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음 이덕형 漢陰 李德馨
이덕형(李德馨..1561~1613)은 조선 후기의 文臣으로 임진왜란 당시 명(明)과의 외교적 활동을 통하여 전쟁 극복에 큰 역할을 하였고, 호(號)는 한음(漢陰)이고 시호(諡號)는 문익공(文翼公)이다. 그는 1561년9명종 16) 2월12일 서울 남부 성명방(誠明坊 .. 지금의 을지로, 충무로, 남대문로 일대)의 외가에서 태어났다. 당시는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 .. 남자가 결혼 한 뒤 처가에서 일정 기간 사는 혼인 풍습)의 영향이 아직 많이 남아 있었는데, 이덕형도 그러한 사레이었다.
이덕형과 토정 이지함
이덕형이 어릴 적에 노는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된 토정 이지함 (土亭 李之函)은 장차 나라에 큰 인물이 될 것으로 예견하고, 조카이며 당시 영의정이었던 이산해(李山海)에게 딸을 줄 것을 권유하였고, 결국 이덕형이 17세되던 해에 4살 아래인 이산해의 둘째 딸을 맞아 결혼하게 된다.
이덕형의 부인 .. 정려문
이덕형의 부인 한산 이씨 (영의정 이산해의 둘째 딸)는 아들 셋을 두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시아버지가 살고 있던 강원도 안협으로 8살 된 둘째아들 여벽(如壁)과 3살된 막내아들 여황(如黃)을 데리고 가서 피난살이하였다.
그녀가 28세때인 1592년 9월 왜군이 안협으로 들어 온다는 소식이 들리자 가까운 백암산으로 피신하였다가 왜군에게 몸을 더럽힐 것을 염려하여 바위에서 뛰어내려 순절하였다.
두 아들이 어머니의 시신을 끌어 안고 울부짓는 것을 하인들이 수습하여 산기슭에 묻었다가, 임진왜란이 끝나자 이 곳 양평군 양서면에 모셔 장사지냈고, 선조(宣祖)는 그녀의 절개를 크게 칭송하여 입구에 정여문(旌閭門)을 세우도록 하였다. 후일 이덕형도 이 곳에 함께 묻힌다.
이 정여문은 일제시대에 유실되었다. 전하는 얘기에 의하면 임진왜란때의 이덕형 활약에 증오를 느낀 일본군이 정여문과 신도비를 물에 빠트려 정여문이 유실되었다고 한다. 신도비는 물에 가라앉은 것을 후손들이 찾아내어 다시 세웠으나, 글씨는 전부 마모되어 판독이 불가능하다.이 묘소의 입구, 즉 정여문이 세워진 곳 앞이 큰 냇물이었다. 지금도 다리를 건너야 한다.
이덕형의 영정
영정각(影幀閣)에는 이덕형의 전신영정(全身影幀...사진 왼쪽)을 모셨다. 오른편의 초상화는 이덕형이 젊었을 때인 1590년대에 당시의 초상화가 이신흠(李信欽)이 그렸는데, 1846년 이덕형의 9대 증손 이의익(李宜翼..이조판서)이 이 원본을 궁중화가 이한철(李漢喆)에게 주어 전신 영정을 그리게 하였다.
그는 선조 13년 (1580)에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쳤으며,문학에 통달하여 어린 나이에 봉래 양사언(蓬來 揚士彦)과 막역한 사이가 되었다. 그가 14살 되던 해에 포천의 외가집에서 지낼 때, 포천에 살고 있던 당대의 문장가 봉래 양사언(蓬萊 揚士彦) 및 그의 형제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양사언의 詩에 화답하며 지은 詩는 이러하다.
야활모광박 野闊暮光薄 들은 넓어 저녁빛 엷게 깔리는데 수명산영다 水明山影多 물은 맑아 산그림자 가득하다 녹음백연기 綠陰白煙起 녹음 속에 하얀 연기 이는데 방초우삼가 芳草雨三家 아름다운 풀 언덕에 두어채 집이로세...
최연소 대제학 .. 31세
이덕형은 1580년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1592년에는 31세의 젊은 나이에 예조참판과 대제학(大提學)을 겸직하게 된다. 조선 500년 동안 31살의 대제학은 이덕형이 처음이었고 마지막이었다.
온 나라의 학문을 바르게 평가하는 저울....이라는 의미로 문형(文衡)이라고도 불리우는 대제학은 학자로서 최고의 명예이었다. 품계(品階)는 판서와 동일한 정이품(正二品)이었지만, 三政丞이나 육조(六曺)의 판서보다 더 높은 대우를 받았다.
