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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날리빌리지(5,200m·마지막 캠프)로 올라온 지 이미 닷새째. 하루 24시간 중 23시간50분을 텐트 안에 갇혀 있기도 닷새째다. 계속 내리는 눈과 심한 바람은 우리 세 명을 꼼짝없이 하이캠프의, 발도 쭉 펴지 못할 좁은 텐트 속에 가둬놓고 있다.
오늘은 결혼기념일이자 큰 녀석 생일이다. 일주년 결혼기념일에 이 아이를 ‘선물’로 받은 것이다. 그 동안 큰 녀석 생일 챙기느라 막상 결혼기념일 행사는 항상 뒷전이었지만, 나에게는 두 번의 행사를 한 번에 끝냄으로서 경제적인 면에서 많은 도움이 되긴 했다. 아무튼 이런 뜻있는 날 매킨리 정상을 밟을 수 있다면 또다른 깊은 의미가 부여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제발 오늘만큼은 날씨가 좋아질 것을 바랬지만, 더 심한 바람으로 나의 의지를 무참히 날려 버리고 만다.
간신히 인내의 한계를 느낄 때쯤 한두 차례 텐트 밖으로 나가 배설의 시원함이 아니라 ‘배설의 고통’을 느끼고 온 것뿐이다. 텐트 안에서 참는 것도 고통이요, 영하 30도, 체감온도는 훨씬 그 이하인 텐트 밖의 심한 바람과 눈보라 속에서 일을 보는 것 자체도 고통이다. 그나마 큰 볼일은 아직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약간 잠잠해진 바람을 틈타 텐트에서 약 50m 떨어진 곳으로 허벅지까지 쌓인 눈을 헤치고 가서 자리잡아 온갖 힘을 다 주고 텐트로 돌아오면 30분 정도는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맥이 빠진다.
이제 연료도 식량도 모두 바닥이 났다. 두 사람(오성섭, 조재범)은 매킨리시티로 내려가겠다고 한다. 혼자 이틀 정도 버틸 식량과 연료만 남은 상태라 두 사람이 내려가기로 하고 나는 좀더 있어 보기로 한다. 오후에 약간 바람이 줄어든 상태에서 두 사람이 조심스럽게 내려가는 모습을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다가 텐트 안으로 다시 들어온다.
매킨리 정상을 향한 발걸음이 이렇게 어려운 것일까? 쉽게 정상의 모습을 보여 주리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날씨에 갇혀 꼼짝 못하고 있는 것이 답답하기만 하다. 혼자 놀기의 정수! 시체 놀이나 해야겠다.
여기가 텐트 속이냐, 상여 속이냐
올 초 2003년 정승권등산학교 동문 데날리원정대가 대원 9명으로 구성되어 1월 중순부터 약 4개월 동안 원정 훈련을 하였다. 그 후 정승권 교장을 포함해 6명이 원정길에 올랐는데, 3명씩 2개팀으로 나누었다. 정 교장을 비롯해 박민, 양준원 대원은 헌터봉, 필자를 포함해 오성섭, 조재범 대원은 매킨리 웨스트버트레스를 등반하기로 하고 랜딩포인트에서 각자의 등반지로 헤어졌다.
필자의 매킨리팀은 모두 원정 경험, 고소 경험이 없어 은근히 더 걱정됐다. 또한 훈련기간동안 계속 내 체력에 대해 나 자신도 많은 염려를 해왔다. 평소 배가 불룩 나와 있는 내가 아니던가. 더구나 나와 비슷한 연령층의 대원 3명이 사정으로 합류하지 못했다. 그외 다른 대원들과는 열 살 이상 차이가 나므로 체력에 대한 부담감은 출발할 때나 등반중이나 계속 신경이 쓰였다.
적어도 나로 인해 등반이 어긋나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했기에, 매킨리 하이캠프까지 아무런 이상 없이 등반한 것만 해도 나로서는 일단 성공이었다. 그러나 다른 젊은 대원들에 비해 고소증 극복에 그리 큰 어려움을 겪지 않았고 체력도 버틸만하여 정상 등정에 강한 욕심이 생긴 것이다.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떴다. 텐트 안에는 나 혼자만이 누워 있다. 꿈에 꽃상여를 본 것 같다. 아직 정신이 돌아오지 않은 상태라, 꼭 내가 상여 속에 누워 있는 것 같다. 간신히 침낭 속에서 두 눈만 내놓고 멀뚱거리고 있다. 텐트 천장의 중앙이 상여 꼭대기 중앙의 모양과 똑같아 보인다. 텐트 옆은 하얗고 두껍게 서리가 끼어 있고, 천장에는 거미줄처럼 서리가 밑으로 늘어져 있기까지 하다. 늘어져 있는 서리들은 나무와 풀들의 뿌리가 뻗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땅속 깊이 파 묻혀 있는 것 같다. 걸어놓은 고글이며 시계도 서리가 두껍게 끼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다.
