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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전례’] 전례 생활을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시편 95,7.8)
이 시편 구절에서 ‘오늘’은 시편 저자의 시대뿐 아니라 어느 시대에나 적용되는 시간 개념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어느 시간에만 계신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시편 구절은 3년에 가까운 코로나 팬데믹 시대를 지내면서 주일미사 참석률이 8.8%(2021년)까지 떨어진 한국천주교회의 현실에서 더욱 절실히 요구되는 신앙인의 태도가 아닐까 합니다.
이러한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주일미사 참석률 저하와 함께 생각해야 하는 것은 전례에 참여하면서 해야 하는 ‘하느님을 만나는 체험’입니다. 말씀전례와 성찬전례라는 두 식탁을 통해 신앙인을 양육하는 하느님을 만나는 체험이 없다면 지속적이고 활기찬 신앙생활을 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과의 만남을 체험하기에 가장 좋은 전례에 잘 참여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이고 어떻게 하면 전례 생활을 잘 할 수 있을까를 사회적 현상과 정신과학의 차원에서 이야기하려 합니다.
왜 전례에 잘 참여하지 못할까?
현대인의 병 중의 하나가 만성피로라고 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약 10%의 인구가 만성피로를 호소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만성피로증후군은 1% 정도라는 보고가 있고, 우리나라 성인의 약 40%가 만성적인 피로를 호소한다는 조사도 있습니다.
정신의학계의 권위자 이시형 박사는 ‘쉬어도 피곤한 사람들’(비타북스, 2018)에서 “도시의 정신노동자들의 피로는 육체 피로가 아니라 정신의 피로다!”라고 합니다. 뇌 피로의 요소를 ‘나이에 따른 위기감’, ‘직업 스트레스’, ‘급격한 사회 변화’, ‘국제화 스트레스’를 꼽습니다. 거기에 뇌를 피로하게 만드는 잡념으로 ‘과거의 일에 대한 집착’, ‘미래의 일에 대한 걱정’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뇌 피로를 줄이는 휴식법으로 Mindful Meditation(마음챙김 명상)을 추천합니다. 곧 지금 현재에 집중하는 명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전례생활에 적용하면 좋은 결과가 생길 겁니다. 과거에 매이지 않고 미래에 대해 미리 걱정하지 않고 현재 자신이 만나는 사람과 시간에 집중하는 것이야말로 뇌 피로를 해소하면서, 전례에서 하느님을 만나기 쉽게 해줍니다. 모든 것을 알고 받아주시며 우리 모두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과의 만남은 참된 휴식입니다. 그래서 시편 저자는 이렇게 찬미했지요.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를 돋우어 주시고 바른길로 나를 끌어 주시니 당신의 이름 때문이어라”(시편 23,1)
재미없는 전례?!
나이 드신 분들은 ‘전국노래자랑’을 보면서 춤추고 노래를 하는 반면에, 젊은이들은 ‘BTS’, ‘블랙핑크’와 같은,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그룹에 환호하며 노래를 따라 합니다. 곧 당시의 사람들에게 흥미를 주고 화려한 퍼포먼스가 동반했을 때 사람들은 신이 나고 자신도 모르게 감동과 흥분을 합니다.
이에 반해 전례는 이런 퍼포먼스가 부족하고, 고리타분합니다. 일부 사목자들은 성가대와 조명과 강론 등으로 신자들의 열정을 불러일으키려고 노력합니다. 전례는 사회에서 보여 주는 퍼포먼스를 따라갈 수 없고, 또한 따라갈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전례가 비록 시대와 민족의 문화를 어느 정도 반영하지만 변치 않는 요소로서 예수님으로부터 기인한 요소들은 시대와 지역을 넘어서 중심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파견되었던 열두 제자들이 돌아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에 대한 보고를 들으신 후에 평가를 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 6,31)
전례는 열정적인 자신의 신앙을 보여 주는 곳이라기보다 우리 아버지 하느님의 품에서 쉬면서 말씀과 성체로 에너지를 충전하는 곳입니다.
