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중국, 러-미에 이어 세 번째로 무인우주선 발사
1999년 11월 19일 중국이 무인 우주선을 대기권 밖으로 쏘아올리는 데 성공했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21일 중국이 첫 발사한 무인 우주선 션저우(神舟)호가 단기비행 임무를 무사히 끝내고 내몽고 자치구에 착륙했다고 보도했다.
장쩌민((江澤民) 국가 주석이 `신의 배`라는 뜻으로 명명한 션저우호는 이날 오전 6시30분 장정2호F 로켓에 실려 감소성 주천 기지에서 발사돼 10분 후 로켓에서 분리된 뒤 정해진 궤도에 진입했다. 무게 10t의 션저우호는 21시간동안 지구를 14바퀴 선회하면서 우주과학 실험을 실시하고 21일 새벽 3시41분 무사 착륙했다.
이번 우주선은 비록 실험우주선에 불과했지만, 중국은 소련과 미국에 이어 세번째로 무인 우주선 발사에 성공한 나라가 됐다. 1950년대부터 우주산업을 국가 전략산업으로 육성해온 중국은 지난 1992년 유인 우주선 프로젝트에 착수하기로 결정, 수천명의 과학자들을 동원해 연구와 개발에 박차를 가한 끝에 마침내 이날 유인우주선의 전(前) 단계인 무인우주선 실험에 성공했다. /조선
[1987년]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 사망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이 1987년 11월 19일 폐암으로 타계했다. 향년 77세였다. 그는 해방 후 40여년동안 한국 최대의 재력을 형성한 재벌의 대명사였다.
1901년 경남 의령에서 태어난 그는 38년 삼성상회를 설립, 사업에 투신했다. 그는 효성그룹창업주였던 고 조병제씨 등과 삼성물산공사를 세웠고, 제일제당제일모직을 잇따라 설립해 상업자본을 산업자본화하는 데 성공했다. 그의 포부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69년 삼성전자를 설립, 당시 금성사와 경쟁하면서 전자산업의 발전을 선도했고, 80년대 들어서는 반도체 유전공학 등 첨단산업분야에 과감히 진출해 사업을 확장했다.
그러나 이런 그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그는 5.16직후에 한때 부정축재자로 몰리기도 했으나 오히려 같은 해 8월 전경련의 전신인 한국경제인협회를 창설, 회장에 취임함으로써 혁명정부의 경제개발계획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또한 지난 66년 한국비료의 사카린 밀수사건과 관련, 한때 경영일선에서 물러나는 등 곤욕을 치렀으나 삼성그룹회장을 복귀, 삼성그룹의 전성시대를 이뤘다.
평생 사업보국, 인재제일, 합리추구 등의 경영이념을 추구했던 그는 사후에도 경영학자들이 그의 호암정신(HOAMISM)을 연구하고 있을 정도로 긴 그림자를 후세에 남겼다. 한편 이러한 긍정적인 평가가 있는 반면, 노조불인정일등주의 등에 집착하고 경영을 1인 카리스마에 지나치게 의존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삼성은 추모식에 앞서 19일(오늘) 오전 8시 중구 태평로 삼성전자 본관에서 사장단협의회를 갖는다. 삼성전자가 서초동 신사옥으로 이전함에 따라 이번 사장단협의회는 태평로에서 열리는 마지막 회의다.
[1985년] 레이건-고르비 첫 회담
산책하면서 신선한 공기를 마십시다.
스위스 레만호 호숫가의 아담한 별장 ‘플뢰르 도’에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도착하자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이렇게 제안했다. 1985년 11월 19일 오전 10시. 호숫가 바람이 선뜻했다. 산책인 만큼 배석자는 없었다.
“20분쯤 산책하고 오겠지 했죠. 그런데 한 시간 반이나 걷는 거예요. 산책하고 돌아오는 두 사람을 보니 잘 어울려 보이더군요.” 낸시 레이건 여사의 회상.