간밤에 내린 눈으로 텐트 아랫부분은 눈에 밀려 불룩 들어와 있다. 걸어놓은 시계를 털어 시각을 보니 새벽 3시, 기온은 영하 24도다. 간밤에 끓는 물을 넣어 침낭 발밑에 넣어둔 수통조차 차갑게 식어 있다. 새벽 3시지만 백야로 밖은 환하다. 아직도 밖에는 바람이 세게 불어 텐트가 흔들린다. 어제 재범과 성섭은 잘 내려갔을까. 날씨가 좋아질 듯하면서 계속 좋지 않다. 어스름에 다시 잠이 든다.
하루종일 텐트에 처박혀 이렇게 외부와 철저하게 차단된 곳에서 보름 이상 아무런 생각 없이 혼자 지내본 적이 여태까지 없었다. 보름째 이 정도의 추위와 고소증과 악천후를 겪었으면 한달음에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은 생각이 들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다. 도시생활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깨끗이 씻고 제대로 먹고 잠다운 잠을 자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 순간을 즐기며 머무르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자연이 좋아서? 경치에 빠져서?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세상과 접해서? 물론 그런 이유도 있겠지만 솔직한 심정은 세상에 다시 나가기가 두려운 것이 큰 이유 중 하나일 것 같다. 다시 돌아가 싸우고, 경쟁하고, 미워하고, 욕하고, 화내며 뒤엉켜 살아가기에 이젠 지쳐 이대로 조용히 더 지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 같다.
조금이라도 더 이 여유 있는, 아니 여유로움은 아니더라도 세상을 외면한 단순한 생활을 좀더 느끼고 싶은 마음에 삶을 도피하고 싶어서다. 이곳에 계속 머무르고 싶다는 생각은 등정 후 와실라로 돌아가는 경비행기가 안에서조차 아쉬움으로 자꾸 뒤돌아보게 할 정도였다.
화이트아웃 속에서 일단 철수
하루 종일 혼자 텐트 안에 있다가 저녁때쯤 날씨가 좋아진 것 같아 밖으로 나가려 하니 눈이 잔뜩 쌓여 텐트 입구가 막혀 있다. 간신히 입구를 치우고 나와보니 50cm는 족히 왔나보다. 삽으로 텐트 주위 눈을 치우는 데 1시간이 걸린다. 삽질 한 번 하고 한숨 쉬고…. 이 고소에서는 쉬운 게 하나도 없다.
대충 치우고 앞에 있는 암반 위에 오르니 세상이 다 보인다. 포레이커봉, 헌터봉, 아래 매킨리시티가 엄청난 넓이로 자리잡고 있고, 그 가운데 원정대들이 쳐놓은 색색의 텐트들과 올라 왔던 길들이 가늘게 실처럼 연결되어 보인다. 눈, 구름, 봉우리 위의 파란 하늘, 내리쬐는 햇빛-. 이 거대한 자연의 모습을 보니 그 동안의 답답함이 싹 가시고 신이 난다. 매킨리시티 헤드월로 오르면서 보았던 것보다 더 넓은 세상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 높이에서 보는 경치가 이 정도면 정상에서 보는 세상의 모습이란 어떨까, 다시 한번 기대된다.
잠깐 아래쪽 날씨가 좋아서였는지 하이캠프에는 텐트들이 많이 늘었다. 사진 몇 장 찍고 텐트로 돌아와 오붓이 혼자 저녁을 해결한다. 이제 며칠 사이가 고비가 될 것 같다.
하이캠프에서 7일째 아침. 텐트에서 눈을 뜨니 그렇게 내리던 눈과 바람이 멈추었고 파란 하늘이 보인다. 용수철처럼 일어나 텐트 밖으로 나와 데날리패스를 보니 외국팀 두 팀이 각각 4명씩 그 동안 쌓인 눈을 번갈아 러셀하며 힘겹게 오르고 있다. “드디어 정상 간다!”며 부리나케 눈을 녹여 물을 만들고 빵 한 조각 먹고 출발준비를 했으나 점점 나빠지는 날씨…. 결국 오르던 외국팀들조차 데날리패스를 지난 후 바로 돌아오고 있었다.