어떻게 하면 전례에 집중해서 참석할 수 있을까?
어떤 운동이나 취미생활도 처음부터 잘할 수는 없습니다. 배우고 익히고 습관이 들어야 합니다. 계속해서 참여하고 전문가로부터 배우면서 서서히 마음과 몸으로 익히다 보면 흥미와 재미가 생깁니다. 전례에 집중하며 참석하는 좋은 습관을 익히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단계를 연습하면 좋겠습니다.
첫째, ‘집중하기’입니다. 주님의 기도에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했듯이, 어제도 내일도 아닌 오늘 주시는 하느님의 양식에 의식하며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미사 시간에 스마트폰을 끄거나 진동으로 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잡념을 흘려보내십시오. 사람은 물 한 모금 마실 때 일곱 번 생각이 바뀐다고 합니다. 그 정도로 이런저런 생각으로 집중하기 힘들게 하는 것이 잡념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과 예식에 집중하고 그 밖의 생각이나 걱정은 잡념이라 여기고 그냥 흘려보내십시오. 자녀들이 부모님의 잔소리를 흘려보내듯이.
둘째, ‘내적인 것을 외적으로 표현하기’입니다. 내면의 것은 말이나 행동이나 표정 등을 통해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교회에서 배운 전례적인 말이나 행동 양식을 통해서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성호를 긋고, 손을 모으고, 절을 하며 성가를 부르는 외적인 행위는 자신의 내적인 신앙을 드러내는 좋은 형태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로마인들에게 말씀하셨지요.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로마 10,10)
셋째, ‘공동체와 함께 하기’입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말이 있듯이 혼자 하는 것보다 함께 하는 것이 쉬운 법입니다. 물론 마음이 서로 통할 때 그렇지요. 사회적인 존재인 사람은 공동체와 함께 있을 때 자신도 모르게 자존감이 커집니다. 예수님은 공동체적 신앙의 중요성과 효과를 이렇게 확인해줍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19-20)
마더 데레사의 삶에 대한 명언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생각을 조심하세요, 언젠가 말이 되니까. 말을 조심하세요, 언젠가 행동이 되니까. 행동을 조심하세요, 언젠가 습관이 되니까. 습관을 조심하세요, 언젠가 성격이 되니까. 성격을 조심하세요, 언젠가 운명이 되니까.”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어떤 의미일까?
구세주의 어머니 되도록 특별히 보호 받은 마리아
12월 8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은 마리아의 생애에서 가장 먼저 기념하는 대축일이다. 하지만 19세기에 들어와서야 교의로 선포됐다. 그만큼 치열한 신학적 논쟁이 있었다.
5세기까지 동방교부들은 마리아가 불완전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다. 오리게네스는 마리아가 신앙인의 모범이 되지만 처음부터 그 성덕이나 믿음이 완벽했던 것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바실리오와 요한 크리소스토모, 치릴로 또한 마리아가 신앙의 회의와 어둠을 겪었다고 인정했다. 그러면서도 구원 경륜에 있어서 마리아의 역할에 대해 찬양했다.
서방교부들의 생각은 달랐다. 암브로시오는 처음부터 마리아를 완벽한 여인이었다고 했다. 나아가 마리아의 완벽한 성덕을 바탕으로 무죄하다고 강조했다. 아우구스티노 역시 마리아의 순종과 그 신앙을 중요하게 여겼다. 하지만 마리아가 죄 없이 잉태됐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중세에서도 이 논쟁은 이어졌다. 안셀모, 토마스 아퀴나스, 보나벤투라 등 여러 신학자들은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 교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들은 마리아가 원죄 속에 잉태됐지만, 모태에서 원죄로부터 정화됐다고 믿었다.
안셀모의 제자이자 영성 저술가 에드머는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에 대한 믿음을 주장했다. 이에 당시 많은 신학자들은 우려를 나타냈지만, 일반 신자들의 호응도는 커져 갔다.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 교의에 큰 영향을 준 신학자는 프란치스코회 중세 신학자 둔스 스코투스다. 그는 ‘선행 구속’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그리스도의 구원 중개 능력이 단지 원죄의 정화만이 아니라 마리아를 원죄에서 보호하는 데에도 효력을 미친다고 주장했다.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를 통해 그리스도의 구원 중개가 완전해진다는 것이다.
