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도지역
마을유래
및
역사(군 외 면)
완도읍과 같은 권역(圈域)에 속해 있었으나 고려 현종 때부터 1855년(정종
6년)
까지는 현재의 군외면(郡外面) 관할구역이 삼분(三分)되어
대창리(大昌里),영풍리
(永豊里),불목리(佛目里), 사후도(伺候島), 고마도(古馬島), 토도(兎島)는
강진현
(康津縣)에 속했으며, 남선리(南仙里),황진리(黃津里),용계리(龍溪里),중리(仲里)
달도리(達島里)와 기타 도서는 영암군(靈巖郡)에 속하였고, 당인리(唐仁里)에서
원동(院洞)까지는 해남군 은소면(海南郡 銀所面)에 속했었다.
그후 加里浦鎭이 獨鎭되면서 1855년부터 東西 兩面으로 갈라서 郡外面을
외면(外面)
이라고
중분리(中盆里),정돌리(正突里),화개동(花開洞),부흥리(復興里),대구미(大口味),
신정리(新亭里), 당인리(唐仁里), 두읍리(斗邑里), 삼장리(三莊里),
갈문리(葛文里)
화학동(化鶴洞), 대산리(大山里), 신흥리(新興里), 방축리(防築里), 망리(望里),
석장리
(石場里), 도암리(道岩里)를 관장했었다 .
1896년 2월3일 완도군이 설군(設郡)되면서 외면(外面)을 군외면(郡外面)이라
개칭하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대야리(大也里),영풍리(永豊里),불목리(佛目里),황진리(黃津里)
원동리(院洞里)를 군외면의 관할로 한 반면에 신정리(新亭里)에서 망리(望里)까지의 지역
을 군내면(郡內面)으로 이전하였으며 신정리에 있는 면사무소를 대문리(大文里)로 옮겼다가
1917년 대문리에서 면사무소를 원동리 현위치로 신축이전하였다.
원동리(院洞里)
마을형성 |
1522년(中宗 17년)군내리에 가리포진(加里浦鎭)이 설진된후왕래가 빈번해지면서 속칭
"옹개" 에 院집을 세웠던것이다. 원집이 있는 마을이라하여 원동(院洞)이라고 하였으며 지금도 옹개원터라고 하여 지명이 전해 오고 있다.
1917년 신정리에서 대문리를 경유하여 이전되어온 군외면사무소의 소재지가 되면서 마을이 급속도로 발전 되었다.
완도군의 관문이며 완도교가 1,2차로 가설된 연륙기점 마을이다. 제1차 가설된철교는 6.25때 파괴된 한강 철교의 잔해를 보수하여 만든 핀트러스형으로 1969년 1월31일 개통하였으며, 교통량의 증가로 인하여 1985년 2월에 새로이 대교를 준공하여 현재는 별로 사용 가치는 없으나 6.25동란 전화의 유물의 관광상 보존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밖의 원동내 명칭에는[원계/선창/고두머리/장등/안동네/개추/갯제/중산골/..등]
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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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없음)
중리(仲里)
마을형성 |
달도에 최초로 입주한 성씨는 문씨,최씨이고 그후 경주김씨, 김해김씨가 들어와서 현재 많이 살고 있으며 다른성씨도 거주하고 있다. 웃부락인 해남 이진은 성을 싸서 진을 치고군사가 있다하여 이진이라부르고 닻도는 배 닻같이 생겼다하여 닻도라 불렀다. 그후 영안군에 편입하여 달호라 불렀다가 현재는 완도군에 편입되어 달도라 부르고 있다.
달도는 옛날에는 양쪽다리가 나있지 않고 섬으로 되어 있어 사람을 나룻배로 실어 날랐다 하여서 섬도(島)자를 써서현재는 달도라 부르고 있다.
달도내 명칭- 천석바위/아리꽁지/망매산/봉화불/당끝/당/당제/갯제/용왕제/불무동/웃꽁지/숭어바위/몰마기미/안산기미/코바위/당유례/염수/둥굴재/큰골/작은골/약샘/동섭바위/동백나무개/...........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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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없음)
달도리(達島里)
마을형성 |
조선 숙종대에 정씨의 후손이 황진리에서 분가하여 이주한후 마을이 형성 되었다. 황진리에 소속된 마을로 해방후 1946년에 불당골-간데마을-신덕 을 합하여 한마을을 형성하였으며 큰동네와 버금가는 잘사는 마을이 될수 있다고 중리(仲里)라고 불렀다.