하이캠프에서 8일째 되는 날도 날씨가 좋지 않았다. 바람이 심하고 눈발이 날린다. 매킨리시티로 내려갔다가 어제 다시 올라온 재범이가 오늘은 내려가자고 한다. “레인저 말로 앞으로도 이런 날씨가 계속 될 것 같다고 하니 일단 매킨리시티로 내려가자”고 한다.
아쉽다. 아쉬움이 크게 남는다. 아무 말 없이 배낭을 꾸리고 텐트를 걷는다. 오래 계속 있던 다른 두 팀도 모두 내려갈 준비를 한다. 식량과 가스 모두 바닥이 났다. 이제는 선택의 여지도 없고 너무 지쳤다.
눈발이 휘날리는 가운데 하이캠프를 출발했다. 올라올 때보다 눈이 엄청 쌓여 있고, 등반로 자체도 바뀌어 있었다. 눈보라 때문에 시야도 짧고, 발을 잘못 디디면 허리까지 빠진다. 내려가는 것도 장난이 아니다. 확보를 보며 한 사람씩 헤드월 위까지 어렵게 내려온다.
이제부터 고정자일에 주마를 걸고 내려가야 한다. 대략 경사 70도에 400m 정도 되는 이 빙벽은 두 곳에 고정자일이 설치되어 있어 한쪽으로는 오르기만하고 다른 한쪽은 내려가게만 되어 있다.
눈보라와 가스가 뒤엉켜 화이트아웃이다. 위도 아래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단지 위로 올려진 고정자일과 아래로 뻗은 고정자일 그 중간에 내가 있을 뿐이다. 한 줄기 자일을 타고 천상을 오르는지 속세로 내려가는지 그저 신비롭기만 하다. 매킨리 등반이 좋은 점은 백야현상 덕에 등반할 수 없을 정도로 날이 어두워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무리 어두워져도 날씨만 좋으면 주위를 모두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이며 랜턴 없이 충분히 등반할 수 있다.
그 동안 텐트에만 있어서인지 기력이 많이 떨어졌나 보다. 눈을 헤치고 내려가기가 무척 고통스럽고 힘들다. 거의 기진맥진해 매킨리시티의 캠프로 간신히 돌아왔다. 며칠 전 헌터팀과 교신이 되어, 내일쯤은 매킨리시티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연락을 받았다. 헌터팀도 그 동안의 악천후로 일단 등반을 포기하고 며칠 전부터 매킨리 등반에 열중하고 있다고 했다. 내일 모두 다시 만나면 재정비한 후 새로운 계획을 짜야 할 것 같다.
추워서 오래 못 쉬어
매킨리시티의 날씨가 무척 좋다. 바람 구름 한 점 없다. 하이캠프 넘어 정상 부근의 하늘을 봐도 구름 한 점 없다. 헤드월 경사면에 20명 이상의 외국 등반대들이 오르고 있다. 오늘은 분명 많은 등반대들이 정상을 오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아쉽고 안타깝다. 하루만 더 하이캠프에 남아 있었어도 등정할 수 있었을 텐데…. 속절없이 마냥 헤드월을 오르는 외국 등반대들과 정상쪽만 번갈아 쳐다본다.
오후에 헌터팀을 마중나간다. 약 1시간쯤 내려가니 정승권 대장과 박민 대원이 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약 보름 전에 서로의 등반지로 헤어질 때보다 몰골이 모두 말이 아니다. 헌터팀도 꽤나 고생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래도 그 와중에 알파미와 압력솥까지 썰매에 싣고 왔다.
매킨리시티에 텐트 한 동을 더 치고 식당텐트까지 치니 이제 부러울 것이 없었다. 모처럼 압력밥솥에 밥을 하고 국을 끓여 젓갈반찬에 포식을 한다. 하이캠프에서의 8일 동안은 나의 체력과 컨디션을 최악으로 만들었다. 다시 신나게 먹고 기력을 되찾아야겠다. 식량도 충분하고, 정 대장을 포함하여 대원 모두 합류했으니 매킨리 등반계획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됐다.
