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디로 축복이었다. 날씨 음식 여정 그리고 함께 한 사람 모두. 지난 토요일, 전날까지 영하 10도 주위를 맴돌던 겨울 추위가 우수가 지나자 거짓말처럼 물러갔다. 마치 봄마중에 나선 우리를 축복이라도 해주려는 듯... 대신 성큼성큼 다가온 봄볕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볕을 따라 온 바람에서도 봄내음이 물씬 묻어났다. 아침 8시 30분 경부고속도로 하행선 안성휴게소에서 만난 친구들 얼굴에도 봄은 이미 와 있었다. 가볍게 요기를 한 뒤 안성휴게소를 뒤로 하고 또 다른 친구들과의 약속 장소인 내소사로 향했다.
천안-논산간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공주-서천간 고속도로로 갈아탔다. 토요일 아침인데도 차는 붐비지 않았다. 특히 공주-서천간 고속도로는 마치 우리가 전세낸듯 싶을 정도로 차량통행이 드물었다. 설 명절을 보낸 뒤끝이라 그런지 아니면 평소에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다른 차량에 신경쓸 일 없이 주변 경관을 느긋하게 즐기며 갈 수 있었으니 우리에게는 이 역시 축복이었다. 시간이 넉넉한 편이어서 부여/백제휴게소에서 쉬어 가기로 했다. 날씨가 풀린데다 붐비지 않아 우리 일행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 얼굴에도 여유가 넘친다.
동서천 JC를 빠져 나와 서해안고속도로로 접어들자 주변 경관이 확 바뀌었다. 그때까지 거쳐 온 고속도로 주변 산에는 아직 잔설이 그대로였는데 서해안 고속도로 주변 산이나 구릉에는 봄기운이 완연했다. 줄포 IC를 빠져 나가 12시 무렵 드디어 내소사 입구에 이르렀다. 가슴이 뛴다.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그냥 그렇게 느끼고 있었을 뿐이다. 사실 내소사 같은 유적지 혹은 명소는 꽉 짜인 일정에 따르기보다는 마음 내키는 대로 차분하게 살펴보아야 제 격이지만 슬쩍 둘러 본 것만으로도 가슴에 남는다. 꽃살문도 마음에 든다. 무엇보다 옆지기가 마음에 들어한다. 옆지긴 그 와중에도 대웅전을 비롯해 여기저기 드나들며 부처님께 빌고 나온다. 단청이 보이지 않고 탱화가 보이지 않아 소박해 보이는데 처음부터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벗겨졌을까? 그리고 탱화는? 오는 4월 초 아버지 제사를 모시고 나서 돌아오는 길에 다시 한번 차분히 찾아 볼 생각이다.
입구의 전나무숲길이나 경내의 할머니나무도 인상적이다. 등산로입구에서 자전거로 전기를 만들어 음악을 들으면서 웃기도 했다. 핑크 옷을 입고 나간 옆지긴 어느 곳에서도 쉽게 눈에 띄어 찾기가 수월해 좋았다. 친구 부인네들이 잘 어울린다고 한마디씩 했다며 옆지기가 흐뭇해 하는 모습이 꼭 어린 아이 같다.
절 입구 초원식당(063-581-1077, 010-6824-1077)에서 점심으로 청국장, 갈치조림, 산채비빔밥을 시켜 먹었다. 이번에 같이 간 친구 중 하나가 언젠가 맛있게 먹었다며 추천한 곳이다. 청국장과 반찬은 맛이 일품이었지만 갈치조림은 별로였다. 음식은 재료가 맛을 좌우하는데 그곳까지 들어 온 갈치가 싱싱할 리도 없는데다 조림이라기보다 국이라고해야 좋을 정도의 조리였으니 그 맛이 오죽했으랴. 그 식당에서 음식보다 더 관심을 끈 것은 벽에 걸린 내소사 설경사진이었다. 설경은 어느 곳이든 보기 좋지만 사진 속 내소사의 설경은 仙景 그 자체요 절경이었다. 식당에서 나오면서 옆지긴 청국장 두 뭉치를 사들었다. 저걸 요리해 줄 시간이나 있을런지... 일행 중 한 사람이 다른 손님의 어그부츠를 잘못 신고 나온 사실을 한참 뒤에야 발견하고 노상에서 서로 바꿔 신는 해프닝이 일기도.
