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2992
1월1일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세계 평화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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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복향' 님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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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SwAmKF1MQng (김주영 시몬 주교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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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언제나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긴 마리아!>
종신서원을 준비하는 형제들의 피정을 동반하고 있습니다. 오전에는 강의와 묵상, 오후에는 작업과 운동, 오래전 수련장 역할을 하던 시절이 떠올라 참 좋습니다.
작업 시간에는 다들 톱 하나를 손에 들고 십자가의 길 주변에 서 있는 나무들을 살리러 나갑니다. 너무 오랜 세월 돌보아주지 않았기에, 여기저기 다들, 안쪽부터 시작해서 말라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나무들에게 너무 미안했습니다. 한 그루 한 그루 손질해줄 때마다 “미안하다. 정말 미안해.”라고 말하며 죽은 나뭇가지들을 시원시원하게 쳐주고 있습니다. 그랬더니 나무들이 제게 ‘그간 너무 답답했는데, 너무 고맙다.’며 인사를 하는 듯합니다.
이미 말라 죽어버렸는데, 쓸데없는 가지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으니 나무들이 그동안 얼마나 답답했을까, 생각하니 정말 미안했습니다. 말라비틀어진 가지들을 잘라내며 든 생각 한 가지!
또다시 새해가 다가왔는데, 나도 시원시원하게 잘라낼 죽은 가지들을 잘라내야 할텐데...새 해에는 떨쳐버릴 것은 속 시원하게 떨쳐버리고 좀 더 자유롭고 홀가분한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한 수도회 피정집에 머물 때의 일이었습니다. 사실 피정객들에게 있어 식사만큼 중요한 것도 없는데, 주방 자매님을 못 구했더군요. 형제들이 밥해대느라 쩔쩔 매고 있었습니다. 저보고 발이 넓으니, 좋은 주방 자매님 한분 알아봐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어떤 분을 원하냐고 물었더니, 요구 사항들이 지나치게 구체적이었습니다.
연령은 4~50대에다 음식 솜씨는 기본. 교회 기관이니 신앙심이 돈독하고, 봉사 정신도 갖춘 분. 급여에 너무 지나치게 연연하지 않는 분. 성격이 밝고, 마음씨도 따뜻한 분. 제일 중요한 것 한 가지, 입이 무거운 분! 다 듣고 난 저는 크게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수사님들! 그런 자매님 있으면 저부터 모셔가겠네요. 아무리 눈 크게 뜨고 온 세상을 다녀봐도 그런 자매님은 없답니다. 특히 입이 무거운 자매님 찾기는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렵습니다. 참 딱 한분 있기는 하네요. 우리 성모님!”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루카 복음 2장 19절)
오늘 우리는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경축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지만 절대로 우쭐한 법이 없었습니다. 구세주 탄생이란 하느님의 큰 사업에 가장 큰 협조자로서 뭔가 기대할 만도 한데 결코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그저 한평생 자신 앞에 벌어진 모든 일에 대해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습니다. 기도하고 기도하면서 하느님의 진의(眞意)를 찾아나갔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마리아는 참으로 겸손하셨습니다.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초지일관 겸손의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을 쓰시겠다고 하니 기쁜 마음으로 자신의 몸, 자신의 인생 전체를 다 내어드렸습니다. 자신의 한 몸 희생하여 하느님의 인류 구원 사업에 조그만 기여라도 한다면 참으로 영광이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이토록 겸손했던 마리아였기에 하느님께서는 그녀의 머리 위에 세상에서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왕관을 씌워주십니다. 끝없이 밑으로 내려서는 마리아를 하느님께서는 가장 높은 곳으로 올리십니다. 그 자리가 바로 ‘천주의 성모’ ‘하느님의 어머니’였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주교 학자의 가르침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마리아만이 유일무이한 하느님의 어머니요 또한 그분의 신부(新婦)이십니다. 마리아는 열 달 동안 구세주 하느님을 자신의 태중에 모셨던 살아있는 감실이십니다. 마리아께서는 아기 예수님을 당신 태중에 잉태하시기 전 당신 영혼 안에 먼저 잉태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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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DvIFZt8LD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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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 마리아는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나라다>
오늘은 새해 첫날이기도 하며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신 성모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새해 첫날 우리나라의 수호자이신 성모님이 하느님의 어머니이심을 고백하며 공경하는 대축일로 시작하는 것은 정말 좋고 큰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모님을 공경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를 온전히 만날 수 없는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목자들이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러 왔습니다. 목자들을 부른 천사들은 지금으로 말하면 교회나 세례자 요한을 의미합니다. 목자들이 그 부르심으로 마구간에 들어왔을 때 아기 예수님을 먼저 경배했을까요, 아니면 성모 마리아의 허락을 받아야 했을까요? 성모님은 구세주의 어머니이십니다. 예수님이 아드님으로서 어찌 당신 어머니를 공경하지 않는 사람을 만나주시고 싶으시겠습니까?
언어를 배우지 않고는 외국인과 소통할 수 없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소통하시기 위해 마련하신 언어와 같습니다. 어떤 언어든 사용하실 수 있으셨다면 굳이 성모님을 선택할 필요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언어는 길과 같아서 그분이 우리에게 오시기 위해 내어놓으신 길을 그대로 걷지 않으면 그분께 갈 수 없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두 번째 길이고 하느님께서 세상에 오시기 위해 마련하신 당신과 가장 밀접한 길은 성모 마리아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모 마리아를 통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셨다면 우리도 당신께 다가오기 위해 성모 마리아를 통해 오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힘들게 내신 길을 따르지 않고 각자가 원하는 길로 오려고 한다면 인격적으로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저도 지금의 제가 있게 된 것이, ‘하.사.시.’나 ‘십일조’, 그리고 ‘7기도’나 ‘성체조배’ 등이 큰 역할을 했음을 언제나 강조합니다. 하지만 만약 저에게 다가오는 사람이 이런 것들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저는 어떤 마음이 들까요? 물론 그런 사람을 물리치는 일은 없겠지만, 저를 만든 이런 것을 무시한다면 아무래도 저도 그 사람에게 심리적 거리를 둘 것입니다. 저를 사제나 스승으로 여기지 않고 다른 목적으로 다가오려는 사람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에겐 이런 것들이 하나의 언어입니다. 하.사.시.를 읽은 사람과 말이 잘 통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영화 ‘기생충’에서 그 집에 몰래 숨어 사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은 주인이 원하는 길과 문으로 그 집에 들어온 사람들이 아닙니다. 따라서 그런 사람이 있음을 발견한다면 주인은 바로 경찰에 신고할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께 다다르는 가장 합법적인 길, 혹은 문은 성모 마리아이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하느님의 어머니로 공경할 때 성모님은 우리가 당신 아드님을 경배할 수 있도록 당신 아드님을 내어주실 것입니다.
