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구나무 심기
김종인
삽질 한번 제대로 해본 적 없는
아이들이 모여 살구나무를 심는다.
살구나무 묘목이 학교 울타리 주위로
나란히 열을 지어 제대로 선 모습을 보면서
어서 자라, 하늘을 떠받치고 서서 봄이 오면
벚꽃보다도 먼저 화사하게 연분홍 꽃이
봉실봉실 피워 올리는 풍경을 상상만 해도 신이 난다.
부디, 아름다운 꽃을 피우거라, 기도하며
또, 한 구덩이 살구나무를 심는다.
교문통 올라오는 언덕바지, 산비알,
칡덩굴 기어 올라가는 절개지 밑에서
운동장 주위 비탈, 한 바퀴 돌고
건너편 도서실 뒤를 돌아 수돗가로 나올 때는
어디 한 그루라도 더 심을 빈터가 없는가 두리번거린다
시나브로 해가 가고 봄이 오면, 살구꽃은 피리라
비와 바람과 서리와 눈을 맞으며 무사히 삼 년만 자라거라
어느 날 봄, 벚꽃이 세상의 눈들을 현혹하기 전
산수유 노란 꽃이 피었는지도 모르고,
진달래, 개나리에 벌써 봄이 왔는가 하며
놀라는 사람들의 머리 위에서 아무도 모르게
연분홍 꽃무리가 사람들의 뒤통수를 탁 치면,
그때서야 아, 정말 봄이로구나 하는 경탄을 위해
한 그루 살구나무를 심는다.
생명은 끈질기고 자연은 경이로운
가뭄도 날이 가면 비를 내리고
장마도 지루하면 이내 물러가는 것 아니리
어느 날, 한 그루 가득 소담스런 연분홍 살구꽃
울타리 가득 둘러서서 화사하게 웃고 있는 것을 바라보는 경이처럼
다들 우리들의 하늘을 탄성과 놀라움으로 쳐다볼지니
세월이 흘러 우리가 다들 아름드리 살구나무가 되어 있을 그 먼 훗날,
봄이면 학교가 온통 살구꽃으로 뒤덮이는 상상으로
한 구덩이, 한 구덩이, 살구나무를 심는다.
그리운 오상고절(傲霜孤節)
천지에 아름다운 단풍이 드는 시월 어느 날
시베리아 한랭전선으로 전국에는 한파주위보
강원도 어디에는 대설주위보가 내리더니
미처 단풍도 들기 전에 고춧잎은 삶아놓은 듯
알이 덜 찬 배추, 채 굵지 않은 청무, 익지 않은 감,
싱싱하게 소리치던 대파도 얼고
참나무, 오리나무, 아카시아, 은행잎
파랗게 얼었다가 차마 떨어지지 못하고 붙어
바람 앞에 소리 지르네. 강에서, 저수지에서, 대지에서
안개가 피어올라 천지를 덮어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개 바닷속에서 차는 차대로 엉금엉금 기고
배는 항로를 잃고, 하늘의 비행기도 뜨기를 중단하고
사람들은 일제히 집안에 틀어박히네
삼라만상이 고개 숙이고 스스로 침잠하고
천지에 소리는 사라지네. 스스로
입을 틀어막고 뻗쳐오르던 두 손 주머니에 넣고
고개를 한껏 움츠리니 세상 참 조용하네
집구석에 처박혀 연속극이나 보는지 세상 참 조용하네
시퍼렇게 살아서 소리치는 것들 푸르른 것들
된서리, 기습 추위 한방에 모두 사라지네
스스로 죽어라 하고 동굴을 파고 안방 문을 닫아걸고
이불 속에서 무슨 짓을 하는지 광장엔 그림자도 보이지 않네
이참에 모두 파헤치겠네 집집마다 숨죽인 것들 비웃으며
이참에 모두 문을 잠가라 봉쇄하고, 압수하고, 재갈을 물리고
올겨울 참 한파주위보 자주 내리겠네. 올겨울 참 조용하겠네.
오, 그리운 오상고절!
구절초, 쑥부쟁이, 감국이 기를 쓰고 피는
이 황량한 들녘.
─『시에』 2012년 봄호
김종인
경북 금릉 출생. 1983년 겨울 『세계의문학』으로 등단. 시집 『흉어기의 꿈』, 『나무들의 사랑』, 『내 마음의 수평선』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