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인연 / 법상 스님
어떤 거사님께서 아내에게, 자식에게
이 공부가 너무 좋아서, 설법 좀 들어보라고 하고,
책도 사서 주고 아무리 해 보아도,
이 좋은 말씀을 듣고
아무런 감흥이 없다는 것을 보고 답답하다고 말이죠.
이 공부가 원래 그렇습니다.
오히려 인연이 안 된 사람에게 이 공부는 위험하고,
혼란스럽고, 일반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고,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마음 공부하는 사람을 보고
'종교에 빠졌다'라고 하면서
사이비에 빠진 사람처럼 바라볼지도 모릅니다.
이 공부와 인연이 없는 사람에게는
그래서 인연을 가볍게 맺어줄 수는 있지만,
강요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저 시절인연이 오기를 기다려 줄 수밖에요.
제게 부모님들이 이 좋은 불법을
모르는 자식이 안타깝다고
자녀 상담 좀 해 달라고 하시는 분도 계시고요,
심지어 아내와 상담 좀 해 달라고도 하십니다.
그럴 때 저는,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가를 먼저 여쭈어봅니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지 않으면,
부처님이 오시더라도 그들을 바꿀 수 없습니다.
아직 시절인연이 무르익지 않은 까닭입니다.
마음도 없는 사람에게 억지로 강요하기 보다는,
그럴 시간에 오히려 자기 자신의 공부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는 편이 좋겠습니다.
왜 그럴까요?
내 공부가 곧 그의 공부와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의 깨달음이 곧 그의 깨달음입니다.
그렇기에 내가 변하면 그들도 변합니다.
오히려 내가 변하지 않은 채,
그들에게 이 공부해서 좀 변하라고 말한다면,
오히려 그들은 이 공부를 신뢰하지 않을 것입니다.
‘마음공부를 했다는 사람이 그 정도 밖에 안 되면
내가 뭐하러 공부를 해’라고 느낄 것입니다.
그저 묵묵히 공부해서 자신 스스로가 변한다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따라 변하며,
‘무슨 공부를 했기에 저렇게 변했을까!’하고
오히려 궁금해 할 것입니다.
이런 교화방법을 위의교화(威儀敎化)라고 부릅니다.
위의교화야말로 부처님께서 교화하신 참된 방법입니다.
여기에서 위의란 내 삶의 태도가 변하고
삶의 방식이 지혜롭게 변함으로써
저절로 배어나오는 모습을 말합니다.
출처: 법상스님의 날마다 해피엔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