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홍 글씨>는 1850년에 나다니엘 호손이 쓴 동명 소설을 <미션>, <킬링 필드>의 명감독 롤랑 조페가 영화로 만든 작품입니다. <주홍 글씨>라는 호손의 소설 제목은, 지금도 '다시씻기어려운불명예스러운욕된판정이나평판'을비유적으로이르는말로써 하나의 보통명사가 되었습니다.
롤랑 조페는 영화에서 17세기 미국의 뉴잉글랜드 지방의 엄격하기 짝이 없는 청교도 사회를 그렸습니다. 작가 호손도 실제로 매사추세츠에서 청교도였던 선조에게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그런 까닭인지, 호손의 이 작품에 대해, '죄지은 자의 고독한 심리묘사를 치밀한 구성으로 그려낸 19세기 미국문학의 걸작'이라고들 일컫습니다.
엄격한 금욕주의 신앙운동을 펼쳤던 청교도들은 영국 국교회의 박해를 피해 신대륙을 찾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도착한 곳이 바로 오늘날 뉴잉글랜드라고 불리는 지역의 매사추세츠였습니다. 정작 종교의 박해를 받은 청교도들이 새롭게 정착한 곳에서 원주민인 인디언을 노예로 삼고, 한편으로는 너무도 엄격한 교리를 통해 교인들을 무시무시한 형벌로 다스린다는 사실은 커다란 모순이기도 했습니다.
롤랑 조페는 이 영화를 통해 종교가 인간의 욕망에 따라 자의적으로 해석되고, 편향적으로 인간의 생각을 합리화하는지를 넌지시 들추어내고 있습니다.
* 영화의 포스터
* 간략한 줄거리
이 영화의 주공이자 간음한 여인이라고 가슴에 가장자리를 수놓은 주홍빛 A(Adultery의 첫 자)를 달고 사는 헤스더 프린(데미 무어 분)은 몰락한 영국 귀족의 딸입니다. 그녀는 부모에 의해 나이 많은 학자인 로저 프린(로버트 듀발 분)과 원치 않은 결혼을 하고 미국 뉴잉글랜드 지방으로 건너오게 됩니다. 헤스더는 아름답고 현명하고 정의롭고 주위 사람들에게 선을 베푸는 여인이기도 합니다.
그녀의 남편 로저는 인디언에게 잡혀가 죽은 것으로 알려지게 됩니다. 그러는 와중에 그녀는 그 지방의 존경받는 청년 목사 딤즈데일(게리 올드만 분)과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그녀는 곧 임신했고 딸을 낳게 됩니다. 이를 알게 된 주민들이 들고 일어나면서 실제 아버지가 누구냐고 형벌대 위에 올려놓고 무자비하게 추궁하지만 그녀는 끝내 입을 열지 않습니다.
이후 그녀는 불륜을 뜻하는 A를 가슴에 달고 살게 됩니다. 한편 딤즈데일은 헤스더를 사랑했으나 자신이 쌓은 명성과 체면을 저버릴 수가 없어 본인이 애기의 아버지라고 선뜻 나설 수도 없는 갈등 속에 헤맵니다. 양심의 가책과 자신을 갉아 먹는 위선 속에 점차 심신이 피폐해져 갑니다.
* A자를 달고 있는 헤스더 프린
헤스더의 남편 로저는 인디언들로부터 탈출합니다. 그러나 가슴에 A자를 단 부인 헤스더를 군중들 틈에 서서 바라보며 아내의 간통 사실을 알고 치를 떱니다. 로저는 질투심과 복수심으로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은 상대방 남자를 찾아 나섭니다. 그리고 그가 림즈데일이란 걸 어렴풋이 짐작하고 그를 옆에서 따라다니면서 계속 괴롭히는 악당으로 변신합니다.
헤스더가 자신의 딸을 품에 안고 가슴에 A자를 달고 형벌대에 선지 7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마을의 어느 축제날, 딤즈데일은 형벌대 위에서 훌륭한 설교를 마친 뒤 헤스더와 딸 펄의 손을 잡고 자신의 죄를 솔직히 고백합니다. 그리고 헤스더와 똑같이 A자가 새겨진 자신의 가슴을 주민들 앞에서 헤쳐 보이고 죽음을 맞이합니다.
