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트를 치다~ 가 아니라 리스트를 노래하다~ 케빈 첸
케빈 첸 리사이틀을 선택한 이유는 순전히 프로그램때문이었습니다
바로 이 프로그램이죠~ 리스트~ 리스트~ 리스트~ 요
온전히 리스트의 곡들로만 구성된
게다가 오페라의 모티브로 작곡된 곡들이 즐비한 이 프로그램을 보고
그리고 쇼팽 콩쿨 때 전 1위보다 더 눈길이 갔던 2위 케빈 첸의 연주라 해서
평일이어도 매우 피곤한 상태였는데도 출발했어요
가기 전에 당연히 IBK 홀이리라 생각하고 갔는데 다시 보니 콘서트홀
아 케빈 첸이 콘서트홀을 다 채울 수 있을까 잠깐 걱정했는데 정말 쓸데없는 걱정이었습니다
합창석까지 꽉 찬 관객들에게 오늘 케빈 첸은 리스트의 세계를 활짝 열어서
관객들 모두를 2시간동안 무장해제시켜 꼼짝도 못하게 하는 그의 피아니즘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리스트를 노래합니다
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건반이 절로 울려서
가장 인간적인 감정의 최고점을 아는 리스트를 아름답게, 격하게, 그리고 때론 처연하게 노래했습니다
<1부>
리스트|2개의 차르다시 S.225
F. Liszt|2 Csárdás, S.225
리스트|전주곡(교향시) S.97 (케빈 첸 편곡 피아노 독주 버전)
F. Liszt|Les préludes(Poème symphonique), S.97 (solo piano transcription arranged by Kevin Chen)
리스트|순례의 해 제2년 S.161 No.5 “페트라르카의 소네트 104번”
F. Liszt|Années de pèlerinage II, S.161 No.5 “Sonetto 104 del Petrarca”
리스트|노르마의 회상 S.394
F. Liszt|Réminiscences de Norma, S.394
Intermission
<2부>
리스트|마이어베어 <악마 로베르>의 카바티나 S.412a
F. Liszt|Cavatine de < Robert le diable >, S.412a
리스트|순례의 해 제3년 S.163 No.4 “에스테 별장의 분수”
F. Liszt|Années de pèlerinage III, S.163 No.4 “Les jeux d’eaux à la Villa d’Este”
리스트|바그너 <트리스탄과 이졸데> 중 이졸데의 사랑의 죽음 S.447
F. Liszt|Isoldens Liebestod aus Wagners , S.447
리스트|돈 주앙의 회상 S.418
F. Liszt|Réminiscences de Don Juan, S.418
2개의 차르다시로 시작하는 공연을 위해 다들 기다리는데
첸은 좀처럼 건반에 손을 올리지 않네요
오늘 그는 모든 곡을 다시 시작할 때 한동안 마음을 가다듬고 구도자처럼 주문을 외우듯 피아노를 응시하다가
일단 건반에 손이 닿으면 그 건반이 절로 노래하기 시작합니다
강한 음률은 성량풍부한 베이스 가수처럼
맑고 높은 고음은 스핀토 테너와 리릭 소프라노의 사랑의 대화처럼
모든 곡의 설계와 해석이 현과 보컬이 동시에 들리도록 제작된 주크박스처럼
기악과 성악의 가장 아름다운 음들만을 뽑아뽑아서 엮어낸 테피스트리처럼
내내 모든 감각을 감싸서 그의 피아니즘으로 푹 적셔줍니다
1부 첫곡과 두번재 전주곡까지는 그의 기량을 확인시켜 주었다면
세번째 곡 페트라르카 소네트에서는 그의 외모 어디에서도 안 느껴졌던 우아하면서도 관능적인 서정미에 마음이 녹아내렸고
1부 마지막곡부터 그는 리스트의 화신이 됩니다
<노르마의 회상>을 연주하는 그는 노르마였다가 리스트였다가 그리고 다시 무대 위의 작고 단단한 체구의 케빈 첸으로
끝없이 오버랩되는 정체성으로 관객을 들었다 놨다 하는데 1부 마지막의 임팩트는 임팩트도 아니었습니다
