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과에서
병원하면 청결과 함께 새하얀 색이 떠오른다.
하지만 이 치과는 ‘새하얗다’와는 거리가 좀 있는 듯,
검정색에서 짙은 남색과 붉은색까지 어두운 색으로 꾸며져 있다.
환자의 보호자가 입은 흰색 계열 옷이 도드라질 정도로.
- 키이이이이잉.
- 가가각. 가각.
이 어두운 분위기에 어울리는 기계음이 소름끼치게 울리며 치료가 시작됐다.
의사의 별난 취향에 의해 백열등 몇 개만 켜져 있는 진료실 내에서 이보다 듣기 오싹한 소리도 또 없었달까.
“아아아아아아악~~~~~”
그에 맞추어 심각한 비명소리가 울려 퍼진다.
치료대 위에만 환한 등이 켜져 있기에 대조적으로 어둑어둑한 진료실 밖에서 보면 누가 호러영화를 찍는다고 추측할 만한 상황.
-키이잉. 키이이이이잉.
그럼에도 전혀 굴하지 않고 치료를 계속해 나가는 의사의 손길을 따라 기계음이 이어지고,
치과 내 호러영화는 지속되었다.
1시간 전,
“정말 치과에 가야 되는 거야?”
바르는 별로 탐탁지 않은 얼굴로 피리아를 바라보며 몇 번이나 물었던 질문을 다시 했다.
‘치과’란 곳은 그에게 그다지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이지. 바르. 어금니가 아파서 밥도 못 먹겠다며.”
피리아는 자꾸 뒤로 빼는 바르의 손을 잡아끌며 꿋꿋이 치과를 향해 전진했다.
“그거야 그렇지만… 꼭 치과에 가야되는 거냐고…”
여전히 느리게 걷는 속도로 찌푸려진 표정은 변하지 않은 채 바르는 계속 치과로 가는 시간을 미루려는 기색을 확연하게 들어냈다.
“충치가 생겼으면 바로바로 치과에 가야지! 괜히 치료를 미뤄서 이렇게 상태를 더 심각하게 만들지 말고!”
피리아는 단호하게 잘라 말한다.
“게다가 우리 집에 놀러왔을 때 발견한 거잖아. 아무리 바쁘신 숙모님이시라도 뭐가 잘못된 건지 뻔히 알면서도 치료를 안 하면 ‘사촌 동생도 제대로 못 보냐.’며 화내실 거야.”
바르는 피리아에게 멀고먼 사촌 동생이었다.
증조할아버지 대에서 몇 다리 건너 내려와 항렬은 같지만 그걸 촌수로 하나하나 세어 매기려면 너무 복잡했기에 그냥 ‘사촌’으로 통하는 사이였다.
이렇게 멀고먼 사이인데도 정작 사는 장소는 엇비슷해서 자주 놀러 다니는 관계이기도 했다.
“그러는 엄마가 더 제대로 돌본 적이 없으니까 그런 말 할 자격 없다고 하면 되지.”
반쯤 어거지로 끌려가면서도 할 말은 다 하는 바르의 눈빛은 무정하기 그지없었다.
집에 붙어있는 시간보다 밖에서 자는 일이 더 많은 바르의 부모님을 대신해 16살이나 나이차가 있는 피리아가 바르를 맡아 돌봐주는 일이 빈번했던 것이다.
“바르! 그런 말 하면 안 된다고 누나가 몇 번을 말했어?”
“방금 것까지 치면 34번째.”
막 9살이 되는 반항기 소년의 말에 피리아는 한숨을 쉰다.
솔직히 말해 피리아의 부모 역시 바쁘기는 매한가지라서 언제나 바르가 오면 부모님을 대신해서 돌봐주다 보니 이런저런 잔소리를 꽤나 많이 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저걸 꼭 다 기억을 해놓고는 꼬박꼬박 말대답하는 것도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다지 좋은 일은 아니었으니…
“착한 애는 그렇게 대꾸 하는 거 아니랬지.”
나이답지 않게 빠릿빠릿한 바르를 어린애 취급하는 것은 피리아 밖에 없었고,
그에 반박하는 것도 이제는 귀찮았는지 아무런 말도 없이 뚱한 표정으로 걸음을 옮기는 바르였다.