한편 복수만을 위해 살아온 로저는 결국 딤즈데일이 죽고 난 다음에 삶의 목적을 잃은 듯 끝내는 자살을 하고 맙니다. 그리고 헤스더는 딸 펄과 함께 마치를 타고 지긋지긋하게 그녀를 괴롭혀 오던 뉴잉글랜드를 떠나면서 주홍글씨를 떼어 버립니다. 그녀는 편견에 사로잡힌 종교 및 사회적 인습의 틀을 벗어나 새로운 세계를 찾아 떠납니다. 주체적이고 강인한 여성의 모습으로...
[ 나다니엘 호손의 고향을 찾아 ]
* 세일럼
나다니엘 호손의 소설 <주홍 글씨>는 서장(序章)에 세일럼 세관의 묘사가 자세합니다. 작자는 이 세관의 창고에서 A자의 주홍 글씨가 쓰인 옷 조각을 발견하는 데서 이야기를 끄집어 냅니다. 세일럼은 미국 북동부의 매사추세츠의 주에 있는 항구도시로 보스턴에서 차를 타면 해안을 따라 난 길로 30분이면 닿습니다. 지금은 보스턴의 외항쯤으로 몰락했지만 보스턴보다 더 오래된 항구여서 1790년께는 미국에서 여섯 번째로 손꼽힌 도시였습니다.
당시 이 항구에서 출입하는 배들로부터 거둔 관세가 연방 정부 수입의 12분의 1을 차지했다고 주민들은 녹슨 훈장을 끄집어내 보이듯이 자랑합니다. 그 성시(盛時)의 잔재가 세일럼 세관 건물입니다.
* 당시 세관 건물
세관을 중심으로 한 부둣가 일대는 연방정부 내무성의 국립 공원국이 관장하는 국립사적해안(國立史蹟海岸)으로 지적되어 있습니다. 세관 정면으로 길게 뻗은 것이 더비 부두, 부두 끝에는 잡답(雜沓) 대신 창고가 하나 기념물로 쓸쓸히 서서 졸고 있습니다.
세관 옆쪽의 서인도 상회는 사해(四海)에서 실어 온 진품들을 팔던 곳. 그 이웃이 세일럼에서는 가장 오래된 벽돌집이라는 더비 하우스입니다, 동양과의 무역으로 큰돈을 벌어 미국 최초의 백만장자가 된 상인의 집인데 ‘킹 더비’라 불리던 이 상인의 이름은 <주홍 글씨>의 서장에 나옵니다.
세일럼은 나다니엘 호손이 태어난 고향입니다. 호손 때까지만 해도 세일럼은 마녀들이 득실거리는 소굴로 유명하여 지금 마녀 박물관이라는 것까지 생겨 있습니다. 호손의 할아버지는 마녀 재판으로 이름을 떨친 판사이기도 했습니다. 호손 가(家)는 1637년 세일럼에 정착한 이래 대대로 여기서 살았고 나다니엘은 6대째였습니다.
* 세일럼 가는 지도(보스턴에서 약 30분 거리의 북동쪽에 있습니다)
세일럼 세관은 나다니엘 호손이 1846년부터 3년 동안 감독관으로 근무했던 곳입니다. 1819년에 지은 빨간 벽돌의 2층 건물은 <주홍 글씨>에 ‘출입문 위로는 커다란 매의 모형이 날개를 펴고...’라고 쓰인 대로 황금빛 매가 한 마리 지붕 끝에 올라앉아 있습니다.
호손이 일할 때 이미 세일럼은 항구로서의 전성기가 지난 때였고 지금 이 건물은 역사적인 기념물로 남아 구경꾼들을 맞아들이고 있습니다. 문을 들어서서 왼쪽 첫ㅠ방이 호손이 쓰던 사무실입니다. 책상 위에는 그가 쓰던 잉크병, 깃털 펜, 한쪽 구석에는 지팡이...,
창문 바깥으로는 더비 부두 너머로 바다. 벽에 붙은 단추를 누르면 <주홍 글씨>의 서장 ‘세관’의 부분이 녹음으로 흘러나옵니다. 호손은 <주홍 글씨>를 이 방에서 구상했고 세관을 그만두면서 집필을 시작하여 이듬해인 1850년에 발표했습니다.
그는 이 세관의 창고에서 실제로 A자가 쓰인 옷을 발견하고 소설을 착상한 것으로 믿어지고 있습니다. 무기력한 세관 생활을 양로원처럼 풍자했다고 해서 당시 세일럼 사람들은 <주홍 글씨>를 못마땅해 했다고 합니다.
