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선생이 제자 황준량 선생이
설날 올린 시에 답한 시 1 수
이장우(李章佑)
농암 이현보 선생의 손서이기도 하고 퇴계 선생의 가까운 제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금계 황준량은 40세가 되자 다음과 같은 시 2수를 퇴계선생에게 올렸다. 그 중 첫째 시는 다음과 같다.
餞臘迎春欲曉天 섣달 보내고 봄 맞으니
하늘 밝아 오려는데,
山齋獨坐意茫然 산속의 서재에 홀로 앉아 있으니
마음 막막하구나.
行臨蘧瑗知非歲 세월 흘러 공자 때 위나라 거배옥(蘧伯玉)이
잘못 알았다는 40대가 되어가고,
已到鄒軻不動年 이미 이르렀구나, 추나라의 맹자가 말한
마음이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는 나이에.
聖處工夫難下手 그러나 저는 성인이 머물렀던 공부는
손을 대기조차 어렵고,
頭邊光景劇奔川 이미 백발이 된 제 모습은
냇물 매우 빨리 흐르듯 변하네.
何緣免被他歧惑 어떻게 하여야 기로에서 방황하는
의혹 면하게 될 것인가?
正路前頭試着鞭선생님께서 바른길 앞장에 서서
시험 삼아 먼저 채찍을 잡고 인도하여 주소서.
이 시는 퇴계선생 56세 때, 이미 나이 40이 되었지만 아직도 공부에 대하여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자기와 같은 제자를 위하여 “어느 인연으로 다른 길로 빠지려는 유혹 면할 수 있을까? 선생님 같은 분이 바른 길을 앞장서서 채찍을 잡고 인도하여 주소서(何緣免被他歧惑, 正路前頭試着鞭)” 라고 하는 말로 끝나는 시를 받아보고서 그 시의 각운자(위에 밑 줄 표시한 글자)에 맞추어[차운] 다음과 같은 회답한 시를 썼다.
〈次黃仲擧元日韻〉丙辰
〈황준량이 지은 정월 초하루 시의 각운자를 써서 짓다〉
병진년(1556)
拙朴由來得自天 나 서툰 것은 본래
하늘로부터 타고 것이지만,
追尋芳躅每欣然 선현들의 좋은 자취 쫓아서 찾으니
일마다 늘 흔연히 즐거워지네.
聰明此日非前日 그러나 늙어가니
듣는 것과 보는 것은 오늘이
전날보다 못하여지고,
習氣今年似去年 다만 나쁜 습관만은 올해나
지난해나 비슷하게 고쳐지지 않는다네.
透得利關聞上蔡 명예와 이욕의 관문
투철하게 벗어날 수 있었다는 말씀
사상채 선생에게서 들었고,
驗來學力說伊川 배움의 힘으로 고난을
벗어남을 징험하였다고
정이천 선생님은 말씀 하셨다네.
吾儕更勉躬行處 우리 또래 사람들 더욱 더
몸소 실행할 것에 힘써야지,
莫向人前枉執鞭 남들 앞에 나서서 함부로
채찍 잡고 말로만 떠들려 하지 말게나.
그런데 황금계 문집에서는 도리어 이퇴계가 먼저 보낸 시를 보고서 금계가 차운한 것으로 보고 제목을 “퇴계가 정월 초하루에 부쳐준 시에 차운하다(次退溪元日見奇之作)”로 바꾸어 놓았다.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마지막에 나오는 두 구절의 어투로 보아서 틀림없이 황금계 선생이 먼저 올린 시를 보고서 이퇴계 선생이 화답한 것으로 보아야한다. 그렇게 보는 것이 사제 간의 도리에도 부합된다.
필자가 앞서 《율곡집》에서 퇴계 선생과 주고받은 시 몇 수를 검토하여 본 일이 있었는데, 그 책에서도 오히려 퇴계 선생이 먼저 시를 보내니까 율곡 선생이 그런 시를 보고서 응답하는 시가 많은 것 같이 제목을 바꾸어 놓은 것을 본 일이 있다. 아마 그렇게 제목을 사실과 반대로 바꾸어 놓아야 율곡 선생의 위치가 올라가는 것 같이 보이게 하려는 것 같이 보여서, 사실과도 부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참 보기에 안타깝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아마 《금계집》 편집자도 비슷한 심리에서 이렇게 제목을 사실에 맞지 않게 바꾸어 놓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부주의로 이렇게 바꾸어 놓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위에 나오는 금계 선생의 시에 나오는 “거원”은 자를 배옥(伯玉, 이 경우에는 伯자를 배, 또는 패로 읽는 듯함)이라고 하는데, 《논어》에도 나타나는 현인이다. 그는 50세가 되자 49세까지의 잘못을 뉘우치고 고치려는 훌륭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퇴계 선생의 시에 나오는 사상채는 이름은 양좌(良佐)인데, 북송의 도학자인 이천 정호(程顥) 선생의 제자로, 이천 선생은 역경에 처하여서도 오히려 풍채가 평상시 보다가도 나아졌다고 하며, 그러한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서 사씨도 속세의 명리를 아주 투철하게 초월할 수 있었다고 전한다.
이렇게 되는 것은 모두 몸소 실천궁행을 하여보아야 확실히 터득이 되는 것이지, 누가 말로 이러니 저러니 떠든다고 되는 게 아니라고 하는 것이 이 시 뒷부분의 취지이다.
50세가 넘어서자 학문도 이미 완숙한 경지에 접어들고, 명망도 나날이 높아가고 있었지만 아직도 잘못된 구습을 고치지 못하였다고 근심하고, 남에게 무엇을 가르치기 보다는 우선 자신이 실천궁행함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하신 말씀은, 물론 제자의 가르침에 대한 요청에 대한 겸허한 대답이기도 하지만, 정말 좋은 말씀으로 보인다.(20. 1. 7)
첫댓글 감사합니다.
선생님!
새해에도 건강하시길 빌겠습니다.
다시 한 번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