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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장경린
23시 45분: 않았다. 식빵을 커피에 적셔서 발아 먹는
25시 26분: 비가 온다. 아주 많은 비가 아주 큰 밥을 적시고 있다. 비의
26시 34분: 개고기가 먹고 싶다
29시 51분: 나의 모든 것을 내가 아닌 모든 것에게 되돌려 주고 싶다. 나의
모든 것이란 내가 아닌 모든 것들이 내게 준 그것이다. 네온사인으로 만든 십자가처럼 확실하게
45시 86분: 최순호가 쓰러진다. 게임이 잠시 중단된다. 최순호가 일어난
다 재개된다. 이제 고작 3분정도 남은 시간을 허겁지겁
98시 421분: 확신이 날 찾아왔다. 나는 그를 달래서 돌려보낸다. 다시는
날 찾지 마라 알겠니?
388시 914분: 하품을 하다 하품도 내게는 아픔이다. 삶을 너무 과식했
나보다, 배탈이 날 것 같다. 해탈도 내게는 배탈이다.
과식이
489시 973분: 기어가고 있다. 숨 죽이고 있는 나는 그가 휘둘러보는 한
폭의 인물화다. 들고 있던 사상으로 내려친다. 바퀴벌레
의 흰 내장이 바퀴벌레의 왼쪽 옆구리 밖으로 삐져나온
다. 다리처럼 사상을 잘게 끓이며, 나는 시효가 지나버
린 연극 초대권이다.
671시 524분: 그렇지 않았다면
무엇이
시작이나 될 수 있었겠는가?
999시 9996분: 방바닥에서
999시 9997분: 침으로 담뱃재를 찍어들고
999시 9998분: 조심스레
999시 9999분: 재떨이 앞으로 기어가며 나는
<시 읽기>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장경린
저는 1990년대 후반에 접어들어 ‘1990년대 젊은 시인들’이란 큰 제목 아래 월간 『현대문학』의 지면을 빌려 1990년대 젊은 시인들에 대하여 논의한 바 있습니다. 그때 저는 이 논의를 하면서 장경린을 맨 먼저 다루었습니다. 그를 이처럼 맨 앞자리에서 다룬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그중 가장 큰 것은 그의 첫 시집 《누가 두꺼비집을 내려놨나》 속의 작품들, 그중에서도 특히 <이반데니소비치의 하루>가 보여주는 개성과, 제2시집 《사자 도망간다 사자 잡아라》 속에 수록된 여러 작품들이 보여준 개성에 이끌렸기 때문이었다.
장경린은 제가 여러분들과 함께 감상할 작품 <이반데니소비치의 하루>가 수록된 그의 첫 시집 《누가 두꺼비집을 내려놨나》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두꺼비집이 내려진, 그리하여 전류가 서로 통하지 않는 단절의 세계로 해석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시집 《사자 도망간다 사자 잡아라》에서는 그런 인간들의 삶 전체를 ‘이자利子놀이의 과정’으로 파악했습니다. 지금도 장경린이 지적한 ‘내려진 두꺼비집’은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쉽사리 올려질 가망이 없는 채 그냥 내려져 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무인칭 물건처럼 표정 없이 고독하게 살아가는 법을 익힙니다. 그것을 익히지 않고서는 살기가 더욱더 힘이 드니까요.
