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주 시인의 시집 『마른 우물에 부는 화을바람』(푸른사상 시선 226).
그의 시적 여정은 몸의 체험에 대한 사유로부터 시작하여 가족, 특히 어머니와의 관계를 거쳐 사회와 문명에 대한 기억을 더듬으며 다시 자신의 내면으로 돌아온다. 태양이 저무는 서쪽에서 불어온 화을바람 같은 시들의 호흡과 이미지가 역설적으로 삶의 활기를 불러일으킨다.
2026년 5월 18일 간행.
■ 시인 소개
1963년 서울에서 태어나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문학과 미술을 정규로 배울 수 없는 환경 속에서도 글과 그림을 놓지 않았다. 60세가 되던 2024년, 매사추세츠대학교 앰허스트(University of Massachusetts Amherst)에서 비주얼 아트를 전공하며 예술 세계를 확장했다. 2000년 『시인정신』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해 2007년 미주 중앙신인문학상 평론 부문을 수상했다. 2015년 소설 「박하사탕」을 발표하면서 소설 창작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떨어져 나간 것들이 나를 살핀다』 『엄마의 연애』 『소란이 환하다』, 산문집으로 『기억이 풍기는 봄밤』이 있다. 비영리 단체를 설립해 한국도서관, 한국학교, 한국문학 번역 사업을 진행했다. 현재는 시인과 화가로 활동하고 있다.
■ 시인의 말 중에서
추의 진자 운동
왼쪽으로 밀리는 힘을 이용해
오른쪽의 넓은 풍경을 향하여 몸을 밀어 올렸다.
머리카락을 태우고 있는 열을 식히며
숨소리의 세공이 끝나면
서늘한 바람 한 줄기가 텅 빈 몸 안에
비 냄새를 뿌린다.
■ 시인 노트 중에서
추의 진자 운동처럼 한쪽 끝까지 밀려났다가 되돌아오는 힘, 그 반복 속에서 감각을 정제시키고 언어를 세공한다. 이 과정은 단순한 표현 방법의 기술을 익히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존재를 재구성하는 행위에 가깝다. 가장 작은 감각에서 출발한 사유는 점차 외연을 넓혀 별과 빛, 그리고 근원에 관한 질문으로 나아가며 우주적 상상력으로 확장할 수 있는 문장을 곳곳에 접목했다. 시집의 제목인 ‘마른 우물에 부는 화을바람’은 이러한 흐름을 상징적으로 압축한다. 마른 우물은 고갈된 기억과 감정, 혹은 비어 있는 내면을 의미하는 동시에, 그 안에 여전히 남아 있는 흔적의 공간이기도 하다. 몸에 남은 감각, 관계가 지나간 자리, 기억이 되살아나는 순간, 그리고 언어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까지 멈추지 않는 흐름을 기록한 것이다. 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끝과 소멸의 방향에서 불어오는 움직임이며, 사라진 것들이 다시 돌아오는 경로를 암시한다.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이 바람은 비어 있는 곳에서도 계속해서 무언가를 흔들고 움직이게 하여 허무한 들판 위에서 생을 활기차게 끌고 갈 수 있는 에너지를 공급한다.
■ 추천의 글
유희주 시인은 서울 삼양동에서 미국 매사추세츠까지 돌며 살아내는 동안 만난 사람들에게 들판의 마음으로 손을 내민다.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은 사람, 견디지 못하고 떠난 사람,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 이혼하거나 사별하거나 형제와 의가 끊기거나 사기당한 사람을 외면하지 않는다. 기다리는 가족이 없는 사람, 사회의 끝자락을 붙잡고 연명하는 사람, 등이 텅 빈 사람, 길에 붙잡혀 빠져나오지 못하는 사람을 어머니처럼 끌어안는다. 사람들에게 맞는 토양을 찾기가 어렵고, 인연이 닿았던 사람도 낡아 떨어져 나가고, 귀퉁이가 조금 모자라 관계가 깨지기도 하지만, 영원히 넓은 하늘과 인류의 긴 역사를 견지하는 마음을 멀리하지 않는다. 속내가 읽히는 사람을 만나는 경우를 행운으로 삼으며 “초록을 잡고 고립을 통과”(「초록을 잡고」)하려고 보라색 비밀을 나눈다. “힘껏 살아낸 사람들이 죽으면” 하늘에서 “봄빛을 타고 다시 옛집으로 돌아올”(「어여쁘신 손님」) 것을 믿고, “손에 들린 붉은 금붕어를 잘 키”(「완성으로 가는 그림」)우겠다고 다짐한다. 순하고 부드러운 얼굴을 띠면서 “꾸덕꾸덕 굳은살을 심장까지 채”(「마른 우물에 부는 화을바람」)우는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린다.
― 맹문재(문학평론가·안양대 교수)
■ 시집 속으로
마른 우물에 부는 화을바람
유희주
눈물 구덩이에 먼지가 날립니다
나의 애인은 찢어진 비닐봉지처럼 날아다니다
늑골 어디쯤 걸려 낡아가고 있습니다
하얀 뼛조각에 새겨진 어린 속살의 목소리
절박하고 애절하게 경계를 넘어 도망치던
푸른 머리카락들의 기억과
싱싱한 지느러미를 흔들며 물길을 따라 흐르던 청량함
남은 기억의 힘으로 현재의 소멸을 견디는 중입니다
바위 뒤에 숨어 지극한 표정으로 피어나는 꽃을 발견하면
바람에 펄렁이는 얼굴 따위는 잊어버립시다
살아간다는 건 꾸덕꾸덕 굳은살을 심장까지 채워야 하는 일
깊은숨을 몰아 짖어대는 개처럼 한번 컹 짖어버리고
금계화를 경건하게 내려다봅니다
남은 생은 귀를 베는 문장을 찾습니다
간혹 화을바람이 불 때
별을 향해 전화를 걸면 긴 치마를 입고 있던 내가
뱃속에서 맑은 종소리를 울리며 걸어 나올 수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