그외의 명칭 - 장군바위/불당골/이월례원장/하루바위/청둥고랑/........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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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리(黃津里)
마을형성 |
조선 효종때에 경주 정씨가 처음으로 이주하여 정착한 이후 마을을 형성 하였다. 완도의 금송봉산(禁松捧山)으로 산림보호와 그 관리를 위하여 황장소(黃腸所)를 설치하여 감색,산직 등 50명의 이질을 두어 산림을 감시 보호 하면서 범법자를 징계하고 육림하는 한편 주로 황장목을 수집 진상하는 업무에 진력하였으므로 황장소인 이곳에는 황장목이 수시로 입출항 되었다.
그러기에 황장진 또는 황정리라 하였고 훗날 황진리 지명의 유래가 되었다.
그외의 명칭 - 오름/독개끝/독총골/......등
황장목의 전설
황장목이란 수백년 수령의 홍송으로 나무속에 송진이 가득베어 썩지 않는 나무인데 예날 우리 완도에는 이러한 황장목이 울창하였기에 조정에서 완도산을 국유로 봉하고 민간의 입산을 엄금하였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400여년전에 해남 송지에 고효자라고 세평을 받은 효자의 편모께서 노병으로 별세 하였는데 가세가 빈곤하여 관재를 준비치 못하고 비통과 걱정에 빠져 통곡중이었는데 집에서 기르던 큰 삽살개가 끙끙거리며 고효자의 바지락을 물고 끄는 것이었다. 이상히 여긴 고효자는 개를 따라 나서자 남창 나루까지 인도하여 완도로 건너가자는 시늉을 한다.
그러나 바다를 건너갈 배가 없어서 방황중인데 이번에는 삽살개가 고효자 앞으로 다가 서면서 등에 업히라는 시늉을 계속하니 어쩔수 없어서 업히어 완도로 건너 왔었고 개는 다시 주인을 안내하여 특상품관재가 될 큰 황장목 곁에 머물렀다. 고효자는 그 황장목을 보고 욕심이 났으나 새로이 걱 정이 된다. 벨 연장도 없고 혹 연장이 있다한들 거목을 베기가 너무 힘겨운 일이며 완도의 황장목은 국법으로 벌목을 엄금하고 있음을 아는지라 여러모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단정한 고효자는 앞이 캄캄하여 설움만 복받쳐 통곡을 억제치 못하고 엉엉 울었던 것이다.
그럴즈음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당시의 가리포진 첨사는 이선원 이었는데 이첨사가 격무에 시달려 어슴푸레 낮잠 졸음의 찰나 비몽사몽간에 통곡하는 소리가 역력히 들려 오는 것이다.
졸음에서 놀라 깬 이첨사의 귀에는 여전히 통곡이 계속 들려서 사령을 불러 "울음 소리의 출처를 알아 보라"고 명령 하였다. 사령은 근방을 살펴본후 "근처에는 아무도 우는 사람이 없습니다." 라고 보고 하였다. 그러나 이첨사의 귀에는 계속 통곡 소리가 들리니 이상히 여긴 첨사는 사령들을 뒤따르게하고 통곡이들리는 방향을 향하여 찾아 나섰다.
그러나 기이한것은 조금가면 그옆에서 또 더가보면 또, 그옆에서 곡성이 들려 기어히 곡성이 나는 곳까지 당도해보았다. 거기는 상황봉 중턱이었다.
낙낙장송이 하늘을 찌를듯 울창한곳으로 큰 황장목곁에 황소처럼 큰 호랑이 한마리와 울고 있는 젊은 사내를 발견한 것이다. 이첨사는 땀을 닦은후 우는 젊은이를 달래며 사연을 물으니 젊은이는 경건히 인사하며 자초지종을 아뢰었다.
이첨사는 고효자가 범을 개라고하는 말에 예사효자가 아님을 깨닫고는 고효자를 달래며 "내일 우리가 관을 만들어 보내줄것이니 아무걱정말고 지금건너가 어머니 장례를 정성것 모실 채비를 하십시오"하고 귀가 시킨 이첨사는 약속대로 그황장목을 베어 관을 만들고 쌀과 제찬등을 갖추어 고효자의 집으로 조위사를 보내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었다.
