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년 9월 14일 목요일 [(홍) 성 십자가 현양 축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를 속죄하시려고 지신 십자가를 묵상하고 경배하는 날이다. 이 축일의 기원은 정확히 알 길이 없다. 전승에 따르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 성녀의 노력으로 찾게 되었다. 황제는 이를 기념하고자 335년 무렵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님의 무덤 곁에 성전을 지어 봉헌하였다. 그 뒤로 십자가 경배는 널리 전파되었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9월 14일로 이 축일이 고정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과 모세에게 불평하자 주님께서 불 뱀들을 보내시어 많은 백성이 물려 죽는데, 모세가 기도하여 기둥 위에 단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나게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고 하신다(복음).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 ▥ 민수기의 말씀입니다. 21,4ㄴ-9<또는 필리 2,6-11> 4 길을 가는 동안에 백성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5 그래서 백성은 하느님과 모세에게 불평하였다. “당신들은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올라오게 하여, 이 광야에서 죽게 하시오? 양식도 없고 물도 없소. 이 보잘것없는 양식은 이제 진저리가 나오.” 6 그러자 주님께서 백성에게 불 뱀들을 보내셨다. 그것들이 백성을 물어, 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죽었다. 7 백성이 모세에게 와서 간청하였다. “우리가 주님과 당신께 불평하여 죄를 지었습니다. 이 뱀을 우리에게서 치워 주시도록 주님께 기도해 주십시오.” 그래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8 그러자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불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 9 그리하여 모세는 구리 뱀을 만들어 그것을 기둥 위에 달아 놓았다.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13-17 그때에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셨다. 13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15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17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느님 사랑의 역설적인 표징이지만, 우리에게는 가끔 불평 가득한 삶의 무게로 느껴지기도 하고, 지혜롭지 못해 짊어진 어리석음이거나, 전능하신 하느님께 어울리지 않는 걸림돌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분명히 십자가는 우리 구원의 표징이지만, 현실에서는 짊어지고 싶지 않은 짐인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 민족에게 ‘십자가’에 담긴 종교적 의미를 가장 깊이 느끼게 해 주는 표현은 ‘한 맺힘’과 ‘한풀이’일 것입니다. 누구나 가슴에 맺힌 ‘한’이 있어서 억울한 심정을 표현하지 못할 때 ‘한’이 맺힌다고 합니다. 맺힌 한은 어떤 형태로든 풀어야 하는데, 한풀이는 보통 한이 맺힌 이유를 찾아내어 현실 속에서 화해하는 과정을 필요로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불평하면서 종살이의 편안함을 그리워하느라 하느님께서 주신 해방과 구원의 기쁨을 누리지 못했기에 벌을 받지만, 그들이 죄를 뉘우침으로써 치유되는 한풀이를 체험합니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죄 때문에 상처받은 당신의 마음에 대해 인간에게 앙심이나 보복의 한 맺힘이 아니라,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시는 역설적인 사랑을 통해 진정한 한풀이가 무엇인지 보여 주십니다. 십자가는 장식품이 아닙니다. 우리가 흔히 보는 십자가는 나의 삶의 모순과 불평의 한을 예수님께 떠넘겨 드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먼저 용서하고 화해하며, 인내하고 기도하는 수행의 삶을 통해 하느님의 지혜를 깨닫고 참된 한풀이로 초대하는 표징임을 기억합시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