매킨리시티(4,300m)로 내려온 지 4일만인 6월16일 오후 다시 하이캠프로 올라가 6월17일 오전 10시경 정상을 향해 출발했다. 춥다. 무척 춥다. 발가락 감각은 없어진 지 오래다. 앞에 가는 외국팀 3명의 발걸음이 너무 느리다. 겨우 10m 오르고 5분 정도 쉬는 꼴이다. 빨리 이 눈사면과 추위를 벗어나야겠건만 앞서지는 못하고 욕을 바가지로 퍼부으며 뒤따라간다. 앞서려면 안자일렌한 3명의 간격 30m와 나와 끝사람 간격 10m를 합해 적어도 50m 이상은 가파른 눈사면의 불안한 길을 한달음에 죽 올라가야 하는데, 이 높이 이 상태에서는 도저히 자신이 없다. 그저 따라가는 수밖에…. 중간에 쉬며 발가락들을 자극해 본다.
데날리패스로 오르기 시작한 지 1시간 반이 지났다. 이곳은 오전에는 전혀 햇볕이 들지 않는다. 사면 길은 발자국 하나만 놓을 수 있는 공간이다. 그 아래는 크레바스가 있는 엄청난 비탈이다. 조심조심 한 발 한 발 내딛는 발걸음에 아직은 힘이 있고 여유가 있다.
데날리패스에 올라선 시간은 출발 후 2시간이 지나서다. 결국은 느림보 3명을 따돌리고 내 페이스대로 걸을 수 있었다. 이제 위험한 길은 조금 벗어났다. 며칠간 날씨가 좋아 많은 외국팀들이 정상으로 향했는지 길은 뚜렷이 잘 나 있다. 데날리 사면을 넘어 약 30분 정도 더 오른 후 바람을 피해 커다란 바위 뒤에서 물과 스니커즈, 찰떡파이를 먹고 잠시 휴식을 갖는다. 그러나 바람과 추위에 곧 움직여야만 했다. 이곳 바위는 거의 석탄 수준으로 까맣다.
매킨리! 다시 오르고 또 오른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내리막길은 한 번도 없었다. 여태까지 평지만 몇 번 있었고 줄창 오르막길이다.
보온주머니 속 수통 물도 꽝꽝 얼어
잠시 쉬며 물통을 열어 보지만 열리지가 않는다. 뚜껑이 얼어붙어 버렸다. 물통 속의 물도 단단한 얼음으로 변해 있었다. 두꺼운 보온주머니 속에 들어 있었건만 물은 이제 끝이다. 매킨리시티로 내려가 3일간 쉬며 먹었던 것이 체력 회복에 도움이 됐는지 아직까지는 걸을 만하다.
한참을 오르다보니 따라오던 준원이가 보이지 않는다. 기다릴 겸 잠시 바람을 피할 곳을 찾아 쉰다. 이곳은 배낭을 내려놓고 편히 쉬기가 여의치 않다. 잠시 서 있으면 바로 추위가 몰려오고 바람 피할 곳이 없으며 졸리기 시작한다. 20분 이상을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 배낭을 두고 100m 정도 내려가 본다. 저 아래에서 올라오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배낭 있는 곳으로 올라가려니 힘이 더 빠진다.
오후 3시30분경 아치데콘스 타워 안부로 올라섰다. 광활한 설원지대인 풋볼필드 위에 또다시 엄청난 높이로 서있는 정상. 기가 죽다 못해 기가 막힌다. 그러나 이제 끝장을 봐야 한다. 하이캠프에서 날씨 때문에 묶여 있었던 것이 무려 며칠이던가. 그 8일간은 날씨만 좋아지면 한달음에 올라갈 것 같은 간절한 마음이었다. 날씨가 좋지 않아 결국은 정상을 못 가는 줄 알았다. 그러나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다시 힘겹게 한 걸음 한 걸음 움직인다. 현재 해발 6,000m를 넘어섰다. 점점 가팔라지는 사면-. 한 발 한 발이 내 등반 높이의 신기록을 세우고 있는 중이다.
오르다 힘이 들어 잠시 쉬며 눈을 감으면 아득한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하다. 얼른 눈을 뜨고 정신 차려 다시 오른다. 멀리 외국인으로 보이는 두 명이 힘겹게 사면을 오르고 있다. 위험한 곳은 기어가다시피 하며 힘들게 천천히 오르고 있어 이상하다 싶을 정도다. 정상 능선에 올라섰다. 앞에 힘겹게 오르던 외국인 둘이 사진을 찍어 달라며 모자를 벗는데 60세 이상은 되었을 노인들이다. 정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어 시키지도 않는 사진을 여러 장면으로 찍어주며 “굿! 원더풀!”을 떠벌리니 기분이 굉장히 좋은가 보다. 그러나 이 이상은 못 가겠다고 한다. 이곳부터 정상까지 약 1km 정도인데 상당히 위험하다. 그래도 두 노인은 만족한 듯이 내려간다.