하지만 곧 날아온 꿀밤을 한 대를 피하지 못한 바르는 머리를 쓰다듬으며 툴툴거린다.
“왜 근데 예전에 간 치과랑 다른 곳을 가는 거야?”
“그…그거야 뭐, 새로운 곳 간다고 나쁘진 않잖아~”
일부러 밝게 말하는 피리아를 바르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근데 여긴 요새 새로 연 것 같은데?”
막 리모델링을 끝마친 삐까뻔쩍한 외관의 건물 앞에 서서 바르는 ‘수 치과’라고 쓰여 있는 간판을 바라본다.
어디를 어떻게 보나 개장한지 며칠 안됐다는 것이 한눈에 보인다.
“응. 여기저기 광고가 붙어 있길래 한번 와본 거야.”
‘치과가 광고를 다 하나?’
작은 의문에 고개를 갸우뚱거린 똑똑한 9살짜리 꼬마는 피리아의 뒤를 따라 치과에 들어갔던 것이다.
“이제 그만해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이제는 질렸다는 표정으로 제로스는 인상재-치아의 틀을 찍을 때 사용하는 고무 같은 재료-를 트레이에 넣으며 말한다.
늘 웃고 있는 그의 표정은 계속된 비명소리로 인해 눈꼬리에 경련이 일어나고 있었고,
심한 고막 손상으로 그날 안에 이비인후과에 가봐야 하지 않을까 심각하게 고려해보기까지 했을 정도였다.
“까아아아아… 에?”
이제까지 기계의 고주파를 누를 정도로 하이톤의 비명을 질러왔던 피리아는 제로스의 말에 정신이 든 듯 커다란 푸른 눈을 깜박거렸다.
“곧 있으면 치료도 다 끝날 테니 빨리 나가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트레이를 바르의 치아에 물린 제로스는 치아 틀이 굳어지는 동안 한숨을 쉬듯 말한다.
근 20분간의 치료에 이만큼 피곤해진 것도 처음이었던 듯,
제로스는 노이로제라도 걸린 것처럼 비어있는 손으로 출구이자 입구인 문을 가리켰다.
“뭐…뭐에요. 치아 틀을 뜨는 것 보면 또 와서 치료한 부위를 메워야 하는 거 아닌가요?”
환자를… 아니, 환자의 보호자를 매몰차게 쫒아내려는 의사의 당부에 피리아는 황급히 아는 지식을 다 동원해 한마디 한다.
분명 치료를 시작하기 전에 ‘오늘 치료 후, 4일쯤 뒤에 다시한번 오셔야 합니다.’라며 어떤 재료로 충치 부위를 채울 것인지 물었던 것이다.
“뭐, 그때야 충치를 제거하는 일은 없을 테니 상관없지만 오늘은 이만…이란 기분이네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제로스는 트레이를 수거해 깔끔하게 떠진 바르의 치아 틀로 시선을 돌린다.
“그건 또 무슨 의미에요?”
완전 피곤하다는 표정으로 뒷정리를 설렁설렁하게 하는 제로스를 보며 피리아는 눈살을 찌푸린다.
“보호자 분께서 환자분보다 더 요란을 떠셔서 말입니다.”
평상시의 접대용 미소를 지으며 태연하게 일침을 날리는 제로스의 말에 피리아는 얼굴을 붉힌다.
저번에도, 저저번에도 피리아가 바르를 대동하고 치과에 들를 때면 주로 충치 치료가 있었고,
그 때마다 피리아가 기계음을 못 견뎌 하는 덕분에 언제나 수난을 치렀다.
“무…무슨 요란이라는 거에요?! 그렇게 따지면 이 치과 꼴이 더 요상하지요!”
물론 치과를 바꾸지 않는 것이 익숙하고 더 좋지 않으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언제나 두 번째로 같은 치과를 방문하게 되면 의사가 원인을 알 수 없는 급성복통을 호소하거나 갑작스런 상을 당했다며 뛰쳐나가고…
결국 그렇게 문전박대를 당한 경험이 그녀를 늘 새로운 치과로 향하게 했던 것이다.
“요상하다니요! 여긴 제 병원인데 제 취향으로 꾸민다고 큰일 난답니까?!”
찔리는 것이 있기는 있는지 황급히 화제를 전환한 피리아의 말에 제로스는 이마에 사거리를 출현시키며 목소리를 높인다.
