제나 부제는 속으로 다음의 기도를 바칩니다.
이어서 부제나 사제는 책에 고개를 숙여 경건하게 절하면서 속으로 말한다.
✛ 이 복음의 말씀으로 저희 죄를 씻어 주소서.
지난주에 복음 전에 사제가 바치는 기도를 소개해 드렸습니다. 물론 지난주에 알려드린 부분과 같은 맥락에서 위에 소개된 기도 역시 교우들에게 해당되는 예식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러한 부분을 알려드리는 이유는 우리 또한 복음이 가진 은총과 힘을 의식하며 이 시간을 봉헌하자는 의미에서입니다. 복음을 포함한 전례 안에서 말씀을 선포하는 이들의 자세에 대해서는 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 38항에 제시되어 있습니다.
“독서, 기도, 권고, 환호, 노래는 사제나 부제 또는 독서자가 모두 크고 분명한 목소리로 말해야 한다. 이러한 본문을 발음할 때는 그 본문의 유형에 따라 목소리를 맞추어야 한다. 또한 거행의 형식과 집회의 장엄성에도 맞추어야 한다. 나아가 여러 언어의 특성과 백성의 문화도 고려하여야 한다.”
복음이 낭독되는 순간, 미사에 참여한 모든 이는 우리에게 오시는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만남은 살아 움직이는 하느님의 계시된 은총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은총을 전달하는 이들은 최대한 분명하게 전달하는 데 집중해야 하며, 미사를 봉헌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 은총에 머무르고, 묵상함으로써 우리가 온전히 그 은총을 담아 나아갈 수 있도록 마음을 모으는 것이 우리에게 요구되는 합당한 자세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강론”에 대해서 설명드리겠습니다.
[주님 성탄 대축일] 구세주 강생 이야기와 ‘성탄 구유’
성탄 구유, 하느님의 자애 드러내는 거룩하고 놀라운 표징
12월 25일 주님 성탄 대축일이다. 가톨릭교회는 24일 저녁 성탄 전야 미사부터 주님 세례 축일까지 전례력으로 ‘성탄 시기’라 하여 구세주 강생 신비를 기념한다.
구세주 강생 이야기는 마태오와 루카 복음서에 자세히 나온다. 마태오 복음서는 주님 탄생과 함께 동방 박사들의 경배 소식을 알려준다. 루카 복음서는 예수님 탄생을 로마 제국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칙령으로 시행된 호적 등록과 연계해 소개한다. 다윗의 후손인 요셉이 호적 등록을 하기 위해 다윗의 도시라 불리는 베들레헴에 가야 했고, 그곳에서 마리아가 주님을 낳았다고 한다. “그들이 거기에 머무르는 동안 마리아는 해산 날이 되어, 첫 아들을 낳았다. 그들은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2,6-7)
반면, 요한 복음서는 마태오와 루카 복음서의 주님 강생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선포한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1,14)
구세주 강생에 대한 성경 말씀을 종합하면,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11)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또 그분을 향하여 창조”(콜로 1,16)되었지만, 세상의 구원자를 위한 자리는 없었다. 그래서 구세주는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리인 마구간에서 태어나셨고, 구세주의 어머니 마리아는 갓난아기인 주님을 구유에 뉘었다.(루카 2,7) 하지만 목동들과 동방 박사들이 주님을 찾아와 경배하고, 하느님의 영광을 보게 되었다라고 정리할 수 있다.