그런데 장경린의 주장은 바로 이런 현실 속에서 설상가상으로 세상은 우리들에게 ‘이자’를 더 많이 늘려가라고 강요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나깨나 이자를 늘리기 위해 안달입니다. ‘이자는 잠을 자지 않는다’는 성공한 모 기업인의 명언처럼, 쉬지 않고 불어나는 이자를 잡기 위하여 우리는 동분서주합니다. 세상에 어디 공짜가 있겠습니까? 그것이 이자놀이의 기본 원리 아닙니까? 그러니 가장 원천적으로 따져 올라가보면 우리가 태어난 것 자체가 공짜일 수 없습니다. 한 번에 방출되는 남성의 정자 수가 2억 개쯤 된다고 하니까. 우리는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2억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이 땅에 당당하게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공짜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의 생명으로 승리자의 얼굴을 하며 나온 결과로 사실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어머니의 뱃속에서 사라졌습니까? 그러므로 그 많은 것들을 대신해서 혹은 이겨내고 이 땅에 나온 우리들은 그날부터 이자를 갚으며 살아야 할 의무를 걸머지고 만 것인지 모릅니다. 이자라는 말을 화두로 삼아 인생을 해석한 장경린 식으로 보자면 앞에서와 같은 말이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저 자신이 지금 이 글을 쓰는 것도, 장경린 식으로 말하자면 이자를 갚는 행위의 일종입니다(앞에서 제가 말씀드린 것이 미진하다고 여기시는 분은 그의 제2시집 《사자 도망간다 사자 잡아라》와 저의 책 《몽상의 시학: 90년대 시인들》 속에 들어 있는 <장경린론: 삶─이자놀이의 과정>을 참고하시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이것이 여러분들과 함께 감상할 작품입니다. 이 작품의 제목을 보면서 여러분들은 금방 러시아 작가 솔제니친의 중편소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조금 더 문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소설가 박태원의ㆍ최인훈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과 오규원 시인의 <시인 구보씨의 일일> 그리고 소설가 주인석의 <소설가 구보씨의 하루>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소설가나 시인들은 수백 년 혹은 수천년 동안 계속되는 대역사에도 관심이 있지만,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일 것 같은 하루, 그러나 그 하루가 모여 수백 년과 수천년을 이루는 이 하루에 관심을 두기도 하지요.
우리의 하루는 어떤 모양으로 흘러가고 있을까요? 우리의 하루생활에 대한 세밀한 성찰이 장경린의 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속에 들어 있습니다. 그저 타성에 저어 스쳐가버리고 마는 우리의 하루를 붙들어 놓고, 그는 그 앞에 머물면서 도대체 나의 하루가, 그리고 너의 하루가 어떤 모양인가를 깊이 직시해보려고 한 것입니다.
23시 45분: 않았다. 식빵을 커피에 적셔서 발아 먹는
25시 26분: 비가 온다. 아주 많은 비가 아주 큰 밥을 적시고 있다. 비의
26시 34분: 개고기가 먹고 싶다
29시 51분: 나의 모든 것을 내가 아닌 모든 것에게 되돌려 주고 싶다. 나
의 모든 것이란 내가 아닌 모든 것들이 내게 준 그것이다. 네
온사인으로 만든 십자가처럼 확실하게
45시 86분: 최순호가 쓰러진다. 게임이 잠시 중단된다. 최순호가 일어난
다 재개된다. 이제 고작 3분정도 남은 시간을 허겁지겁
98시 421분: 확신이 날 찾아왔다. 나는 그를 달래서 돌려보낸다. 다시는
날 찾지 마라 알겠니?
388시 914분: 하품을 하다 하품도 내게는 아픔이다. 삶을 너무 과식했
나보다, 배탈이 날 것 같다. 해탈도 내게는 배탈이다.
과식이
489시 973분: 기어가고 있다. 숨 죽이고 있는 나는 그가 휘둘러보는 한
폭의 인물화다. 들고 있던 사상으로 내려친다. 바퀴벌레의
흰 내장이 바퀴벌레의 왼쪽 옆구리 밖으로 삐져나온다. 다
리처럼 사상을 잘게 끓이며(‘끓으며’의 오식?-필자 주), 나
는 시효가 지나버린 연극 초대권이다.
671시 524분: 그렇지 않았다면
무엇이
시작이나 될 수 있었겠는가?