그저 학문의 권위가 높다고 해서 대제학이 될 수는 없었다. 문과의 대과 급제자이면서도 원칙적으로 왕의 특명을 받은 학자들이 공부하던 호당(湖堂...궁중의 독서실)출신만이 가능하였다.
이덕형과 임진왜란
31세의 젊은 나이에 대제학에 임명되던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 난다. 이덕형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어 宣祖를 호종하여 定州(평양 위)에 이르렀고, 明나라의 군사를 요청하는 청원사(請援使)가 되어 명나라에 건너가 원병을 요청하는 나라의 운명을 건 중요한 사명에 성공한다.
이덕형이 청원사로 떠날 때 이항복이 배웅을 나온다. 이덕형이 말이 한 필뿐이라 걱정이라고 하자 이항복은 자신이 타고 온 말을 풀어 이덕형에게 내 준다.明나라 원병이 도착하자 이덕형은 明의 장군 李如松의 접반관(接伴官)이 되어 전쟁 중 계속 행동을 같이 하였다.
이덕형의 말년
宣祖 말년에 이르러 붕당정치가 심화되고, 삼사(三司..홍문관, 사헌부,사간원)의 관헌들이 이해(利害)에 따라 탄핵 상소문을 올리는 일이 잦았는데, 이 때 이덕형도 여러 차례의 무고한 탄핵을 받았다. 그러던 중 이덕형은 宣祖의 큰 아들인 임해군의 非理를 비판하였다고 하여 宣祖의 눈 밖에 나면서 승승장구하던 그도 한직으로 밀려나게 된다.
宣祖가 죽고 光海君이 왕위를 계승하자 이덕형은 영의정으로 복직되었으나, 당파간의 정쟁이 극심해지면서, 三司의 상소문과 이에 따른 국문으로 조정이 조용할 날이 없게 되고, 이런 와중에 이덕형은 영창대군을 죽이는 것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삭탈관직되었다.
그리고 이 곳 양평으로 물러나 은신하며 국사(國事)의 그릇됨을 상소(上疎)하였으나, 53세에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 여기에 묻혔다.
오성과 한음 ... 이항복과 이덕형
많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는 오성 이항복(鰲城 李恒福)과의 우정은 나라를 위하여서도 매우 다행이었다. 野話에서는 오성과 한음이 어렸을 적부터 친구였다고 하나, 기록에 의하면 서로 살던 곳도 달랐고, 오성이 한음보다 5살이나 많았었다.
한음년보(漢陰年譜)에 의하면 한음 18세, 오성 23세때 감시(監試...생원,진사시험)에서 처음 만났다고 한다. 宣祖는 한음과 오성 등 이때 동시에 문과에 급제한 다섯명의 유망한 젊은 학자들을 특별히 총애하여 王의 책을 보관하는 어부(御府)를 이들에게 개방토록 하였으며,잡일을 면제하여주고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토록 배려하였다.
율곡 이이는 이들을 추천하여 호당(湖堂..궁중 독서실)에서 학문을 닦게하고, 옥당(玉堂..홍문관에서 일하는 젊은 선비)에 뽑아 국가의 동량을 키우도록 하였다.이후부터 두사람은 파격적인 승진을 거듭하면서 영의정까지 오르는데, 한음이 나이는 어리지만 오성보다 한발 앞서 승진하였으며, 31살에는 조선 왕조 역사상 최연소인 나이로 문형(文衡)에 뽑히게 되었던 것이다. 학자들을 통솔하고, 학술과 문장의 주도권을 쥔 대제학은 모든 선비들이 가장 선망하는 벼슬이었다.
오성 이항복 (獒城 李恒福)과 한음 이덕형(漢陰 李德馨)의 여러 설화...오성과 한음의 이야기. 사실 이항복의 호(號)는 백사(白沙)이다. 오성은 그의 직책이었던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이다.
1. 이항복은 이덕형으로부터 전염병으로 몰살한 일가족의 시체 감정을 부탁받고 그 집에 이르러 시체를 감정하는데, 갑자기 한 시체가 벌떡 일어나 볼을 쥐어박는 바람에 혼비백산한다. 알고보니 이덕형이 시체 옆에 누워있다가 장난 친 것이었다.
2. 이항복이 이덕형의 부인과 情을 통하였다고 이덕형에게 말하자, 이 말을 전해 들은 이덕형의 부인은 이항복을 집으로 초대하여 똥을 넣은 떡을 대접한다. 거짓말하는 입에는 똥이 들어가야 한다고 말하면서....