EBS 스페셜 프로젝트 ‘아빠 찾아 3만리’에서 아빠를 찾아 우즈베키스탄에서 한국까지 단둘이 날아온 자매의 이야기가 방영된 적이 있습니다. 아직 어린 자매는 공책에 필요한 말들을 적어왔지만, 한국인에게 길을 묻는 것이 두려워 계속 길을 헤매다 결국엔 울어버리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나중에는 용기를 내어 공책에 적힌 것을 보여주며 인천 공항에서 아빠가 일하는 대구의 공장까지 찾아갑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다가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드시 성모 마리아를 거쳐야 합니다. 그 길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실 수 있는 길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려면 물어보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언어를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나라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면 더 깊이 소통하기 위해 그 소통의 방법인 언어를 더 열심히 배우려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과 소통하시기 위해 사용하셨던 첫 번째 언어가 성모 마리아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오신 통로가 성모 마리아이십니다. 우리가 다시 하느님께로 가기 위해 배워야 하는 언어가 있다면 성모 마리아입니다. 성모 마리아를 배우려 하지 않는다면 감히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늘은 여러분 마음속에 떠오르는 걸 그려보세요.”
반 아이들은 가족, 동물, 자연 등 각자가 원하는 것을 도화지에 그렸습니다. 그런데 한 남자아이는 도화지를 온통 검게 칠했습니다. 선생님들도 부모들도 아이가 무엇을 그리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수십 장의 도화지를 그저 빈틈없이 검게 칠했던 것입니다. 아이는 의사들에게도 무엇을 그리는지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릴 뿐이었습니다.
아이는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됩니다. 그런데도 계속 도화지를 검게 칠했습니다. 이제 수백 장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선생님은 아이의 책상에서 커다란 고래의 그림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아이가 그린 그림을 다 맞춰보니 커다란 고래의 모양이 나왔습니다. 아이는 그저 고래를 고래의 크기에 맞춰 그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아이가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은 온전한 크기의 고래 그림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런데 그 그림을 받아들이지 않고 무시한다면 그 사람이 아이에게 다가가는 것은 아이를 정신병자 취급하며 다가가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은 성모 마리아를 통해서였습니다. 성모 마리아를 이해하지 못한 채 그리스도께 간다는 말도 역시 그리스도를 어쩌면 “왜, 굳이 마리아에게 태어나셨어요?”라고 이해 못 하며 다가가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계명 판이라면 성모님은 그 판을 담고 있는 계약의 궤입니다. 먼저 계약의 궤를 만나지 않으면 그 속의 십계명 판을 들여다볼 수 없습니다. 모든 자녀의 나라는 어머니인 것처럼, 성모님도 그리스도의 나라입니다. 그리스도를 온전히 만나고 싶다면 그분이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 선택한 성모 마리아와 먼저 소통해야 합니다.
성모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습니다. 성모님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향해 사용하시는 언어와 같기 때문이고, 당신께 오는 길과 같기 때문입니다. 성모 마리아를 공경하면 그분께서 그리스도께로 우리를 이끄시고 그분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행복을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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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새해 첫날이 밝았다. 오늘은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이며, 세계평화의 날이다. 지금은 성탄 시기로 전례의 중심은 주님이시다. 그러나 아들을 기억할 때는 어머니도 기억하는 것이다. 왜 성모 마리아가 평화와 축복과 관계가 있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평화’이시며 하느님과 인간들 사이를 “원수가 되어 갈리게 했던 담을 헐어버리신”(에페 2,14) 그리스도께서 마리아를 통해 오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낳아주는 행위가 평화를 전하는 것이며, 이 평화는 바로 구원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 축복된 삶은 365일 계속되어야 한다.
복음: 루카 2,16-21: 여드레째 되는 날,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은 여드레째 날 할례를 통하여 하느님 백성의 구성원이 된다. 그리고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그리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계신 분으로 항상, 그리고 오늘 여기서 주어지는 분이다. 단 말씀을 받아들이고, 성찬을 모시고, 마음의 할례 즉 회개할 때, 그분은 우리를 복된 교회의 지체가 되게 하신다.
오늘 복음에서 천사들의 말대로 된 것을 확인하고 믿었던 목동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며 돌아갔다. 이것은 말씀대로 이루어진 것을 보고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린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말씀이 살아있을 때 감사와 찬미가 나올 수 있으며, 그 안에 평화가 있다. 이 평화는 바로 구원이다. 목동들이 예수님을 본 순간 평화 즉 구원을 맛보고 돌아간다. 하느님께 그 평화에 대한 찬미와 감사를 드리면서 돌아갔다. 우리가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주님을 만나 뵈옵기 위한 노력이다. 마치 천사의 말을 믿고 달려가는 목동들과 같이 말씀을 들은 즉시 실천하려고 하는 마음이다. 자기 생각이나 뜻을 죽일 수 있는 그런 삶이 평화를 구원을 느낄 수 있다.
때가 찼을 때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여인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을 완성케 하셨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말씀, 성령을 통하여 인간을 당신의 자녀가 되게 해주셨다. “지금의 때”는 이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를 통해서 계속 태어나시며, 모든 인간을 하느님의 참된 자녀로 만들어 공동 상속자로 만드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은 우리의 모습이 마리아의 모습, 즉 말씀을 잉태하여 낳아주는 마리아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모든 이가 하느님을 “압바, 아버지!”로 부를 수 있을 때 참 평화, 구원이 있을 것이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의 의미가 여기에 있다. 하느님의 어머니는 하느님의 말씀이 인간이 되셨다는 면에서 하느님의 어머니이다. 이제는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를 통해, 지금 여기서 태어나실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이 있다. 그것은 마리아가 스스로 하느님의 뜻을 자유롭게 받아들여(루카 1,38 참조) 당신 자신이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신 신비로써 ‘구원’과 ‘평화’에 이바지하셨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선물이 되지 못하는 ‘모성’은 없다는 것이다.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서 마리아에게서 이 같은 일이 나타났다면 모든 여인에게서도 마찬가지로 참된 사실이다. 모성은 결코 개인적인 것이 아니다. 이 때문에 낙태가 허용된 나라처럼 태아를 살해하도록 합법화하는 행위는 근본적으로 평화를 파괴하는 전쟁의 행위와 다를 것이 없다. 어머니와 자녀, 더 나아가 아직 태어나지 않아서 더욱 보호가 필요한 자녀와의 사이에 평화가 없다면 과연 어디에 평화가 있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성 바오로 6세께서는 1977년 ‘세계평화의 날’의 주제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당신이 진정 평화를 원한다면 생명을 보호하라. 생명은 처음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누구에 의해서든지, 또한 전쟁, 테러, 무죄하고 아무런 힘도 없는 태아에 대한 어머니나 의사들의 폭력 등 어떠한 방법에 따라서도 침해되지 않도록 항상 보호받아야 한다. 생명을 거스르는 모든 범죄는 평화를 침해하는 행위이다. 특히 낙태로써 태어나려는 생명을 없애는 것처럼 오늘날 무섭게 또 때로는 합법적으로 국민 대중의 습성을 썩게 하는 행위는 더욱 그렇다. 인간 생명은 잉태되는 순간부터 그 타고난 생을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신성한 것이다. ‘신성하다’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곧 생명이 어떤 억압도 받지 않게 되어있으며, 이해할 수 없는 것이며, 모든 존경과 배려와 정당한 희생을 받을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1976. 12. 8. 성 바오로 6세의 메시지).