십자가는 나의 교과서입니다! 이제는 많이 연로해지신 선교사 신부님, 스페인 출신이라서 그런지 정통 가톨릭 신앙에 대한 신념이 얼마나 강렬하던지 마치 투사 돈키호테 같으셨습니다. 혈기왕성하던 시절, 혹시라도 누군가가 지하철역 에스켈레이터 끝에서, ‘예수천국불신지옥’이라는 피켓을 들고 있는 것을 발견하면, 벼락같이 화를 내시면서 뛰어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는 사정없이 피켓을 뺏들고는, 사람들에게 큰 목소리로 외치셨습니다. “여러분들, 두려워하지 마시고, 우리 천주교회로 나오십시오! 우리 하느님은 자비하십니다!” 신부님은 당시 피켓맨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ㅋㅋ 젊은 형제들의 정기적인 고백성사를 위해 승용차로 모시고 갈때면, 창밖을 바라보며 늘 같은 말씀을 반복하셨습니다. “보십시오! 여기도 십자가, 저기도 십자가, 십자가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 많은 교회 십자가 아래 예수 그리스도는 찾아볼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십자가 없는 교회에서 십자가 없는 영광, 십자가 없는 구원을 꿈꾸지만, 사실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천국이 없습니다. 십자가를 건너가지 않고는 영원한 안식도 없습니다. 십자가를 부정할 때 하느님 나라도 없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나 사회의 큰 문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십자가나 고통, 희생이나 헌신이 없는 달콤한 인생, 편안한 신앙만을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한 걸음 한 걸음씩의 성장과 인내와, 일상적이고 지속적인 노력, 결국 십자가와 고통은 외면합니다. 돈보스코가 시작한 오라토리오 초창기 시절의 일입니다. 돈보스코와 동고동락하기 위해 찾아드는 아이들의 수효는 점점 늘어나고, 숙소며, 먹거리며, 입을거리 마련이며, 할일은 태산같았습니다. 할수없이 그는 연로한 어머니 맘마 마르가리타에게 도움의 손길를 건넵니다. 어머니 입장에서는 참으로 당혹스러웠습니다. 평생에 걸친 고생을 끝내고 이제는 손자손녀들 품에 안고 편한 여생을 계획했었는데, 갑작스런 아들 신부의 초대에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초대로 여기고 하루 온종일 아이들을 위해 열심히 일했습니다. 삼시새끼 식사며, 청소, 이불빨래, 옷빨래로 하루 해가 짧았습니다. 하루는 너무나 지친 맘마 마르가리타가 아들 돈보스코를 떠나기 위해 사무실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견딜 수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돈보스코는 아무 말없이 손을 들어 벽에 붙어있던 십가가를 가리켰습니다. 십자가를 한참동안 바라보던 어머니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사무실을 나갔습니다. 그리고는 돌아가시는 마지막 순간까지 아들이 펼치는 위대한 사목의 가장 큰 협조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 죄인들에게 가장 기쁜 소식이며 구원의 열쇠라는 진리를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십자가에 감사하고, 기꺼이 지고가려는 사람은 드믑니다. 때로 피하고 싶어도, 때로 지긋지긋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또 다시 십자가를 선택하고, 십자가 안에 담긴 구원의 신비를 묵상해야만 합니다. 다시 한번 십자가를 우리 삶의 이정표요 지침으로 설정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 사람만의 십자가를 주십니다. 나는 내가 지고가는 이 십자가가 너무 작은 것 같아 늘 부끄럽습니다.”(복자 샤를르 드 푸코) “십자가는 나의 교과서입니다. 나는 거기에서 겸손과 양순함을 배웁니다. 또한 언제라도 십자가를 쳐다보면 즉시 내가 취할 길을 발견하고 가야 할 길에 용기를 줍니다.”(성 콘라도) “십자가는 하느님이 당신의 사랑스런 자녀들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십자가는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이며, 십자가는 천국 문을 여는 열쇠이기도 합니다.”(성 요한 비안네)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희생이 일치를 이룬다
저희 집은 오산 비행장 바로 옆이었기 때문에 항상 비행기의 굉음을 들으며 자라야했습니다. 다른 부모님들은 자녀들을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고 말하곤 하지만 저희 어머니는 저를 비행장 철책에 걸려있는 것을 가져왔다고 하셨습니다.
어렸을 때 물론 이런 말이 농담인 것을 알면서도 가끔 심하게 야단을 맞으면, ‘정말로 나는 주워온 아이인가?’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습니다.
아버지 또한 제 이름을 ‘삼용’이라고 귀하지 않은 이름으로 지어주신 것을 비롯하여 많은 아버지들이 그렇듯이 표현을 잘 안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정말로 우리를 사랑하시기는 하는 건가?’라는 생각이 가끔씩 들 때도 있었습니다.
이럴 때마다 저는 아버지, 어머니께서 저희를 위해 고생하신 것을 기억해 냈습니다.
