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인자들아 너희가 당연히 공의를 말하겠거늘 어찌 잠잠하느뇨 너희가 정직히 판단하느뇨 오히려 너희가 중심에 악을 행하며 땅에서 너희 손의 강포를 달아주는도다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저희의 독은 뱀의 독 같으며 저희는 귀를 막은 귀머거리 독사 같으니 곧 술사가 아무리 공교한 방술을 행할찌라도 그 소리를 듣지 아니하는 독사로다 하나님이여 저희 입에서 이를 꺾으소서 여호와여 젊은 사자의 어금니를 꺾어 내시며 저희로 급히 흐르는 물 같이 사라지게 하시며 겨누는 살이 꺾임 같게 하시며 소멸하여 가는 달팽이 같게 하시며 만기되지 못하여 출생한 자가 일광을 보지 못함 같게 하소서 가시나무 불이 가마를 더웁게 하기 전에 저가 생 것과 불붙는 것을 회리바람으로 제하여 버리시리로다 의인은 악인의 보복 당함을 보고 기뻐함이여 그 발을 악인의 피에 씻으리로다 때에 사람의 말이 진실로 의인에게 갚음이 있고 진실로 땅에서 판단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하리로다 (시 58:1-11)
<설교> 사람이 살면서 억울한 일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 물론 순전히 자기 입장에 서서 억울하다는 항변을 하는 것도 많겠지만 자신이 저지른 일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범인으로 몰리는 것도 있을 것이고, 자신의 말이나 행동을 오해해서 악한 사람으로 몰리는 것도 있을 것입니다. 특히 연예인들이 근거 없는 소문에 휩싸일 때 억울한 심정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실제로 재판 사건을 보면 범인이 아닌 사람이 사형을 받고 나중에 무죄가 밝혀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은 그나마 고의가 아니라 사건 판단을 잘못한 실수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때로는 정치적인 이유로 자신의 훼방자를 법이라는 힘을 이용해서 처단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예수님도 바로 그렇게 죽으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은 세상에 진실하고 정직한 판단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물론 ‘법정에서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진범을 가려내며 그에 따른 정확하고 정직한 판단을 하는 것은 있지 않는가?’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법정에서의 판단은 눈에 드러난 증거에 의해서만 할 뿐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눈에 드러난 것이 오히려 억울한 증거가 되어 죄인으로 판단을 받게 되는 경우가 있음을 생각해 본다면 이 세상에 진실하고 정직한 판단은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 정답일 것입니다.
그래도 세상에는 진실하고 정직한 판단이 있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다면, ‘과연 지금의 세상이 예수님에 대해 진실하고 정직한 판단을 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현존하는 세상을 굳건히 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너뜨리기 위해 오셨습니다. 현존하는 세상은 결국 사라질 허상에 불과하며 오직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그 나라만이 영원하다는 것을 선포하기 오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지금의 세상이 환영하고 구세주로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세상은 누구든 세상의 체제를 무너뜨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제사장과 장로들, 그리고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고발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야 말로 이스라엘을 무너뜨리는 반역자로 여겼기 때문이 아닙니까? 예수님의 말씀 하나하나가 자신들이 붙들고 지탱해 왔던 체제를 무너뜨리는 것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제거함으로써 자신들의 체제를 지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은 모두가 자신을 지키고, 또한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 살아갑니다. 그런데 복음은 세상이 지키고자 하고 붙들고자 하는 것을 잘라내는 방식으로 다가옵니다. 과연 이러한 복음에 대해, 또한 예수님에 대해 진실하고 정직하고 공의로운 판단을 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본문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자들아 너희가 당연히 공의를 말하겠거늘 어찌 잠잠하느뇨 너희가 정직히 판단하느뇨 오히려 너희가 중심에 악을 행하며 땅에서 너희 손의 강포를 달아주는도다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1-3절)
다윗은 하나님께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약속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다윗을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판단하지를 않습니다. 사울의 눈에는 다만 자신의 왕권을 위협하는 정적으로만 보일 뿐이었습니다. 이것은 사울만이 아닙니다. 이 기회를 틈 타 사울에게 다윗을 밀고하여 자신의 위치를 굳게 하려는 사람들 역시 다윗을 정직하게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을 밀고하고 해하고자 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다윗을 이스라엘의 반역자로 판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무고하게 사울에게 쫓기고 있음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을 해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공의를 따라 정직하게 판단하고 그 판단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입장에서 자신의 이득을 위해 행동한 인간의 악하고 완악한 실체인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공의를 따라 정직하게 판단하고 그 판단에 따라 의롭게 행동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사람이 정직하게 판단하고 의롭게 행동하려면 철저하게 자기 입장이라는 것은 버려야 합니다. 자기 자신은 완전히 버려진 채 오직 의만 그 가슴에 충만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인간이 아닙니다. 우리의 가슴은 의로 가득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로 가득합니다. 공의보다는 세상에서의 이익에 더 이끌립니다. 정직한 판단보다는 내 입장에서 내게 유리한 판단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오직 내 중심으로 말하고 행동을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완악함입니다.