999시 9996분: 방바닥에서
999시 9997분: 침으로 담뱃재를 찍어들고
999시 9998분: 조심스레
999시 9999분: 재떨이 앞으로 기어가며 나는
─<이반 데니소피치의 하루> 전문
이 시를 다 읽으신 여러분들은 기존 시의 형태가 과감하게 파괴된 것 앞에서 당혹감을 느낄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기본의 시간틀이 완전히 파괴된 것을 보고 또 한 차례 당혹감을 느낄 것입니다. 그러나 기존 시의 고정화된 형식이나 기존의 시간틀에 구속감을 느꼈던 사람은 거꾸로 엄청난 해방감을 느낄 것입니다.이 시를 읽은 첫 느낌이 당혹감이든 해방감이든 간에 이 시의 형태가, 그리고 그 속의 시간틀이 아주 이채롭다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그런데 제가 걱정하는 것은 저 1920년대 김소월 시를 읽던 감수성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라면, 이 시를 보고 도대체 그게 시가 될 수 있느냐, 그게 무슨 시냐고 강하게 불평을 토로할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예상하며 저는 다음과 같이 답하겠습니다. 대중가요로 보면 <신라의 달밤>을 감상하던 때에서 지금 우리는 ‘H. O. T.’의 노래를 감상하는 시대로 들어왔고, 영화예술로 말자하면 무성영화 시절에서 컴퓨터 합성 영화 시대로 접어든 것이 현실이라고 말입니다. 이렇듯 모든 문화가, 더 나아가 사회가 바뀌고 있듯이, 시 역시 그동안 엄청난 내외적 변화 및 발전을 계속해왔다고 말입니다. 이처럼 열린 마음과 감수성으로 기존의 고정틀을 부수고 장경린의 위 시를 보면, 위 시는 아주 참신한 매력을 더해주면서 우리 앞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우선 저는 위 시에서 파괴된 시간틀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할 것입니다. 이 문제를 생각해보기 이전에 여러분에게 한 가지 묻겠습니다. 진정 이 우주 속에 시간이란 것이 존재합니까? 존재한다면 어떤 식으로 존재합니까? 혹시 이 우주 속에 시간이란 없고 단지 무상의 흐름만이 존재하는 것인데도 인간들이 인위적으로 편리를 위해 만들어놓은 장치에 불과한 것이 시간이 아닙니까? 1년은 365일로, 하루를 24시간으로, 한 시간을 60분으로 정한 것은 절대진리처럼 불변의 것입니까? 도대체 시간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굳이 시계가 필요하다면 하루쯤 지난 다음에 시계바늘이 한 칸 정도 지나가게 하면 안 됩니까? 혹은 아예 시계 없이, 자신의 나이가 얼마인지도 모르고 사는 삶이 더 나을 수 있다는 생각도 해볼 수 있지 않습니까? 아직도 저 중앙아시아 지역의 원시부족 중에는 자신의 나이를 모르는 사람이 많다고 하는데 그게 문제될 일입니까. 그냥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잠을 자고, 또다시 그 일을 반복하다가 때가 오면 우주 속으로 돌아가는 것도 괜찮은 방식 아닙니까?
《근대성의 구조》라는 책의 일본인 저자 이마무라 히토시는 “교회의 종소리가 사라지고 시계가 종소리를 대신하면서 근대가 시작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제 식으로 고쳐 표현해본다면 ‘횃대의 닭울음 소리가 사라지고 시계가 등장하면서 근대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꽃시계를 아십니까? 시계가 없던 시절, 꽃이 피는 것을 보고 시간을 대중했던 것이지요. 서정주의 시 가운데 한 구절에는 “얘들아 박꽃핀다 밥하러 가자”는 말이 있습니다. 초가지붕 위에 박꽃이 하얗게 피기 시작하니 보리쌀을 닦아 저녁 지을 시간이 돌아온 게 아니냐고 동네 처녀들이 저녁 준비를 재촉하는 말이지요.
아날로그 시계 시절을 지나 디지털 시계의 시절이 오면서 초단위 이하까지 알려주는 그 시계 앞에서 우리의 삶도 디지털화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지고 말았습니다. 시간은 인간이 인공으로 만든 아주 편리한 도구이지만, 시간이 인간을 예속화하는 정도는 대단합니다. 우리는 배가 고파서 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되었기 때문에 밥을 먹습니다. 우리는 출근을 하고 싶어서 출근을 하기보다 출근할 시간이 되었기 때문에 출근을 합니다. 어디 이런 예가 한두 가지입니까? 이 시대를 지배하는 무서운 존재가 시계임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수도 없이 많은 예들을 들춰낼 수 있을 것입니다.
시간이 그 시간을 알려주는 시계가 이렇게 견고한 권력적 실체임을 알면서도, 위 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쓴 장경린은 그 견고한 시간의 구조를 낱낱이 해체해버렸습니다. 그는 시간을 느끼면서도 그 시간의 구속력으로부터 가능한 한 멀리 달아나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들의 시간 인식이 실은 얼마나 단절적인 것인가를 알려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1시 다음에 2시가 오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 인식의 잣대에 의한다면 1시 다음에 11시가 올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의 세계 인식은 단절적이고 분절적이며 비약적입니다. 요컨대 우리는 장경린의 위 시에 나오는 시간들을 보면서 기존의 시간틀을 해체 시킨 시인의 과감성과 인간의 시간 인식 속에 스며 있는 분절성과 단절성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간이 있기보다 내가 있고, 내가 인식하는 순간, 그 순간만이 시간표에 동그라미를 그려넣을 수 있는 시간입니다.