‘성탄 구유’는 구세주 강생의 거룩하고도 놀라운 표징이다. 교회는 “이 가난에서 하늘의 영광이 드러난다”(「가톨릭교회 교리서」 525항)고 고백한다.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이를 돕는 사람에게 복을 주시고 가난한 이에게 등을 돌리는 사람은 배척하신다. 주님이신 예수님께서는 구유에서부터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가난한 이들의 삶에 참여하셨다. 주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파견되셨다. 나아가 주님께서는 가난한 이에게 해준 것이 곧 당신 자신에게 해준 것이라고 말씀하신다.(「가톨릭교회 교리서」 544, 2443항 참조)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18-21 참조)
성탄 구유는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자애’를 드러낸다. 온 세상의 창조주께서 자신을 낮추시어 우리와 같이 작아지셨다.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길을 잃고 헤맬 때마다 우리를 찾아 주실 형제, 늘 우리 곁에 계시는 충실한 벗인 당신의 외아드님이신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셨다. 당신 아드님을 우리에게 주시어 우리를 용서하시고 죄에서 구해 주셨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성탄 구유의 의미를 이렇게 풀이했다. “구유는 동물의 여물을 담는 통이다. 그런데 지금 그 구유에 자기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참된 빵으로,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해 필요한 참된 양식으로 드러내신 분이 누워 계신다. 그분은 인간에게 참 생명, 영원한 생명을 주는 양식이다. 이렇게 구유는 인간이 하느님의 빵을 얻기 위해 초대된 하느님의 식탁을 암시한다.”(「설교집189,4)
프란치스코 교황도 “구유 앞에서 생명의 양식은 물질적 부가 아니라 사랑이고, 폭식이 아니라 나눔이며, 과시가 아니라 소박함이란 것을 깨닫는다. 생명의 양식인 그분을 받아모심으로써 사랑 안에서 다시 태어나고 욕심과 탐욕의 악순환을 깰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탐욕하고 독점하는 삶이 아닌 나누고 베푸는 삶을 살도록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 주신다”고 설명했다.
성탄 구유는 하느님께서 당신 사랑이 가장 필요한 이들 그리고 가까이 와 주십사 청하는 이들을 위해 사람이 되셨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러므로 주님의 가난한 탄생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가난한 이들에게 다가가고 그들을 사랑하라는 요청이다. 하느님께서는 구유에서 탄생하심으로써, 상속받지 못한 이들과 소외된 이들에게 희망과 존엄을 줄 수 있는 유일하고 참다운 혁명을 몸소 시작하셨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를 “사랑의 혁명, 자비의 혁명”이라고 정의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런 의미에서 주님 성탄 대축일을 앞두고 성탄 구유를 설치하는 교회 풍습을 장려했다. 성탄 구유 풍습은 1223년 12월 25일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그레치오의 한 동굴에 베들레헴의 마구간을 재현하면서 교회 안에 확산됐다.
구세주이신 아기 예수님은 구유에 누워서 온유하지만 힘차게 가난한 이들과의 나눔의 필요성을 선포하신다. 이는 아무도 소외되거나 배척받지 않는 더욱 인간적이고 형제애 넘치는 세상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그래서 교회는 “성탄의 신비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형성될 때 우리 안에서 성취된다”고 가르친다. (「가톨릭교회 교리서」526항)
[성탄 특집] 니콜라오 성인은 왜 산타클로스가 됐을까?
자선 위해 몸 바친 성인의 헌신… 세상을 수놓는 사랑의 선물로
하얀 수염에 붉은 볼, 둥그렇게 나온 배에 후덕한 풍채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기 위해 굴뚝을 오르내리는 할아버지. 산타클로스는 크리스마스 하면 떠오르는 기분 좋은 상징 중 하나다. ‘착한 어린이에게 선물을 준다’는 산타클로스의 원칙은 전 세계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산타클로스의 존재여부를 밝힐 수 없는 이유가 됐다. 굴뚝을 타고 선물을 전하는 후덕한 풍채의 산타클로스가 실제로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자선을 행하며 산타클로스의 유래가 된 인물은 존재한다. 바로 니콜라오 성인이다.