검은색 치료대에 짙은 남색으로 된 벽지, 짙은 붉은 색-좋게 보면 와인색, 나쁘게 말하자면 핏빛-의 소파가 대기실에 놓여있고 그곳은 보라색 전구로 밝혀져 있었으니.
개인적인 취향이라고 넘어가기엔 환자들에게 악취미로 보이기 충분했달까.
유일하게 밝은 빛이 내리쬐는 치료대 옆에 앉아 치과의사란 사람 역시 검은색 복장을 입고 치료를 하는데,
하얀 치아를 기대하는 치과인지 검은 충치를 환영하는 장소인지 알 수가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취향도 정도곳이죠! 게다가 간호사 한명도 없이 무슨 치과가 이래요.”
그렇다.
치과하면 보조해주는 간호사가 많이 있어 치료를 할 때 옆에서 기계 조작을 도와주는데 이 특이하다 할 수 있는 치과에선 의사가 혼자서 다 처리를 했던 것이다.
“없어도 잘 하지 않았습니까?”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제로스를 바라보며 피리아는 왠지 모를 짜증이 치솟는 것을 느꼈다.
실제로 혼자 치료를 할 때 전혀 속도나 과정에 지장이 없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괜히 인정하기 싫게 만드는 말투였달까.
“자신이 치료하는 걸 보지도 않아놓고 무슨 큰소리에요.”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비명을 지르느냐 뭘 보긴 하셨습니까?”
한창 말싸움으로 발전되는 이 둘의 대화(?)를 지켜보던 바르는 입안을 헹구고 목에 둘러진 헝겊-목걸이 형식에 철제 줄과 집게로 이어진-을 풀어놓는 등,
환자로써의 할 일을 모두 다 끝냈는데도 차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 채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래서 치과에 오기 싫었던 건데…”
두 번째로 찾아간 치과마다 문전박대를 당한 후,
알게 모르게 치아관리 태도가 철두철미해진 바르였지만 그래도 충치가 찾아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나 보다.
그래도 치과 가는 것을 늦춰보겠다고 한사코 그 사실을 숨기다가 결국 들켜버린 것이다.
그때 바르는 치과에 혼자 가겠다고 암묵적으로 결단을 내렸지만 피리아의 치마폭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고,
모든 금전사항은 피리아에게 맡겨져 있었으니 돈을 지불할 능력이 없는 환자로써 그저 그녀의 동행으로 따라갈 수밖에…
“그럼 광고를 하지 말던 가요!”
“그건 저도 모르는 사이에 대학교 선후배분들이 해주신 거란 말입니다!”
목청이 계속 높아지는 그 둘의 말싸움에 바르는 고개를 내저으며,
이대로 저 둘을 내버려두고 그냥 혼자 집에 가버릴까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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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안가고 버티던 치과에 가고 나서
그와 마찬가지로 열심히 올리는 걸 미루고 있던 소설을 하나 올립니다(이걸 몇 달 전에 썼더라~;;)
치과 전문 용어들에서 딸리는 묘사나 설명은 넘어가주시고요(어떻게 찾아야 할지도 막막해서ㅠㅠ)
치과에서 스케일링뿐이었지만 치료를 받으면서 기계음을 녹음해서 소설 배경음으로 쓸걸 그랬나~
라고 살짝 아쉬워하기도 했지만 결국 안하기로 한 건 역시 잘한 선택이겠죠?ㅋㅋㅋ
참고로 제로스의 ‘대학교 선후배분들’은 싸그리 다 제로스 옹호 팬클럽회원(고로 모두 다 여자들ㅋㅋ)으로 자청해서 홍보를 해준 거란 설정입니다ㅎㅎㅎㅎ;;;
앞부분에서 익명으로 서술한 피리아의 비명은 나름 반전이라고 혼자 킥킥거리면서 쓴 건데요.
여러분께도 재밌었길 바라면서 이만 사라지겠습니다~
첫댓글 피리아가 소리를 지른거였군요...;; 피리아, 그러면 폐가 되잖아.......(제로스님에게) 그러니 소리좀 그만질러..;
ㅋㅋㅋ 그렇죠~ 여러모로 폐가 되는데도 굳굳히 써봤습니다ㅋㅋ
아프겠다
소리가 아프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