오늘 이 축일을 지내는 것은 그러기에 마리아가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신 당신의 모성으로써 이 세상에 이루신 생명과 구원과 평화의 선물에 대해서 묵상하고 깊이 사색하도록 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강생 순간부터 그분의 생명과 밀접히 결합하여 변모된 모든 생명의 품위를 깨닫도록 촉구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이러한 가운데 참 평화를 간직한, 즉 구원의 기쁨을 가진 우리가 진정으로 남에게 복을 빌어줄 수 있으며, 그 복은 복을 빌어주는 이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되돌아오며, 서로를 하나가 되게 해주고, 그것은 성자를 통하여 아버지께 올려지는 것으로, 이것이 참된 감사의 생활이며, 이 생활을 통해 우리는 평화를, 기쁨을, 구원을 항상 맛보며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먼저 평화를 맛보고, 그 평화를 빌어줄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이 시간에 기도하자.
오늘은 새해 첫날이기에 큰 희망과 부푼 꿈을 가질 수 있는 그러한 날이다. 첫날이기에 의미를 지니는 날이며, 이날 이 한해를 하느님께 바치자. 첫날이므로 성경의 말씀대로 하느님께 바치고 한 해를 하느님 앞에, 더욱 성실하게 살도록 다짐하자. 이러한 지향이 중요하다. 비록 오늘 짧은 시간이지만 기도와 미사를 통하여 1년의 계획을 압축하여 설계하며 하느님께 온전히 바쳐야 하겠다. 그래서 복음에 나타난 목자들과 같이 우리도 언제나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며 영광을 드리는 삶을 갖도록 노력하는 새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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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평화>
“그리고 서둘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냈다. 목자들은 아기를 보고 나서, 그 아기에 관하여 들은 말을 알려 주었다. 그것을 들은 이들은 모두 목자들이 자기들에게 전한 말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목자들은 천사가 자기들에게 말한 대로 듣고 본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돌아갔다."(루카 2,16-20)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 예수님의 모습은 ‘참 평화’의 상징입니다. (예수님이 곧 ‘참 평화’입니다.) 세속 사람들은 ‘힘’이 있어야 평화를 얻을 수 있고, 지킬 수 있다고 말하지만,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 예수님은 아무런 힘이 없는, 세속의 물리적인 힘 같은 것은 전혀 없는, 가난하고 연약한 아기일 뿐입니다. 그 모습에서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2코린 12,9)라는 하느님 말씀이 연상됩니다.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은 분명히 ‘큰 힘’인데, 세속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힘이 아닙니다.
(무력도 아니고 권력도 아닙니다.) 인간을 완전히 새롭게 변화시키는 생명력입니다.
죄 속에서 살고 있으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참 평화’를 얻어 누릴 수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나서 첫 번째로 잃은 것은 평화였습니다. “그들은 주 하느님께서 저녁 산들바람 속에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들었다. 사람과 그 아내는 주 하느님 앞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창세 3,8) 하느님을 피해서 숨은 아담과 하와의 모습은, 죄 때문에 ‘참 평화’를 완전히 잃은 모습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끊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평화의 원천이신 분입니다. 따라서 죄를 짓는 것은 스스로 평화를 버리는 것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죄를 짓고서도 마음 편하게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있긴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겉으로만 그렇게 보이는 것이고, 그 안에는 ‘참 평화’가 없습니다. 그래서 ‘참 평화’를 누리려면 회개부터 해야 합니다.
믿음이 없거나 부족하면 ‘참 평화’를 얻어 누릴 수 없습니다. 돌풍 때문에 겁에 질렸던 제자들의 모습이 좋은 예입니다. “그들이 배를 저어 갈 때에 예수님께서는 잠이 드셨다. 그때에 돌풍이 불어 호수로 내리 몰아치면서 물이 차 들어와 그들이 위태롭게 되었다. 제자들이 다가가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곧 잠잠해지며 고요해졌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의 믿음은 어디에 있느냐?’ 하셨다."(루카 8,23-25ㄱ) 제자들은 아직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바로 옆에 예수님이 계시는데도 자기들이 죽을지도 모른다고 무서워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이 부족해서 평화를 잃은 모습입니다. 만일에 그때 그들의 믿음이 완전했다면, 주무시는 예수님과 함께 그냥 잤을 것입니다.