레이건으로서는 두 번째 임기를 맞고서 첫해였지만 소련 지도자와의 만남은 처음이었다. 그는 공산주의에 대한 유화정책을 거부했다. 미국중앙정보국(CIA)의 첩보에 따르면, 계획경제의 모순이 누적된 소련은 머지않아 내부에서 중대 위기를 맞게 되어 있었다.
“소련의 약점을 찾아 계속 두들겨라.” 5년 동안 미국의 군사비 지출은 두 배가 됐다. ‘별들의 전쟁’이라고 불리는 ‘전략방위계획(SDI)’에도 천문학적인 예산이 할당됐다. 1984년 레이건은 소련을 ‘악의 제국’으로 규정했다.
미국을 쫓아가느라 가랑이가 찢어질 지경이 된 소련은 브레즈네프, 안드로포프, 체르넨코 등 당 서기국의 노인들이 잇달아 쓰러진 뒤 1985년 50대의 고르바초프를 선택했다. 경제문제를 보고받은 고르바초프는 말기 암 환자 배 속을 열어 본 기분이었다. 군사비 압박을 줄이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회담 자체의 결과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SDI를 실험단계에서 그쳐라’는 고르바초프의 설득에 레이건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러나 ‘자주 만나자’는 기초적인 합의는 세계사를 바꾸어 놓았다. 두 정상은 1986, 87년 잇따라 만나 냉전의 종식에 대한 공감대를 넓혔다. 1989년 독일통일과 동유럽 자주화는 이런 공감의 산물이었다.
한편 이날 두 사람의 첫 회담은 ‘깜짝 스타’를 탄생시켰다. 회색 스커트와 실크블라우스 차림에 세련미 넘치는 라이사 고르바초프가 그 주인공이었다. “영어를 할 줄 아십니까?”라는 기자들의 질문에 그는 “물론, 여러분도 할 줄 아시나요?”라는 깜찍한 농담으로 답했다. ‘공산주의자도 사람이다’라는 사실을 서방 사람들이 새삼 깨닫는 순간이었다.
[1977년] 사다트 대통령, 이스라엘 방문
← 1977년 11월 이스라엘을 방문한 이집트 사다트 대통령(왼쪽)을 베긴 이스라엘 총리가 맞이하고 있다. 다음달에는 베긴 총리가 이집트로 날아갔다.
1977년 11월 19일 이집트의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이 중동 평화 회담을 위해 이스라엘을 방문했다. 1970년 나세르의 뒤를 이어 이집트의 대통령이 된 사다트는 소련의 소극적 원조에 불만을 품고 1972년 수천 명의 소련 기술자와 고문을 추방하고 이듬해 10월 시리아와 연합하여 아랍-이스라엘 전쟁을 일으켰다. 시나이 반도에 대한 전술적 기습공격에 성공한 사다트는 이스라엘로부터 조금의 영토나마 되찾은 최초의 아랍 지도자가 되었다. 1977년 11월 19~20일 역사적인 이스라엘 방문기간 중 예루살렘의 크네세트(이스라엘 의회)에서 평화정착을 위한 자신의 계획을 내놓았고 그 공로로 1978년 이스라엘 총리 메나힘 베긴과 함께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계속된 정치적 협상 결과 1979년 3월 26일 아랍권에서는 최초로 이스라엘과 평화조약을 맺었다. 서방세계에서는 사다트의 인기가 올라갔으나 국내에서는 조약반대, 경제위기 악화, 그 결과 생겨난 반대여론에 대한 탄압 등으로 인기가 급격히 떨어졌다. 그는 1981년 10월 아랍-이스라엘 전쟁기념식에서 사열하던 중 이슬람교 극단주의자에 의해 암살되었다.
