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운여정> 졸업 65주년 여정
‘역사의목격자’ 고목나무를 만나다(1)
표민웅 편저編著
<졸업 65주년의 여정은 마음은 청춘이지만 몸은 마음같이 따르지 못하니, 당일 하루 코스로 우리의 근세 역사가 품어 있는 서울의 고궁들을 찾아 역사의 현장을 지켜 본 고목들과의 대화를 하는 여정을 마련했습니다>
서울에는 5대 고궁이 있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과 덕수궁이다.
조선 왕조의 문화와 역사를 느낄 수 있는 중요한 유적지이다.
1392년 태조 이성계는 무학대사에게 천도 지역을 알아보게 한다. 무학은 계룡산과 한양을 두루 다녀 보고 북악과 인왕산, 낙산과 남산 등 내사산內四山으로 둘러싸인 한양을 천거하였다. 그리고 정궁의 위치를 무학은 인왕산을 진산眞山으로 삼고, 북악과 남산을 청룡, 백호로 삼는 동향東向이 좋다고 건의하였다. 그러나 정도전은 북악을 주산主山으로하고 좌 낙산, 우 인왕산으로 하는 남향의 경복궁자리를 주장하였다. 당시의 권력자 정도전의 의견이 체택되었지만 무학대사는 200년 후 큰 변란의 화를 입을 것이라 경고하였다고 한다. 무학대사의 예견대로 임진왜란의 화를 입고 경복궁은 소실되었다.
오래된 고목古木이 궁궐보다 더 오랜 역사를 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궁궐 전각들은 훼손되면 새로 지어졌지만 고목들은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궁궐에서 벌어진 숱한 역사적 순간들을 생생하게 목격한 산증인이 고목들이다. 궁궐의 또 다른 역사, 문화인 것이다. 고목나무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이어주는 다리다. 5대 궁의 고목들이 살아온 긴 세월만큼 저마다 품고 있는 이야기를 엮어본다.
1. 경복궁
'경복景福'은 시경詩經에 나오는 말로 왕과 그 자손, 온 백성들이 태평성대의 큰 복을 누리기를 축원한다는 의미다. 풍수지리적으로도 북악산을 뒤로 하고 좌우에는 낙산과 인왕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길지吉地의 요건을 갖추고 있다. 1395년 창건되었으나 1592년 임진왜란으로 전소된 이후 법궁法宮의 역할을 창덕궁에 넘겨주었다. 4대 세종부터 14대 선조까지는 정궁인 경복궁 근정전에서 역대 왕들이 즉위하였으며 주로 경복궁내에서 사망하였다. 광해군과 인조시대에 창덕궁과 창경궁을 복구하고 경복궁은 폐허의 상태로 놓이게 되었다. 조선조 말 1865년(고종2년) 흥선 대원군이 왕권의 회복을 위해 권위의 상징으로 경복궁을 복원하였다. 정선 아우라지와 강원도 산골의 나무를, 서해안 안면도와 전라도 진도까지 전국으로부터 이송한 나무와 경희궁의 전각殿閣들을 뜯어 경복궁 복원의 재료로 사용하였다. 1910년 한일 병합후 1915년 박람회 개최와 1926년 조선총독부 건설로 전각들이 철거되거나 훼손되었으며 그 자리에 박물관이나 잔디밭을 비롯한 정원이 들어섰다. 이러한 모습이 1945년 해방 후에도 이어졌으며 6·25 전쟁을 거치면서 일부 전각이 추가로 소실되었다.
1968년 광화문 복원을 시작으로 경복궁의 본모습을 되찾기 위한 각계의 관심과 노력이 증대되어, 1980년대 말부터 본격적인 복원사업 계획이 시작되었다. 1995년 조선총독부 청사(소위 중앙청) 철거, 2001년 흥례문 권역 복원, 2010년 광화문 목조木造 복원, 2023년 광화문 월대月臺 복원을 비롯하여 각 권역별 주요 전각들을 오는 2045년까지 복원시킬 계획이다.
그래서 경복궁에는 오래된 고목이 별로 없다. 그러나 경회루에는 오래된 능수버들이 있다. 가지가 길게 늘어진 능수버들은 경회루를 둘러싸고 있다. 능수버들은 아름다운 모습 뿐 만 아니라 활쏘기의 표적 나무가 되었다. 최고의 명궁은 왕이 참석한 가운데 늘어진 능수버들 잎을 맞히는 것으로 우열을 가렸다고 한다. 명, 청의 사신들을 접대하던 곳,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즐겨 낚시하던 모습을 지켜본 버들나무이다.(사진#1)
사진#1, 경회루 능수버들나무
*청와대, '영욕의 역사'… 740여 살 이 나무는 알고 있다.