이후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마리아 신심과 공경은 많은 비판을 받고 위축됐다. 하지만 이어진 낭만주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마리아 신심은 더욱 강화됐고, 19세기까지 이어진 성모 발현으로 마리아 신심은 촉진됐다. 이런 분위기에서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와 ‘성모 승천’에 대해 신학적으로 더 깊이 논의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17~18세기 13명의 교황들은 성모 축일을 장려하면서도 원죄 없는 잉태를 교의로 선포하지는 않았다. 1840년에는 10명의 프랑스 대주교들이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에게 공동 서한을 보내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를 교의로 선포할 것을 요청했다. 도미니코회 회원들도 이를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비오 9세 교황은 이전 교황들과 달리 교의 선포를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했다. 비로소 1854년 칙서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을 통해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를 교의로 선포했다. 둔스 스코투스의 ‘선행 구속’이라는 신학적 개념을 바탕으로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 교의가 모든 인간의 구원 필요성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룩된 구원의 보편성이 합치될 수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곧 하느님은 마리아를 죄로 향하는 근본적인 경향으로부터 특별히 보호하심으로써 구세주의 어머니가 될 수 있도록 이끌어주셨다는 사실이 교의로 선포된 것이다. 그로부터 4년 뒤 1858년, 프랑스 루르드에서 성모 마리아가 발현해 자신을 ‘원죄 없으신 마리아’로 밝히면서 확증됐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는 한국교회와도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는 한국 신자들의 성모 신심을 칭송하면서 1838년 교황청에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를 조선교회 수호성인으로 정해 줄 것을 요청했다. 3년 뒤인 1841년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은 조선대목구 수호성인으로 성 요셉과 함께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를 선포했다.
1898년에는 서울 주교좌명동대성당이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를 수호성인으로 정했다. 1954년에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 교리 선포 100주년을 맞아 한국교회를 성모님께 다시 봉헌했다.
대희년이었던 2000년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을 맞아 한국교회는 다시 한번 성모님께 한국교회를 봉헌했다.
한편 각 교회는 한 분의 수호성인만 모신다는 교황청 경신성사부의 권고에 따라 2015년부터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만을 한국교회 수호성인으로 모시게 됐다.
[가톨릭 신자로서 알아야 하는 미사] 28. 미사 해설 - 말씀 전례 (4) 말씀 전례 중 독서
모든 신자들은 “본기도”가 끝나면 자리에 앉고, 자연스럽게 말씀 전례로 이어집니다. 우리는 이 예식을 통해 말씀을 듣게 되는데, “보편된 교회”라는 특성상 전 세계 어디에서든 같은 말씀을 전해 받습니다. 종종 신자분들께서 전례에 대해 질문을 하실 때, 미사 안에 말씀은 누가 정했는지 질문을 하시곤 합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1969년에 발행한 「미사 독서 목록 지침」(Ordo Lectionum Missae)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보편교회는 말씀 전례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전례 주기에 따라 배정하는데, 미사 독서 목록 지침 66항에는 “주일과 축일의 미사 독서 목록”의 지침으로, 69항에서는 “평일 미사 독서 목록” 지침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주일과 축일의 독서 목록 지침인 66항입니다.
(1) 모든 미사에는 세 독서가 있다. 첫째 독서는 구약에서 읽고, 둘째 독서는 사도서, 곧 전례 시기에 따라 서간이나 요한 묵시록을 읽는다. 셋째 독서는 복음을 읽는다. 이러한 배치로 신구약 성경과 구원 역사의 단일성이 밝혀지고, 그 중심은 파스카 신비로 기념하는 그리스도이심이 드러난다.
(2) 주일과 축일에는 3년 주기로 더욱 풍부하고 다양한 성경 독서를 배정한다. 이와 같은 배정으로 3년마다 같은 본문을 읽게 된다.
