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임종주의 시선] 헌법기관의 품격
중앙일보
입력 2023.06.20 01:05
임종주 정치에디터
‘부산 돌려차기’ 사건 항소심에서 가해자에게 징역 20년형이 선고된 것을 놓고 갑론을박이 꽤 뜨겁다. 검찰 구형량 35년에는 못 미치지만, 1심 때 12년형보다는 8년이 늘어난 것인데 못마땅하다는 반응이 온라인을 중심으로 들끓는다. 그렇게 달궈진 정서적 형량은 무기징역이나 사형을 가뿐히 오르내린다.
'부산 돌려차기' 사건 피해자의 변호인이 지난 12일 항소심 선고 후 법정 앞에서 판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법원은 피고인 A씨(31)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하고, 10년간 정보통신망 신상 공개, 10년간 아동 관련 기관 취업 제한, 20년간 위치추적 전자장치 부착을 명령했다. 송봉근 기자
생면부지 여성을 10여분간 뒤쫓아가 무차별 폭행한 것으로도 모자라 정신을 잃은 피해자를 상대로 성폭행을 시도하고, ‘출소 후 보복’ 운운으로 극심한 공포감을 조장하는 2차 가해로 사회적 공분을 부른 까닭이다.
'부산 돌려차기' 사건 피해자 인스타그램 캡처
항소심 재판부에 제출됐다는 반성문은 여론의 반감에 더 불을 질렀다. 가해자는 “일면식 없는 사람에게 묻지마식 상해를 가한 것에 깊은 잘못을 느끼고, 마땅한 처벌을 받겠다”면서도 “왜 이리 많은 징역형을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전과가 많다는 이유라면 그에 맞게 형 집행을 다 했다”며 억울함을 표출했다. 징역살이로 죗값을 모두 치렀는데도 1심에서 부당하게 중형을 받았다는 반발이다. 이 남성은 전과 18범이다. 그러나 가해자 스스로 그렇게 합리화하고 싶을 뿐 언제, 얼마를 갚았는지 계량할 수는 없다. 피해자의 아픔과 고통은 계산 밖이다.
이런 경우 으레 사법적 단죄의 목소리가 공명을 일으킨다. ‘누구라도 억울한 희생양이 될 수 있겠구나’ 하는 불안감은 엄벌주의를 모질게 자극한다. 범죄자 신상공개를 대폭 확대하라는 요구가 분출하고 머그샷(현재 얼굴) 공개 추진 등 법 개정 움직임에 속도가 붙는다. 형량을 더 강화하고, 전자발찌를 하나라도 더 채워야 한다는 분위기 또한 팽배해진다.
지난 18일 서울 종로구 총리 공관에서 열린 고위당정협의회. 미국처럼 범죄자 머그샷(현재 얼굴 사진) 촬영과 공개를 추진하기로 했다. 김현동 기자
근대사법에서 형벌은 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법적 방법이다. 효과와 장점을 부인할 순 없다. 그럼에도 처벌과 치유를 별개로 보는 데서 오는 한계 또한 엄연히 존재한다는 지적이 외면받아선 안 된다. “(응보적 형사사법은)범죄로부터 단절시키는 효과가 아니라 범죄의 악순환이 생기도록 환경을 조성하고,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악화시킨다”(하워드 제어『회복적 정의란 무엇인가?』). 돌려차기 사건 가해자가 교도소를 제집 드나들 듯하며 18개의 별을 달게 된 것도 그런 결점과 전혀 무관하다고 할 수 있을까.
이탈리아 영화 거장 ‘타비아니’ 형제 감독의 ‘시저는 죽어야 한다(2013)’에는 실제 죄수들이 배우로 등장한다. 적게는 징역 10∼20년형에서 종신형까지 선고받은 중죄인들이 셰익스피어의 희곡 ‘줄리어스 시저’를 교도소 무대에 올리기까지 6개월간의 여정을 섬세하게 담아냈다. 수감자들은 시저 암살을 공모하고 실행하는 극 중 상황에 몰입하다 뜻밖에 자신들의 추악한 본모습과 마주하게 된다. 그렇게 환호와 박수로 물결친 공연장을 뒤로하고 감방으로 돌아간 죄수는 최고로 꼽히는 대사를 나직이 읊조린다. “예술을 알고 나니 이 작은 방이 감옥이 되었군”. 비로소 예술을 통해 자신의 죄를 깨닫고 치유와 회복의 빛을 본 것이다.
국가기관의 과오를 따지는 과정에도 ‘응보와 회복’을 하나의 연결고리로 보는 접근법을 대입해보면 어떨까. 잘못은 잘못대로 가려서 도려내되, 재발 방지와 신뢰 회복을 위한 길도 함께 모색하자는 의미에서다. 공정성을 생명으로 선거 관리의 중책을 이어가야 할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전·현직 직원 자녀 채용 의혹으로 휘청이는 모습을 보고 드는 생각이다.
노태악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이 지난 9일 오후 경기 과천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 선관위원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뉴스1
감사원·권익위원회와 선관위 간 진상조사를 둘러싼 공개 충돌은 볼썽사납다. 정치권 공세는 논외로 하더라도 사정 기관들이 마치 먹잇감 하나를 놓고 경쟁하듯 달려드는 것도 능사는 아니다. 당장 내년 4월 총선이 불과 9개월여 앞이다. 선거제 개편과 선거구 획정, 여론조사 개선과 가짜뉴스 대응 등 무엇 하나 손 놓고 있어선 안 된다. 선거 관리의 공정성이 흔들리면 선거 결과에 대한 불신과 사회적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선관위 조사’ 충돌 볼썽사나워
엄벌과 신뢰회복 함께 논의돼야
선관위 자성·책임 모습 보여야
다만, 선관위도 책임지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이미 드러난 숱한 ‘아빠 찬스’ 의혹만으로도 우리 사회의 공정성에 큰 상처를 입혔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은 헌법기관의 품격과는 거리가 멀다. 권익위 조사에 적극 협조하겠다던 당초 약속을 은근슬쩍 번복하려는 듯한 행태와 헌법재판소 권한(감사원 감찰 범위)쟁의 심판 청구가 감사·조사 동시 무력화를 노린 꼼수로 비치는 건 권위를 스스로 실추시키는 자충수다.
잘못을 깨닫고, 반성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여야 국민적 신뢰 회복이 스며들 명분과 공간이 열린다. 스크린 속 명대사를 헌법기관이라고 해서 되뇌지 말란 법은 없다.
임종주 정치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