니콜라오 성인, 산타클로스로 우리 곁에 다시 오다
4세기경 소아시아지역 미라(Myra) 주교로 활동했던 니콜라오 성인은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를 통틀어 가장 널리 알려지고 공경되고 있는 성인 중 하나다. 따라서 독일, 스위스, 네덜란드 등지에서는 그의 축일(12월 6일)을 기념해 행사를 개최했는데, 자선을 베풀었던 성인의 모범을 따라 축일 전날 밤에 선물을 교환하고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나눠주기도 했다.
산타클로스가 대중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지금의 미국 뉴욕인 뉴암스테르담에 정착했던 네덜란드인들이 성 니콜라오 축일에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나눠 주는 관습을 미국에 소개하면서다.
성 니콜라오를 라틴어로 표기하면 ‘상투스 니콜라우스’(Santus Nicolaus)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이를 ‘신터 클레스’(Sinter Claes)라고 불렀고, 미국으로 이주한 네덜란드 사람들에 의해 전해져 ‘산타클로스’라는 영어식 이름으로 변화했다.
흰 수염에 둥그렇게 나온 배, 유쾌하게 웃으며 순록이 끄는 썰매를 타고 다니는 산타클로스의 모습은 1800년대 미국에서 만들어졌다. 미국 소설가 어빙은 1809년 「뉴욕에 정착한 네들란드 후손들의 역사」라는 책에서 산타클로스를 토실토실 살이 찌고 유쾌하게 웃고 있으며 테가 넓은 모자를 쓰고 긴 담뱃대를 물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했다.
1823년 미국 문학가 무어는 ‘성 니콜라오의 방문’이라는 시를 통해 순록과 썰매를 탄 반짝이는 눈의 산타클로스를 묘사했다. 한편 미국의 만화가 토머스 내스트는 1863년 「주간 하퍼 삽화」에서 남북 전쟁이 벌어지고 있던 당시의 군인들을 찾아다니며 선물을 나눠 주는 모습으로 산타클로스를 묘사했다. 이 삽화에서 그는 여덟 마리의 사슴이 썰매를 끌고 있는 모습과 함께 수염 난 산타클로스를 유쾌하게 웃는 모습으로 묘사함으로써 더욱 현대적이고 대중적인 이미지에 가깝게 표현했다.
불쌍한 이들 돕는데 헌신한 니콜라오 성인
3세기 말 소아시아 리키아(지금의 터키) 지방의 파타라에서 태어난 니콜라오 성인은 돈 많은 부모를 일찍 여읜 후 물려받은 재산을 불쌍한 이들을 돕고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헌신하는 데 바쳤다.
니콜라오 성인이 사제로 서품된 지 얼마 안 돼 미라의 주교가 선종했는데 적당한 후임자가 없어 열심히 기도를 했던 주교들은 밤중에 하늘에서 “내일 아침 성당에 맨 먼저 들어오는 ‘니콜라오’라는 자를 뽑으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전해진다. 이튿날 아침 조배하러 성당에 갔던 니콜라오는 그 즉시 주교로 축성됐다.
그의 선행에 관해서는 이어져 내려오는 여러 전설이 있다. 그 중 하나가 세 처녀 이야기다. 결혼 지참금이 없어 출가하지 못했던 세 자매. 고민하던 세 자매의 아버지는 궁리 끝에 딸을 팔아넘기기로 결정했고, 이를 알게 된 니콜라오 성인은 황금이 든 자루를 이들에게 전했다. 그 중 한 자루는 밤중에 창문으로 들어가 난로 가에 걸어 놓은 양말 속에 넣어줬는데, 크리스마스 전날 밤에 양말을 걸어 놓는 관습은 이 전설에서 유래했다.
크리스마스에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는 이벤트도 니콜라오 성인과 관련이 있다. 기근이 든 해에 마음씨 나쁜 여관집 주인이 아이 셋을 죽인 후 손님들에게 먹을거리로 팔기 위해 소금에 절이는 일이 발생했다. 이 일은 12월 24일에 일어났는데 이 사실을 알게 된 니콜라오가 죽은 세 아이를 부활시켰다고 전해진다. 이 전설로 인해 니콜라오 성인은 서유럽에서 어린이들의 수호성인으로 알려지게 됐으며, 이후 크리스마스 때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는 산타클로스로 자리잡았다.
