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맛비 속에 받아 온 콩국물에 담근 국수를 어머니께서 맛있게 드십니다. 요즘은 썩 입맛이 좋아지셔서 입에 닿는 음식들을 달아 하십니다. 심지어 즐겨 하지 않으시던 횟집을 따라 나서기도 하십니다. 어머니는 평생을 매 끼 새 모이만큼 드셨습니다. 냉장고에 이런저런 재료를 채워 놓아도 식단은 늘 최소화 모드입니다. 많이 드시는 건 아니지만 어머니의 그런 모습은 참 경이롭습니다.
평소와 다르게 적극적이시기도 합니다. 다 큰 자식들에게 뭐 하나 줄려고 해도 조용히 눈치 보시다 어렵게 권하시곤 하던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지푸라기처럼 여린 몸을 간신히 일으켜 아이스크림이나 바나나를 잽싸게 들고 오십니다. 원초적 모성이 살아나는 순간입니다. 어느 손주가 사귀고 있는 처자가 있다니까 달까지 정해 빨리 결혼시키라 성화를 다 하십니다. 그 아이 형도 아직 미혼인데요.
집이 항상 부산합니다. 맏이인 서울의 누님은 아예 내려와 장기 체류하면서 어머니의 벗이 돼 드립니다. 중간에 전열을 정비한다고 올라가지만 며칠 사이 다시 옵니다. 춘천의 형은 거의 매일 출근을 합니다. 괜찮다고 해도 잠깐이라도 들르십니다. 막내도 종종 내려와 어머니의 밤을 지킵니다. 저는 출근길에 아침 드시는 어머니를 뵙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어머니는 이렇게 근 석 달을 옆을 지키는 자식 없이 주무신 적이 하루도 없으십니다.
바깥손님들의 걸음도 부쩍 잦아졌습니다. 춘천에 얼마 남지 않은 최씨 댁 종손 형님 내외가 자주 어머니를 찾습니다. 밭에서 손수 키운 채소들을 한 꾸러미씩 꼭 들고 오십니다. 대부분 서울에 계시는 친정 쪽 친척들도 거의 한 순배 돌았습니다. 젊어 신세가 많았다고 늘 고마워하시는 외숙모님이 오시니 손을 잡고 한참을 울고 웃으십니다. 고단한 시집살이에 이따금은 힘든 기억을 비치셨지만 아버지 형제와 조카들을 아주 반갑게 맞이하십니다. 보름 전에는 우리가 가장 오래 살았던 효자동 법원 뒤 동네 아주머니들이 단체로 방문을 하셨습니다. 이제는 다 할머니이시지만요. 모처럼 그 옛날 골목에서처럼 수다를 한참 하셨습니다.
이렇게 어머니는 날마다 잔칫날입니다. 어떤 날은 안팎 손님에 치이며 좋아하시면서도 힘들어하십니다. 짐짓 염려도 됩니다. 가끔 이런 갑작스러운 변화가 왜 생겼는지 골똘히 생각하시는 듯한 표정도 몰래 봅니다. 그렇지만 어머니의 하루를 조율하거나 관리하지는 않습니다. 언제 당신 인생이 이렇듯 긴 봄날인 적이 있었을까요?
지난 봄 아내는 숨소리에 이상을 느끼고 어머니를 달래 대학병원에 모시고 갔습니다. 그곳에서 아내는 어머니와의 이별을 고지받았습니다. 잔칫날이 아니어도 좋으니 한 3년 전으로 갈 수 있으면 하는 탄식을 해봅니다. 살짝 다가가 가죽같이 마르고 거친 어머니의 손을 잡으면 순간 눈물이 터지기 직전이 됩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잔칫날의 분주함을 뒤로하고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