<그랬던 제자들이 나중에는 모두 위대한 믿음의 사도가 되었습니다.감옥에 갇혔을 때의 베드로 사도의 모습이 좋은 예입니다. 헤로데가 베드로 사도를 붙잡아서 감옥에 가둔 다음에 군중 앞으로 끌어내어 사형시키려고 했을 때(사도 12,4-5), 그 전날 밤, 감옥에 있는 베드로 사도의 모습을 보면, 두려움이 전혀 없는 모습, 즉 ‘참 평화’를 누리는 모습입니다. 다음날 사형당할 죄수가 아닌 것처럼, 또 그곳이 감옥이 아닌 것처럼 그는 아주 태평스럽게 깊이 잠들어 있는데(사도 12,6), 그것은 그가 이미 ‘완전한 믿음’에 도달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람과 파도 때문에 죽게 되었다고 겁에 질렸던 때의 일을 생각하면, ‘믿음’은 ‘참 평화’를 얻어 누리는 지름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희망’이 없으면 ‘참 평화’도 없습니다. 배반자 유다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는 그분께서 사형 선고를 받으신 것을 보고 뉘우치고서는, 그 은돈 서른 닢을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에게 돌려주면서 말하였다. ‘죄 없는 분을 팔아넘겨 죽게 만들었으니 나는 죄를 지었소.’ 그러나 그들은 ‘우리와 무슨 상관이냐? 그것은 네 일이다.’ 하였다. 유다는 그 은돈을 성전 안에다 내던지고 물러가서 목을 매달아 죽었다."(마태 27,3-5) 유다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잃었을 때 이미 평화를 잃었겠지만, 아마도 그 자신은 의식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을 배반한 뒤에는 평화 없는 생활을 하면서 불안과 고통 속에서 살았을 텐데, 그래도 구원을 희망하면서 그때 회개했다면 그렇게 끝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배반자 유다의 가장 큰 죄는 자기 스스로 ‘구원의 희망’을 버리고, 자기 자신을 포기한 죄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참 평화’도 없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사제와 레위인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루카 10,30-32) (여기서 ‘길 반대쪽’은 ‘사랑의 반대쪽’입니다.) 그 사제와 레위인은, 몸은 편했겠지만, 마음의(영혼의) 평화는 잃었을 것입니다. (분명히 그렇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 해서 사랑 실천을 한(루카 10,33-35) ‘착한 사마리아인’의 마음속에는 평화가 가득했을 것입니다. 그 평화는 사랑 실천을 통해서 얻은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필리 4,6-7).” <기도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평화를 얻는 것은 아니고, 믿고, 회개하고, 희망하고, 끊임없이 사랑을 실천하면서 기도할 때, 그때 ‘참 평화’를 얻어 누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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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2022년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한 해를 선물로 주셨으니 감사드립니다. 교회는 새로운 한 해의 첫날을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성모님의 순명으로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성모님의 순명으로 나자렛의 성가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성모님의 전구로 예수님께서는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첫 번째 표징을 보여 주셨습니다. 성모님은 모든 고통과 아픔을 가슴에 담았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만나 위로하였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아들 예수님을 다시 품에 안으셨습니다. 고통과 아픔을 품에 안으신 성모님을 교회는 천주의 성모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2022년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순명으로 새해를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슬픔과 고통까지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기쁘게 받아들이면서 새해를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2022년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었습니다. 보편교회는 작년에 주교 시노드를 시작하였습니다. 시노드의 정신은 ‘참여, 경청, 사명’입니다. 시노드의 주된 내용은 ‘여정의 동반자, 경청, 발언, 거행, 공동 사명을 위한 공동 책임, 교회와 사회 안에서의 대화, 교회 일치, 권위와 참여, 식별과 결정, 시노달리타스 안에서 이루어지는 우리의 양성‘이라는 10가지 주제입니다. 경청과 참여 그리고 사명이라는 시노드의 정신을 생각하며 2022년 새해를 힘차게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교회의 사명은 복음 선포이고 이를 위해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성사 생활과 기도 생활로 응답합니다. 복음 선포 곧 ’선교‘는 그리스도인의 가장 위대하고 거룩한 임무입니다.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실 때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라고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임무를 부여하셨기 때문입니다.
선교는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해 세례 받게 하는 것과 세례를 받았으나 교회를 등진 이들을 새 복음화해 주님께로 다시 돌아가게 하는 이중의 의미를 지닙니다. 그래서 선교의 대상은 세상 모든 이입니다. 선교사는 세 형태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 교회로부터 공적으로 파견된 선교사입니다. 이들은 파견된 선교지에서 복음을 전하고, 세례 성사를 베풀며 교회를 세워 성사 생활을 지속하게 합니다.
둘째, 삶의 자리에서 성덕으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퍼뜨려 이웃을 교회로 이끄는 선교사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답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입으십시오.”라고 그리스도인들에게 권고합니다.
셋째, 기도와 물적 수단으로 교회에 협력하는 선교사들입니다. 교회가 선교 사명을 수행하는 데 있어 기도뿐 아니라 물질적인 수단들도 적지 않게 요구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도 “선교는 여전히 절박한 과제”라면서 “선교를 위해 우리의 시간과 노력, 재화를 쏟아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세상에서 아기 예수님을 처음 받아 준 손은 목수 요셉의 거친 손이었고, 그분을 처음 맞아들인 장소는 누추한 구유였습니다. 그분께 찬미와 찬양을 드린 첫 번째 사람도 밤을 지새우던 가난한 목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 강생의 짧은 이야기는 약하고 보잘것없는 곳, 비천한 사람들 안에 우리가 믿고 있는 신앙의 핵심 진리가 있음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가까이에 있는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들, 그들 가운데 단 한 사람만이라도 내 안에 깊이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는 장소가 있다면, 그곳이 나를 구원할 내 ‘인생의 구유’입니다.
‘권세 있는 자를 자리에서 내치시고, 부유한 자를 빈손으로 보내시며, 미천한 이를 끌어 올리시고, 가난한 이를 배불리시는 주님께 찬양을 드렸던’ 성모님의 도우심으로 우리들 모두가 참된 평화를 이룰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합시다. 돌아보면 2021년도에도 참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대부분은 사건과 사고, 우리들의 마음을 우울하게 하던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희망을 이야기 합니다. 희망은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기다리는 것도 아닙니다. 희망은 지금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보호자 성모님 불쌍한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시어 귀양살이 끝날 때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뵙게 하소서. 천주의 성모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시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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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교구 신기룡 안드레아 신부님]
새해가 밝았습니다 새로운 한 해를 허락하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리며, 형제 자매 여러분의 가정에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 드립니다.
오늘은 새해 첫날이며 '천주의 모친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우리 교회는 마리아를 '천주의 모친' 즉 '하느님의 어머니'로 부릅니다.
성경에 보면, 창세기에는 뱀의 속임수에 넘어가 사람이 죄를 범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뱀과 여자,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서로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에게 승리를 거두게 된다는 최초의 기쁜 소식이 담겨 있습니다. 그 첫복음의 중심에 마리아는 주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복음서에서는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인 엘리사벳은 예수님을 잉태하신 마리아께서 자신을 방문하셨을 때, 마리아를 향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를 찾아주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하며 인사하였습니다. 우리와 같은 한 인간이며 여린 한 소녀를 두고 '하느님의 어머니'란 칭호를 붙이는 것을 보면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또 우리는 일상생활 중에서도 성모님을 기억합니다. 우리 신자분들 중에 묵주의 기도를 못 드리는 분은 없을 겁니다. 묵주의 기도는 성모송을 외우면서 주님의 생애를 묵상하는 기도입니다. 또 하루 세 번 삼종기도를 드리면서도 성모님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마리아 교회라는 오해를 사면서까지 성모상을 모시고 성모님을 공경합니다. 그만한 자격이 있기에 교회에서는 그런 엄청난 칭호를 드렸겠지요.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은 마리아 자신에 의해서 가능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거기에는 누구보다도 아드님이신 예수님이 계셨기에 이런 존경과 사랑을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주님의 종이오니 당신의 뜻대로 하소서" 하며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였습니다. 만약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절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성부의 외아들이신 성자 예수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그 여인은 특별하게 여겨지지도 않았을 것이고, 모든 사람에게 칭송을 받는 일도 없었을 겁니다.