[1968년] 한국-스와질란드 국교 수립
스와질란드는 1968년 11월 19일에 한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였으며, 북한과는 외교관계가 없다. 한국과 스와지란드 양국은 1970년 3월 10일에는 의료기술협정을 체결하였다. 1978년 3월 스와질란드 총리가 방한한 후부터 양국의 우호관계가 더욱 돈독해졌다. 1970년 이후 의료단과 기술훈련원을 파견하고 있으며, 1985년 음바바네에 한국대사관을 설치하였다가 1993년 9월 폐쇄하였다. 그러나 한국은 이후에도 매년 거의 10만 달러에 상당하는 기자재 공여사업 등을 통해 협력관계를 강화해나가고 있다. /naver
[1965년] 바티칸공의회(Vatican Council), 신앙의 자유 선언안을 승인
제2차 바티칸 공의회(제21회 공의회)는 교황 요한네스(요한) 23세(재위 1958~1963)에 의해 소집되었는데, 회의 도중 그가 죽자 바오로 6세(1963~1968)에 의해 계승되었다. 이 회의는 1959년 1월 교황 요한네스 23세의 가톨릭교회의 쇄신(현대화)과 교회(신 ·구교) 일치를 표방한 담화 발표로부터 비롯되어, 이 목적 실현의 추진을 위하여 1962년 10월 11일에 개회되었다. 회원 3,043명 중 2,540명과 이례적으로 프로테스탄트 교파들에서 옵서버 60여 명이 참석하는 등 사상 최대규모의 공의회로서, 공의회 사상 유례없는 열기를 보였다. 제1차 바티칸공의회가 근대적 사상과의 대결을 강력히 제시한 데 반하여, 이 회의는 ‘시대에의 적응’을 내세워 교회의 보수적인 면을 완전 탈피, 과감한 교회제도 ·전례의식 ·교육 ·계시 등에 관한 재해석과 개혁의 자세를 드러내 보여 교회에 새바람을 불러일으켰다. 더군다나 1965년 12월 8일의 폐회 전날, 1054년에 있었던 동방교회(東方敎會)에 대한 파문(破門)을 피차간에 취소하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근 10세기 가깝게 등져 온 동 ·서 교회간에 화해 분위기를 조성하는 성과를 보았다. 이 회의는 교회 ·전례 ·사목(司牧) ·계시 등에 관한 4개의 헌장과, 교회일치 ·매스미디어 등에 관한 9개의 교령(敎令), 그리스도교적 교육 등에 관한 3개의 선언을 채택함으로써 획기적인 교회개혁의 성과를 거두었다. 그 결과 한국 등 세계의 가톨릭 국가들의 전례에서 자국어 사용이 단행되고, 한국에서는 신 ·구교 《공동번역 성서》가 나오게 되었다. /naver
[1946년] 파리에서 제1차 유네스코(UNESCO) 총회 개최
세계 각국의 교육, 과학, 문화의 보급 및 교류를 통해 국가간의 이해를 돈독히 하고 협력관계를 촉진함으로써 국제평화와 안전을 확보하려는 유네스코(UNESCO : 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가 1946년 11월 4일 유네스코 헌장 발효와 함께 정식으로 발족했다.
유네스코 헌장은 1945년 11월 16일 영국과 프랑스가 주축이 되어 런던에 소집된 44개 연합국 교육문화회의에서 채택됐다. 이는 1942년 10월 유럽 여러 나라의 문교장관들이 런던에서 문교장관회의를 열고 전쟁으로 파괴된 교육시설 및 문화재를 복구하기 위한 국제기구의 설립을 촉구하는 결의를 하자, 미국이 이에 동조하여 1944년 국제기구안이 제시됨으로써 설립이 구체화된 것이다.
1차 총회는 발족 15일 뒤인 11월 19일 파리에서 열렸다. /조선
[1942년] 소련군, 스탈린그라드서 독일군에 대반격 개시 (독일군 포위공격)
1942년 오늘 소련의 스탈린그라드!
소련군은 스탈린그라드 시내를 점령하고 있는 독일군에 대대적인 공격을 펼친다.
소련군은 30만 독일군에 대해 포위망을 좁혀가면서 남부의 독일군 저지선을 돌파한다.
포위된 독일군은 겨울이 깊어지면서 전투외의 추위와도 싸워야 했다.
보급품마저 끊어져 독일군들은 돈강 근처에서 굶주림에 떨었다.