시간의 틀을 해체시키고 시간의 인식상을 직시한 장경린은 시의 첫 연 첫 행에서부터 그가 인식하고 행동한 하루의 일과를 우리에게 공개합니다. 그런데 그 공개 방식이 매우 독특합니다. 무질서한 세계까지도 질서화시키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것이 인간이지 않습니다. 그저 우연으로, 단절의 형식으로 존재하는 것들까지도 질서화시켜 그것에 의미를 부여해야만 마음놓고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란 말씀입니다. 그런데 장경린은 거꾸로 잘 짜여졌다고 믿으며 살아가는 우리의 일과표를 뒤흔들어 해체시키며 실제로 너의 하루는, 아니 나의 하루는, 아니 우리의 하루는 이렇게 흘러가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해옵니다.
장경린은 첫 연의 첫 구절을 “않았다”로 시작했습니다. 도대체 뭘 ‘않았다’는 것인지 밑도 끝도 없습니다. 이 말 앞에 우리는 그 무엇도 넣을 수 있지만, 그 어느 것만이 정답이라고 우겨댈 수 없습니다. 그가 23시 45분에 무엇을 ‘않았다’는 것인지 우리는 그저 자리 나름대로 막연히 짐작해볼 수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않았다”라는 미완의 문장으로 시작한 그는 “식빵을 커피에 적셔서 빨아먹는”이라는 또 하나의 미완의 문장을 던지고 이내 입을 다물지만, 그래도 이 미완의 문장에서는 그나마 그가 무엇을 했는지 엿보기가 쉽습니다. 벌레처럼 게으른 동물처럼(실제로 인간이란 아주 게으른 동물이니까). 품위이니 격식이니 하는 그 인위적인 형식을 다 내다버린 존재처럼, 그는 타인의 눈으로 표상되는 사회적 가면을 다 벗은 채로 이 현대사회에서 가장 구하기 쉬운 식빵과 커피를 앞에 놓고 그의 위장을 채우고 있습니다. 가끔씩 우리는 고상한 식탁을 차려놓고 온갖 형식을 다 지켜보려고 애를 쓸 때도 있지만, 형식은 품격을 만들어 대신 얼마나 무겁고 거추장스럽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일상은 매일매일 형식의 잔치로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그저 “식빵을 커피에 적셔서 빨아먹는”, 그 벌레 같은(?) 편안함을 즐길 때가 대부분이지요.
미완의 문장에서 약간의 일상을 훔쳐본 우리는 곧바로 시인이 제시하는 제2연으로 옮아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2연으로 옮아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제2연에서 시인의 눈은 창밖을 향하고 있습니다. “식빵을 커피에 적셔서 빨아먹는” 행위와 아무 관련 없는 비가 많이 내리고 있는 것을 그는 봅니다. 그러면서 감성을 가진 한 인간이 되어“ 아주 많은 비가 아주 큰 밤을 적시고 있다”는 시적 표현을 합니다. “식빵을 커피에 적셔서 빨아먹”던 벌레 같은 한 인간이, 이 제2연에서는 감성을 가진 한 인간으로 우주를 바라바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그뿐 시인은 제2연 역시 미완의 문장인 “비의”로 마치고 맙니다. 그의 의식과 무의식이 비에 대하여 이 정도로 관심을 갖고 아내 다른 방향으로 관심을 튼 것 같습니다.
제3연에 오면 우주를 감성적으로 대하던 인간은 사라지고, 갑자기 “개고기가 먹고 싶다”는, 식욕을 가진 인간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그것도 한국 사람들이 좋아하면서 동시에 꺼려하는 개고기를 먹고 싶다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식욕은 이성의 통제나 계획표와 관계없이 제 욕구를 느꼈을 뿐, 그가 개고리를 먹으러 갔는지 어쨌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개고기에 식욕을 느끼던 시인은 제4연으로 오면서 매우 심각해지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비로소 사색하는 이성적 인간이 된 듯, 그는 존재론적 고민을 합니다 그의 고민 내용은 무척이나 심각합니니다. 그러면서 공감을 자아냅니다. 핵심 부분만을 여기에 한번 다시 옮겨보기로 하겠습니다.