고효자의 지극한 효심이 감천되어 삽살개는 호랑이로 변하였고 고효자의 애절한 곡성은 멀리 30리 밖의 이선원 첨사의 졸음을 깨웠던 것이다. 이는 (효는 백행지본으로 하늘도 감동 한다는 진리)임을 세인들에게 가르쳐주는 좋은 예의 전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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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인리(敎仁里)
마을형성 |
교인리는 완도군에서 해발 180m의 고지에 위치한 제일 높은 부락이다. 원래 국도가 원동에서 출발하여 완도읍으로 가는 첫 부락이다 . 첨사도 완도로 행차할때는 이길을 이용했다. 그리고 고인돌이 있어 쉬어간 곳이다. 사방이 방장하여 5만평에 달했었다.
전설에 의하면 의병과 왜군이 싸울때, 기점표시가 되어 군사 기밀지로도 이용하였고 총기 보관까지 했던 기밀거점의 역할도 했었다고 한다. 지도를 놓고 보면 군외면의 중앙지이기도 하다.
1910년경 오석균, 김영현 학자 의 주선으로 군외사립 보통학교가 설립되어 부락 명칭을 교인동 으로 하였고 학교 명칭은 교인학교로 하였다. 학교가 있어 항일운동의 본거지로서 역할이 커지면서 일제의 압박도 심하여 결국 폐교하다시피 하여 불목리로 옮겨졌다. 국회의원 김선태를 비롯하여 도의원 ,대학교수, ....등 이학교에서 수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었다. 그리고 학교가 있던 시절 군외면민들의 단합된 힘으로 방풍림을 구축하였다.
이부락의 시작은 화전민 으로부터 시작되어 현재는 1972년 교인리로 분구 되었다. 현재 원동-완도간 4차선 도로가 예정되어 공사가 진행 중이기도 하다.
그밖의 명칭
숙승봉 - 완도 사람으로 송림대사라는 속칭 앙살래중으로 불렀던 분이 있었는데 성은 석장리 오씨로 알려져 있다. 이 대사가 해남 대흥사 주지로 임명 받았으나 성질이 괴팍하여 텃새를 이기지 못해 다시 완도로 오던중 자기가 있을 곳을 마침 숙승봉으로 결정하여 거주하게 되었다고 한다.
숙승봉은 해발 436m의 봉우리에 빈몸으로도 올라가기 힘든곳을 논흙을떠다가 방을 놓고 불을 넣었던 흔적이 지금도 완연하게 남아 잇다. 전설에는 하루 아침에 이봉을 세번 돌앗다고 하며 굴안에 쌀나오는 구멍과 물나오는 구멍이 있엇는데 손님이 와서 상자승이 쌀구멍을 쑤셔버려 안나 왔다는 전설도 간직하고 있다.
숙승봉 큰굴/ 점바위........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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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선리(南仙里)
마을형성 |
조선효종대에 마을을 형성하였다. 옛날부터 많이 생산되는 석화(石花)는 널리 이름이 나있다. 속명으로 꿀포리라 하였고 석포라고 부르게 되었다. 영암군 북평종면 석포로 황장과 함께 가리포진이 독진으로 승격되면서 1855년 완도 내면에 황진리로 통합되어 편입 되었다.
해방이후 1946년에 황진리에서 분리 되면서 "남방게"라고 부르던 이름을 따 남선리라고 개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고, 그당시 까지는 만수와의 나루터로 "꿀포리" 나루터로 불리워 졌다.
마을앞에 닭섬이 위치해 있는데 간조시에는 걸어서 들어갈수가 있고,겨울철에 외가리가 둥지를 트는 아름다운 무인도 이다.
개펄이 발달하여 굴,번지락.고막...등 패류가 발달하였고, 가을철에는 문져리(망둥어)낚시가 쏠쏠한 재미를 더해주는 마을이다.
그밖의 명칭 - 꿀뻐리/남방계/은선동/큰고랑/장태고랑/동매/딱섬/해구덕밭/오소리몰랑/왁새꾸지/신다물바지락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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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문리(葛文里)
마을형성 |
조선시대 선조때에 성주 배씨,제주고씨,청주한씨등이 바다건너 해남에서 이주하여 마을을 이루었으며, 완도군이 만들어지면서 산골의 화학동을 갈문리에 통합하였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대산리와 합하여 대문리로 개칭되어 부르다가 해방 직후에 다시 갈문리로 부르게 되었다.
