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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존재의 근원
현대의 자연과학에서 우주 존재는 빅뱅의 사건으로부터 시작되나 빅뱅의 순간 자체는 과학적 해명이 한계에 부딪히는 플랭크의 벽 뒤로 가려지게 된다. 따라서 그 벽 너머에 대해서는 형이상학적 사유를 전제하게 되는 것이다. 최초 발생순간을 논리적으로 이해하려면 물질적 요소와 관념적 법칙들이 존재하게 된다. 이 둘이 결합하는 순간 현상적 우주가 형성되기 시작했을 것이다. 이러한 사유에 입각하여 희랍의 플라톤은 우주 제작자를 생각했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에는 우주의 근본질료와 형상 그리고 신의 존재가 전제되어 있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적 사유가 희랍적 사유를 넘어서는 부분으로 질료와 형상을 신에 의해 비로소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기독교에서 우주 형성의 근본 원인은 오로지 신이 된다. 신의 우주 창조는 無로부터의 창조가 된다. 결국, 기독교적 우주 창조론에 있어 우주 창조를 설명하는 기본 축은 신과 무라는 양 원리이다. 이 이원성 안에서 우리는 다시 희랍적 형상과 질료, 정신과 물질의 이원적 사고방식을 발견하게 된다.
이에 반해 석가의 통찰은 신과 인간, 피조물과 창조자 간의 절대적 구분을 무화시키는 통찰이다. 현재 우주를 창조하는 근원적 힘이 바로 그 이전 우주 속에 살던 유정의 업력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이 유정의 존재는 기독교의 신처럼 그 존재의 시작점을 물을 수 없는 무시 이래의 존재로 이해된다. 나아가 우주 자연의 물리력과 생명체의 생명력 그리고 유정의 업력을 모두 같은 힘으로 이해하며, 업력을 가장 근본적인 힘으로 보고 있다.
송대의 신유학 역시 유가적 전통에 따라 우주 바깥에 우주 창조자를 따로 설정하지 않는다. 우주는 음양 이기(二氣)의 운동 결과 발생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기의 회전에 의해 천지가 만들어지고 운행과 취산에 따라 자연 사물과 인간까지도 형성된다고 본다. 이러한 기는 추상적 원리인 리로부터 기원한 것으로 본다. 따라서 인간은 다른 존재와 마찬가지로 음양오행의 결과물일 뿐이며, 기가 잘 통하여 막힘이 없는 상태에서 자신 안에 내재된 보편적 우주 이치인 천리(天理)를 깨닫고 그 이치를 실현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의 본질을 이룬다. 그러나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것은 기질의 차이로 결정된다는 것이다.
우주 또는 인간의 근원이 무엇인가에 대해 이상의 네 입장은 서로 상이한 관점을 제시하고 있지만, 그들 안에 하나의 공통점이 발견되는데, 그들 모두 그 근원으로서 표면적으로는 두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희랍: 이데아 - 질료 / 기독교: 창조자 神 - 피조물이 의거하는 無
불교: 진여심의 心 - 무명으로터의 業 / 유가: 태극의 理 - 개체 형성의 氣
앞에 있는 것은 궁극적인 것으로 뒤에 있는 것은 그것에 대립 되거나 파생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결국, 뒤에 있는 것은 인간이 그 근원에 도달하기 위해 넘어서야 할 것으로 이해된다. 후자를 떠나 전자를 회복함이 인간의 본질로 이해되는 것이다. 그러나 신과 이데아, 리가 객관주의적 관점에서 사유되는 것인 반면, 오직 불교의 심은 주체적으로 사유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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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인간이라면 누구나 철 들기 시작할 무렵 자기 자신의 존재에 관한 물음에 사로잡혀 밤을 지새운 적이 있을 것이다. 즉 나는 누구이며, 어디에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종교 서적이나 철학 서적을 뒤적일 것이다. 이러한 보편적인 인간 존재에 관한 물음에 대해 철학적 실마리를 얻을 수 있는 책인 [동서양의 인간 이해]가 철학서적 전문출판사 서광사에서 출간되었다.
이 책은 오랫 동안 인간 존재와 자아에 관해 연구해 온 한자경 교수가 희랍 사상과 기독교 사상, 그리고 불교 및 유가에 나타난 인간관을 비교 고찰하여 정리한 책이다. 이 책은 "인간은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인간 존재의 시작인 근원에 대한 물음 및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라는 중간 과정에서의 인간 본질에 대한 물음 그리고 "인간은 어디로 가는가?"라는 인간 삶의 끝인 죽음에 관한 물음을 각각 하나의 장으로 삼아 각 장에서 네 관점을 서로 비교하는 방식으로 글을 구성하고 있다.