준원이가 도착해 안자일렌을 할 것인가 묻는다. 그냥 가자고 하며, 나보다 먼저 정상을 밟아 보라고 준원이를 앞세운다. 아이젠이 바짓가랑이에 걸려 실족하지 않게 조심스럽게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엇박자로 발걸음을 내딛으며 정상 능선길로 들어선다. 정말 위험한 구간이다. 양쪽으로는 까마득한 낭떠러지-. 길이라고는 한 발만 간신히 딛을 수 있다.
바로 앞선 준원이가 목이 메인 듯 소리를 지른다. 정상이다. 더 이상 갈 곳도 없고 더 높은 곳도 없다. 매킨리 정상, 흰 설산의 정수리! 그 위에 내가 올라섰다. 결코 그 무엇의 도움 없이 30cm 되는 보폭으로 오르고 또 올라 해발 6,194m 북극에 가장 가까이 있다는 가장 추운 산을 올랐다.
깊고 깊은 ‘잠의 크레바스’ 속으로
바람이 몹시 분다. 춥다. 정말 춥다. 목이 쉬어 말도 제대로 할 수 없다. 하지만 하늘이 파랗게 가까이 있고 알래스카의 모든 산봉우리들은 내 몸, 내 눈 아래에 보인다. 고소, 추위, 세찬 바람, 피곤함에 정신이 하나도 없다. 매킨리는 북극점에 가까이 위치하여 지구상에서 가장 추운 산으로 꼽히고 있으며, 에베레스트보다 위도가 35도나 높은 지점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생리적으로는 히말라야보다 600~900m 높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추워서 우모복을 꺼내 입고 사진을 찍는다. 한 달간 못 깎은 수염에 입김인지 콧물인지 하얗게 얼어 붙었다. 시야는 쾌청하여 사방의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인다. 정상의 추위에서 40분을 간신히 버티고 내려온다. 이제 제대로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왔던 길을 한 발 한 발 돌아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조심스럽게 정상 능선과 사면을 내려섰다. 힘이 들어 배낭을 내려놓고 쉰다. 데날리패스에서 속을 썩이던 느림보 3명이 지나쳤다. “아이고 이 녀석들, 고생 좀 해봐라” 하며 웃어준다. 갑자기 온몸의 진이 다 빠지는 것 같다. 하루종일 못 먹을 것에 대비해서 아침을 꾸역꾸역 먹었지만, 이후 간식을 전혀 먹지 못해서 더 그렇다. 목은 마르고 물은 얼어붙어 버렸다. 눈을 뭉쳐 입안에 넣고 녹여 먹지만 겨우 혀만 축일 정도다. 스니커즈 한 개를 억지로 씹어 먹어 보지만 목안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마라톤을 하면서 35km 지점에서 먹는다는, 윤회씨가 준 파워젤 2봉을 뜯어먹는다. 그래도 데날리패스를 내려가려면 조금은 힘이 남아 있어야 한다.
차가운 눈을 먹고 잠시 서 있었더니 다시 온몸이 떨려 온다. 또 걸어야 한다. 그래야 춥지 않다. 발가락 손가락을 부지런히 움직인다. 내려가도 내려가도 데날리패스가 보이지 않는다. 언제 어떻게 내가 이만큼 올라왔나 싶을 정도로 지긋지긋하게 걸어 내려간다. 이윽고 가장 위험한 구간 데날리패스에 도착했다. 이곳만 내려가면 하이캠프에 내 한 몸 누일 텐트가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아침에 오를 때와 다르게 그 동안 바람에 눈이 날려 사면에 눈이 살짝 덮여 있어 미끄럽기까지 하다. 한 발 한 발 온 신경을 몰두하여 내딛으며 내려온다. 1시간을 그렇게 내려오니 머리가 다 아프다.
이제 평지를 1km 정도만 가면 된다.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텐트가 저기 보이는데 도무지 가까워지지 않는다. 간신히 도착해 시계를 보니 오후 9시가 약간 넘었다. 오전 10시쯤 출발했으니 11시간 정도 걸렸다. 아이젠과 장비를 벗어버리고 텐트 안으로 들어가 펼쳐져 있는 침낭을 끌어 덮고 뻗어 버린다. 내일은 따뜻한(?) 매킨리시티로 내려가야지. ‘지독한 놈. 그래도 정상을 올라갔다’는 생각에 입가에는 미소가 번지며 나의 몸은 깊은 잠의 크레바스로 아득히 떨어지고 있었다.
최흥환 파스컴 대표·산빛산악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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