또한 남의 허물을 뒤집어쓰고 억울하게 사형을 받게 된 3명의 청년을 구해 주거나 물에 빠진 선원들을 기적적으로 구해주기도 했던 니콜라오 성인은 지금도 선원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 받고 있다.
성탄절을 보내며 우리가 기억해야 할 니콜라오 성인의 정신
루돌프가 끄는 썰매에 선물을 가득 싣고, 크리스마스 전날 밤 어린이들이 있는 집을 방문하는 산타클로스. 시대가 변하며 산타클로스는 크리스마스를 상징하는 이미지로 소비되고 있지만, 신앙인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그 안에 담긴 니콜라오 성인의 정신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루카 6,38)라는 복음 말씀을 실천했던 니콜라오 성인의 뜻이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전하는 산타클로스에게 투영돼 있기 때문이다.
교회 곳곳에서는 주님 성탄 대축일을 맞아 니콜라오 성인의 나눔 실천에 동참하기 위한 다양한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한마음한몸운동본부(이사장 유경촌 티모테오 주교)는 2006년부터 산타클로스의 나눔 정신을 실천하는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산타가 되어 주세요’ 캠페인은 소아암이나 희귀난치병으로 투병중인 아동 및 청소년들에게 특별한 크리스마스 선물을 전해주는 이벤트다. 한마음한몸운동본부 김영삼(그레고리오) 홍보팀장은 “병원에서 크리스마스를 기쁘게 지내지 못하는 아이들과 함께 기쁨을 누리고자 선물을 전하는 캠페인을 시작하게 됐다”라며 “산타클로스가 갖는 나눔의 의미를 이 캠페인을 통해 실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교황청재단 고통받는 교회돕기(Aid to the Church in Need·ACN) 한국지부(이사장 유경촌 주교)도 ‘그리스도인 난민 가정에게 희망을’ 캠페인을 통해 난민 가정을 위해 자선을 실천하며 성탄을 보내길 요청하고 있다.
전례와 미사의 영성 (36) 미사 안에서의 기념(Anamnesis)
미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루카 22,19)하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거행하는 주님 사랑과 희생의 기념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찬 전례 안에서 바치는 감사 기도를 통해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 주시며 하신 말씀을 반복하면서 그분의 사랑과 희생, 죽음과 부활을 다시 기념하게 됩니다. 이렇게 감사 기도문 안에서 주님의 사랑과 희생을 ‘기념’(Anamnesis)하는 부분은 ‘성령을 청원하는 부분’(Epiclesis)과 더불어 성찬 전례 안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됩니다. 특별히 이 ‘기념’ 부분에서 교회는 우리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의 파스카 신비를 기억하면서, 그 신비를 통해 우리를 성부와 화해시키신 그리스도를 성찬의 희생 제사 안에서 성부께 봉헌하게 됩니다.
이러한 전례적 ‘기념’과 관련하여 특별히 우리가 기억하고 되새겨야 할 중요한 내용이 있습니다. 이 내용에 대해 전례 사전에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만약 전례적 기념이 우리의 인간적 기억에만 관련된다면 그것은 단순히 축제적 기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전례적 기념에는 하느님의 실제 ‘기억’이 포함되며 어린 양의 희생 제사는 세상 창조 때부터 효과를 낸다(묵시 13,8). 그러므로 전례는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범주를 포괄하고 넘어가는 신비를 현존케 한다. 우리 기억을 하느님의 기억에 합치시키는 모든 전례적 행위는 우리로 하여금 확실히 하느님의 영원성에 참여하게 한다”(주비안 피터 랑, 전례 사전, 가톨릭출판사 2005, 68 참조).