저자는 한 주제에 대해 각 관점을 설명하면서 가능한 한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전달하고자 할 목적으로 각 관점을 대변한다고 생각되는 구절을 찾아 인용하고 설명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먼저 희랍 사상에서는 주로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와 [국가론]을 인용하였고, 기독교 사상에서는 [성서] 이외에 중세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인용하였다. 또한 불교에서는 원시근본 불교사상을 담고 있는 [잡아함경] 이외에 유부의 [구사론]을 인용하였다. 마지막으로 유가에서는 [맹자], 주돈이의 [태극도설] 및 주희의 [주자어류]를 인용하였다.
제1장에서는 인간 존재의 근원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희랍이나 기독교나 유가는 인간 및 우주의 근원을 인간 자체 내에 주체적으로 설정하지 않고 오히려 인간이 추구해 나아가야 할 대상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데 반해, 오로지 불교만은 인간 및 우주의 근원을 인간 자체 안에 설정하고 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제2장에서는 인간의 본질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희랍인이 지향한 것은 변화하는 현상 세계 너머에서 변화하지 않는 영원한 이데아를 올바로 인식하는 것에 있는 데 반해 기독교 사상은 인간 이성의 한계 또는 인간 지혜의 한계를 강조한다. 불교적 사상에서는 인간의 본질이 해탈이며, 유가에 있어서는 천리를 올바르게 실천수행하는 도덕성에 인간 본질이 놓여 있다.
제3장에서는 인간 삶의 끝인 죽음에 대해 다룬다. 희랍 사상에 있어서 죽음은 인간 신체와 영혼의 분리를 의미하며, 신체로부터 분리된 영혼은 신체적 제약성으로부터 풀려나 자유로워진다고 본다. 기독교에 있어서는 인간의 죽음은 인간 삶의 끝이 아니며, 불교에 있어서는 불생불멸의 마음 본래의 자리에로 되돌아가는 것, 즉 해탈을 지향한다.
그리고 유가의 생사관은 도가의 자연주의적 생사관과 크게 다르지 않아 인간 생사는 일시적 현상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본다. 이처럼 인간 본질에 대해 네 경우의 관점에서 살펴본 후 저자가 마지막으로 강조하는 바는 안과 밖, 상대와 절대, 인간과 신이 하나임을 깨닫는 것이다.
저자의 말
인간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인간은 과연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 것인가? 이것은 결국 "나는 누구인가?"의 물음이다. 치워놓을 수 없는 화두, 멀리하고자 달아나 다른 곳으로 가보아도 나보다 먼저 그곳에 와 있어 나를 맞이하는 물음이다. 그래서 반갑고 그래서 또 서럽다.
수천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묻고 또 물었지만 아무도 더 이상의 의문의 여지가 없을 만큼 확실하고 궁극적인 답을 제시할 수 없었던 물음, 어디에서 어떤 방식으로 답을 찾아야 하는지, 답의 진위의 기준이 무엇인지, 답이 과연 있기나 한 것인지, 아니 물음 자체가 제대로 물어진 것인지, 그것조차 분명치 않은 물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철들기 시작하면 묻기 시작하고, 누구나 인생의 짐이 무겁고 아프게 느껴질 때 애타게 그 답을 찾아 헤매지만, 끝내 그 답에 이르지 못해서는 더 큰 허전함만 갖게 되는 물음, 지금 여기에서 그 물음이 다시 물어지고 있다.
나는 누구인가? 그 물음의 답을 내가 처한 시공간적 한계 속에서만 구하고자 한다면, 그 나의 한계가 곧 얻어진 답의 한계가 될 것이다. 그렇다고 나의 한계 너머, 나의 보이지 않는 시작과 보이지 않는 끝 너머를 사유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하겠는가? 한계 너머로 나아가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른 사람의 사유를 좇아보는 것뿐이다.
알고 싶은 그 물음에 대한 진지한 사유의 흔적이 있는 곳은 어디든지 찾아가 그의 사유를 나의 사유로 바꿔보는 것뿐이다. 그렇게 해서 형이상학적이거나 종교적인 서적을 뒤적이게 되었다. "인간은 어디에서 와서 무엇을 위해 살다 어디로 가는가?"라는 물음 아래 현재의 내 안에 뒤섞여 있을 사상들을 구분하여 정리해 보려는 생각에서 처음에는 희랍 사상과 불교와 유가와 도가의 네 항목을 구상하였었다.
