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장군의 전장 리더십
- 영화 ‘명량’을 보고나서 -
최근 영화‘명랑’의 열풍이 극장가를 휩쓸고 있다. 박대통령을 비롯하여 정치인들도 대거 관람 하면서 한국영화 사상 최초로 개봉 12일 만에 관객 1천만 명을 돌파 했다. 우리나라 역사를 통해서 가장 위대한 두 분을 꼽는다면 광화문에 동상이 설치된 세종대왕과 이순신장군이다. 세종은 국가통치권자였고, 이순신은 수군 지휘관이었다. 특히 이순신장군에 대해서는 여러 책과 드라마 등을 통하여 익히 알고 있지만, 금번 영화‘명량’에서 그 분의 해전 리더십과 수범적 군인정신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불후의 명장임을 재 부각시키고 있다.
명량해전은 이순신장군이 1597년 9월16일(음) 명량 수로에서 낡은 12척의 병선을 이끌고 133척의 일본 주력함선을 괴멸시킨 승첩(勝捷)이다. 그 당시 원균이 칠천량(漆川梁)해전에서 대패하여 수군이 전멸상태로 제해권을 왜군에게 빼앗긴 상황하에서 모략중상을 받아 지휘권을 박탈당하고 백의종군하던 이순신 장군이 우여곡절 끝에 3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 직후였다. 이순신장군은 10대1의 열세한 병선으로 적 함대를 남해에서 서해로 북상하는 유일한 수로이며 바닷물이 주기적으로 급격히 역류하는 명량(울돌목) 협수로로 유인하여 격멸시켰다. 이 때 다수의 민간피난선들을 사전에 인근에 집결정박시켜 아 함대를 지원하는 대규모 전선(戰船)단으로 위장시켜 위력시위를 함으로서 적의 사기를 꺾었다.
영화가 흥행위주로 약간의 픽션적 요소가 없지 않아 왜적의 배를 부딪쳐 격침시키는 충파(沖破)나 선상백병전 등은 실제와 상이할 수도 있지만, 이순장군의 창의적인 해상전술은 물론 투철한 결사구국의 애국심과 사생관은 아무도 부인 못할 승전 리더십의 진수라 하겠다. 특히 다수 부하들이 출전을 반대함에도 지휘관의 결단을 과감히 실천하였다. “반드시 죽을 각오를 하면 산다( 必死則生, 必生則死), 한사람이 길목을 잘 지키면 천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一夫當逕 足懼千夫)’라고 강조 하면서 군율을 엄정 이행코자 비장한 결의와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게 한 상하간 소통의 전장 리더십 발휘 장면은 관객의 심금을 울리게 한다.
영화에서 ”장수는 충(忠)을 향하고, 충은 백성을 향해야한다“는 메시지는 국가 기강해이와 안보불감증으로 국민사기와 결집력이 이산되고 있는 현시점에 있어서 국가지도자가 국민으로부터 존경과 신뢰 그리고 충성과 순복(順服)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리더십의 기본원칙을 재인식시키는 금과옥조와 같은 참 교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묵묵히 노를 젓는 수군병사들과 전쟁에 시달리면서 호구지책이 어려움에도 이순신의 모병과 군량미 공출에 협력하는 농어민들의 국구정신은 물론, 육전에서 왜군에게 대패한 관군을 돕고자 전국방방곡곡에서 조직된 의병과 승병의 필사적 게리작전활동은 이순신의 해전 승리에 일조하였으니, 국가위기에 처하여 온 국민이 이 같이 총력전 체제로 일체화됨으로서 7년간의 대일본 전쟁에서 패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순신은 수군통제사(해군 총사령관)로 있으면서 스스로 논밭을 갈아 군자금을 만들고 당시 철갑 거북선과 판옥선을 만들어 미래해전에 철저 대비함으로서, 군정 및 군령기능을 동시 행사한 행정 및 전술을 겸비한 유능한 무결점의 지휘관이었음에 무려 7년간 23회의 해전에 출전하여 단 한 번의 패함도 없이 완승을 거두었던 것은 세계해전 사상 유례없는 자랑스러운 승전기록이다.
이순신장군은 한마디로 대민관계에 있어서는 충군애민(忠君愛民)의 가치관과 민본사상(民本思想)에 바탕을 둔 인정(仁政), 위민정치(爲民政治)의 표본적 귀감이었으며, 부하와의 상하관계에 있어서는 인간관계와 의리를 중시하는 올곧은 리더였다. 이 같은 사실은 난중일기와 유성룡의 징비록(懲毖錄)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나라사랑하는 애국정신, 제힘으로 사는 자립정신, 정의를 목표로 삼는 대의정신, 부하와 국민과 함께하는 애민정신, 새 길을 뚫고 나가는 개척정신 등으로 집약된다.
특히 이순신 장군은 올바른 가치관과 도덕성을 견지하고, 항상 미래를 예측하고 창의력을 발휘하며, 목표를 명확히 제시하는 창조적 리더였다. 그리고 항시 부하들과 상의하며 신상파악과 명령지시 상태를 확인하고, 골육지정으로 지도 감독하고 개별적 능력개발에 힘썼다. “적을 업신여기면 반드시 패한다(輕敵必敗之理)와 장부로 태어나 나라에 쓰이면 죽기로 최선을 다”라는 그의 말은 후세에 귀감이 되고 있다.
이순신장군은 임진왜란 초기 옥포 해전의 대승으로 연안에서 안하무인격으로 날뛰던 왜적들에게 큰 충격과 공포에 휩싸이게 하였고, 한산대첩의 승리는 남해의 제해권을 확보하고 작전대세를 우리 편에 유리하게 전개시킨 거룩한 승전이었으며, 명량해전의 대승으로 일본군의 수륙병진 공격에 의한 서울 조기점령 계획을 무산시키고 선조의 명나라 몽진을 되돌려 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에서 갑옷도 입지 않고 갑판에서 독전 지휘 중 적 조총탄에 맞아 전사함으로서 이미 승전의 기세를 잡고 추격하던 차에 도주하는 적함을 모조리 수장시키지 못하고 전쟁을 끝내게 되었음은 참으로 안타까웠다.
그는 평생을 나라와 겨레를 위해서 정의롭게 살았으며 민족정신을 구현한 역사적 도표(道標)로서 청사에 길이 빛날 성웅(聖雄)이다. 순국 후 선조대왕은 ‘나는 그대를 버렸지만 그대는 나를 안 버렸다’ 고 하였고, 숙종대왕도 현충사 제문에 ‘절개에 죽는다는 말은 옛날부터 있지만 제 몸 죽고 나라 살린 것은 이분에게서 처음보네’ 라고 공의 죽음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노산 이은상도 ‘민족의 태양, 역사의 면류관’이라고 칭송했으니, 한마디로 충무공은 불멸의 위기관리 선구자이며 현대판 최고 경영자로서 손색이 없다.
이순신장군이 가신지 416년이 된 지금도 국내 정파싸움은 변함없고, 한일관계는 최악의 상태로 치닫고 있다. 일본은 언제 또다시 우리를 침략할지 모른다. 영화 ‘명량’을 통해 상궤를 일탈한 젊은이들에게 충무공의 구국정신과 애국심을 본받도록 일깨워줌으로서 국민의 안보망각증과 군의 주적개념을 재정립 강화하는 동기유발의 계기가 되기 바라 마지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