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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대통령 부인으로 어울릴까?
이희호 약력
출생
1922년 9월 21일
경기도 경성부 수송정
(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송동)
사망
2019년 6월 10일 (향년 96세)[1]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신촌동 세브란스병원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김대중대통령묘소
활동기간
제15대 대통령 배우자
1998년 2월 25일 ~ 2003년 2월 24일
미국 유학을 다녀온 여성 민주운동가 출신으로서 남편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 시절 여성가족부의 전신인 여성부가 설립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 한국 여성의 인권과 권리를 비약적으로 상승시킨 1세대 페미니스트이기도 하다.
부유한 가정 환경에서 자라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와 이화여자전문학교 문과를 다녔다. 이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를 졸업하였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미국으로 유학을 가 미국 램버스 대학교에서 사회학 학사학위, 미국 스칼렛 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한, 당대 보기 드문 엘리트이다.
2019년 6월 10일 숙환으로 사망했다.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 배우자 중에서는 장수한 기록이며, 2004년 7월 20일에 대한민국 제10대 대통령 배우자 홍기가 사망한 지 15년 만에 사망한 대통령 배우자다.
2. 생애[편집]
이화고 이희호 1939
1939년 이화고 재학시절의 이희호(우측)
6남 2녀 중 장녀이자 넷째로 일제강점기 경성부 수송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이용기는 국내 '의사 면허 4호'로,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인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여 전라북도 남원시 도립병원장, 경기도 포천군 도립병원장을 지내는 등 매우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다. 어머니 이순이[3]는 한의사 집안에서 태어나 신실한 감리교 신자였기에[4], 그 영향에 따라 모태신앙을 갖게 된다.
"여자도 공부 많이해야 한다"는 모친의 뜻에 따라, 서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로 올라와 1936년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이화여고의 전신) 입학하였다. 보통 학교 재학 당시 반장을 하는 등, 솔선수범의 아이콘이었다고 한다. 18살 때 모친이 사망하여, 크게 충격을 받는다.
그러면서 여성의 삶에 대해 고민하게 되고, 어떤 것이 여성인 나를 위한 길인지 생각한 뒤에, 스스로 결심하게 되는 3가지가 있었다. 그것들은 바로 첫 번째는 '결혼하지 말자', 2번째는 '건강하자', 3번째는 '공부를 많이 하자'였다고 한다.[5]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1942년 이화여자전문학교(이화여대의 전신) 문과에 입학한다.
그러나 1944년, 일제의 교육긴급조치에 따라 이화여전을 졸업하지 못한 채 해방을 맞이했다. 이때 잠시 충청남도 예산군에서 여자청년연성소 지도원으로 일한다. 1946년 9월, 이번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 다시 입학해 영문학을 전공한다. 2학년 때 전공을 옮겨 한국전쟁 발발 직전인 1950년에 교육학 학사학위를 취득했다. 서울대학교 재학 당시에는 그 당시 많은 청년들이 그랬듯이 광복군출신 이범석이 창단했던 조선민족청년단에 가담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당시 여성으로는 엄청나게 높은 수준[6]의 교육을 받은 축인데 1943년도에 고등교육을 받는 학생 수가 5,504명, 그중에 여학생은 고작 1,255명이었다. 1944년도 자료에 따르면, 조선에 거주하는 여성들 약 1,260만명 중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여성들은 약 3,600명 정도로, 상위 0.02%에 해당한다.
서울대 재학 시절 당시 여학생이기에 편협한 시선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활발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이희호는 총학생회 사범대학 대표, 사범대 학도호국단 부단장을 맡았다. 엄청나게 활발하고 여성 운동에 관심이 많았으며, 전통적인 여성상에서 탈피하고자 노력했기에, 교내에서 '다스'[7]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동기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이야기할 때 "내가 히히호호하고 크게 웃어서 이름이 이'희호'에요"라고 재치 있게 소개했다고 한다.[8] 또한 사회참여운동에 관심이 많아 연극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는데, 대학교 1학년 때 <Foolish>라는 연극을 공연할 때는 이희호가 시나리오를 쓰고, 주연을 맡고, 연출도 다 했다고 한다. 항상 웃기는 역할까지 다 맡는 등 활달한 타입이었다고 한다.
대학 졸업한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는데, 피난길에서도 이태영[9], 김정례 등 1세대 여성운동가들과 적극적인 여성 운동을 펼쳤다. 1950년에는 대한여자청년단, 1952년에는 여성문제연구원 등을 창설하였다. 여성문제연구원은 훗날 여성문제연구회로 명칭을 바꿨고, 훗날 1964년부터 1971년까지 2대 회장[10]을 맡기도 한다.