그러나 정리하는 과정에서 다시 생각해 보니 희랍 사상과 기독교가 서양 사상으로 혼합되어 있기는 해도 서로 구분할 필요가 있는 것 같고, 유가와 도가는 동양 사상 내에서 서로 구분되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아 결국 희랍, 기독교, 불교, 유가의 네 항목을 구성하게 되었다. 구성을 해놓고 보니 그 사상 원류에 있어 소크라테스, 예수, 석가, 공자라는 4대 성인과 만나게 되었는데, 그 만남이 결코 우연은 아닌 듯 싶다.
그러나 처음부터 4대 성인의 사상을 포괄적으로 정리할 생각은 없었다. "인간은 어디에서 왔는가?"의 물음은 인간 존재의 시작인 근원에 대한 물음이고,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의 물음은 중간 과정에서의 인간 본질에 대한 물음이며, "인간은 어디로 가는가?"의 물음은 인간 삶의 끝인 죽음에 관한 물음이기에,
오직 그 세 주제, 즉 인간 존재의 근원과 본질과 귀착점에 대해서만 논하고 싶을 뿐이었다. 따라서 각 주제를 하나의 장으로 삼아, 각 장에서 그 한 주제에 대해 네 관점 각각을 서술하면서 서로 비교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한 주제에 대해 각 관점을 설명함에 있어서는 가능한 한 각 관점을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전달하려는 목적으로 각 관점을 대변한다고 생각되는 구절을 찾아 인용하고 설명하는 방식을 택했다. 물론 인용문의 선택과 해설에 있어 나 자신의 개인적 판단에 따른 치우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인용문은 그 자체의 고전적 가치에 의하기보다는 오히려 논하고자 하는 물음에 대한 답으로서의 적합성과 그것이 우리의 한국적 사유에 미친 영향력의 여부에 따라 선택하고자 하였다. 희랍 사상에서는 주로 플라톤의 [티마이오스]나 [국가론]을 인용하였지만, 기독교 사상에서는 [성서] 이외에 중세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인용하였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알려진 기독교가 순수 히브리 사상이기보다는 이미 중세 교부철학을 거쳐 희랍화된 서양 사상이기 때문이다. 또 불교에서는 원시근본 불교사상을 담고 있는 [잡아함경] 이외에 유부의 [구사론]이나 대승경전도 인용하였는데, 이는 우리 나라의 불교사상이 대승, 특히 유식이나 여래장 또는 선사상에 많이 기울어져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가에서 [맹자] 이외에 주돈이의 [태극도설]이나 주희의 [주자어류]를 인용한 것은 우리 나라 유교가 주로 주희 성리학의 영향을 입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어떤 문제의식으로 그 각 주제의 논의를 시작하려 하는지, 그리고 그 각 주제에 대한 네 관점의 논의를 마치면서 어떤 결론에 이르고 있는지는 각 장에서의 본격적 논의에 앞선 서언과 논의 말미의 결언에서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서언에서는 각 주제에 대한 현대 과학적 관점에서의 대답을 정리해 보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러한 과학적 대답이 여기서 문제 삼고 있는 철학적 또는 형이상학적 물음에 대한 최종적인 답이 아니라는 것, 우리의 물음은 경험적이고 과학적인 지평을 넘어서는 새로운 차원의 물음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하였다.
결언에서는 앞서 논의된 네 관점들을 다시 비교 정리하면서 지나친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도식화해 보았는데, 여기서 다시 나의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평가가 너무 두드러진 것은 아닐까 염려되기도 한다. 그러나 어찌 보면 인용문을 통한 본격적 논의 전체가 실은 그 결언을 위한 논증 자료일 수도 있다.
또 순수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생각이라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개인적이라고 해도 그것이 나 일 개인의 생각만은 아닐 것이고, 주관적이라고 해도 한 역사 속에서 한 핏줄로 이어져 있는 우리의 상호주관성을 떠나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 상호주관성을 다시 한 번 더 확인하고픈 마음에 이렇게 별 볼 일 없는 생각들까지도 한 권의 책으로 엮어 세상에 내놓는 것이리라.
인간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 인간 삶의 시작과 끝을 묻는다는 것, 그렇게 인간의 근원을 밝힌다는 것은 곧 인간의 심연 안에서 인간 이상의 것을 발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심연의 근원에 있어 개체적 경계는 소멸하고 나는 너와 하나가 된다. 인간이 신과 다르지 않고 인간이 자연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이 한 권의 책을 쓰는 동안 내 마음 속에 품고 있던 생각은 사실 이게 다이다.
