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뜨개 스웨터와 벙어리 장갑
유옹 송창재
요며칠 상당히 추워졌다.
어느 아주머니가 털실 모자를 쓰고 서실에 오셨다.
예전에는 흔하던 손뜨개 털실모자였다.
나이가 드신 아주머니이다.
“직접 뜨신 거예요?”
“아니, 딸이 떠서 보내준 거예요.”
“ 따님이 몇 살인데요?”
“이제 30이에요. 서울서 학교 마치고 직장에 다니는데, 어찌 시간이 있는지 짜서 보내 줍디다.”
“솜씨도 좋고 성격이 찬찬한가 봐요.”
“ 예, 그런 편이에요.”
그저께 서실에 가서 내 옆에 앉으신 아주머니와 한 얘기 이다.
항상 차분하게 붓글씨를 쓰시는 엄마의 솜씨와 성격을 닮았나 보다.
이제 서른이고 괜찮은 직장에 다닌다면, 엄마가 겨울에 추운데 나다니신다고 직접 손으로 모자를 떠서 보내 줄 시간적 여유를 찾기가 어려울 텐데...
더구나 미혼이라는 그 딸의 모습이 보일 듯하다.
그래서 딸은 엄마를 닮는다 하나?
엄마는 감수성도 많으셨고 솜씨가 좋으셨다.
우리 식구들은 겨울이면 누구나 한 가지씩은, 엄마가 털실로 직접 짜준 장갑이나 목도리나 스웨터를 입거나 두르고 다녔다.
벙어리장갑은 끈까지 달아서 목에다 걸고 다녔고, 그것이 싫다고 하면 손가락장갑을,
짧은 목도리가 싫다고 하면 긴 목도리를,
스웨터가 싫으면 조끼를…
엄마는 뭐든지 대나무를 깍아 만든 코바늘로 잘 떠 주셨다.
그 대나무 코바늘은 해마다 겨울이 되면 어김없이 찾아 나와서는
엄마 손가락 사이에서 미끄러지듯 반짝이며 춤을 추었다.
엄마는 겨울 밤이면 거의 매일 뜨개질을 하셨다.
아이들이 많아서 일일이 돈을들여 겨울 옷을 장만하시기가 어려우니, 털실을 이용해서 우리들의 겨울용품을 손수 만드셨고 또한 솜씨도 좋으셨다.
이렇게 뜨개질을 하실 적에는 누나, 여동생들을 모두 불러 앉히시고 뜨개질 방법을 가르쳐 주시면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뜨개질을 하셨고, 헌 스웨터나 조끼를 풀어서 실을 색색으로 나누어 감아놓는 일은 내 몫이었다.
식구들의 겨울채비를 하기 위해서는 털실이 많이 필요했다.
그렇다고 그 많은 분량의 털실을 전부 살 수가 없기 때문에 형 옷은 내가 물려 입고, 누나 옷은 동생이 물려 입고.. 그러다가 물려받는 것이 싫어서 안 입겠다고 투정하면 그것을 다시 풀어 새 옷을 만드시곤 하셨다.
오래 입다보면 팔꿈치나 가장자리에 보푸라기가 생기거나 닳아서 헤지면 다시 떠 주시지만, 실을 풀어도 잘라내야 하기 때문에 처음 보다는 실의 양이 많이 부족하다.
그러면 서로 다른 실을 엮어서... 두 개를 풀어 한 개를 만들고, 큰 것을 풀어 작은 것을 만드셨다.
헌 것을 풀면 실이 고불거려서 예쁘게 감아지지도 않고, 끊어진 것을 일일이 묶어야 하기 때문에 색색의 털실뭉치를 감는 일도 상당히 귀찮은 일이었다.
그럴 때면 나는 숙제한다는 핑계로 작은 방으로 도망을 갔다. 그러면 그것은 작은 동생의 몫이었다.
큰방 윗목에 놓인 작은 상 위에는, 조그마한 대바구니에 여러 색의 털실뭉치와 대나무로 깎아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하게 윤이나는 몇 개의 뜨개바늘과 함께 뜨다만 옷가지들이 늘 준비되어 있었다.
그래서 동생들도 밖에서 놀다가 들어와 따로 놀 거리가 없으면 자연스럽게 털실꾸러미에 손이 가고, 나중에는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뜨개질을 할 정도가 되었다.
물론 동생들이 뜨는 것들은 간단한 소품들이었고 뜨다가 모르면 저녁에 엄마하고 함께 마무리를 하였다.