(3) 주일과 축일의 독서는 두 가지 원칙, 곧 ‘주제의 조화’와 ‘준 연속 독서’ 체계를 바탕으로 하여 배정하였다. 한 해의 여러 시기와 각 전례 시기의 고유한 특징에 따라 이 두 원칙을 적절하게 적용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주일과 축일은 전례주년 안에서 성대하게 기념하는 날을 말합니다. 특히 3년 주기(가해, 나해, 다해)를 바탕으로 “주제의 조화”와 “준 연속 독서”의 원칙에 따라 독서를 배정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주제의 조화”는 어떤 형식으로든 서로 연결됨을 뜻합니다. 즉, 우리가 읽는 독서는 분명한 연결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아울러 “준 연속 독서”란 성경의 본문에 따라 진행되지만, 중간 부분을 건너뛰거나 생략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매주일, 그리고 매일 연속되는 독서라고 하더라도 그날 전례의 주제, 그리고 전례주년에 따라 생략되는 부분이 생긴다는 점도 참고적으로 알아두실 필요가 있습니다. 이 두 원칙은 전례주년의 흐름 안에서 명확히 적용되어 고정화되었습니다.
평일 미사 독서 목록 지침은 69항에서 제시되고 있는데, 평일의 경우에는 두 가지 독서, 곧 구약을 포함한 신약에서 서간문을 중심으로 선택되는 첫 번째 독서, 둘째 독서는 복음을 선택하도록 인도합니다. 평일 미사의 독서의 배분 및 구성은 2년 주기(홀수해, 짝수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화답송”에 대해서 설명드리겠습니다.
전례와 미사의 영성 (35) 성령 청원(Epiclesis)과 일치
“오, 예수님, 거룩해진다는 건 얼마나 쉬운지요. 선의만 조금 있으면 되니까요. 예수님은 영혼 안에서 매우 작은 선의라도 발견하시면 서둘러 당신을 영혼에게 주십니다. 그때는 영혼의 잘못도, 넘어짐도, 그 어느 것도 예수님을 가로막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매우 관대하시며 아무한테도 당신 은총을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청하는 것보다 더 많이 주시기까지 하는 분입니다. 성덕에 이르는 지름길은 성령의 영감에 충실히 머무는 것입니다”(성녀 파우스티나 수녀의 일기 中).
성녀 파우스티나의 이 아름다운 말씀에서도 볼 수 있듯 우리가 거룩해질 수 있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거룩함의 샘”(감사 기도 제2양식 참조)이신 아버지 하느님의 거룩함에 성령의 은총을 통하여 참여할 수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미사 때 바치는 성찬 기도문(감사 기도 제2양식)에는 두 군데에서 성령의 은총을 청하는 부분(Epiclesis)이 나옵니다. 첫 번째는 우리가 봉헌한 예물(빵과 포도주)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길 청하면서 “간구하오니, 성령의 힘으로 이 예물을 거룩하게 하시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게 하소서.”라고 사제가 청원하는 부분입니다. 두 번째는 “신앙의 신비여”를 노래한 후 “간절히 청하오니, 저희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어 성령으로 모두 한 몸을 이루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는 부분입니다. 처음에 언급된 성령 청원은 성령께서 예물(빵과 포도주) 위에 내리길 바라는 것이라면, 두 번째 성령 청원은 성령께서 신자들에게 내리길 바라는 모습이 됩니다.