3. 이항복이 신부감 선을 보려고 인절미를 해서 이덕형 등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고 부탁한다. 몽둥이로 자기를 ?으며 때리라고 시킨 뒤 도망치는 체하며 신부의 치마속으로 들어 갔다. 신부는 이에 당황하지 않고 " 선을 보려면 겉선이나 보시지 속선까지 보십니까 ?" 말하였다.
4. 이항복이 도깨비를 우연히 만나 장차 정승을 하리라는 예언을 듣는다. 그리고 이덕형에게, 자기는 변소에서 불알을 당기는 도깨비를 만나 예언을 들었다고 말하며 이덕형에게 변소에 가서 앉아 보라고 한 뒤, 노끈으로 이덕형의 불알을 매어 당겼다. 이덕형이 끝까지 아픔을 견디며 참고 있으니까 이항복은 정승까지 하겠다고 말해 준 뒤, 나중에 이덕형에게 변소에서 일어난 일을 본 것처럼 얘기하였다. 이덕형은 비로소 속은 것을 알아채렸다.
5. 이항복의 집의 감나무 가지가 권율장군의 집으로 휘어 들어 갔는데, 이 가지에 열린 감을 권율 집에서 차지하자, 이항복은 권율이 있는 방문으로 주먹을 찔러 넣고 " 이 주먹이 누구 주먹이요?"하고 물었다. 권율이 " 네 주먹이지 누구 주먹이겠는냐?"라고 야단치자 감을 가로챈 일을 항의하였다. 후일 이항복은 권율장군의 사위가 되었다.
사여풍운변 事如風雲變 세상 일은 비바람처럼 변하고 강동세월류 江同歲月流 강물은 세월과 같이 흘러 간다. 영웅고금의 英雄古今意 고금의 영웅의 뜻은 도부일허주 都附一虛舟 모두 한 척의 배에 부친다.
노계 박인로 (蘆溪 朴仁老)의 조홍시가 (早紅枾歌)
반중(盤中) 조홍(早紅)감이 고아도 보이나다 유자(柚子)아니라도 품음 즉 하다마는 품어가 반길 이 없을 새 글로 설워하나이다.
이 詩調는 육적회귤(陸績懷橘)의 故事가 바탕이 된 박인로의 시조이다. 옛날 중국 오(吳)나라의 육적(陸績)이 여섯 살 적에 원술(元述)의 집에서 접대로 내놓은 유자 세개를 품안에 넣었다가 발각되었다. 그 까닭을 물으니 어머니에게 드리고 싶어 그랬노라고 대답, 그 효성에 모두 감동하였다.
이 시조는 알려지기를...한음 이덕형이 충청,전라,경상의 도체찰사를 배수받고, 경북 영천에 머물러 있을 때 노계 박인로에게 조홍시를 보냈는데, 박인로가 어머니를 생각하며 지은 시조라고 한다.
이덕형이 관련은 있지만, 이는 잘못 알려진 것이라고 한다. 즉, 여헌 장현광 (旅軒 張顯光)이 성리학을 배우러 온 박인로에게 조홍감을 대접하며 , 그것을 소재로 시조를 지어보라고 하였고, 이에 박인로는 이 시조를 지었다는 얘기이다.
한음 이덕형으로 잘못 알려진 이유는..이덕형이 위의 "조홍시가"를 보고 노계 박인로에게 단가 3장을 더 짓도록 한데서 연유한다. 노계의 조홍시가는 모두 4首인데 첫째 수와 2~4首는 그 창작시기가 다르다.첫 首는 여헌 장현광이 짓게 하고, 나머지 세 首는 첫 首를 보고 난 후 이덕형이 더 짓게 한 것이다.
개울에 빠트린 신도비
한음 이덕형의 신도비(神道碑)이다. 임진왜란당시 이덕형의 활약에 반감을 가진 일제(日帝)는 이덕형 부인의 정여문과 이덕형의 신도비를 개울에 빠트린다. 정여비는 流失되고, 신도비는 후손들이 후일 건져 올렸으나 비석은 깨어지고, 비문은 마모되어 판독할 수가 없다.
또한 일제(日帝)는 이덕형의 공훈에 대한 보답으로 많은 사패지(賜牌地)를 내렸으나,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빼앗기게 되었다고 한다.이 신도비는 이덕형이 세상을 떠난지 40년 후인 효종4년(1653)에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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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김규봉 ... 사는 이야기 원문보기 글쓴이: 非山非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