식사 후 바로 숙소에 들어 가 체크인하기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그러기에는 너무 일러 소화도 식힐 겸 탤런트 이모씨의 별장이 있다는 모항해수욕장 주변 경관을 보러 갔다. 이모씨의 별장은 오래 전에 숙박시설로 바뀌었다는데 바다로 확트인 전망이 볼만했다. 건물 아래 절벽 경관이 그만이라는데 내려 가기가 힘들어 그만 두고 대신 숙박시설에서 기르는 닭이랑 공작을 보는 것으로 대신했다. 우리나라 절경인 곳에는 어김없이 '매운탕'집과 '닭볶음'집이 있으니 이 닭들도 틀림없이 그 대상일터지만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암탉 여러 마리를 거느리고 노는 장닭의 울음소리가 우렁차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아 왔던 길을 되짚어 가 개암사를 찾았다. 능가산 한쪽에 내소사가 자리하고 같은 산 반대 쪽에 개암사가 있다. 죽염을 처음 만들어 쓴 사람이 이곳 스님들이란다. 죽염의 효험을 지켜 본 주민들이 그 기술을 이어 받아 이를 상품화했고. 내소사가 상대적으로 규모가 크고 찾는 사람도 많고 증축공사 따위로 어수선한데 비해 개암사는 규모도 작고 찾는 사람도 별로 없어 적막이 감돌았다. 그 점이 오히려 맘에 든다. 절 뒤 산꼭대기의 바위가 두 개로 열려 있는데서 개암사(開巖寺)라 부른다고.
오후 4시반경 대명리조트에서 체크인을 하고 짐을 풀었다. 호텔식 스위트형 2실을 예약하면서 바다를 내려다 보며 낙조를 볼 수 있는 곳으로 달라고 얘기해 두었다는데 현실은 달랐다. 체크인 순서대로 방을 배정하다 보니 바다 쪽 방은 동이 났단다. 우씨, 뭐 그런 게 다 있나, 욕을 속으로 삼키고 배정된 방에 짐을 풀고 있는데 광주에서 한 팀이 도착했다. 그 친구 부인은 당뇨가 심해 투석을 하는데다 시력마저 거의 상실한 상태라 거동하기가 쉽지 않은데 부인네들을 만나려고 어렵게 움직인 것이다. 친구지간인 사내들보다 이제는 여인네들이 더 어울리고 싶어하고 모이면 온 동네가 시끄럽다. 짐을 풀어 두고 채석강 해넘이 감상에 나섰다. 낮동안 따뜻했던 기온도 저녁 무렵엔 제법 쌀쌀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저녁 6시20분의 일몰을 보려고 사람들이 많이 모여 들었다. 드디어 영산포에 둥지를 튼 친구 부부도 그곳에 합류했다.
좋았던 날씨에 비해 해넘이 광경은 감격스러울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도회지 사는 사람이 쉽게 볼 수 있는 광경은 아니지 않는가. 그저 해가 넘어가는 광경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해넘이 감상후 숙소에서 30분 정도 차를 타고 나가 계화회관(063-581-0333)에서 백합 세트메뉴로 입안을 즐겁게, 뱃속을 놀라게 했다. 모임 회장이 사전에 꼼꼼하게 조사하여 미리 예약해 둔 덕에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TV 프로그램에만도 50여회 넘게 소개된 유명한 맛집이라고 했다. 인당 2만원에 백합파전, 백합구이, 백합탕, 백합찜에 백합죽까지 다양하게 맛 볼 수 있었고 모주까지 서비스로 얻어 먹었다. 이렇게 먹어대니 그게 다 어디로 가겠는가. 살로 간다. 살로 가. 모두 뱃살로.