대한여자청년단에서 활동하던 무렵, 미래 남편이자 인생의 동반자가 되는 김대중과의 운명이 시작된다. 1.4 후퇴로 피난민들을 배로 후송하기 위해 인천에 있던 해운회사 사장의 도움을 받는데, 바로 그 사장이 김대중이었다. 이후에 김대중이 부산으로 사업 거점을 옮기면서 대한여자청년단 간부들과 만나는 자리를 가지는데, 이때 처음으로 둘이 만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당시에 이희호는 옛 서울 지역 대학생 모임이었던 면학동지회(면우회)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는데, 이 모임에 김대중이 간헐적으로 참석하면서 교우하게 되었다. 그러나 곧 1954년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미국 유학하는 동안 미국 감리교 교회에서 지원을 받았는데, 생활비가 부족하여 공장에서 일하며 학비를 벌었다고 한다. 미국에서 램버스대에서 사회학 학사를 취득하고, 스카릿대 대학원에서 차별받는 흑인공동체 문제에 관한 현장연구로 석사 취득 후에 1958년 귀국한다.
이화여대 부총장 이희호
이화여대 부총장 시절의 이희호
귀국 후에 모교인 이화여자대학교 사회사업학과 강사로 강단에 섰고, 이어 여성문제연구원 간사, YWCA 연합회 총무,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이사직을 맡으며 국내 여성운동사의 초창기를 장식한다.
김대중과 이희호의 결혼식
이희호와 김대중의 결혼식 사진
여성운동가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와중에 1962년 5월 10일 김대중과 결혼한다.[11][12] 그것도 김대중에게는 두 번째 부인, 즉 재혼이었다. 김대중의 첫 부인인 차용애는 1959년에 사망했다.[13][14][15] 슬하에 김대중 전 대통령의 3남 중 한 명인 김홍걸을 두었다. 3남 중 장남과 차남은 전처 소생이다.
이후에 이희호가 2살 연하의 김대중과 결혼할 때, 여성계 선배들은 미국 유학을 다녀온 초엘리트 여성운동가 이희호가 너무 아깝다며 통탄했다. YWCA 선배들이 눈물을 흘리며 왜 (이희호의) 소중한 인생을 (김대중의) 초라한 삶에 맡기냐고 물었다고 한다. 후일 이희호는 김대중과 결혼한 이유를 묻자, "잘 생겼잖아요"라고 대답했다.[16]
김대중과 이희호
단란한 모습의 이희호와 김대중
사실 이희호의 자서전이나 발언을 종합해 보면 김대중과 만나기 전에는 본래 민주운동가 계훈제와 결혼할 생각이 있었다. 서울대학교 출신 엘리트인 계훈제는 재야의 유명인사로 반탁운동, 4.19 혁명, 베트남 전쟁 파병반대, 유신헌법 반대 등에 앞장섰다. 하지만 잦은 투옥 생활을 하게 되며 폐결핵이 심해지자 이희호는 해외 유학을 결정하였고,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고백하였다.[17]
1998 대통령 취임식
김대중 전 대통령 취임식의 이희호
당시 재야인사였던 김대중이 군부로부터 정치적 탄압을 받으면서 여성 운동 활동도 접어야 했다. 대신 남편의 기나긴 옥바라지와 내조, 민주화투쟁의 동지로 일생을 보냈으며, 대통령의 가장 가까운 비판자이자 조언자였다고 알려져 있다. 남편 김대중의 대통령 취임 이후에는 70대 후반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소외계층 복지와 정책감시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여성권익 향상에 이바지한다는 젊었을 적 초심을 잃지 않고, 부군의 정책공약에 정치적 관심에서 소외되기 쉬운 여성들을 위한 대책이 들어가게끔 도왔으며, 이는 국민의 정부 출범 후 여성가족부의 출범으로 이어졌다.
이희호 김정은
2011년 사망한 김정일의 조문을 위해 방북하여
김정은을 위로하는 이희호
2011년 12월 김정일 사망 당시 조문을 위해 방북한 것을 두고 논란이 있었는데 김대중 대통령 사망 당시 북측의 조문단 파견에 대한 답방 차원이었다고 설명했다. 당시 이희호와 함께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동행했는데, 둘 다 남편이 사망했을 때 북한에서 조문을 왔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2018년 문재인 정부 시절, 일명 판문점 회담으로도 불리는 2018 남북정상회담이 마무리된 이후 이희호는 문재인 전 대통령에게 노벨평화상을 받길 바란다는 덕담을 전했다. 이에 대해 당시 문재인 전 대통령은 노벨상은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에게 넘기고 대한민국은 평화만 얻으면 된다는 대답을 했다.
결론적으로 이희호의 덕담은 실현되지 않았고,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일시적으로 화해 무드에 들어갔던 당시 남북관계도 이희호 사망 이후 2020년대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 사건을 기점으로 급격하게 냉각되었다. 남편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남북 평화를 바랐던 이희호의 행보를 돌이켜 본다면 여러모로 안타까운 대목이다.
김건희 약력
1972년 9월 2일, 서울특별시 성동구 명일동(현 강동구 명일동)에서 아버지 김광섭, 어머니 최은순 사이에서 셋째로 태어났으며, 당시 이름은 김명신(金命新)이었다.