마리아는 처녀의 몸이었습니다. 어린 소녀에게는 혼전 잉태라는 죽음 같은 공포가 엄습했지만 자기에게 닥칠 큰 시련도 마다 않고 주님의 뜻에 순종합니다. 또한 그 아이로 인하여 앞으로 닥쳐올 그 많은 시련들을 오롯한 마음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 순종이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게 하셨고, 교회의 어머니가 되셨고 또 우리들의 어머니가 되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 가장 약한 사람이 여자라고 합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빠르고 무서운 사람은 아줌마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강한 사람은 어머니라고 합니다. 그 어머니로서의 삶을 제대로 보여주신 분이 바로 오늘 우리가 기념하고 공경의 예를 다하는 성모님인 것입니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언제나 맨 뒷자리 계셨지만 두려움을 사랑으로 이겨내고서 십자가 밑에서, 아들 예수님의 죽음에 함께 하고 있는 어머니를 말입니다.
성모님을 모시면서, 하느님의 은총으로 우리 인간들 가운데서도 흠 없는 이가 한 명쯤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더군다나 우리 한국 천주교회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성 요셉과 함께 공동 수호성인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2006년 한 해를 시작하면서 우리 자신과 우리의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드리며, 주님의 뜻에 따라 살아갈 수 있도록 성모님께 도우심을 간구합시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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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용민 사도요한 신부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한 해의 시작과 함께 가장 많이 주고받는 말입니다. ‘복’(福)이란 한자어는, 하느님[示]께서 각자[一]에게 필요한[口] 밭[田]을 주셨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도 있습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약속하신 말씀과 상통합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세상 사람들에게 가장 큰 복은 재물과 건강, 부귀와 영화겠지만, 하느님 백성인 우리에게 참된 복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는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상속자들입니다. 인간으로서 감히 얻을 수 없는 하느님의 몫을 상속받게 된다는 놀라운 사실을 새해 첫 날부터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고백은 베들레헴에서 아기 예수님을 낳으신 성모님의 인생 속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성모님께서는 목자들이 전해 준 믿기지 않을 이야기를 들으시고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고 합니다. 화려하지만 사라져 버릴 세상이 주는 복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새겨 놓으신 하느님의 영의 선물을 받으신 성모님께서는 어떤 처지에서도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는 믿음의 복을 누린 분이셨습니다.
복은 혼자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나누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은 서로 빌어 주는 것입니다. 새해 첫 날을 어제와 별 다르지 않은 날로 느끼는 대부분의 사람들 마음처럼, 행복과 희망은 저절로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결심하는 능력입니다. 새해에 내가 결심하고 하느님께 청한 것이 정말 내게 필요한 것인지 성모님처럼 곰곰이 되새겨 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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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말이 참 어렵습니다. 정제된 말만 하려고 무던히도 애를 쓰는데 가끔 불쑥 튀어나오는 거친 말이 상대방뿐 아니라 나 자신도 아프게 합니다. 신앙도 말로 이어져 온 역사 속에서 조금씩 다듬어져 온 것이지요. ‘내가 보았다, 내가 믿었다, 내가 깨달았다.’라고 수없이 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우리에게 전하여 준 것이 신앙입니다.
오늘 복음의 목자들과 마리아의 모습에서 우리는 신앙을 가져다주는 말의 가치를 다시금 되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목자들은 보았고, 본 것을 외쳤고, 그들이 외치는 것은 하느님께 닿아 있습니다. 목자들이 전해 주는 말은 사람들과 하느님을 연결합니다. 그런 목자들 곁에서 마리아께서는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기시지요.
침묵입니다. 단지 말이 없는 침묵이 아니라 말을 곱씹고, 느끼고, 깨닫는 침묵입니다. 목자는 말을 하고 마리아께서는 말을 묵상하십니다. 신앙은 말을 하고 듣는 순환적 관계 안에서 성장합니다. 서로 말하려는 가운데 서로 들으려는 노력이 균형을 맞출 때 신앙은 건강해집니다. 대개 배운 사람들의 못난 모습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것이, 남을 가르치려고 드는 자세입니다. 모르는 사람보다는 너무 알아서 듣지 못하는 사람이 참으로 무지한 사람입니다.
신앙의 말은 억눌려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 말을 할 수 있게끔 스스로 침묵으로 배려하는 겸손한 이들의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당시 사회에서 배우지 못하고 무능하고 죄인 취급받던 목자들의 외침으로 복음이 선포되었고, 마리아의 침묵으로 그 선포의 의미가 깊은 울림이 되었다는 사실을 복음은 집어냅니다.
한 해의 시작점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고민하는 것도 좋지만, 이웃들이 어떻게 살고들 있는지 살펴보는 침묵의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말조차 꺼내기 힘든 거칠고 억눌린 삶을 살아가는 이들 안에 선포되는 하느님 복음의 의미를 깨달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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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루카2,19)
<새해 평화 많이 받으세요!>
오늘은 2022년 임인년 새해 첫 날이자, 교회 전례력으로는 의무대축일인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그리고 '제55차 세계 평화의 날'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새해 인사를 드립니다. "2022년 한 해는 보다 더 영과 육이 함께 건강하시고, 주님께서 내려주시는 평화가 충만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그리고 우리 신앙의 결정적 모범이신 하느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를 본받아, '하느님의 자녀요 상속자답게',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늘 마음속에 간직하고, 하느님 아버지 뜻에 순종하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세계 평화의 날'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평화'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평화는 단순히 힘의 불안한 균형으로 전쟁만 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질서, 더욱 완전한 정의를 인간 사이에 꽃피게 하는 질서를 따라 하루하루 노력함으로써만 얻어지는 것입니다."