경복궁의 후원이던 청와대 옛 본관 터에는 파란만장한 권력의 흥망을 오롯이 지켜본 나무 한 그루가 있다.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이라는 주목朱木이다.(사진#2) 산림청에서 지난 2007년 청와대 고목을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고려 충렬왕 때 태어나 생물학적 나이가 무려 740여 살로 추정된다. ‘고려 25대 충렬왕 9년(1283), 11년(1285)년 왕이 한양(당시 남경)에 두 번 행차했다는 기록과도 거의 일치한다’며 남경을 찾은 왕이 쉴 수 있는 공간을 조성하기 위해 조경의 일환으로 심은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 기록과 나무의 생물학적 나이가 이렇게 일치하는 경우도 흔치 않다고 했다.
조선조 초기의 왕자의 난, 집현전 학자들과의 한글 창제, 사육신의 수난, 4대 사화와 임진왜란, 명성왕후 민비의 시해를 겪었으며 현대에 들어 와 해방과 건국, 4,19와 5,16혁명, 이강욱 가족과 10,26의 비극적 사건들, 이렇게 700년 넘게 역사의 현장을 지켜본 나무라는 의미에서 가치가 높지 않은가!!?
청와대 경내에선 역대 12명의 대통령 중 윤보선을 제외한 11분의 기념 식수가 남아있다. 그중 가장 오래된 나무는 1978년 박정희가 심은 가이즈카 향나무다. 이들 기념나무는 영원히 우리나라를 지켜주는 수호목守護木이 되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2. 창덕궁
1392년에 개국한 조선왕조는 5백 여 년의 역사를 거치면서 전란과 국난으로 여러 번 궁궐을 옮겼다. 처음 지은 왕조의 법궁은 1395년 창건된 경복궁이었으나 곧바로 태종은 이복동생을 죽이는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이 일어났으며 자신의 정적 정도전이 주동하여 건설헌 경복궁을 꺼림직하게 여겨 개국 10여 년 밖에 안된 1405년(태종5년)에 새 궁궐 창덕궁을 세웠다. 이후 조선왕조는 만약을 위해 창덕궁도 법궁法宮으로 세워 양궐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창덕궁은 북악산 왼쪽 봉우리인 응봉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궁궐로 동쪽으로 창경궁과 맞닿아 있다. 경복궁의 동쪽에 있어서 조선 시대에는 창경궁과 더불어 동궐東闕이라 불렀다. 창덕궁은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중요한 고궁으로 500여 년 조선 역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임금이 거처한 궁궐이었다. 공식적으로 조선의 법궁은 경복궁이었으나, 창덕궁의 위상은 임진왜란으로 더욱 확고해졌다. 선조 25년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서울에 있던 모든 궁궐이 불타버리자, 선조 38년(1605년)부터 재건 준비를 시작하여 광해군 원년(1609년) 10월에 인정전 등 주요 전각을 복구하였다.
불행하게도 1623년 인조 반정으로 궁궐 대부분이 또 소실되어, 인조 25년 1647년에 복구하였는데 인조는 이때 후원에 여러 정자와 연못을 조성하였다. 후원後園인 비원祕苑은 한국의 유일한 궁궐후원이라는 점과 한국의 정원을 대표한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높게 평가받아 1997년에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정조는 인정전에 품계석을 세우고 후원에 부용지를 중심으로 부용정, 주합루, 서향각을 세우고 오늘날의 후원 모습으로 조성하였다. 헌종은 짧은 재위 기간 동안 낙선재, 석복헌, 수강재를 건설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역대 왕들은 주로 창덕궁에서 정무를 보아 왔다. 17대 효종 이후 경희궁에서 즉위한 정조와 헌종외에는 대부분 창덕궁 인정전에서 즉위하였다.
*창덕궁의 고목
고목나무는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다리다. 이러한 창덕궁의 역사를 지킨 고목이 4개 있다. 천연기념물 194호로 지정된 향나무를 비롯해 돈화문 양옆에 자라는 회화나무들, 비원에 있는 뽕나무와 600여 년이 된 다래나무다.