이번 스탈린그라드 공격으로 7만명의 독일군 병사가 목숨을 잃었다.
독일군은 히틀러의 결사항전 명령에도 불구하고 이듬해인 1943년 2월 마침내 소련군에 항복했다. /YTN
[1917년] 간디 Indira (Priyadarshini) Gandhi 출생
1917년 11월 19일 태어남 / 1984년 10월 31일 죽음
"내가 만일 국가에 봉사하다 죽는다면 나는 이를 자랑스러워할 것이다. 나의 피 한 방울 한 방울은 국가 성장에 이바지할 것이고 이 나라를 강하고 역동적으로 만들 것이라고 확신한다. " - 인디라 간디, 1984
간디는 1966~77년 3차례에 걸쳐 총리를 지낸 후 4번째 총리직(1980~84)을 수행하다가 시크 과격파에 의해 암살된 인도의 정치가이다. 민족주의 지도자이며 자주독립국 인도의 초대 총리를 지낸 자와할랄 네루의 외동딸로 태어나 정치에 입문한 그녀는 1966년 1월 샤스트리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총리에 취임했다. 1972년 3월의 총선에서 승리했지만 당선무효 판정을 받자,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여 비상권을 장악함으로써 권력을 유지했다. 국민의 신망을 잃은 간디는 1977년 총선에서 완패하여 자나타당이 대권을 승계했다. 자나타당의 분열사태로 1980년 1월 재집권한 그녀는 정치적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다. 여러 주(州)에서 폭넓은 자율성을 요구했고 펀자브 지방의 시크 과격파들은 폭동을 일으켜 자치권을 얻으려고 했다. 1984년 6월 간디는 무력을 동원해 시크교 최대 사원인 암리차르 황금사원을 공격했으며 450명 이상의 사망자를 냈다. 5개월 후 인디라 간디는 집 앞 정원에서 자신의 경호원에 의해 암살되었다. 저격범은 2명의 시크교도로 밝혀졌다.
[1905년] 유치진/柳致眞 출생
1905. 11. 19 경남 충무~1974. 2. 10.
극작가․연출가․연극평론가. 호는 동랑(東朗). 경상남도 통영(統營) 출신. 1931년 리쿄대학[立敎大學] 영문과를 졸업했다. 귀국 후 극예술연구회의 창립을 주도하고 신극운동을 전개해나갔다. 이듬해 희곡 《토막》으로 문단에 등단했으며, 일제의 탄압에 의해 극예술연구회가 해산되자 41년 현대극장을 창립, 《북진대》 《흑룡강》 《대추나무》 등의 친일적인 작품을 쓰기도 했다. 47년 극예술협회를 조직했고, 한국무대예술원을 창설하여 초대 원장이 되었다. 50년 중앙국립극장장, 60년 동국대학교 교수, 국제극예술협회 한국본부장, 드라마센터 소장 등을 지냈다. 초기 작품에서는 일제의 식민지 수탈로 인해 한민족이 겪는 황폐화 과정을 농촌현실에 비추어 사실주의적 수법으로 그려냈으나, 일제의 횡포가 심해지자 애정을 주제로 한 낭만주의적 역사극을 주로 다루었다. 8․15 후에는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 전쟁의 비참함, 분단문제 등을 다룬 작품을 썼다. 예술원상, 문화훈장, 3․1연극상 등을 받았다. 주요 희곡작품으로 《버드나무 선 동리의 풍경》 《소》 《조국》 《별》 《장벽》 《마의태자》 《원술랑》 《한강은 흐른다》 등이 있고, 저서로 《유치진 희곡전집》 《동랑 자서전》 외에 많은 연극관계 논문이 있다.