다윗이 “저희의 독은 뱀의 독 같으며 저희는 귀를 막은 귀머거리 독사 같으니 곧 술사가 아무리 공교한 방술을 행할찌라도 그 소리를 듣지 아니하는 독사로다”(4,5절)고 말하는 것처럼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은 뱀의 독과 같은 남을 죽이는 악한 것 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실상입니다. 귀를 막은 귀머거리 독사처럼, 우리도 우리의 악함과 탐욕을 책망하는 말씀에 대해 귀를 막은 채 오직 우리의 이익을 따라 타인의 아픔과 상처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고 내 성질대로만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과연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귀를 열어 놓고 살아간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왜 우리가 추구하고 원하고 소망하는 것이 달라지지 않고 여전히 세상의 것에 매여 살아가는 것입니까? 말씀에 대해 귀를 열어 놓고 있다면 말씀을 통해 전달되는 예수님의 소리를 들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목자의 음성을 양이 알고 따르는 것처럼 예수님의 소리를 듣고 순종하게 되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과연 우리의 현실이 그러하다고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 우리의 귀는 말씀보다는 세상을 향해 더 열려 있다고 봐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일에 대해 민감하지 않습니까? 말씀 때문에 고민하고 걱정하고 탄식하는 것보다는 세상의 일 때문에 매일 고민하고 걱정하고 탄식하며 살아가지 않습니까? 이것이 마치 귀를 막은 귀머거리 독사처럼, 그래서 술사가 아무리 공교한 방술을 행한다고 해도 그 소리를 듣지 않고 자신의 길로만 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사람이 이러한 길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 길이 자신에게 유리할 것이라고 착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육신에 득이 되는 길을 찾기 때문에 정직과 공의가 인도하는 길은 회피하게 되고 대신 비록 거짓이라고 해도 득이 되는 길을 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 길을 절대로 인정치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저희 입에서 이를 꺾으소서 여호와여 젊은 사자의 어금니를 꺾어 내시며 저희로 급히 흐르는 물 같이 사라지게 하시며 겨누는 살이 꺾임 같게 하시며 소멸하여 가는 달팽이 같게 하시며 만기되지 못하여 출생한 자가 일광을 보지 못함 같게 하소서 가시나무 불이 가마를 더웁게 하기 전에 저가 생 것과 불붙는 것을 회리바람으로 제하여 버리시리로다”(6-9절)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인간이 세운 모든 것을 무너뜨릴 것이고 결국 세상은 하나님의 계획의 성취만 남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현재의 실상을 전부로 바라보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그 끝에서 세상을 바라보면서 판단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정직한 판단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세상에 기반을 둔 자신의 내일을 바라보고 인생을 계획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자기 인생을 고난의 길을 가는 것으로 계획하겠습니까? 오직 세상에서의 번성과 성공을 기대하며 인생을 계획하고 살아가지 않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말씀에 대해서는 귀를 막아 버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은 세상에 기반을 두고자 하는 인간의 계획이 모두 헛됨을 선포하면서 하나님의 계획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10절을 보면 “의인은 악인의 보복 당함을 보고 기뻐함이여 그 발을 악인의 피에 씻으리로다”고 말합니다. 의인이 악인의 보복 당함을 보고 기뻐하는데, 이것은 단지 악인이 보복을 당하는 것이 기분 좋다는 의미라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악인에 대해 보복하시고 결국 하나님의 계획대로 성취되는 하나님의 승리를 바라보면서 기뻐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발을 악인의 피에 씻는다는 것이 승리의 의미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승리에 함께 참여되는 신자의 기쁨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을 바라보는 신자의 시각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에서 무엇을 보십니까? 열심히 일하고 노력해서 성공한 인생이 보입니까? 아니면 돈과 권력으로 큰소리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보입니까? 그래서 여러분은 스스로 초라하다고 느끼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이야 말로 말씀에 대해 귀를 막은 채 여전히 인간의 완악함과 탐욕을 따라 사는 인생에 불과할 것입니다.
신자가 봐야 할 것은 공의와 진실과 정직으로 판단하시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세상입니다. 하나님이 판단하실 때 악한 자는 결국 멸망으로 끝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의인은 하나님의 승리에 참여하여 영원한 기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보이는 것으로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셔서 모든 선한 일을 행했지만 세상은 하나님의 기름 부은 자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진리의 말씀을 듣지를 못하고, 은혜를 입지 못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은 모든 선한 증거를 다 베풀었지만 그들이 귀머거리 독사처럼 귀를 막음으로써 소리를 듣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꾀한 악의 길로만 갔던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자신의 기반을 굳건히 세우려고 하고, 이러한 세상에서 성공하고자 하는 것이야 말로 진리의 말씀에 따라 세상을 판단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세상은 진실하고 공의로우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판단하십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판단을 바라보고 살아갈 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판단에 박수를 보내고 기뻐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판단을 현실에서 찾고자 한다면 결국 실망만 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의 현실은 마치 판단하시는 하나님이 안 계신 것과 같은 모습으로 보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항변처럼 여러분이 보는 현실은 악인이 의인을 핍박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믿음이 아무런 힘도 되지 못하는 것이 여러분이 체험하는 현실입니다. 또한 악인이 망하고 믿음으로 살았던 자신의 승리를 보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가 믿는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갚음이 있고 진심으로 땅에서는 하나님의 판단이 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여 보좌 우편에 계시고 예수님께 심판의 권세가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오심이라는 약속 안에서 신자는 악인의 보복 당함을 보면서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 그 끝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신자가 세상에서 세상으로부터 정직하고 온전한 판단을 받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세상은 진리를 알지 못하고 말씀에 귀를 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낙심할 필요가 없는 것은 이 땅에 판단하시는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신자는 공의롭고 정직하게 판단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세상의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판단을 바라보고 구하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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