그렇게 여러 해를 하다 보니 누나와 동생들의 솜씨도 늘어서 나중에는 작은 소품들은 누나가 맡아하고 엄마는 크고 복잡한 것을 하셨다.
누나는 물어보고 엄마는 설명해 주며… 여기서는 몇 코를 줄이고, 이렇게 뒤집어서 몇 코를 더 만들어 주고,,
그러면 동생들도 자투리실로 이어서 조금씩 배워가는 식이었다.
그래서 우리 집 여자식구들은 지금도 뜨개질을 전부 다 잘한다.
이렇게 정성들여 손수 만들어 주시는 것들을, 철없는 나를 비롯한 작은 아이들은 매년 겨울이면 입어야하는 뜨개 옷이나 목도리 장갑들이 싫고, 다른 아이들처럼 화려한 비닐 옷이나 장갑들이 부러워 보여 안 입겠다고 투정을 부리고는 하였다.
하지만 조금 자라서는 엄마의 정성을 알고 고마워서 자주 입다보니 그 따뜻함과 부드러운 촉감이 좋아 지금도 니트 옷을 좋아한다.
엄마가 떠 주셔서 대학 다닐 때 아껴서 입고 다녔던, 짙은 회색 굵은 발의 스웨터가 지금도 내 옷장에 걸려있다.
자주 입지를 않고 깨끗이 간수하여 지금도 깔끔하다.
참 대단하다. 40여년이 되었는데...
아주머니의 털실 모자를 보니 생각이 나서 엄마의 그 스웨터를 챙겨 두었다. 며칠 입으려고.
겨울철이면 항상 등장하는 손으로 뜬 방울달린 빵모자, 벙어리장갑, 털실목도리는 이제는 화학제품과 기계제품에 밀려서 보기가 어려워졌다.
예전보다는 세련되고 색상도 더 화려하고, 별스러운 모습의 제품들이 나와 길거리를 누비고 다니지만, 아무리 눈여겨 보아도 투박하지만 정감이 가는 엄마의 손 솜씨는 찾아보기가 어렵다.
엄마가 할 줄 모르니 딸들도 모르는 것은 물론이겠지만, 돈만 있으면 더 예쁘고 멋진 것들을 쉽게 갈아입고, 쓰고, 멋을 낼 수 있는 세상인데, 앉아 힘들이고 청승떨며 굳이 누가 그런 짓을 하나? 그런가 보다.
하지만 누구인가를 위해서 지금도 뜨개질을 하는 어느 한 여인을 알고 있다.
그 모습이 새로워 가끔 옛날을 더듬기도 한다.
이것은 돈이 아니고 정성이고 사랑인데...
추운겨울 코가 시리는, 외풍이 심해 별로 따뜻하지도 않은 방에서 이불을 둘러쓰고 앉아 엄마와 딸들이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어가며, 서로 손가락을 재보며 어깨넓이도 재보고 콧수를 늘이고 줄이며, 장갑을 뜨고 스웨터를 짜던 모습이 과연 청승맞고 구질구질한 모습일까?
돈만 들고 나가면 별것을 다 해결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지만..
요즘은 보기도 힘들어진 군고구마, 군밤장수 아저씨의 각시가 떠준 벙어리장갑, 빵모자가 보이질 않는 것이, 우리의 고향을 잃어가는 떠돌이들이 물질에 쫓겨 한 평생을 허덕거리며 사는 인생을 보는 것 같아 며칠의 매서운 겨울추위가 더욱 으스스하다.
그 때의 겨울은 밥상위의 밥그릇이 미끄럼을 타고, 문고리를 잡은 손이 쩍쩍 붙을 정도로 추웠어도, 먹지 못하고 잠잘 집이 없어 다리 밑에서 얼어 죽는 사람들은 있었지만, 엄마, 아빠가 때리고 밟고 한겨울에 찬물을 끼얹어 얼어 죽은 아이들은 없었는데....
이것이 과연 발전이고 진보일까? 인간의 부재는 아닐까?
엄마도 보고 싶고, 엄마의 모자를 떠서 보내준 아주머니의 딸도 보고 싶다.
내일은 엄마의 회색 스웨터를 챙겨 입어야지!
앞으로 몇 년이나 더 입을 수 있을는지.
일 년에 한 주일씩만이라도 입어야겠다.
첫댓글 매서운 바람 부는 겨울날에
혹시 나들이에 맨손보다는
벙어리 장갑 하나 만이라도 있으면
차가움에서 따뜻함을 느낄 수 있겠지요.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바깥 날씨 차가운 오늘, 따뜻한 스웨터 이야기 훈훈하네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