어머니가 하루 종일 남의 밭에 나가 품을 팔 때, 우유와 빵을 간식으로 받으면 그것을 드시지 않으시고 잘 두셨다가 일 끝나고 돌아오셔서는 가게 하나 없어 군것질을 하지 못하던 우리들에게 주셨습니다. 저는 그 때 먹었던 우유와 단팥빵 맛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또 어머니는 생선 머리만 맛있다고 드셨습니다. 물론 생선의 머리가 가장 맛있기는 하지만 풍족하지 못한 양 때문에 몸통은 우리를 주시고 머리만 드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떤 때는 삼겹살을 구워주셨는데 어머니는 배가 부르다며 우리가 드셔보라고 드리기 전까지는 입에도 대지 않으셨습니다. 어떤 때는 어머니의 그 맘도 모르고 우리가 다 먹어 버린 적도 있었습니다.
아버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시골에 살 땐 저희 집이 비만 오면 잠기는 그런 동네에 있었는데 일을 마치고 돌아오시던 아버지는 가족을 생각하며 사람들이 말리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생명을 무릅쓰고 불어난 냇가를 헤엄쳐 집에 돌아오셨습니다.
아버지는 지금도 다리를 저시는데 그 이유는 우리를 위해 겨울에도 일을 하시다가 사다리에서 떨어지셔서 허리를 다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몸으로도 우리를 위해 계속 일을 하셨습니다.
아무리 부모님께서 우리에게 싫은 소리를 하신다고 하더라도 이런 기억이 있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습니다.
누구도 태어날 때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부모님이 우리를 위해 해 주신 사랑의 희생들을 바라보며 부모님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희생은 사람을 갈라지지 않게 연결시켜주는 접착제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오늘 저를 찾아오신 한 형제님께서 미사시간에 특별한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외우는 ‘하느님의 어린양’에 대해 설명해 달라고 청하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세례를 받기 위해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저기 하느님의 어린양이 오신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때 구약을 이해한다면 즉각적으로 ‘아! 우리 죄를 위해 피를 흘리고 돌아가셔야 할 희생제물이 오시는구나!’라고 이해해야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어린양은 구체적으로 탈출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그것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발랐기 때문에 죽음을 면할 수 있게 했던 희생양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전에서는 아침저녁으로 어린 양을 희생 제물로 바쳐졌습니다.
요한 계시록에서 하늘나라에 있는 사람들은 바로 하느님의 어린양의 피로 자신의 옷을 깨끗이 빨아 빛나는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베드로 1서 1장 19절엔 이스라엘 백성이 죄로부터 해방 된 것은 “어린양의 피” 덕분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미사 때,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저희를 위하여 빌으소서.”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어린양의 가장 명확한 의미는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흠도 티도 없는 “속죄 제물”을 의미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은 세상 창조 이전에 이미 인류의 죄를 위하여 희생되기로 준비되어 계셨지만(1베드 1,20), 그 완성은 당신이 깨끗하게 만드신 인류와 혼인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아담이 옆구리에서 피를 흘려 하와가 탄생하였고 둘이 한 몸이 되었듯이,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나와 교회가 탄생하였고 그 교회와 한 몸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성경의 시작이 이 아담과 하와로 시작되지만 성경의 끝은 두 번째 아담과 하와인, 죽임을 당하신 하느님의 어린양과 교회, 즉 천상 예루살렘과의 혼인잔치로 끝맺게 됩니다. 이것이 세상 창조 때부터 계획된 커다란 창조와 구원의 계획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셔야 함을 예고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이 영원한 생명이란 바로 우리가 나온 원천인 그리스도와 혼인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느님만이 영원하시기에 사람이 되신 하느님과 한 몸이 되지 않고서는 누구도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과연 피를 흘리는 희생적 사랑은 갈라졌던 관계를 하나로 이어주는 힘이 있습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를 당신과 하나로 연결시켜 주시되 하느님만이 지닌 영원한 생명까지도 누리게 해 줍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부모님이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것을 믿어야 하듯이, 십자가도 나를 위한 그리스도의 희생임을 믿어야합니다.
많은 교회 간판에, “하느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고 씌어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글로 표현하지 않고 십자가로 보여줍니다. 우리를 위해 고생을 하신 부모님을 존경하고 사랑해야 한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고 우리는 무엇을 느껴야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