賞春曲 (상춘곡)
정극인(1401~1481)
본관은 영성(靈城). 자는 가택(可宅), 호는 불우헌(不憂軒)·다헌(茶軒)·다각(茶角).
조선전기 통례문통찰, 사간원헌납, 사간원정언등을 역임.
저서로는 『불우헌집(不憂軒集)이 있다.
홍진(紅塵)에 묻힌 분들 이내 생애(生涯) 어떠한고? 옛사람 풍류(風流)를 미칠까 못 미칠까? 천지간(天地間) 남자(男子) 몸이 나만 한 이 많건마는 산림(山林)에 묻혀 있어 지락(至樂)을 마다겠나? 수간모옥(數間茅屋)을 벽계수(碧溪水)앞에 두고 송죽(松竹) 울울리(鬱鬱裏)에 풍월주인(風月主人) 되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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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진(紅塵) : 번거롭고 속된 세상, 속세.
생애(生涯): 살아있는 동안, 평생.
천지간(天地間): 하늘과 당 사이, 이 세상을 말함.
산림(山林): 산에 있는 숲, 곧 자연을 말함. 홍진(紅塵)⬄ 산림(山林).
지락(至樂): 더할 나위 없는 즐거움.
마다겠나?: 모르는 것인가?
수간모옥(數間茅屋): 몇 칸 안 되는 초가.
벽계수(碧溪水): 푸른 시냇물.
송죽(松竹): 소나무와 대나무.
울울리(鬱鬱裏):울창한 속에서.
풍월주인(風月主人): 자연을 즐기는 사람.
엊그제 겨울 지나 새봄이 돌아오니 도화(桃花) 행화(杏花)는 석양리(夕陽裏)에 피어 있고 녹양방초(綠楊芳草)는 세우(細雨) 중에 푸르도다. 칼로 말라 냈나? 붓으로 그려 냈나? 조화신공(造化神功)이 물물(物物)마다 화려하다. 수풀에 우는 새는 춘기(春氣)를 못 이기어 소리마다 교태(嬌態)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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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화(桃花) 행화(杏花): 복숭아꽃, 살구꽃.
석양리(夕陽裏): 석양 속에, 해거름, 해질 무렵.
녹양방초(綠楊芳草): 푸른 버드나무와 향기로운 풀.
세우(細雨): 가랑비.
칼로 말라 냈나: 칼로 재단하여 내었는가?
조화신공(造化神功): 조물주의 신비로운 재주.
물물(物物): 사물, 형태를 가진 모든 물건들.
화려하다: 화려하다는 뜻도 있지만, 여기선 ‘야단스럽다’는 의미.
춘기(春氣): 봄날의 화창한 기운.
교태(嬌態): 아름답고 아양 부리는 자태.
물아일체(物我一體)이니 흥(興)인들 다를쏘냐? 시비(柴扉)에 걸어 보고 정자(亭子)에 앉아보니, 소요음영(逍遙吟詠)하여 산일(山日)이 적적(寂寂)한데 한중진미(閑中眞味)를 알 이 없이 혼자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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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아일체(物我一體): 자연과 내가 한 몸이 되는 것을 표현.
시비(柴扉): 사립문.
소요음영(逍遙吟詠): 슬슬 거닐며 나직이 읊조림.
산일(山日): 산속에서 지내는 나날.
한중진미(閑中眞味): 한가로움 속의 참다운 즐거움.
여보, 이웃들아! 산수(山水) 구경 가자스라. 답청(踏靑)일랑 오늘 하고 욕기(浴沂)란 내일 하세. 아침에 나물 뜯고 저녁에 낚시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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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여보게
가자스라: 가자꾸나.
답청(踏靑): 봄에 파랗게 난 풀을 밟으며 산책하는 것.
욕기(浴沂): 봄에 즐기는 물놀이.
이제 막 익은 술을 갈건(葛巾)으로 걸러 놓고 꽃나무 가지 꺽어 셈하며 먹으리라. 화풍(和風)이 문득 불어 녹수(綠水)를 건너오니 청향(淸香)은 잔에 배고 낙홍(落紅)은 옷에 진다. 준중(樽中)이 비었거든 나에게 아뢰어라. 소동(小童) 아이더러 주가(酒家)에 술을 물어 어른은 지팡이 짚고 아이는 술통 메고 미음완보(微吟緩步)하여 시냇가에 혼자 앉아 명사(明沙) 맑은 물에 잔 씻어 부어 들고 청류(淸流)를 굽어보니 떠오르는 건 도화(桃花)로다. 무릉(무릉(武陵)이 가깝구나. 저 산이 그곳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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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건(葛巾): 칡(갈포)으로 만든 두건.
화풍(和風): 솔솔 부는 화창한 바람, 건들바람.
청향(淸香): 말고 깨끗한 향기.
낙홍(落紅): 단풍이 떨어지는 것, 여기서는 붉은 꽃잎이 옷에 떨어지는 것을 표현.
준중(樽中): 술동이 속.
미음완보(微吟緩步): 작은 소리로 읊으며 천천히 거닒.
명사(明沙): 곱고 깨끗한 모래.
청류(淸流): 맑게 흐르는 물.
송간(松間) 세로(細路)에 두견화(杜鵑花)를 부여 들고 봉두(峯頭)에 급히 올라 구름 속에 앉아 보니 천촌만락(千村萬落)이 곳곳이 벌여 있네. 연하일휘(煙霞日輝)는 금수(錦繡)를 펴 놓은 듯 엊그제 검던 들이 봄빛도 유여(有餘)할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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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간(松間): 소나무 사이.
세로(細路): 좁은 길, 오솔길.
두견화(杜鵑花): 진달래 꽃, 참꽃.
봉두(峯頭): 산봉우리.
천촌만락(千村萬落): 수많은 마을.
연하일휘(煙霞日輝):안개와 노을, 빛나는 햇살.
금수(錦繡):수를 놓은 비단.
유여(有餘): 넘치고 남음이 있음.
공명(功名)도 날 꺼리고 부귀(富貴)도 날 꺼리니 청풍명월(淸風明月) 외에 어떤 벗이 있사올고? 단표누항(簞瓢陋巷)에 헛된 생각 아니하네. 아무튼 백년행락(百年行樂)이 이만한들 어찌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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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명(功名): 공을 세워 이름이 널리 알려짐.
부귀(富貴): 부와 지위.
청풍명월(淸風明月): 맑은 바람과 밝은 달, 풀월.
단표누항(簞瓢陋巷): 대나무 도시락, 표주박과 누추한 마을, 소박한 시골 살림, 청빈한 선비의 생활을 비유한 말.
백년행락(百年行樂): 안빈낙도(安貧樂道)의 다른 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