세일럼은 고가(古家)와 박물관이 많기로 유명한 곳입니다. 그 가운데 특히 ‘일곱 박공의 집’이라 불리는 고가는 미국의 뉴잉글랜드 지방에서 가장 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 중의 하나. 1668년에 어떤 선장이 지어 300년도 넘은 이 집은 호손의 다른 소설 <일곱 박공의 집>의 무대가 되면서 널리 알려졌습니다.
* 일곱 박공의 집
박공지붕은 책을 엎어 놓은 모양의 지붕형식이며 박공벽은 박공 지붕의 측면에 생기는
삼각형 벽을 말하는데 박공은 보통 이들을 통털어 말한다.
호손은 아저씨가 이 집에 살아 자주 놀러 왔었습니다. 3개의 17세기 건물이 모여 있는 이 집 마당 경내에 호손의 생가가 있습니다. 나다니엘 호손은 46세 때까지 간헐적으로 세일럼을 드나들며 살다가 <주홍 글씨>를 써놓고는 일단 고향 땅을 떠났습니다. 그가 세일럼에서 살던 네 군데의 집 가운데 생가 외는 몰 가(街) 14번지의 <주홍 글씨>를 쓴 집이 남아 있습니다.
* 호손의 생가
나다니엘 호손은 스스로 자기는 고향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의 고향에 대한 감정은 애증이 교차된 것이었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듯이 세일럼을 떠나서는 어느새 도로 돌아와 있곤 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작품 속에 세일럼의 거리들을 그려 넣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고향을 수식어로 미화하지는 않았습니다. 해마다 7월 4일이면 세일럼의 거리에는 호손이 나타납니다. 옛날의 옷차림 그대로 하고 그가 살아옵니다.
그는 나다니엘 호손 가(街)에 선 자신의 동상(1904년 건립) 앞을 지나 구(舊) 시청 홀도 기웃거려 보고는 자기가 근무하던 세관을 찾아가 생일 케이크를 자릅니다. 나다니엘 호손 협회가 1978년부터 그의 생일을 기념하는 행사로 딴 사람을 작가로 분장시켜 내놓은 것이죠.
* 호손의 동상
나다니엘 호손이 세일럼을 떠나 정착한 곳은 시인 에머슨이 살던 콩코드였습니다. 호손은 세일럼에서 세관 근무를 하기 전인 1842년부터 3년 동안 콩코드에 머문 적이 있습니다. 이 때 살던 집은 콩코드 천(川)이 뒤로 흐르는 넓은 공원 가운데입니다.
‘올드 맨스(舊牧師館)라 부르는 이 집은 <주홍 글씨>의 서장에도 언급이 되어 있습니다. 에머슨의 조부가 지어 대대로 살던 곳인데 호손은 이 집을 빌려 들어 2층 에머슨이 쓰던 책상에서 <올드 맨스 이끼>를 썼습니다. 서재의 유리창에는 호손의 부인 소피아가 다이아몬드로 긁어 쓴 ‘인간의 재난은 신의 의도’라는 글씨가 생생합니다. 이 집은 1939년 매사추세츠주의 고적 위원회가 사서 관리중입니다.
호손이 세일럼의 세관을 그만두고 다시 콩코드로 찾아와 살던 곳은 ‘웨이사이드’라는, 시내에서 조금 떨어져나가 앉은 한적한 길가 집입니다. <작은 아씨들>의 여류작가 올컷이 7년간 살다가 이웃으로 이사한 뒤 1852년 호손이 사 들어왔습니다.
1700년대 초기의 건물인데도 아직 말끔합니다. 올컷 부부가 쓰다가 나중에 호손의 침실이 된 방이 남아 있습니다. 1965년 미국 연방정부의 공원 관리국이 사들였습니다. 호손은 리버풀 영사로 나갔다가 다시 이 집으로 돌아왔고 1864년 이 집을 나서서 여행 중에 플리머스에서 객사했습니다.
호손은 콩코드의 슬리피 할로 공동 묘지에 있는 ‘작가의 동산’에 에머슨 등과 이웃하여 묻혔습니다. 가족묘지의 손바닥만한 묘비에는 ‘HAWTHORNE'(호손) 외자가 적혀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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