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세유표(經世遺表) 권9
‘방전법(方田法)’은 중국에서 시행된 것을 보면, 일정한 규모로 方을 정하고, 그 안의 모든 토지를 측량하고, 각각 토지의 주인을 명시하고, 그 토지의 비옥도(산출량)을 정하되, 거기에 참여자를 여럿으로 하여 힘 있는 한 두 사람이 농간을 부리지 못하게 하고, 그 문서 대장을 작성하되 변동 사항이 생기면 그것을 부기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근대적 토지대장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 단위가 보(步)·경(頃) 등으로 지금과 다를 뿐이다.
그러니 그 시행이 쉽지 않음은 자명하다. 애매한 토지제도로 이득을 보던 기득권자는 물론, 먹고살기 고달픈 사람은 나중에 좋더라도 당장 새로운 일이 생기는 것이 싫다. 그래서 중국은, 북송 때부터 남송까지 시행과 파기를 반복하다, 명나라에 와서야 이를 제도화하였다.
선생은, 장주(漳州) 지사였던 주자가 방전을 시행하고자 황제에게 소를 올린 사실과, 조정대신 등의 방해로 결국 실패했지만 주자의 주장에서 힘을 얻고자 했던 것 같다. 상대적으로 자세히 다루고 있다.
중국 방전(方田) 시행의 시말(始末)
송 신종(宋神宗) 희령(熙寧) 5년(1072), 방전법을 다시 정리하였다.[사신(史臣)이, “신종 때에 그릇된 擧措가 시끄러웠으나 이 일이 볼 만한 것이었다.” 하였다]
8월, 사농(司農)에게 조서를 내려, 부세를 고르게 하는 조약과 그 방식을 아울러 천하에 반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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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에 조서를 내려, 등윤보(鄧潤甫)의 청을 좇아서 경동로 17주(州)에 관원 4명을 뽑아 각자 그 방면을 주관하면서 군ㆍ현에 나뉘어 다녔는데, 각각 3년을 임기로 했습니다. 또 조서를 내려, 방(方)마다 대갑두(大甲頭) 두 사람, 소갑두(小甲頭) 세 사람을 차임(差任)하고, 방호(方戶)에 함께 집회해서 각각 보ㆍ묘를 확인하도록 했습니다. 방전관이 토색(土色)을 징험하면서 각각 갑두와 방호를 단속해서 함께 정했고, 재상(災傷)된 도의 분(分)은 조서해서 임시로 정파(停罷)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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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풍(元豊) 원년(1078)에 조서를 내려, “경동(京東) 동로(東路)의 백성들이 방전(方田)의 부실함을 호소하고 있다. 먼저 사송(詞訟)이 가장 많은 한 현을 택하여 각 등제(等第)에 의거해서 적중하게 세율(稅率)을 세웠다가, 일이 끝나고 송사가 없기를 기다려서 곧 그 안을 다음 현에 시행하라.” 하였습니다.
5년(1082), 개봉부(開封府)에서 방전법을 말하면서, 세 받는 것이 가장 고르지 못한 현에 먼저 시행하는데, 해마다 5현씩 방전하기를 청하므로 그 청대로 했습니다. 그 후에는 반드시 그 해 곡식이 익은 뒤 농한기(農閑期)에 시행했으나, 현에 산림(山林)이 많은 곳은 혹 시행하고 혹은 시행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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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풍 8년(1085), 관리가 봉행(奉行)하면서 소요(騷擾)를 많이 일으킴을 황제(皇帝, *신종)가 알고, 조서를 내려 방전을 파(罷)했다.
휘종(徽宗) 숭녕(崇寧) 3년(1104) 재신(宰臣) 채경(蔡京) 등이 방전을 다시 시행하기를 청하므로, 그 말을 좇아서 경사(京師) 서북 양도부터 시작하였다.
5년(1123), 여러 도에 조서하기를 “현재 방전을 시행하고 있으나 민간에 방전된 것이 고르지 못할까 염려되며, 공리(公吏)가 시끄럽게 청구[乞取]하는 것을 금단하기 어려우니, 이미 방전한 것은 제외하고 임시 중지하라.” 하였다.
대관(大觀) 2년(1108), 조서를 내려 다시 방전법을 시행하였다.
선화 2년(1120), 조서를 내려 여러 도의 방전을 파하였다.