나의 모든 것을 내가 아닌 모든 것에게 되돌려 주고 싶다. 나의 모든 것이란 내가 아닌 모든 것들이 내게
준 그것이다.
자기애가 지나치게 강해서 늘 나르시시즘에 빠져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리고 인생이 희망과 성공으로 가득 차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면, 우리는 한번쯤이라도 장경린이 위 인용문에서 말했듯이 “나의 모든 것을 내가 아닌 모든 것에게 되돌려 주고 싶다”는 느낌에 사로잡혔을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어느 때는 내 인생의 짐이 너무나도 무거워서, 어느 때는 내 존재 자체가 너무나도 증오스러워서, 어느 때는 희망의 그림자를 발견할 수 없는 허무주의자가 되어서, 누군가가 내 인생을 전세라도 내가듯, 월세라도 내가듯, 내 생 자체를 대신 짊어지고 떠맡아주었으면 하는 생각을 해봤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드러낸 장경린의 마음 밑바닥에는 “나의 모든 것이란 내가 아닌 모든 것들이 내게 준 그것이다”라는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어찌 보면 우리의 탄생부터가 그렇지 않습니까? 자신이 이 세상에 나오고 싶어서 자발적으로 탄생 길을 택한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어느 날, 갑자기 이 세상 사람이 되어 있지 않았던가요? 그러니 나의 나라도, 나의 시대도, 나의 부모도, 나라는 존재 자체도, 내가 아닌 모든 것들이 나에게 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인간이 엄청난 자기애와 생명에 한 욕구를 유전인자 속에 갖고 있다는 것, 그것이 인간사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입니다. 장경린은 이런 자의식 속에서 상업화되고 세속화된 종교를 냉소적으로 바라다보며 “네온사인으로 만든 십자처럼 확실하게” 모든 일을 되돌리고 싶다는 생각에 빠져듭니다.
시간이 한참 지난 뒤, 작중 화자이자 시인인 장경린의 의식 속에는 축구하는 최순호의 모습이 들어옵니다. 아마도 장경린은 텔레비전을 켜놓고 있었는가 봅니다. 깊고 심각한 사색을 하는 동안에도 텔레비전은 그것과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이 제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 우리들 집 안의 풍경 아닙니까? 장경린은 이 제5연을 통하여 놀이에서 노동이 돼버린 선수들이 스타로 변신해버린 축구계의 현실을 은밀히 지적하며 노동보다 더 심각해진 축구놀이의 현장을 보여줍니니다.
제6연으로 가면 텔레비전을 통해 축구를 보던 장경린의 눈이 거꾸로 자신의 내면을 향하고 있습니다. 이러면서 매우 의미심장한 깨달음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그것은 바로 ‘확신確信’이라는 괴물(?)에 관한 것입니다. 여기서 ‘확신’이란 말은 진지, 신념, 절대 등과 같을 말로 대치될 수 있을 것입니다. 장경린이 이곳에서 전해주는 말을 한번 다시 들어봅시다.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도록 이끌어줄 것입니다.
확신이 날 찾아왔다. 나는 그를 달래서 돌려보낸다. 다시는 날 찾지 마라 알겠니?
삶의 길에 대해 확신을 가진 사람도 ‘전도傳導’를 하려고 듭니다. 전도란 말 그대로 ‘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도를 알면 생의 구원은 확실해지는 것. 그러나 누가 진정한 도를 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하지만 사람들은 이러저런 확신 속에 그들의 주장을 펴고 마침내는 도를 말하면서 전도사의 길로 나가지 않습니까? 이런 점에서 전도사는 명쾌하나 위험합니다. 그 누구도 삶의 정도正道 혹은 구원의 도를 확실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 비추어볼 때, 위 인용문 속의 시인은 매우 겸허하고, 유연하고, 열려 있는 인간형입니다. 그는 ‘확신’의 위험성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 확신이 신념으로 변하고, 그 신념이 고집으로 변하는 위험성을 아주 잘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딱딱해진 확신을 가능한 한 갖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택한 것이 ‘그를 달래서 돌려보내는 것’입니다. 여기서 시인은 언제나 회의하는 지성 그 자체로 남아 있기를 바랍니다.