[1875년] 미국의 고고학자, 정치가 빙엄(Bingham III, Hiram, 1875~1956) 출생
하와이 출생. 예일대학과 하버드대학에서 라틴아메리카사(史)를 공부하였다. 예일대학에서 교수생활을 하였고, 1908년 칠레에서 열린 국제학회에 참석한 후 페루에 들러 잉카제국의 유적을 답사하였다. 1911년 쿠스코 북쪽의 탐험에서 마추픽추유적을 발견, 1912년에 발굴하였다. 1924년 코네티컷주 부지사, 상원의원을 지냈다. 저서에 《잉카의 잃어버린 도시》 등이 있다. /naver
1911년 6월 24일 미국의 고고학자인 히람 빙엄(Bingham, Hiram, 1875∼1956) 이 인간의 접근이 거의 불가능한 페루 안데스 산맥 지역에서 잉카의 잃어버린 도시 마추픽추(Machu Picchu)를 찾아냈다. 마추픽추는 쿠스코에서 북서쪽으로 약 80km 떨어진 곳에 있다. 면적은 13㎢이고 신전 하나, 3,000개가 넘는 계단, 테라스식 정원으로 이루어졌다. 빙엄은 1906년부터 라틴 아메리카를 여행하기 시작했다. 예일대학교 역사학 교수를 지내면서 잉카에 대한 옛 기록을 단서로 마추픽추를 찾아나섰다. 1911년 6월 24일 그는 요새화한 도시 마추픽추에 도착해 잘 보존된 석조물의 유해를 발견했다. 이어 8월에는 또 다른 중요한 잉카 유적 비트코스도 발견했다. 빙엄은 안데스 문명에 관한 <잉카의 땅>·<마추픽추>·<잉카의 잃어버린 도시> 등의 저서를 출간했으며, 말년에는 정치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브리태니커
[1863년] 링컨, 게티즈버그에서 연설
← 미국 일리노이 주 딕슨에 있는 링컨 기념 주립기념비
1863년 11월 19일 게티즈버그 국립묘지 개관식에 참가한 미국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은 미국 역사에 길이 남을 명연설을 했다. 펜실베이니아 주 게티즈버그는 남북전쟁 당시 결정적인 전투(1863. 7. 1~3)가 벌어졌던 곳으로, 그곳에 희생자를 위한 국립묘지가 건설되었다. 개관식의 주연설자는 당대 최고의 웅변가인 에드워드 에버렛으로 무려 1시간 동안이나 연설을 했다. 뒤를 이은 링컨의 연설은 당시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이후 널리 인용되는 명연설로 찬사를 받았다. 링컨이 기차를 타고 오면서 봉투 겉봉에 서둘러 썼다는 통설이 있으나 사실로 확인된 바는 없다. 주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87년 전 우리 선조들은 자유라는 이념으로 이 땅에 새로운 나라를 세웠고 인간은 모두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믿음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가 하는 말은 별로 오래 기억에 남지 않겠지만 그분들의 희생은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희생이 결코 헛되지 않도록 우리의 결의를 굳건히 다지는 것, 하느님의 가호 아래 이 나라가 자유롭게 다시 탄생하리라는 것, 그리고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이 세상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다짐해야 합니다."
[1828년]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슈베르트(Schubert, Franz, 1797~1828) 사망
오스트리아 대표적인 작곡가 슈베르트가 1828년 11월 19일 사망했다. 초기 독일낭만파의 대표적 작곡가로 ‘가곡의 왕’으로도 불리운 그의 음악적 천분은 일찍부터 두드러져 8세때 교회에서 가창, 바이올린, 피아노, 오르간 등의 기초적인 지도를 받고 11세 때 아름다운 소년 소프라노 음성을 인정받아 빈 궁정예배당의 합창아동으로 채용되어 국립 기숙신학교에 들어갔다.
여기에서 궁정악장 A.살리에르에게 작곡법을 배워 작곡을 시작하게 되었다. 1828년 31세의 짧은 생애를 마치면서도 오토 에리히 도이츠의 연대순으로 정리된 작품번호에 따르면 작품수는 998개에 이르고 있으며 그중에서도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약 633곡의 가곡이다.