(복음의 기쁨, 219항)
"모든 시대에 평화는 높은 데서 내려오는 선물이며 함께 하는 노력의 결실입니다."(제55차 세계 평화의 날 담화문에서)
평화는 우리의 노력, 우리의 땀의 결실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평화를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나 자신의 평화, 가정의 평화, 공동체의 평화, 나라와 세계의 평화를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 출발과 그 시작은, '평화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평화'는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그분 안에 머물 때, 머물려고 노력할 때 결실로써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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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새해에는 한 살 더 먹으니>
민수기 6,22-27 (사제의 축복)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일러라. ‘너희는 이렇게 말하면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축복하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그들이 이렇게 이스라엘 자손들 위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
갈라티아 4,4-7 (종살이에서 자유로)
형제 여러분,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 율법 아래 놓이게 하셨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이들을 속량하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 되는 자격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진정 여러분이 자녀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 영께서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그리고 자녀라면 하느님께서 세워 주신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루카 2,16-21 (목자들이 예수님을 뵙다, 할례와 작명)
그때에 목자들이 베들레헴으로 서둘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냈다. 목자들은 아기를 보고 나서, 그 아기에 관하여 들은 말을 알려 주었다. 그것을 들은 이들은 모두 목자들이 자기들에게 전한 말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목자들은 천사가 자기들에게 말한 대로 듣고 본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돌아갔다. 여드레가 차서 아기에게 할례를 베풀게 되자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그것은 아기가 잉태되기 전에 천사가 일러 준 이름이었다.
<새해에는 한 살 더 먹으니>
새해에는
한 살 더 먹으니
그만큼 나이게 하소서
새해에는
한 살 더 먹으니
그만큼 비우게 하소서
새해에는
한 살 더 먹으니
그만큼 작아지게 하소서
새해에는
한 살 더 먹으니
그만큼 낮아지게 하소서
새해에는
한 살 더 먹으니
그만큼 넓어지게 하소서
새해에는
한 살 더 먹으니
그만큼 고와지게 하소서
새해에는
한 살 더 먹으니
그만큼 나아가게 하소서
새해에는
한 살 더 먹으니
그만큼 뜨거워지게 하소서
새해에는
한 살 더 먹으니
그만큼 넉넉해지게 하소서
새해에는
한 살 더 먹으니
그만큼 부드러워지게 하소서
새해에는
한 살 더 먹으니
그만큼 자유로워지게 하소서
새해에는
한 살 더 먹으니
그만큼 올곧아지게 하소서
새해에는
한 살 더 먹으니
그만큼 기쁨이 되게 하소서
새해에는
한 살 더 먹으니
그만큼 희망이 되게 하소서
새해에는
한 살 더 먹으니
그만큼 축복이 되게 하소서
새해에는
한 살 더 먹으니
그만큼 평화가 되게 하소서
새해에는
한 살 더 먹으니
그만큼 흐트러지지 않게 하소서
새해에는
한 살 더 먹으니
그만큼 부끄럽지 않게 하소서
새해에는
한 살 더 먹으니
그만큼 아쉽지 않게 하소서
새해에는
한 살 더 먹으니
그만큼 당신께 가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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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22년 임인년(壬寅年) 새해가 밝았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하시고자 하는 모든 일에 주님의 사랑과 은총이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새해에 가족과 함께하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족은 나와 가까운 사람들일까요? 먼 사람들일까요?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은 편할까요? 불편할까요? 당연히 가족은 가까운 사람들이며 편한 존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가족을 많이 봅니다.
코로나19로 인해서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났고 따라서 가족과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같이 지내면서 불편함을 느끼고, 점점 너무 먼 사람들처럼 여겨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코로나 이혼이라는 신조어가 생겼고, 가정 폭력이나 아동학대도 많이 증가했습니다.
많은 이가 가족을 나와 동일시합니다. 그러나 가족 역시 엄연히 타인입니다. 내 생각과 행동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타인이라는 것입니다. 타인임을 인정한다면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예의와 격식입니다. 나와 가장 가깝고 편한 가족이라도 예의와 격식을 지키지 않는다면, 편함은 없어지고 거리가 더 멀게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의와 격식을 지키지도 않으면 “가족이면서 이것도 이해 못 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예의와 격식을 지켜나갈 때, 진짜 가족이 됩니다. 예의와 격식의 시작은 ‘감사’입니다. 감사의 마음만 갖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감사를 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새해를 맞이하는 오늘, 우리는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봉헌합니다. 한결같이 우리 신앙의 모범을 보여주신 천주의 성모 마리아를 본받아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기로 다짐하고, 세계 평화를 기원하며 성모님의 전구를 청하는 날인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예수님 잉태의 순간부터 하느님의 놀라운 이끄심을 체험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일을 오늘 복음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기셨습니다. ‘곰곰이 되새겼다’라는 복음사가의 말은 성모님께서 자신이 본 일을 성경에서 장차 이루어지리라고 했던 이야기들과 연결해 생각해 보았다는 뜻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자기 뜻대로 또 자기를 드러내는 모습으로 살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을 함부로 판단해서 세상에 말하는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자기 안에서 곰곰이 되새기셨을 뿐입니다. 하느님의 어머니이시지만 예의와 격식을 잃지 않으신 것입니다.
우리 역시 가족 안에서 또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과의 관계에서 이 예의와 격식을 갖춰야 합니다. 감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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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삶 안에서의 또 다른 삶을 찾기>
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과를 보게 되었다면 무엇이 생각나십니까? 대부분 별다른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사과가 떨어지는구나’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그런데 뉴턴은 고향 집 울즈소프에서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했습니다.
그냥 스쳐 지나가는 일반적인 사물과 사건 속에서 특별한 무엇인가를 보는 사람이 역사에 한 획을 긋게 됩니다. 뉴턴의 사과만이 아닙니다. 제임스 와트는 물이 끓는 주전자를 통해 증기기관차를 만들었고, 프랭클린은 번개를 보고서는 어둠을 밝힐 전기를 만듭니다. 라이트 형제는 하늘을 나는 새를 보고서 비행기를 만들지요.
일상 삶 자체가 또 다른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줍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세히 바라보려고 하지 않고, 항상 똑같은 일상이라면서 지겹다고 합니다. 그러나 똑같은 일상 같지만, 100% 똑같은 일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어떤 시각을 갖느냐에 따라 매번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우리의 삶입니다. 이 삶을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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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마음을 다하여>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새해에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민수기에 보면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민수 6,24-26)고 적혀 있습니다.