제7연으로 가서 봅시다. 제7연을 보면 그것은 참 많은 시간이 흐른 뒤의 일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시간이 흐르자 또 다시 그를 고민에 빠뜨리는 문제가 등장합니다.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아주 무거운 문제입니다. 발단은 아주시원찮은 생리적 행위에서 시작하지만, 그 행위를 통해 이 시인이 사색하는 내용은 무겁기 짝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인이 보여준 그 시시한 행동은 무엇이며 그를 통해 보여준 무거운 사색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우선 그가 보여준 그 시시한 생리적 행동은 제7연의 첫 구절에 나오는 ‘하품을 하는 행위’입니다. 인간이라면 언제, 어디서나, 생물학적인 필요에 의하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새어나오고 마는 하품. 그는 이것을 자각하면서 매우 충격적인 경구를 만들어낼 만큼 깊은 사색의 세계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가 여기서 만들어낸 경구는 바로 “하품도 내게는 아픔이다”라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그럴까요? 저는 여기서 육신을 가졌다는 것은 얼마나 버거운 일입니까? 단 하루만 굶어도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밥 생각에 일손을 놓아야 하는 인간의 육신, 손톱 밑에 가시 하나만 들어가도 하루가 그 아픔으로 얼룩지는 인간의 육신, 병원 가득 들어차 있는 수많은 환자들이 고통스러운 육신, 이러한 육신을 갖고 살아간다는 것은 버거운 인간 조건입니다. 그래서 서정주 시인도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작품 <화사花蛇>의 일절에서 “얼마나 커다란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저리도 징그러운 몸뚱어리냐”고 외쳤겠지요. 인간의 몸뚱어리, 아니 생명을 가짐 모든 것들의 몸뚱어리는, 육신을 가진 존재의 슬픔을 알려주는 동시에 육신을 가진 존재의 운명적 조건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런 점들을 생각하다 보면 장경린의 왜 “하품도 내게는 아픔이다”라고 말했는지 이해가 될 것 입니다. 하품이란 졸음을 쫓아내기 위한 생리적 현상이지만, 그 졸음을 끌어안고, 그 졸음과 싸워가며 살아야 하는 것이 육신을 가진 인간입니다.
장경린은 “하품도 내게는 아픔이다”라는 이 말에 이어 “삶을 너무 과식했나 보다 배탈이 날 것 같다”는 또 다른 하나의 경구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말을 이해하시겠어요. 아지랑이처럼 도대체 그 실체를 알려주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 그러나 내가 짊어지고 살아가야 할 그 삶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그끝을 알아보리라고 다짐하며, 그 괴물 같은 대상 앞에서 어지럼증이 나도록 고민하고 사색한 경험들이 모두 있을 터이니까요. 그렇지만 명쾌한 답은 얻어지지 않고 그 대신 손님처럼 찾아온 것이 미슥거리는 가슴과 현기증나는 머리일 때 우리는 미련한 우리 자신을 얼마나 탓하였던가요. 장경린의 시구처럼 ‘아, 내가 삶을 너무 과식했나보다’라고 자성하며, 혹은 ‘아 내게 삶이란 그렇게 호락화락하게 정답을 가르쳐주지 않는 것인가 보다’라고 좌절하며……. 장경린은 삶에 대해 지나치게 고민한 결과 배탈이 날 것처럼 몸이 불편해졌다고 고백했습니다. 세상과 대충 타협하고 살아간다면 삶을 과식할 일도, 배탈이 날 일도 없겠으나. 자의식을 숙명으로 안고 살아가는 것이 인간일진대, 정도는 달라도 이런 일들을 경험할 수밖에 없지요.
장경린은 이어서 또 다른 경구를 내놓습니다. “해탈도 내게는 배탈이다”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해탈은 불교신자의 이상입니다. 끝도 없는 윤회의 굴레에서 초월하는 것, 그리하여 완벽한 자유와 무의 상태가 되는 것. 그것이 해탈이지요. 하지만 육신을 가진 인간에게는, 욕망을 가진 인간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몇 매나 더 고뇌하면서 살아가는 시인 장경린에게는, 이런 해탈을 꿈꾸는 것 자체가 ‘배탈’로 느껴집니다. 어쩌면 해탈을 꿈꾸는 것 자체가 삶을 지나치게 과식하는 일인지도 모르지요. ‘해탈’이라는 용어조차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 더 편안한 삶인지도 모르니까요. 그러나 장경린뿐만 아니라 시인이란 존재는 사실상 “삶을 너무 과식하는 자들‘이요. 그 과식의 결과로 배탈을 앓는 자들이요. 그 배탈의 결과를 한 편의 시로 만드는 자들인지도 모릅니다.