생전의 고전파시대에는 별로 주목되지 않았던 가곡이라는 예술부문이 슈베르트의 아름다운 선율과 색채 넘치는 화성에 힘입어 비로소 독립된 주요한 음악의 한 부문으로 취급됐다. 대표곡으로 ‘실을 잣는 그레트헨’(1814), ‘들장미’(1815),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처녀’(1923), ‘겨울나그네’(1827)등이 있으며 유해는 유언에 따라 전년에 작고한 벨링크묘지에 있는 베토벤 무덤 가까이에 묻혔다. /조선
[1722년] 오스트리아의 의사 아우엔브루거 폰 아우엔브루크(Auenbrugger von Auenbrugg, Leopold, 1722~1809) 출생
진단에서 타진법을 고안했다. 타진법은 신체 표면의 일부를 짧고 선명하게 두드려서 소리나는 부분의 내부 상태를 진단하는 기법이다. 7년 동안 연구한 뒤, 1761년 이 방법을 기술한 〈새 발명 Inventum Novum〉을 출간했다. 그러나 이 책은 나폴레옹의 개인 주치의인 장 니콜라스 코르비자르 데 마레가 1808년 프랑스어로 번역하고 난 뒤에야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 이 방법은 아직도 진단의 기본적인 방법으로 사용한다.
[1598년] 이순신 장군 노량서 전사/1598
조선 중기 무신. 자는 입부(立夫). 본관은 덕수(德水). 1578년(선조 11) 무과에 급제, 의주판관 등을 지내고 귀향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李舜臣) 막하의 중위장으로 옥포(玉浦)․한산(閑山)․부산포 등의 해전에서 선봉장으로 활약하였다. 그 뒤 충청도수군절도사 등을 지내고, 1598년 경상우도수군절도사로 노량해전(露梁海戰)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1598년 11월 19일 그는 노량에서 퇴각하기 위하여 집결한 500척의 적선을 발견하고 싸움을 기피하려는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陳璘)을 설득하여 공격에 나섰다. 그는 함대를 이끌고 물러가는 적선을 향하여 맹공을 가하였고, 이것을 감당할 수 없었던 일본군은 많은 사상자와 선척을 잃었다.
그러나 선두(船頭)에 나서서 적군을 지휘하던 그는 애통하게도 적의 유탄에 맞았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싸움이 바야흐로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삼가라.하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운명을 지켜보던 아들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그대로 통곡하려 하였으나, 이문욱(李文彧)이 곁에서 곡을 그치게 하고 옷으로 시신을 가려 보이지 않게 한 다음, 북을 치며 앞으로 나아가 싸울 것을 재촉하였다. 군사들은 통제사가 죽지 않은 줄로 알고 기운을 내어 분전하여 물러나는 왜군을 대파하였다.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에 녹훈되고 덕풍부원군 (德豊府院君)에 추봉되었으며, 좌의정에 추증, 1613년(광해군 5) 다시 영의정이 더해졌다. 묘는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어라산(於羅山)에 있으며, 왕이 친히 지은 비문과 충신문(忠臣門)이 건립되었다.
충무의 충렬사(忠烈祠), 순천의 충민사(忠愍祠), 아산의 현충사 (顯忠祠) 등에 제향하였는데, 이 중에 현충사의 규모가 가장 크다. 현충사는 조선 숙종연간에 이 고장의 유생들이 그의 사당을 세울 것을 상소하여 1707년(숙종 33)에 사액(賜額), 현충사가 입사(立祠)되었다.
[1493년] 콜럼버스 두번째 신대륙 탐험에서 푸에르토 리코 발견
1492년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신대륙 발견은 대단하고 유명하다. 역사에 길이 빛난다. 콜럼버스는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태어나 14세 때부터 배를 타기 좋아 했다고 한다. 그가 성장하면서 자신의 나라, 고향에서 자신의 높은 이상과 꿈을 실현하기 위해 일찍이 포르투갈에 건너가 자신의 높은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다. 그곳에서 결혼을 하였고 선원생활을 하던 중 1484년 서쪽 항로를 통해 인도를 갈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자신의 계획을 왕에게 건의하였으나 거절당하는 수모를 당했다.