2부 시작부터 전 가슴에 울컥신호를 받아서 첫곡 마이어베어 오페라 <악마 로베르>의 카바티나 변주곡에서 결국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 이곡이 이렇게 좋은 줄 오늘에서야 알게 되네요 오는 내내 차 안에서 다시 재생합니다
<에스테 별장의 분수>는 많은 피아니스트의 연주로 들었지만 케빈 첸의 연주는 과하지도 지나치게 감상과다하지도 않은
딱 적절한 애상미가 탑재된, 앞으로의 폭풍감동을 대비하기 위한 에피타이저였습니다
이곡 다음의 이졸데의 <사랑의 죽음> 변주곡에서 건반위의 그의 손이 부르르르 떨리면서 포효해내는 격정을 목격합니다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관현악 총주에 맞춰 울부짖던 이졸데의 목소리보다 더 강력하고 온몸에 반사되듯 스며드는 피아노 소리에 안구가 마비되는 느낌으로 감동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이 상태에서 마지막곡 <돈 주앙의 회상>은 대체 리스트는 이걸 치라고 작곡한 것인지 의심이 들 정도인 곡인데 그걸 또 쳐내는 케빈 첸, 그는 정말 괴물같다는 생각이 드는 와중에 모짜르트 돈 조반니의 선율이 곳곳에서 터져나와 미소짓다가 다시 어마어마한 스케일의 질주에 관객의 마음도 같이 질주하다가 롤러코스터에 강제 탑승되어 감각이 터져나갈 듯 고문당하다가
다시 어느 덧 침잠해진 격정을 관조하듯 바라보는 관찰자 1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패러프레이즈(Paraphrase)나 포 푸리(Potpourri) 등의 이름보다 회상(Reminiscence)이란 표현은 자유롭지만 원곡으로부터 받은 인상 들에 편곡자의 판타지가 골고루 미치고 있다는 느낌인데..........
다른 작품 들과 마찬가지로 이 편곡에서도 오리지널에 대한 리스트의 깊은 관심이 엿보이며, 여러 차례의 개작과 페 루치오 부소니 등의 가필과 별개로 '돈 조반니' 중 주요 멜로디를 반복 사용해 오케스트라 사운드 이상의 스케일을 만들어 냈다는사실은 리스트가 이 곡에 대해 기울인 열정이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케한다.
오늘 프로그램북에 있는 <돈 주앙의 회상> 부분의 내러티브가 인상적이었고 더없이 공감이 되는 것이
원곡으로부터 받은 인상을 그만의 판타지의 세계로 가져다가 새로이 구현해 내는 리스트의 능력이 놀랍고
그것을 무대 위의 시공간에서 재현해내는 케빈 첸의 연주자로서의 케파에 관객은 경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어서 입니다
이곡을 마치고 이제 드디어 환하게 웃는 케빈 첸,
소년미 가득한 미소와 세련됨과 당당함이라고는 1도 없는데도 오롯이 느껴지는 거인같은 아우라에
완전히 함락되고 말았습니다
리스트는 모짜르트, 바그너, 그리고 마이어베어의 드라마와 격정을
하얀 건반 위에 옮겼을 때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의 지평을 열어서 또 다른 세계로 우리를 초대한다 그 세계는 단지 오페라 무대의 연장이 아니라
그 무대가 빚어낸 드라마를 매개로 새롭게 창조된 시공간이고 판타지였다
이건 공연을 보고 난 후 저의 생각입니다 음악이 얼마나 확장성과 시대를 연결하는 유기적인 힘이 있는지를 느끼게 해 준 공연에 대한, 그리고 그걸 가능하게 한 리스트와 케빈 첸에 대한 고마움을 담아서 ........................
그리고 앵콜곡 <헌정>, 확인사살까지 하는 케빈 첸이었습니다
제가 무척 좋아하는 슈만 <헌정>의 리스트 편곡버전 <헌정>을 케빈 첸은 가장 진심을 꾹꾹 눌러 담은 연주로
제 가슴에 마지막까지 돌을 던지니 뻥 뚫린 가슴과 먹먹해진 눈으로 돌아오는 밤입니다
음악에 미치는 것은 위험하지만 가치가 있다는 생각을 뇌 한켠에 쟁여두고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