복을 주시는 주체가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지 않으시면, 복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내가 무엇을 잘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자비를 베푸시어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복을 잘 담을 수 있도록 노력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복을 빌어주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성경의 곳곳에서 복을 받는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몇 가지만 상기해 보겠습니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느님의 계명들을 너희가 듣고 따르면 복이 내릴 것이다.”(신명11,27)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모든 말을 명심하여 들어라. 그렇게 하는 것이 주 너희 하느님의 눈에 드는 좋은 일과 옳은 일을 하는 것이므로, 그래야 너희와 너희 자손들이 영원토록 잘 될 것이다.”(신명12,28)
결국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이 복을 받는 길입니다. 더군다나 그 복은 당대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후손에게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그러니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우리의 일상이 하느님의 마음에 든다면 그는 분명 복을 누리고 있는 사람입니다.
한편 “너희가 주 너희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들으면, 이 모든 복이 내려 너희 위에 머무를 것이다. 너희는 성읍 안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다. 너희 몸의 소생과 너희 땅의 소출도, 새끼소와 새기 양을 비롯한 너희 가축의 새끼들도 복을 받을 것이다. 너희의 광주리와 반죽 통도 복을 받을 것이다. 너희는 들어올 때에도 복을 받고, 나갈 때에도 복을 받을 것이다.”(신명28,2-6)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역으로 내가 복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안에서도 밖에서도 복을 받으려거든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말씀을 실천하십시오.
시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행복하여라. 악인들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들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겨 제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시편1,1-3).
주님의 말씀에 머물면 하는 일마다 잘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 안에 머물지 못하면 마음이 허전하고 그 공허를 채우려 엉뚱한 곳에서 위로를 받으려 합니다. 술을 찾는 사람도 있고, 쇼핑에 매달리는 사람, 도박이나 다른 무엇에서 찾으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오늘 기억하는 성모님은 순종의 모범이십니다. 천사를 통해 주어진 하느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뜻대로 실천하였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지켰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모님을 은총을 가득히 받으신 분, 복된 여인으로 부릅니다.
우리도 말씀대로 실행하는 가운데 복된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믿음의 사람이 되십시오. 성모님은 엘리사벳의 입을 통해 “행복하십니다.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루카1,45)으로 불리었습니다. 사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갈라3,9)
시편24,4에서는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결백한 이, 옳지 않은 것에 정신을 쏟지 않는 이, 거짓으로 맹세하지 않는 이라네. 그는 주님께 복을 받고 자기 구원의 하느님께 의로움을 인정받으리라.”라고 말합니다. 허망한데 뜻을 두지 않는 사람으로 복을 누려야 되겠습니다.
많은 이들이 주님께 마음을 두지 못하고 인간적인 욕심 때문에 복을 잃어버립니다. 올 한해는 세속적인 복을 찾으려 헤매지 않고 주님 안에서 복을 만들고 또 빌어주며 복을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행복하다는 것을 압니다. 무엇을 하든 주님 안에서 '마음을 다하여'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이 없습니다. 다만 내 마음이 흔들려서 그분의 사랑을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언제라도 그분의 사랑에 감사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을 간직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사실 우리가 복을 누리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복인 줄 모르는 까닭은 많은 경우 내 입에 맞는 복을 찾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올 한해는 주님의 복을 기억하고 그분의 이름으로 복을 빌어주며 그분께서 원하시고 기대하는 복을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복을 누리기 위해 과거의 불행을 생각하지 않기를 권합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 있는 복에 감사하기 바랍니다. 과거에 매이면 앞으로 나갈 수 없고, 지금 받은 복을 감사할 줄 모르면 더 큰 복이 주어져도 복으로 여기지 못하며 앞으로 받을 복도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처지에서 감사함을 발견하고 기뻐하시길 빕니다. 주님의 복을 많이 받으십시오. 코로나19의 어려움을 극복할 힘과 지혜도 나눌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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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축복 받은 삶>
-‘신의 한 수’이자 ‘축복의 선물’인 우리들’-
“사랑하는 형제자매님들! 새해 복많이 받으십시오.”
우선 새해를 맞이하여 축복 인사부터 드리고 강론을 시작합니다. 지난해가 기축년己丑年 소해였다면 올해는 임인년壬寅年 호랑이해입니다. 호시우행虎視牛行, 호랑이의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의 정황을 살피고 황소의 육중한 걸음걸이처럼 신중하고도 조심스럽게 일을 해나가는 태도가 참으로 절실한 작금의 시절입니다.
“하느님 우리를 어여삐 여기소서, 우리에게 복을 내리옵소서.”
3년째 계속되는 코로나로 인해 오랜 만에 불러보는 미사중 화답송 후렴이 참 흥겹습니다. 하루내내 끊임없이 화살기도 노래 기도로 바치고 싶습니다.
축복의 하느님, 축복의 종교인 천주교, 축복의 사람들인 우리들입니다. 하느님께서 참으로 좋아하시는 일이 우리를 축복하시는 일입니다. “축복받은 삶-신의 한 수이자 축복이 선물인 우리들”, 바로 오늘 강론 제목입니다. 오늘은 새해 첫날이자. 성탄 팔일 축제 내 마지막 절정의 성탄 팔일 축제 내 제8일이고, 참으로 복된 천주의 모친 성모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축복의 하느님께서는 성모 마리아를 통해 새해 첫날 온누리에 평화의 축복을 가득 내려 주십니다.
“땅의 행복은
밤마다 누워
하늘 바라보며
별들
가득 담아 두었다가
꽃들로
피어내는 것이다”-2001.8.20.
새해 첫날 잠시 수도원 정원에 누워 겨울 밤하늘의 북두칠성과 무수히 반짝이는 별들을 보는 순간 떠오른 옛 자작시가 반가웠습니다. 말을 일부 바꿔 “우리의 행복은 하늘 축복 가득 담아 두었다가 사랑 실천의 꽃들로 피어 내는 것이다”라 해도 그대로 통한다 싶습니다. 이어 저절로 떠오른 시편 8장입니다.
“하느님 내 주시여,
온땅에 당신 이름 어이 이리 묘하신고
하늘 위 높다랗게 엄위를 떨치셨나이다
우러러 당신 손가락이 만드신 저 하늘하며
굳건히 이룩하신 달과 별들을 보나이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아니 잊으시나이까
그 종락 무엇이기에 따뜻이 돌보시나이까”
축복의 하느님께 감격하여 바치시는 시편 저자의 행복의 고백입니다. 눈만 열리며 하느님 축복의 선물들로 가득한 세상임을 볼 것입니다. 여기서 저절로 샘솟듯 흘러나오는 찬미와 감사의 고백입니다.
“오소서,
주 하느님!