소흥(紹興 : 南宋 高宗의 연호) 12년(1142)에, 이춘년(李春年)이 아뢰어서 경계(經界)하는 법을 시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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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종(光宗) 소희(紹熙) 원년(1190), 장주(漳州) 지사 주희(朱熹)가 아뢰기를, “경계(經界)하는 것은 민간에 막대한 이득이 됩니다. 소흥(紹興)에 이미 거행한 곳에는 도적(圖籍)이 아직 남아 있어서 전세(田稅)를 상고할 수 있으니 빈자나 부자가 실상대로 납세(納稅)하게 되고, 소송(訴訟)이 번거롭지 않아서 공사(公私) 양쪽이 편리합니다. 그런데 유독 장주(漳州)ㆍ천주(泉州)ㆍ정주(汀州) 세 곳에는 시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빈민이 생업은 없어도 배정된 세는 남아 있어서 그 괴로움을 견디지 못합니다. 주ㆍ현도 일정한 부세를 그냥 잃게 되어서 날로 덜어지고 달로 줄어듭니다.
신이 감히 한 몸의 수고로움을 앞세워서 한 주의 편리함을 뒤로 하지 못하고, 그것이 반드시 시행해야 할 것임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시행하기를 상세하게 하면, 일정한 법이 되기에 족하지만 시행하기를 거칠고 간략하게 하면 후일 폐단이 많아지기 십상입니다. 까닭에 반드시 관리를 가려 위임(委任)해서 성공하도록 책임지워야 합니다. 묘ㆍ보를 타량(打量)하고 계산을 정확히 한 다음, 도면(圖面)과 대장(臺帳)을 모아서 만드는데, 비용은 관에서 주며, 살림에 따라서 세를 고르게 합니다. 이번에는 전지 한 묘마다 9등급을 하고, 높고 낮음에 따라서 계산하여, 돈 몇 문(文)을 내도록 합니다.” 하였습니다.
임금이 이에 보신(輔臣)에게 조유(詔諭)해서, 먼저 장주에 시행하도록 하고, 조신(漕臣) 진공량(陳公亮)에게 조서하여 희(熹)와 함께 힘을 합해서 봉행하도록 하였습니다.[《송사》 <道學傳>에, 주희가 광종 초년에 장주 지사가 되어 경계를 시행하지 않은 해(害)를 항상 병통으로 여겼는데, 마침 조정에서 泉ㆍ汀ㆍ漳 세 주에 경계를 시행코자 하였다. 희가 이에 사정을 묻고 인물을 선택하는 것과 방량(方量)하는 법을 올렸는데, 호족으로서 빈민을 침해하던 자가 불편하다 하여 저지하였다. 재상, 留正은 泉州 사람인데, 그의 고향 고을에도 시행할 수 없다는 자가 또한 많았고, 포의(布衣) 오우규(吳禹圭)도 상서하여, 사람을 시끄럽게 하는 법이라고 무고하였다. 조서도 관망하다(需後) 칙지를 내려서 먼저 장주에 경계를 거행하도록 하였다.]
희(熹)가 매양 이르기를, “경계는 반년 동안이면 마칠 수 있으니, 반년 동안 수고로움으로써 수백 년 폐단을 혁파하고 이후에도 50년 동안은 이 법이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네 현(縣)에 다락집 넷을 지어서 부적(簿籍)을 저장하고, 주(州)에는 다락집 하나를 지어서 네 현 도장(圖帳)을 저장하도록 함이 마땅하다.”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가난한 백성은 고무(鼓舞)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나, 귀가 호족(貴家豪族)으로서 전지를 차지해서 세를 숨긴 자가 이론(異論)을 내세웠으며, 소장(訴狀)을 바쳐서 불편함을 말한 자가 있기까지 하였습니다. 드디어 앞서 내렸던 조서가 막히게 되었는데, 희가 사직하기를 청하면서, 경계를 시행하지 못한 것을 자핵(自劾)하니, 논의하는 자가 애석하게 여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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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 이종(宋理宗) 개경(開慶) 4년(*개경 4년은 없음. 아마도 景定 3년, 1262년인 듯함-고전DB) 경계 추배법(經界推排法)을 시행하였다. 이리하여 한 자[尺] 한 치[寸] 되는 땅도 모두 관적(官籍)에 기입되니 동남 지방이 크게 시끄러웠다.[《綱鑑》]
대명 태조(太祖) 홍무(洪武) 20년(1387)에 비로소 어린도법(魚鱗圖法)을 시행하였다.
만력(萬曆 : 明神宗의 연호) 초년에 장량(丈量 : 토지의 면적을 측량하는 일)하면서 개방법(開方法)을 이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