이에 에스파니아로 건너가 우여곡절 끝에 1492년 이사베라여왕의 격려와 후원을 받으며 1492년에서 1504년까지 무려 네 차례나 대서양을 왕래 하였던 것이다. 콜럼버스는 산타마리아호, 니나호, 핀타호 등 3척의 배와 78명의 선원들을 거느리고 1492년 8월 파롯항을 떠나 2개월여의 1차 항해 끝에 10월 12일 육지를 발견하고 상륙한 곳이 바로 바하마에 있는 산살바도르였다.
콜럼버스는 쿠바와 아이티에도 갔는데 그 곳에서 산타마리아호가 좌초되었고 11월 19일 푸에르토리코에 상륙, 그가 발견한 곳을 인도 땅으로 알고 그 곳을 ‘서인도'라 칭하고 그곳 원주민들을 인도 사람 , ‘인디안’이라 명명했다 . 2차 탐험에서 콜럼버스는 그의 기함과 16척의 배에 선원, 군인, 사무원, 이주민, 법원판사 등 1,200명을 데리고 식민을 목적으로 1493년 9월 25일 출항, 도미니카, 자마이카, 과테말라를 발견하였고 산토도밍고 총독이 되었으며 1498년 5월 30일 6척의 배를 가지고 중국을 찾기 위해 남쪽으로 항해를 하였다. 이 항해가 곧 콜럼버스의 3차 항해였으며 비로서 아메리카 본토에 상륙하였던 것이다. 그곳은 남미북단 트리니다드, 토비코, 그라나다, 마가리타 등이었다.
그 후 1502년 5월 9일 4척의 배를 가지고 4차 항해에 나서 1503년 1월 6일 오늘날 중앙아메리카 파나마를 발견하였으며 나중에 가서는 귀족들과 불화를 빚어 더 큰 야망, 더 큰 뜻을 펼치지 못하고 실의에 빠진 채 그가 발견한 땅을 인도라 믿고 세상을 뜨고 말았다. /Google
그밖에
2004년 광주, 수능 ‘휴대전화 부정’ 사건
2002년 7만7000여t 중유 실은 유조선 스페인해안 침몰. 해양오염 심각
1995년 크바스니에프스키 폴란드 대통령에 당선
1984년 멕시코시티 가스공장서 대규모 폭발사고 544명 사망. 주민35만명 대피
1984년 중단되었던 남북적십자회담 예비접촉 열려
1982년 미국, 퍼싱II 미사일 발사 성공
1981년 여-야, 야간통금해제를 정부에 건의
1980년 KAL기 김포공항서 착륙 중 화재 15명 사망, 15명 부상
1979년 계엄 당국의 휴교 조처 해제로 대학교 전면 개교
1979년 이란, 미국 인질 중 여자 등 13명 석방
1978년 북경에 모택동비판 대자보 등장
1977년 인도에 해일 발생. 2만여명 실종
1975년 한-이란 각료공동회의. 한국의 대(對)이란 기술자 파견, 건설참여 등 10개항 조인
1975년 유엔총회, 한국문제의 서방-공산측 두 결의안 동시채택
1965년 바티칸 공의회, 신앙의 자유 선언안을 승인
1963년 몬트리올서 캐나다여객기 추락 117명 사망
1961년 네루-나세르-티토, 나세르에서 중립국 수뇌회의
1960년 북한, 남북연방제 제안
1957년 유엔총회, 군축위 확대안을 채택(25개국 구성)
1946년 대일(對日) 우편물 정식인가
1942년 대종교 주요간부 21명 구속
1924년 신사상연구회 화요회로 개칭
1831년 가필드 / 대통령 취임 직후 피격되어 의식불명 상태에 놓임으로서 대통령 직무대행문제에 관한 심각한 헌법상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미국 제20대 대통령
1812년 쿤 / 비교언어학에 바탕을 둔 새로운 비교신화학파를 창설한 독일의 언어학자·민속학자
1805년 레셉스 출생 / 수에즈 운하를 건설한 것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외교관
1617년 르 쉬외르출생 / 종교적인 작품을 그린 프랑스의 화가
1600년 영국 왕 찰스1세 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