창덕궁이 창건되었을 때 당시 건물은 모두 사라졌지만 오늘날 궁궐에서 가장 오래된 고목은 조선 개국 이전부터 살아 온 향나무다. 750-760여 살로 추정되는 이 향나무는 규장각 봉모당 앞에서 만나볼 수 있다(사진#3). 현재는 받침대 15개가 괴어져 있으나 정.순조(1800년대초) 때 학자 유본예柳本藝는 당시에 12개의 기둥으로 받쳐진 덕에 번성하고 있다고 기록했으며 이 모습은 19세기 초 그린 ‘동궐도’에도 그대로 묘사되어있다.
*낙선재의 애환哀歡
창덕궁 남동쪽 끝 창경궁과 경계지역에 낙선재樂善齋가 있다. 1847년 헌종 13년 경빈 김씨의 거처를 위해 건립하였다. 낙선재의 의미는 선한 일을 즐겨한다는 의미다. 정조와 수빈 박씨의 처소가 서로 붙어있어 순조가 태어난 것처럼, 헌종도 사랑한 경빈 김씨를 곁에 두고 후계자를 낳기를 바란 의도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후사가 없어 강화 도령으로 이어가게 되었다. 조선조 마지막 왕 순종이 1926년 사망 후 순정효왕후(1894-1966)는 낙선재에서 여생을 보냈다. 조선조 마지막 황태자 이은공의 부인 이방자 여사도 1963년부터 1989년까지 그리고 고종의 황녀 덕혜옹주도 1962년부터 1989년까지 낙선재에서 지냈으니 조선말 비운의 3과부가 함께 의지하며 생을 마쳤다.
3. 창경궁
우리는 어린 시절 창경원에 벚꽃구경하던 시절이 아련히 떠 오른다. 필자는 해방 전 일제 때 할머니와 부모와 함께 봄철 벚꽃 나들이를 즐겼다. 6,25가 나던 해까지 이 꽃놀이를 다녔다. 대학을 입학한 그해, 모여대 1년생 전원과 짝짓기 벚꽃놀이는 잊지 못할 추억이다. 성인이 되서는 야경을 즐기기도 했다. 그래서 창경궁은 우리에게 대표적인 로맨틱한 장소가 되었다. 정부는 창경궁을 복원하기 위해 1983년 10월, 창경원에 있던 동물과 식물을 서울대공원으로, 벚나무는 윤중로로 이전하였다. 경희궁에 있던 벚나무도 이전하였다. 지금은 여의도가 서울의 대표적인 벚꽃놀이터가 되었다.
창경궁은 조선 9대 임금인 성종이 1483년 창덕궁 동쪽에 세운 궁궐이다.
성종은 창덕궁이 좁아 세조비 정희왕후貞熹王后 (1418~1483년), 덕종비 소혜왕후昭惠王后(인수대비, 1437~1504년), 예종비 안순왕후安順王后(?~1498년) 3명의 대비를 위한 공간으로 수강궁을 확장 보완하면서 창경궁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임진왜란으로 전소된 창경궁을 광해군은 명정전, 문정전, 환경전 등의 중심 전각들을 위주로 중건하였다. 창경궁은 장조·정조·순조·헌종을 비롯한 많은 왕들이 태어난 궁이다.
일제강점기에 많은 전각들이 헐리거나 일제에 의해 훼손과 변형이 이루어졌다. 1907년부터 창경궁 안의 건물들을 대부분 헐어내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하여 일반에 공개하였으며, 1911년에는 이름마저 창경원昌慶園으로 격하시켰다.
*비극의 현장을 지킨 고목
왕의 즉위식, 과거시험, 궁중 연회가 열리는 명정전明政殿 좌편에 왕의 집무실인 문정전文政殿이 있다. 이곳에는 사도세자(1735-1762)가 죽는 비극적인 역사를 가까이 지켜봤을 회화나무 2그루가 있다. 1762년 7월 영조 38년 사도세자의 대리청정에 위기를 느낀 노론의 모략으로 결국 뒤주에 갇히게 된다. 지금은 그때의 흔적을 살펴볼 수는 없지만 살려달라고 외치는 사도세자의 절규와 아버지를 풀어줄 것을 애원하는 어린 정조의 읍소가 귓가에 맴도는 듯하다. 또한 사도세자가 죽임을 당하기 60여 년 전 장희빈(1659-1701.11)이 사약을 받은 곳이 이곳 창경궁내 취선당이였다.
조선시대 왕실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으로 기억된 사도세자와 장희빈의 죽음을 가까이 지켜봤을 회화나무 2그루가 문정전 앞에서 자란다.(사진#4) -표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