당신이 되게 하소서
당신의 믿음이
당신의 희망
당신의 사랑이
당신의 신망애信望愛가 되게 하소서
당신의 진리가
당신의 선이
당신의 아름다움이
당신의 진선미眞善美가 되게 하소서.”
요즘 하느님의 축복을 간청懇請하며 참 자주 바치는 기도문입니다. 하느님을, 예수님을 닮아, 저는 강복 주기를 참 좋아합니다.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형제에게 강복하시어 길이 머물게 하소서”, 십자 성호경과 더불어 강복을 드리면 저도 동시에 하느님의 강복을 받는 느낌입니다.
아마도 천주교 신자들보다 강복을 많이 받는 사람들도 없을 것입니다. 머리를 숙이고 성호를 그으며 강복을 받는 가난하고 겸손한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무려 697쪽에 달하는 가톨릭 “축복예식” 책도 얼마나 다양한 축복이 있는지 놀랍습니다. 말 그대로 축복의 하느님이요, 축복의 종교인 가톨릭교회임을 새롭게 확인하게 됩니다. 총지침 1항과2항 내용도 은혜롭습니다.
-1.“온갖 복의 원천과 기원은 만물 위에 계시는 하느님으로 영원히 찬미받으실 분이시다. 지극히 선하신 아버지께서는 만물을 좋게 창조하시고 당신 복을 가득히 내리셨으며, 인류가 타락한 뒤에도 자비의 표징으로 언제나 복을 내려 주신다.
2.“때가 차자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셨고, 사람이 되신 그분 안에서 온갖 영적인 복을 또다시 사람들에게 내리셨다. 이렇게 정의의 태양이신 그리스도 우리 하느님께서 태어나시어, 저주를 푸시고 복을 내리셨다. 바로 이때 옛 저주가 우리에게 복으로 바뀌었다.”
얼마나 아름답고 고마운 축복의 하느님이요 그 아드님 예수님이신지요! 살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축복의 존재인 우리들임을 깨닫습니다. 그렇습니다. ‘욕망덩어리’ 우리가 아니라 신의 한 수 같은 축복의 선물, ‘축복덩어리’인 우리들입니다.
마침 며칠전 복덩어리 며느리라 칭찬하던 수산나 할머니의 고백도 잊지 못합니다. 이어 거칠고 무서운 남편을 순하게 길들인 복덩어리 며느리 엘리사벳 자매의 고백도 생각납니다. 자기 자랑을 하며 크게 화내며 꾸짖던 남편이 이젠 무섭지 않아, “자기 최고야!”하고 웃으며 양손을 들고 엄지척을 했더니 무섭게 화내던 남편이 씩 웃고 말더란 얘기였고 격하게 칭찬했습니다.
“정말 잘하셨습니다. 어린이 집 아이들이나 남자 어른들 별 차이가 없습니다. 그렇게 두려움 없이 사랑하는 마음 담아 칭찬하면 어른 남자들도 아이들처럼 순한 양이 됩니다.”
제가 마리아 대신 형제자매의 이름을 써드리며 참 자주 보속 처방전으로 써드리는 말씀입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루카1,28.30)
마리아 성모님뿐 아니라 우리 하나하나가 은총을 가득히 받은 축복 받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큰 축복은 아드님을 통한 하느님 자녀됨의 축복입니다. 바오로의 고백이 참 고맙습니다.
“진정 여러분이 자녀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주셨습니다. 그 영께서 ‘아빠! 아버지!’하고 외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그리고 자녀라면 하느님께서 세워 주신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으니 이보다 더 큰 축복은 없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자녀답게, 존엄한 품위의 사람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인간답게’ 막연하고, ‘하느님의 자녀답게!’ 가 답입니다.
나라에는 국격國格이 있다면 우리 개인에게는 인격人格이 있고 품위品位가 있습니다. 참으로 축복 받은 하느님의 자녀로서 품위있게 살아가도록 평생 분투의 노력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이미 하느님께 받은 성령 은총의 축복이 이렇게 우리 모두 하느님의 자녀답게 품위있게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정말 하느님을 흠숭한다면 이렇게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 수 뿐이 없습니다. 그러니 일체의 변명과 핑계도 통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에게 필히 더해야 할 관상의 축복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목자들과 마리아 성모님이 그 모범입니다. 참으로 가난하나 탄생하신 주님을 만난 관상 축복의 목자들입니다. 목자들은 천사가 자기들에게 말한대로 듣고 본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돌아갔다 합니다.
찬미와 감사의 삶과 기도보다 결정적인 관상 축복은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평생 날마다 바치는 찬양과 감사의 시편과 미사의 공동전례기도는 하느님 축복의 통로임을 깨닫습니다. 목자들의 말을 듣고 이 모든 일을 마음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기는 마리아 성모님 역시 관상 축복의 어머니임을 깨닫습니다. 그대로 시편 1장의 행복한 사람을 연상케 하는 마리아 성모님의 모습입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겨 제 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늘 일마다 잘되리라.”
말씀의 축복, 관상의 축복입니다. 참으로 마리아 성모님은 관상 축복의 대가이자 렉시오 디비나, 성독의 대가였음이 분명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축복된 삶을 살 수 있게 하시며 사제를 통해 여러분 하나하나를 축복하십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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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2BYctjpdA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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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루카 2, 19)
희망의 빛은
어머니의
삶과 함께
뜨겁게
우리를 향하여
밝아온다.
해마다
우리는 간절한
기도와 함께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맞이한다.
갈릴래아 하늘을
바라보던 한 여인이
하느님을 잉태하고
하느님을 낳는다.
하느님을 안고
하느님을 업고
하느님을
기르신다.
하느님께서도
사람에게서
당신의 집을
지으신다.
지극히 평범한
한 여인의
자녀가 되신다.
사람의 사랑을
먹으며
자라나시는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참된 사랑은
소박하다.
가장 좋은
이름 우리의
어머니시다.
하느님 때문에
눈물로
기도하시고
하느님 때문에
전전긍긍하신다.
하늘은
어머님을
만드셨다.
모든 사람은
저마다
어머니를
갖는다.
가장 큰
은총이다.
마음 속에
간직해야 할
진짜 사랑이다.
진짜 사랑을
보여주신다.
어머니를 통해
하느님을
알게되었다.
어머니의 삶을
만나는 시간이다.
삶이
사랑과 함께
은총이 된다.
마음을 굳게
먹은 사랑의
한 여인이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다.
어머니를 통해
하느님을
믿게 되는
신앙의 기쁨이다.
하느님의 탄생이
이루어졌다.
기쁨의
시작이다.
신앙은
어머니를
닮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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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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