다시 숙소로 돌아 와 양주, 와인, 복분자주, 막걸리 따위와 안주를 풀어 놓고 그걸 마셔가며 몇 가지 안건을 처리했다. 우선 모임 일정에 대해 지금처럼 2월 셋째 주 주말로 하자는 의견과 이제는 따뜻한 봄(4월초)으로 옮기자는 의견이 팽팽했으나 7:8로 후자가 약간 우세해 내년부터 4월 첫째주 주말에 만나기로 했다. 다만 4월 첫주엔 시제가 많아 좀 더 생각해 보기로 했다. 회비는 절반으로 줄여 내기로 했다. 기금이 어느 정도 적립되어 있고, 일자리에서 물러나는 회원이 계속 늘어 나고 있으니 현실을 반영하자는 의견은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연중행사처럼 들먹이던 해외여행은 올해는 물론이요 앞으로 몇년간은 보류하기로 했다. 안건처리를 끝내자마자 남녀 따로 한 방씩 차지하여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참 세월이 무섭긴 무섭다. 다들 젊을 적엔 그토록 좋아하던 술을 이젠 한 잔 정도로 끝내고, 밤잠 안 자가며 고스톱을 치던 친구들이 화투짝 같은 건 아예 쳐다보기도 싫어하니 말이다.
일요일 아침 이른 시각, 일행중에서 비교적 부지런한 축에 드는 사람은 사우나에 들렀다. 나는 부지런한 축에 들었지만 옆지긴 자명종인 내가 본분을 잊어 먹고 깨워주지 못해 그냥 룸에서 샤워를 했단다. 호텔 내 식당에서 황태해장국과 청국장으로 아침을 해결했다. 변산도 맛의 고장 전라도의 일부인지라 전체적으로 맛이 괜찮은 편이었다. 열시 쯤 새만금방조제로 자리를 옮겨 전시실을 구경하고 광주팀은 광주로 서울팀은 서울로 향했다. 광주팀중 한 팀은 헤어지기가 못내 아쉬워 그곳에서 100여키로미터 이상 떨어진 대천 수정식당까지 동행했다.
수정식당(041-936-2341, 010-3929-2341) 역시 미리 와 본 한 친구가 추천한 곳으로 일품요리 '밴댕이 조림'으로 유명한 곳이다. 그 동안 밴댕이 소갈딱지라는 말이나 밴댕이 젓 따위는 들어 봤어도 밴댕이조림은 처음 들어 보고 맛본 것인데 발품을 판 가치가 충분했다. 우선 재빠르게 가시를 발라내는 주인할머니의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고, 손님의 기분을 맞춰주는 주인 할아버지의 너스레도 조림맛 못지 않았다. 상추에 밥을 먼저 얹고 그 위에 가시를 발라낸 밴댕이와 마늘장아찌를 올려 놓고 조림국물을 살짝 뿌려 한 입에 쏙 넣어야 제 맛이란다. 상추에 밥을 먼저 얹어야하는 까닭은 그렇게 해야 조림국물을 흘리지 않고 먹을 수 있단다. 반찬 재료 따위 거의 모든 것을 주인 내외가 직접 키워 조달한다니 재료 맛과 정성이 어울러져 그런 맛을 내는가 보다. 수요에 비해 워낙 밴댕이 공급량이 딸린단다. 제철인 5월에 1년분을 미리 확보해 둔단다. 주인할머니에 따르면 미식가인 할아버지는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한끼 이상 그 음식을 잡수지 않았단다. 그래서 할머니는 할아버지에게 늘 새로운 음식을 만들어 드리면서, 밴이조림도 시험삼아 만들어 드렸는데 할아버지가 아주 맛있게 드시는 걸 보고 상품화했고 달리 광고하지 않아도 입소문이 나 지금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손님이 몰려 온단다. 서해안 고속도로 대천(보령) 나들목에서 4키로 남짓되는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일부러 찾아가지 않더라도 그 부근을 지나가는 경우엔 들러보면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가격도 1인분7,000원으로 부담이 없다. 참 식당이름은 따님이름을 딴 것이라는데 그 따님이 이름값을 내란다며 웃는 주인 할아버지의 모습이 정겹다.
더 없이 맑고 좋은 이른 봄날 둘도 없는 친한 친구들과 경치 좋고 인심 좋은 곳에서 맛잇는 음식을 원없이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해준 친구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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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morundae 원문보기 글쓴이: 이승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