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무 「詩의 溫度」] ㉑ 길 가는 도중에(途中雜詩)
저 멀리 손톱만 한 말, 콩알만 한 사람 가고 또 가고
단풍 든 하늘 대추 익은 땅 넓고도 멀구나
어지러운 나무 구륵죽(句勒竹)의 형세이고
담백한 구름 도라면(兜羅綿)의 빛이네
寸馬豆人歷歷(촌마두인력력)
楓天棗地茫茫(풍천조지망망)
亂樹句勒竹勢(난수구륵죽세)
澹雲兜羅綿光(담운도라금광)
*寸馬豆人(촌마두인) : 먼 곳에 있는 말과 사람이 매우 작게 보임을 이르는 말
*勾勒竹(구륵죽) : 대를 그릴 때 겹으로 하여 마치 쌍대처럼 하는 것을 말한다.
*兜羅綿(도라금) : •兜 투구 (두), 도솔천 (도). 솜을 자아 만든 무명실로 짠 피륙 목면(木綿)의 일종. (∼子, ∼儿)호주머니, 주머니, 자루.
―『아정유고 3(雅亭遺稿 三)』 이덕무(李德懋, 1741-1793)
시(詩)에는 경계(境界)가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이덕무는 이렇게 말한다. “글에는 경계가 있는가. 먼 곳의 물은 파도가 없고, 먼 곳의 산은 나무가 없고, 먼 곳에 있는 사람은 눈이 없고, 말하는 사람은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듣는 사람은 팔짱만 끼고 있다는 묘사가 바로 그것이다.” 인간의 시선은 경계가 있다. 시선의 경계 가장자리에 있는 자연과 사물은 구체적인 모습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형상화할 수밖에 없다.
먼 곳의 바다는 파도가 보이지 않고, 먼 곳의 산은 나무가 보이지 않고, 먼 곳의 사람은 눈·코·귀·입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먼 곳의 바다는 파도를 묘사하지 않고, 먼 곳의 산은 나무를 묘사하지 않고, 먼 곳의 사람은 눈·코·귀·입을 묘사하지 않는다. 단지 형체와 형상만을 묘사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시의 묘사는 그림의 묘사와 닮았다. 손톱만 하게 그 형체만 묘사해도 말인 줄 알고, 콩알만 하게 그 형상만 묘사해도 사람인 줄 안다. 이렇게 보면 인간의 시선은 경계에 머물지만 또한 그 경계 너머까지 바라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선의 경계는 존재하지만 사고의 경계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적 묘사 역시 시선의 경계에 머물지 않고 사고의 경계로까지 확장한다. 그곳에 시적 상상력이 있다.
「詩의 溫度」/ 저자 <이덕무李德懋(1741~1793)>, 편역 <한정주>역, 출판사: 다산초당, 출간일: 2020.02.17.
✵이덕무(李德懋, 1741~1793) : 규장각(奎章閣)에서 활동하면서 많은 서적을 정리·교감했고, 고증학(考證學)을 바탕으로 많은 저서를 남겼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무관(懋官), 호는 아정(雅亭)·청장관(靑莊館)·형암(炯庵)·영처(嬰處)·동방일사(東方一士). 아버지는 통덕랑(通德郞) 성호(聖浩)이다. 서자(庶子)로 태어났다.
어려서 병약하고 집안이 가난하여 정규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으나, 총명하여 가학(家學)으로 문리(文理)를 터득했다. 약관의 나이에 박제가(朴齊家)·유득공(柳得恭)·이서구(李書九)와 함께 〈건연집巾衍集〉이라는 시집을 내어 문명을 중국에까지 떨쳤다. 이후 박지원(朴趾源)·박제가(朴齊家)·홍대용(洪大容)·서이수(徐理修) 등 북학파 실학자들과 교유하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또한 고염무(顧炎武)·주이존(朱彛尊)·서건학(徐乾學) 등 중국 고증학파의 학문에 심취하여, 당대의 고증학자였던 이만운(李萬運)에게 지도를 받았다.
1778년(정조 2) 사은 겸 진주사(謝恩兼陳奏使) 심염조(沈念祖)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淸)의 연경(燕京)에 갔다. 이때 기균(紀均)·당악우(唐樂宇)·반정균(潘庭均)·육비(陸飛)·엄성(嚴誠)·이조원(李調元)·이정원(李鼎元)·이헌교(李憲喬)·채증원(蔡曾源) 등 당대의 석학들과 교유했다. 돌아올 때 그곳의 산천(山川)·도리(道里)·궁실(宮室)·누대(樓臺)·초목(草木)·충어(蟲魚)·조수(鳥獸)에 이르는 기록과 함께 많은 고증학 관계 서적을 가지고 왔는데, 이것은 그의 북학론 발전에 큰 보탬이 되었다.
1779년 박제가·유득공·서이수 등과 함께 초대 규장각 외각검서관(外閣檢書官)이 되었다. 근면하고 시문(詩文)에 능했던 그는 규장각 경시대회(競詩大會)에서 여러 차례 장원하여 1781년 내각검서관(內閣檢書官)이 되었으며, 사도시주부(司䆃寺主簿)·사근도찰방(沙斤道察訪)·광흥창주부(廣興倉主簿)·적성현감(積城縣監) 등을 거쳐 1791년 사옹원주부(司饔院主簿)가 되었다. 그는 규장각의 도서편찬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대전통편大典通編〉·〈규장전운奎章全韻〉·〈기전고箕田攷〉·〈도서집성圖書集成〉·〈국조보감國朝寶鑑〉·〈규장각지奎章閣志〉·〈홍문관지弘文館志〉·〈검서청기檢書廳記〉·〈시관소전詩觀小傳〉·〈송사전宋史筌〉 등을 정리·교감했다.
1793년 병사(病死)했는데, 정조는 그의 공적을 기념하여 장례비와 유고집인 〈아정유고雅亭遺稿〉의 간행비를 내렸다. 서화(書畵)에도 능했다. 저서로는 〈영처시고嬰處詩稿〉·〈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기년아람紀年兒覽〉·〈사소절士小節〉·〈영처문고嬰處文稿〉·〈청비록淸脾錄〉·〈뇌뢰낙락서磊磊落落書〉·〈영처잡고嬰處雜稿〉·〈관독일기觀讀日記〉·〈앙엽기盎葉記〉·〈입연기入燕記〉·〈열상방언洌上方言〉·〈예기고禮記考〉·〈편찬잡고編纂雜稿〉·〈협주기峽舟記〉·〈천애지기서天涯知己書〉·〈한죽당수필寒竹堂隨筆〉 등이 있다.
[자료출처 및 참고문헌: 《이덕무 「詩의 溫度」, 저자: 이덕무, 편역: 한정주(역사평론가), 다산초당, 2020.02.7.》, 《Daum, Naver 지식백과》/ 글과 사진: 이영일∙고앵자, yil207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