신도 인간 안으로 내재화되고, 자연도 인간 속으로 융해되었다. 의식 표면에 나타나는 모든 대상적인 것, 모든 이원화의 산물을 의식 심층의 근원, 대상화 불가능한 근원적 주체로부터 사유하고자 한 것이다. 인간 안의 인간 이상의 것, 그 근원적 주체로부터 사유하고자 하였기에,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인간만을 논하고 있다.
누군가 이것을 또 다른 인간 중심주의라고 비판한다면, 그것은 그가 아직도 인간과 신과 자연이 서로 대립해 있는 의식 표층에서 사유하기 때문이다. 나는 희랍 사상이나 기독교 사상이나 유가 사상이 모두 근원적 주체로부터의 사유가 아닌 표층적인 대상적 사유라고 생각한다. 그것들은 궁극적 근원을 이성 대상의 이데아나 신앙 대상의 신 또는 도덕 실천 대상의 리(理)로 설정하기 때문이다.
오직 불교만이 명상의 수행을 통해 인간 심연 속의 인간 이상의 것, 근원적 일자를 자각함으로써 주체적으로 사유할 수 있었다고 본다. 근원적 일자에 있어서는 인간과 신과 자연이 하나이다. 그것이 곧 하나로서 전체이며 전체로서 하나인 너와 나의 마음, 바로 일심(一心)인 것이다.
인간 안에서 인간 이상(以上)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즉 인간이란 본래 우리가 대상적으로 규정하여 아는 그 이상의 존재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자연이란 본래 우리가 파악하는 자연 그 이상이라는 것, 신이란 본래 우리가 생각하는 신 그 이상이라는 것을 어떻게 감지할 수 있겠는가? 신 또는 자연을 대상으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객관적 사유가 아닌 주체적 사유 능력이 요구된다.
인간이 인간 자신에 대해서조차 주체적으로 사유하지 못한다면, 그 인간이 다른 무엇에 대해 주체적으로 사유할 수 있겠는가? 인간이 그 자신 안에서 인간 이상의 신비를 깨닫지 못한다면, 존재하는 그 모든 것이 우리가 표면적으로 인식하는 그 이상의 신비라는 것을 어떻게 예감할 수 있겠는가? 대상화된 신이나 대상화된 자연 너머의 그 이상의 것이 바로 인간 자신 안의 그 이상의 것과 근원적으로 하나라는 것, 인간의 본질이 바로 그 근원적 하나, 우리의 마음, 즉 일심(一心)이라는 것을 그려보고자 하였다.
목차
1. 인간존재의 근원
-서언:인간과 우주의 근원은 무엇인가? .
1. 희랍:이데아와 질료 ...38
2. 기독교:신과 무 ...50
3. 불교:심과 업 ...65
4. 유가:리와 기 ...84
-결언:인간의 근원은 근원적 일자이다 ...100
2. 인간의 본질
-서언:인간의 본질은 무엇인가?
1. 희랍:이성적 인간 ...116
2. 기독교:신앙의 인간 ..132
3. 불교:해탈의 인간 ...139
4. 유가:도덕적 인간 ..157
-결언:인간의 본질은 근원적 일자에의 추구이다 ...171
3. 인간 삶의 끝
-서언:인간은 죽음과 더불어 어떻게 되는가?
1. 희랍:영혼불멸설 ...192
2. 기독교:죽은 자의 부활 ...206
3. 불교:윤회와 해탈 ...213
4. 유가:기산신멸 ...223
-결언:인간은 죽음과 더불어 근원적 일자로 돌아간다 ...236
저자 소개
한자경은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를 거쳐 동대학원을 졸업하였다.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박사학위(칸트철학)를 취득한 후, 동국대학교 대학원 불교학과에서 석사 및 박사학위(유식철학)를 취득하였다. 현재 계명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저서로는 [칸트의 초월철학], [자아의 연구], [자아의 탐색], [유식무경] 등이 있고, 논문으로는 "후설 현상학의 선험적 주관성과 불교 유식철학의 비교", "동서철학의 융합", "三性의 이해" 등이 있다.
동서양의 차이
1.근원
동양: 무
서양: 기본물질, 변하지 않는 원리
2. 모델
동양: 세계는 변화하므로 불변의 모델은 무존재
서양: 세계를 설명하는 모델이 존재
3. 초월적 존재, 원리
동양: 없음
서양: 초월적 원리나 존재가 존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