마을팡 방풍림은 풍치를 아름답게 할뿐만 아니라 바닷가에 길게 돌출되어 있어 이를 이용하여 간척 방축함으로써 농토가 확장되어 마을을 더욱 풍성하게 하고 있다.
왜란을 피하여 산중화학동으로 이주하고 텅빈 마을은 칡넝쿨 우거진 쑥대밭이 되었다고 하여 갈애골이라 한데서 유래하여 갈문리가 되었다고 전한다.
그밖의 명칭 - 봉두산/사슴당/절꼬랑/생애바위/미끌바위/진재/코팽이/느진목/붓둠벙/연축골/한새꼴창/몽낭개/솜치/봉사굴/범바위/산바위/넙바위/천장맷둥/치끝/망태골.....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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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흥리(永興里)
마을형성 |
조선 효종때 마을을 형성하였으며 1946 에 불목리에서 분구 하였다.
덕운내는 "더울내"라고 속칭하여 오던 지명을 한자로 표기한데서 유래한것인데,울창한 덤불이 얽힌내란 뜻으로 마을 앞을 흐르는 계천이 지금은 깨끗히 정리 되었지만 옛날에는 아주 험난한 덤불로 된 여울이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용소는 원불교 훈련원을 통하여 흐르는 계곡밑에 있는 용둠벙이라는 지소부근의 마을을 가르키는 곳으로 경치가 수려하고 수원이 풍족하여 용이 승천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밖의 명칭 - 정터골/고래안(고려안)/마당바우/불선바위/용둠벙/한독개/참나무개/고막치미/땅끝/발막기미/해남등/영암내/영흥제.........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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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창리2구(大倉里2區)
마을형성 |
1890년 광상김씨가 여수에서 이주해와서 마을에 정착한후 김 양식업을 위하여 각처에서 이주해온 사람들로 급속히 번창하였다. 대수골 밑에 있는 마을이어서 하대수라 칭하였고 1855년 완도군이 만들어 지면서 영풍리에 소속된 자연부락으로 있다가 1945년 해방후 선창구미와 합하여 대창리로 통합되었으며 , 1957년 분구하면서 대창1구와2구로 되었다.
아주 옛날에도 이곳에 삶이 거주하였다고 전해지고, 그 흔적으로 마을 앞산에 동굴이 있는데 그안에서 토기파편과 화덕자리가 있었으나 지금은 매몰되어 그 위치만 구전되고 있다.
그밖의 명칭 - 질매재.....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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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창리1구(大倉里1區)
마을형성 |
1700년경 숙종때 주민이 이주하여와 마을을 형성하였다. 선창구미로서 영풍리에 속해 있다가 해방이후 하대수와 합하여 대창리로 통합하여 분리 되었고 그후 1957년에 대창1구와 2구로 분할 되었다.
대창리는 하대수의 중간 자(字)인 "대(大)자와 선창리(船倉里)의 중간자인 창(倉)자를 합하여 마을 이름으로 하였다.
그밖의 명칭 - 붉은여/배바위/복바위/총치몰랑....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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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목리(佛目里)
마을형성 |
조선 숙종대에 마을이 형성 되었다.
옛날에는 마을 광할구역이 광활하여 부속도서를 제외한 현재의 대창리 ,영풍리,영흥리,은선동 까지 행정구역으로한 광대한 마을 이었으나 1855년 가리포진이 독진으로 승격함에 따라 영풍리 대창리가 신설되어 분리 되었고 관할 구역은 줄어 들었다.
마을 위의 큰바위가 스님이 좌선하는 형상이어서 불몽리,또는 불목리라 불이어 오다가 근세에 불목리(佛目里)로 개칭 되었다. 숙승봉밑 산기슭에는 원불교 훈련원이 있어 전국 신도와 원광대학교 학생들의 수련장으로 활용될뿐 아니라 일반 기관,단체의 수련장으로도 많이 이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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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없음)
고마리(古馬里)
마을형성 |
조선시대 초기에 이 마을의 "서끝"에 마도진이 설치 되었으나 선박의 출입이 불평하여 강진현 마량으로 진이 옮겨가면서 옛마진 이라고 이름을 남겨두고 떠났다고 하여 고마도라 불렀다.
선조대 훨씬 이전부터 주민이 살고 있었다고 전하나 그 자세한 내역은 알수가 없고 그후 이조 숙종대에 마을을 형성 하였다고한다.
일제시재 강진군 행정광할 고마도 초대 책임자는 김재윤씨엿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불목리에 통합 되었다가 해방후 분구 되어 형재의 고마리를 형성 하였다.