이렇게 성령을 청하는 부분에서 그 대상은 ‘빵과 포도주’(첫 번째)와 ‘신자들’(두 번째)로 다르지만, 이 성령 청원을 통해 지향하는 의미는 서로 연결됩니다. 즉 성령을 통해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화되고, 그 몸과 피를 받아 모시게 될 이들 또한 성령의 은총 안에서 그리스도의 지체(몸과 피)로 하나 되어 살아가게 해 달라는 청원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성령의 은총 안에서 성체를 받아 모시게 될 신자들은 그리스도 안에 하나가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전해 주시는 아주 중요한 은총의 내용을 발견합니다. 바로 “그리스도와의 일치”입니다. 그리스도와 참으로 일치될 수 있을 때, 우리는 다른 이들과도 화해할 수 있고, 용서할 수 있으며, 진정으로 서로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참된 사랑의 샘이시기 때문이며, 우리의 구원 또한 그분과 얼마나 일치하는 삶을 사는가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무엇보다 성령의 은총을 청해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 그럴 수 있을 때 성모님께 들려왔던 말씀이 언젠가 우리에게도 전해질 것입니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루카 1,35).
[응답하라 ‘전례’] 전례 교육은 무엇인가?
“누가 나를 이끌어 주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사도 8,31). 이 말은 에티오피아 내시가 이사야 예언서를 읽는 것을 듣고서, 필리포스가 “지금 읽으시는 것을 알아듣습니까?”라고 질문하자, 내시가 답을 대신하여 되묻는 말입니다.
이를 전례에 적용하면, “지금 거행하는 전례를 얼마나 이해하고 계신가요?”라고 묻는다면 신자들은 무엇이라 할까요? “누가 그것을 알려주어야 저희가 제대로 이해하고 참석할 것 아닙니까?”라는 답변 아닌 질문을 할 것 같습니다. 이천년이라는 시간이 녹아있는 교회의 전례는 그 역사만큼 많은 상징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교육, 곧 지적인 차원을 넘어선 생활의 차원을 포함한 교육이 필요합니다.
전례교육은 올바르고 깊이 있는 전례 생활 위한 필요 요소!
스페인 전례학자로 유명한 홀리안 로페스 마르틴 주교는 ‘교회의 전례’(장신호 옮김)에서 전례 교육의 필요성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여러 문헌에서 언급하고 있다고 알려줍니다. 그중에서 요한 바오로 2세의 교황 교서 ‘25주년’(1988) 15항을 소개합니다.
“지금 가장 긴급한 과제는 사제나 신자들 할 것 없이 하느님 백성 모두가 성서적 교양과 전례적 소양을 쌓는 문제입니다. … 이 교육은 오랜 숨결의 사업으로서 신학교와 수련원에서부터 시작하여, 사제 생활이 끝날 때까지 평생을 두고 이루어져야 할 성질의 것입니다. 이 교육은 처지에 따라 평신도들에게도 필요 불가결의 사업입니다. 이들은 많은 지방에서 공동체의 중요한 직무를 맡도록 불림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전례교육은 전례를 집전하는 사제뿐 아니라 전례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며 다양한 봉사를 수행하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요구됩니다.
전례 자체의 본질에서 요구되는 능동적 참여를 위해 요청되는 전례 교육!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는 전례에서 사용하는 언어가 라틴어였기에 일반 신자들이 이해하지 못해서 성찬례 동안에 말 없는 ‘관중’으로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전례 개혁을 통해 ‘모국어 사용’이 허용(전례헌장, 54항 참조)되어 신자들은 더 이상 듣고 보는 ‘관중’이 아니라 ‘참여’하는 주체가 되어 하느님 백성으로 한목소리로 찬양과 청원을 드리고, 영성체를 하며 주님과 일치합니다. 그러나 이 정도의 참여는 “모든 신자가 전례 거행에 의식적이고 능동적이고 완전한 참여를 하도록 인도되기를 간절히 바라는”(전례헌장 14항) 교회의 원의에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의식적’ 참여란, 본인이 왜, 무엇을, 누구와 함께 참여하는 지를 의식하는 깨어있음을 말하며, ‘능동적’ 참여는 전례에서 공동으로 행해지는 동작과 자세, 환호와 성가와 침묵 등에 적극적으로 임하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마지막으로 ‘온전한’ 참여는 부족함이 없는 충분한 참여로서 처음부터 끝까지 전례에 있는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참여를 위해서 일차적으로 사목현장에서 활동하는 영혼의 목자들이 마땅한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전례의 정신과 힘에 완전히 젖은 사목자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느껴진다!