이제 제8연을 봅시다. 또다시 많은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그 사이에 말할 수 없어 많은 일들이 벌어졌겠지만, 이 시인의 의식 속에 포착된 것은 489시 973분에 일어난 일입니다. 여기서 장경린은 바퀴벌레 한 마리를 본 것으로부터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인간 숫자보다 훨씬 더 많고, 인간의 역사보다 더 길고 긴 역사를 이어왔다는 바퀴벌레, 그 바퀴벌레가 제8연의 중심 대상입니다. 이 제8연의 바퀴벌레를 놓고 장경린이 보여준 흥미로운 사실은 인간중심주의 사상을 내버리고 대신 바퀴벌레의 입장에서 인간을 바라다보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중심이 되어 바퀴벌레를 보면 바퀴벌레는 하나의 해추으올, 죽여야 마땅한 존재입니다. 몰살을 시키도 괜찮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바퀴벌레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이란 참으로이상하게 생긴 “한 폭의 인물화”에 불과합니다. 바퀴벌레도 이상하게 생겼지만, 인간이란 존재 또한 얼마나 이상하게 생긴 존재입니까? 타인의 눈으로 인간을 바라다보면 크로테스크하기까지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저러나 바퀴벌레는 도구를 가진 인간 앞에서 무력해졌고, 더 나아가 인간중심주의 사상으로 무장한 이념적 인간 앞에서 무력해졌습니다. 그 결과 바퀴벌레는 죽여도 아무런 죄의식을 느낄 필요 없는 존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죽임으로써 쾌감까지도 느낄 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시인은 이 사실을 직시하고 “들고 있던 사상으로 내려친다. 바퀴벌레의 흰 내장이 바퀴벌레의 왼쪽 옆구리 밖으로 삐져나온다”라고 말했습니다. 바퀴벌레를 죽인 것은 다름 아닌 인간이 가진 인간중심주의 사상의 힘이었고, 그 결과 바퀴벌레는 참혹한 모습으로 주검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서 너무나도 자주 일어나는 일들을 그는 이렇게 통찰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디 인간이 가진 사상이 일관성을 갖고 움직입니까? 인간들의 사상은 모순 덩어리이거나 오합지졸의 형태이기 쉽습니다. 아침에는 이 사상으로, 저녁에는 저 사상으로, 이 일을 할 때는 이 사상으로, 저 일을 할 때는 저 사상으로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란 말씀입니다. 그러고 보면 장경린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바퀴벌레의 다리처럼 사상을 잘게 끊으며, 끝없는 사상의 단절과 모순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바퀴벌레가 죽었듯이, 장경린은 자기 자신 또한 “시효가 지나 버린 연극 초대권” 같은 존재인지 모른다고 고백합니다. 지독한 지가 검열과 자학의 결과 같지요. 이미 쓸모없는 존재로 자신을 의식하였으니 말이에요, 그러나 장경린뿐만 이니라 우리 모두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이런 느낌에 사로잡힐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육신의 생명욕은 엄청난 것이어서 “시효가 지나 버린 연극 초대권”처럼 무력해졌으면서도 우리는 우리의 삶을 재생시키려고, 아니 영생의 땅으로 이어가려고 얼마나 발버둥칩니까? 그런 욕망과 발버둥 때문에 우리는 자학과 좌절과 자살이라는 어둠의 땅을 넘어서 새로운 아침을 또다시 맞이할 수 있는 것인지 모릅니다.