그밖의 명칭 - 고마도/노선창/굴바위/선바위/나루바위/넓자위/돈두바위/병풍바위/독지골/거사골/속등/신등/도둑골/상골/논골/동구골/새몰/웃몰....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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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없음)
토도리(兎島里)
마을형성 |
이조 선조대인 1586년 양천 허씨가 처음으로 이섬에 들어와서 3대를 거치는 동안 서씨와 고씨가 이주해와서 조그마한 섬마을을 이루면서 살았고, 지금은 30여 가구가 모인 어촌 마을로 생활권은 물이 나면 직접 걸어다닐수 있는 해남 북평면에 속해있고,행정구역은 군외면이다.
그밖의 명칭 - 토도/장구섬/뒷목/목잔등/목넘/도채바위/서굿대/제당....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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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풍리(永豊里)
마을형성 |
조선 숙종대인 1686년에 주민이 입주하여 띠밭과 덤불로 버려진채 불모지였던 들녘의 산기슭이나 해변에 산재되어 정착 하였다. 그러나 단위마을이 되지 못하고 불목리에 소속되어 "띠등"이라고 불리워 졌었다.
그후 1855년 가리포진이 독진으로 승격되어 완도내면 영풍리로 독립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대창리 , 사후도를 통합하여 큰마을이 되었다.
마을 이름은 "띠등"이라고 하였는데 1794년 전라감사 이서구공니 이곳을 지나다 좌우를 살펴 산좋고 물좋은 이들녘의 뒷산에 치수하여 버려진 땅을 개간하면 영원히 아름답고 풍요로운 마을이 될것이라 하여 영풍리라고 불러준 마을 이름이 지금에 이르고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후 주민들이 이감사의 은공을 기리어 점바위 옆에 공덕비를 만들었다고 전한다.
그밖의 명칭 - 통샘/독바우/꾸지나무께/용치꼬랑/문박우등/부삽바위/사후도...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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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없음)
용계리(龍溪里)
마을형성 |
지금부터 약 270여년전 동네 동쪽 새작골에 용암사라는 절이 있고 동네 앞으로 냇가가 흐르고 상단부에 용둠벙이 있었다. 그래서 용암사아는 용(龍)자와 시내가 흐른다고 해서 시내계(溪)를 붙여서 용계리라고 불렀다고 한다.
"앵계"라고도 불렀다.
해방전에는 신흥,망축,초평,용계리 4개부락을 신학리라고 했으나 1945년 해방이후 초계리로 분구 되었다가 1954년 용계 ,초평으로 분구 되어 오늘의 용계리에 이르고 있다.
그밖의 명칭 - 새작골/큰골/메밭골/보튼골/새추골/불목재/큰학등/지추바위/펜판/피마당께/숙승봉/남사당/짱바탕.....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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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없음)
망축리(望築里)
마을형성 |
1570년경 선조대에 신창표씨 형제와 김해 김씨가 처음으로 입주 하였으나 대산리로 난을 피해 이주하고 그후 현종대에 밀양 박씨가 이주하여 점차 마을을 형성 하였다.
옛날 개펄을 축방하여 앞들을 조성하고 마을 옆에 방죽이 있는 마을이라하여 방축리라고 불러왔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신학리에 통합 되었다가 해방되어 분리되면서 뒷산에 마주봉이 있어 달리는 말의 형국으로 학문을 즐기며 마주봉과함께 후손들이 대성할것을 바라는 뜻으로 망축리로 개명하였다고 한다.
그밖의 명칭 - 똘갓/무동골/마주봉(일명 마주박)/장수바위/효자비/개미절터.......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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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없음)
초평리(草坪里)
마을형성 |
남평 문씨가 마을 뒷산 화학동에서 처음으로 입주하였고 그후 신창 표씨, 경주정씨가 난을 피하여 방축리에서 옮겨와 점차 마을이 형성 되었다.
큰산밑에 있는 마을이라하여 대산리라 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신학리에 통합 되었다가 해방후 분리 하면서 초평리로 개명 되었다.
속칭 "번던"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제주에서 많은 말이 이진진을 통하여 한양으로 가던중 마을앞 넓은 들판에 자생 초원이 있어서 망릉 임시로 사육하였으며 번던으로 변하여 불리워 오다가 해방후 분리 되면서 넓은 초원을 뜻하여 초평리로 명명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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