사목자들이 전례의 영역에서 준비될 필요성은 전례에서 신자들이 능동적으로 참여하도록 교육하여야 하는 그들의 임무에서 비롯합니다. 이러한 임무를 달성하기 위하여 먼저 그들 자신이 “전례의 정신과 힘에 완전히 젖어들”(전례헌장, 14항) 필요가 있지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신학교와 수도자 신학원에서 신학생들은 “거룩한 예식들을 이해하고 거기에 온 마음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적당한 지도를 받고 또 거룩한 신비의 거행 자체와 거룩한 전례 정신에 젖은 다른 신심 행위를 통하여 영성 생활의 전례 교육을 받아야 한다”(전례헌장, 17항)고 권고합니다.
이러한 지침에 따라 1970년(1985년 개정)의 ‘사제 양성의 기본 지침’과 1979년의 ‘신학교의 전례 교육에 관한 훈령’ 등에서 분명한 교육 방향과 구체적 내용을 제시합니다. ‘신학교의 전례 교육에 관한 훈령’에서 세 가지 관점을 분명히 밝힙니다. 1) “그리스도 정신을 길어 올리는 첫째 샘이며 또 반드시 필요한 샘”(전례헌장 14항)인 전례에 대한 완전하고 능동적인 참여에 각 개인이 입문해야 합니다. 2) 전례의 모든 관점에 대해서 더욱 완전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학문적인 관점에서 전례를 공부해야 합니다. 3) 이론적인 이해뿐만 아니라 전례 거행을 준비하고 참여하는 것을 포함하는 전례 사목 분야에 실천적으로 입문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또 다른 그리스도로 살아가고 있는 신자들에게 필요한 전례교육!
“세례를 통하여 교회에 합체되어 그리스도교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인호를 받고, 또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 교회를 통하여 하느님께 받은 신앙을 사람들 앞에서 고백하려고 힘쓰는”(교회헌장, 11항) 신자들은 그리스도교 생활 전체의 원천이며 정점인 성찬의 희생 제사에 참여하여 신앙생활의 활력을 얻어야만 세상에서 복음을 말씀과 삶으로 선포할 수 있습니다.
예비자교리, 견진 교리, 특강 등을 통해서, 주일 미사에서 행하는 강론을 통해서 부분적인 전례 교육을 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전례 봉사의 직분을 받은 신자들의 경우에는 개인적이든, 소그룹으로든 공부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교구에 따라 전례분과장이나 전례교육의 필요성을 느낀 신자들을 위한 교육과정을 행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교구가 행하는 것도 아니고, 정기적이지 않는 경우가 많으며, 전례 전체를 다루지도 않기에 한계가 분명합니다.
미래의 사제를 위한 전례교육은 교회의 지침에 따라 어느 정도 실행되고 있지만, 이미 서품을 받아 사목현장에서 전례사목을 하고 있는 사목자의 경우, 교회에서 새롭게 발표하는 전례에 대한 문헌이나 예식들에 대해서 교육받기가 쉽지 않습니다. 주교회의에 전례위원회를 설치하고, 전례전문가들을 양성하며 전례학회를 구성했지만 당면한 과제들을 수행하기 바쁜 상황입니다.
하느님 백성 전체가 전례에 능동적 참여를 하여 전례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를 만나 구원 체험을 하도록 이끄는 전례교육 체계가 한국교회에 절실히 요구되는 상황입니다. 특히 주일미사 참석률이 급격히 떨어진 현재 교회 상황에서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맞는지 틀리는지를 묻기보다 이런 행동이나 말씀에 어떤 의미가 있고 하느님의 현존을 어떻게 느낄 수 있는지를 묻는 사제와 신자를 자주 만나면 좋겠습니다.
고사성어에 ‘지즉위진간’(知則爲眞看), 곧 ‘알면 참모습이 보인다’라는 말이 있듯이, 전례에 대해서 잘 알면 전례 거행에서 아버지 하느님과 성자 예수님의 참모습을 뵙고, 성령에 의해 참 진리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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