제9연을 보십시오. 장경린 역시 제가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독한 인간중심주의 사상의 힘 때문에, 모순 속에서도 꿈틀대는 수많은 사상의 저력 때문에 시효가 지나버린 연극 초대권 속에서도 생명을 일궈내려는 무모한 욕망 때문에, 우리는 그게 무엇이 되었든 간에 인간사의 첫 발걸음이라도 떼어놓을 수 있었을 것이고, 그것이 누적되어 역사라는 이름의 화려한 건축물을 지어낼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말입니다. 정말 이런 것들이 아니라면 장경린의 말처럼 “무엇이/시작이나 될 수 있었겠는가?” 그렇다고 해서 장경린이 인간사를 무조건 옹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인간사의 양면성을 함께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로부터 아주 많은 시간이 또 흘러갔습니다. 고상한 사색으로 고민하던 장경린은 제10연에 이르러 한 마리의 벌레처럼 그의 일상이 전개되는 한순간을 사진 찍듯이 보여줍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 인간들의 일상 속에는 벌레와 같은 삶의 모양이 얼마나 많이 들어 있느냐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장경린이 우리에게 보여준 그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마지막 연에 우리의 눈길을 모아보기로 합시다.
999시 9996분: 방바닥에서
999시 9997분: 침으로 담뱃재를 찍어들고
999시 9998분: 조심스레
999시 9999분: 재떨이 앞으로 기어가며 나는
바로 이것입니다. 아마도 시인은 그의 방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담뱃재를 방바닥에 떨어뜨린 모양입니다. 이것은 매우 흔한 일이지요. 담뱃재를 치우는 일은 휴지를 치우는 일보다도 훨씬 귀찮지요. 그만큼 품이 더 들고 신경이 쓰이니까요. 위 시 속의 장경린이 아니더라도 원래 게으름을 사랑하는 인간들은 이때 게으른 벌레처럼 침으로 담뱃재를 찍어들고 재떨이 앞으로, 그렇지 않으면 휴지통 앞으로 기어가게 마련이지요. 이렇게 재떨이 혹은 휴지통 앞으로 기어가는 시인과 우리들이 모습은 방바닥을 기어 다니는 바퀴벌레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그러면서 ‘인간은 벌레이다’라는 명제를 만들어내어도 무방할 것 같은 생각에 이르지요.
시가 좀 길고 파격적인 관계로 꽤 긴 여정을 밟아 여기까지 왔군요. 시간의 파괴도 문제적이려니와, 그 속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하루를 성찰해본 모습도 무척 인상적입니다. 온갖 잡동사니처럼 모여 있는 그 모든 것들이 밑도끝도 없는 우연성의 남발 속에 일어나는 현실, 게으른 벌레처럼 무력하게 기어다니기도 하는 인산상,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의 영역을 침범할 태세로 자아와 세계와 삶에 대해 깊이 고뇌하는 인간상, 그 인간들이 가진 엄청난 이기성과 자기 중심성, 그 이기성가 자기 중심성에 깃들인 모순성과 비극성,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힘으로 계속될 수 있는 인간사 등…… 참으로 많은 것들을 우리는 장경린의 작품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속에서 봅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루만의 일이 아니라 좀더 확대한다면 우리 인생 전체의 축소판이기도 합니다. 단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인간과 그들이 만들어가는 삶의 잡식성적인 성질, 그 모든 것들이 책상 정리하듯 정리되지 못한 채 모순과 우연 속에서 들끓는 현실, 그리하여 매끄러운 자서전을 쓰는 것이 불가능한 현실, 그치기만 했을 뿐 공백으로 지워져버린 수많은 시간들…… 우리는 장경린의 시 <이반 데소니비치의 하루>를 보며 인간과 그들이 만들어가는 삶의 실체를 보다 정직하게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인간과 그들의 삶이란 게 얼마나 엄청난 모순과 우연과 고민과 방치 속에서 이름지을 수 없는 모습을 만들면서 흘러가고 있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나와 내가 만들어가는 삶도, 너와 네가 만들어가는 삶도 다 그러하지 않느냐고, 우리는 장경린의 특별한 듯하나 보편성 깃들인 위의 시 <이반 데소니비치의 하루>를 읽으면서 시인과는 물론 우리 서로가 공감을, 위로를, 악수를 함께 나눌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정효구, 『시 읽는 기쁨』, 작가정신, 2003.
첫댓글 처음엔 야 시를 이렇게도 쓰는구나 했는데 두 번에 걸려 해설을 읽고는 음 그렇구나 했습니다. ^^
이런 시도 있다는 것을
고개 끄덕일 수 있다면
이런 시는 시의 영역을 넓혀가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서정성이 짙은 시만을 시라고 고집하는 사람들에게
시의 넓은 영역을 소개하기에 좋은 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