여기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중요한 내용은 첫째, 전례적 ‘기념’이 인간적 ‘기억’을 초월하여 하느님의 구원 역사와 연결된 개념이라는 것. 둘째, 전례는 시간의 범주(과거, 현재, 미래)를 포괄하는 것이기에 전례적 행위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영원성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미사 때의 ‘기념’은 이천 년 전 예수님의 사랑과 희생을 단지 인간적으로 ‘기억’함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념’을 통해 우리의 유한성이 하느님의 영원성에 참여하는 순간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우리가 미사 안에서 행하는 기념은 단순히 과거의 구원 사건을 회상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베푸신 위대한 구원을 선포하며 ‘지금 여기서’ 그 구원 사건이 재현되고 현재화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전례적 ‘기념’을 통해 이천 년 전의 구원 사건에 우리가 참여할 수 있고, ‘나’의 구원이, 아니 ‘우리’의 구원이 ‘지금 여기서’ 이뤄짐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오직 감사드리는 것뿐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감사로 가득 차 기쁨 가득한 찬미를 드립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하나 되어, 전능하신 천주 성부 모든 영예와 영광을 영원히 받으소서.”
[가톨릭 신자로서 알아야 하는 미사] 29. 미사 해설 - 말씀 전례 (5) 말씀 전례 중 화답송
말씀 전례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키워드는 “거룩한 대화”입니다. 곧, 일방적인 교육이 아닌,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소통하는 것이 말씀 전례의 핵심입니다. 대화란 말하고, 듣기가 반복됨을 말합니다. 우리가 독서를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다면, 화답송을 통해 우리가 하느님께 말씀을 올려드리는 행위는 말씀 전례의 매우 흥미로운 요소입니다. 종종 신자분들께서 이 화답송에 대해서 “듣는 부분”이라고 오해하지만, 이 부분은 분명 우리 입장에서의 “화답”입니다. 물론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 몇몇 신자분들께서는 또 다른 질문을 가지실 수도 있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느님께 올려 드리는 것이 아닌데 어떻게 “대화”라고 할 수 있는가?> 충분히 가질 수 있을 만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말씀 전례에서의 대화는 “말씀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대화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우선, 현행 전례법인 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에서 제시하는 화답송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화답송은 말씀 전례에서 떼놓을 수 없는 부분이며, 전례적으로도 사목적으로도 매우 중요하다. 화답송은 하느님 말씀에 대한 묵상을 도와준다. 화답송은 그 독서 내용에 어울려야 하며, 원칙적으로 [미사 독서]에 있는 것을 사용한다(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 61항).』
흔히들 신자분들께서 독서의 중요성보다 화답송의 중요성을 크게 생각하지 않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화답송은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에 답변을 드린다는 점에, 나아가 하느님 말씀에 대한 묵상을 돕는다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지금은 “화답송”이라고 부르지만, 한때는 “층계송”이라 불렀습니다. 이는 하느님 말씀을 들은 하느님 백성들이 계단(gradus)에 앉아 경청하다가 시편으로 구성된 노래를 불렀다는 것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화답송 때 시편 선택은 전례주년에 맞추어 독서와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화답송은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기도로 화답함”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공동체 전체가 참여하는 노래로 준비하여야 합니다. 화답송을 노래로 하기 위해 성가대의 아름다운 화음을 통해 표현하는 것도 좋지만, 적어도 후렴 부분은 공동체 전체가 참여하는 것이 좋습니다. 화답송을 성가대가 따로 노래하지 않는다면, 독서자나 화답송을 노래하는 다른 봉사자가 독서대에서 노래하거나 낭송하는 것이 좋습니다. 또한 화답송을 노래로 하거나, 낭송을 할 때 너무 긴 시간이 소요되어 공동체가 지루해하거나, 너무 어려운 곡을 선택하여 공동체가 소외되는 경우가 발생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합니다. 다음 시간에는 “복음 환호송”에 대해서 설명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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