1987년, 경기도 양평군청의 공무원이던 아버지 김광섭이 일찍 세상을 떠났다.[1][2]
1991년 2월, 서울특별시 강동구에 위치한 명일여자고등학교를 졸업했고, 1992년 3월 ~ 1996년 2월, 경기대학교 예체능대학 회화과(서양화 전공)[3]를 졸업했다.[4] 이 시점까지 김건희의 이름은 김명신이었다.
1995년 5월,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입선'했다.#
3. 대학 졸업 이후[편집]
1996년 3월~1999년 2월, 숙명여자대학교 교육대학원 미술교육전공 석사를 졸업했다.
1998년 1학기, 광남중학교에 교육실습(2학점)을 다녀왔다.
1999년 3월~2008년 2월, 국민대학교 테크노디자인대학원 디지털콘텐츠디자인학 박사를 졸업했다.
2001년, 영락여자상업고등학교에서 미술강사를 했다.
2001년 1학기, 2002년 1학기, 2003년 1학기~2004년 1학기, 한림성심대학교 컴퓨터응용학과에서 시간강사로 재직하며, 색채표현기법·디자인개론·그래픽실습 과목을 강의했다.
2001년 7월 11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훈동 단성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2003년 1학기~2004년 2학기, 안양대학교 산업디자인과에서 강사로 재직했다.
2003년 1학기~2004년 1학기, 한림정보산업대학교 산업디자인과 강사로 재직했다.
2003년 7월 9일~15일, 분당 삼성플라자(현 AK플라자 백화점 분당점)에서 전시를 했다.
2004년 1학기~2006년 1학기, 서일대학교 산업디자인학과에 재직하며, 색채학·인간공학·디자인사에 대해 강의했다.
2005년 1~2학기, 서울정보기능대학교 컴퓨터게임과에서 강사로 재직하며, 아이디어 발상·2D컴퓨터그래픽스·콘텐츠개발 과목 등을 강의했다.
2005년 1학기~2008년 1학기, 한국폴리텍Ⅰ대학 컴퓨터게임과에 재직하며, 게임기획·게임분석·콘텐츠개발 과목 등을 강의했다.
2006년 5월~11월, 서울대학교 문화콘텐츠 글로벌 리더 과정(GLA)[5]을 이수했다.
2007년 1~2학기, 수원여자대학교 광고영상과에서 겸임교수로 재직하며, 뉴미디어광고·디지털배너광고·온라인미디어광고실습에 대해 강의했다.
2007년 7월 25일, 문화예술 전시기획사 '코바나컨텐츠'를 설립해 대표이사로 재직한다.
2007년 8월, 11월, 두 편의 KCI등재 학술지 논문을 투고한다.
2008년 고려대학교 언론대학원 최고언론과정[6]에 등록하여 수료하였다.
2008년 10월 '김명신'에서 '김건희'로 개명했다. #
2009년 고려대학교 언론대학원 최고언론과정[7]에 또다시 등록하여 수료하였다.
2009년 고려대학교 언론대학원 언론정보학과 석사과정에 입학하였으나 중퇴하였다.
2009년 1학기, 상명대학교 시각디자인과에서 강의했다.
2009년 2학기, 단국대학교 영상디자인학과에서 디지털미디어론을 강의했다.
2010년 3월~2012년 2월, 서울대학교 경영전문대학원(EMBA) 경영학과 경영전문 석사를 취득했다.[8]
2010년 8월~2011년 3월,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최고지도자 인문학 과정(AFP)을 수료했다.
4. 결혼 이후[편집]
윤석열 김건희 결혼 사진
김건희 2019년 모습
2012년 윤석열과 김건희의 결혼식[9]
2019년 윤석열의 검찰총장 임명식 참석
2012년 3월 11일, 윤석열과 결혼했다. 윤석열은 만 51세, 김건희는 만 39세였다.
결혼 과정은 크게 세 가지 설로 알려져있다.
2011년 5월 25일, 김건희의 어머니인 최은순 씨는 검찰조사 당시 "윤석열의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선배이자 자신과 가깝게 교류하던 삼부토건 조남욱 회장이 소개해줬다. 교제한 지는 2년 정도."라고 주장했다.[10] #
2018년 3월 17일, 김건희는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나이 차도 있고 오래 전부터 그냥 아는 아저씨로 지내다 한 스님이 나서서 연을 맺어줬다"고 주장했다. 월간조선 2018년 4월호 #
2021년 6월 17일, 천준(필명) 작가는 윤석열 평전 '별의 순간은 오는가 - 윤석열의 어제, 오늘과 내일'에서 "윤석열의 기나긴 싱글 생활을 안타깝게 여긴 한 외가 어른이 주선한 선 자리에서 두 사람이 만났다"고 주장했다. #
2013년 2학기~2015년 1학기, 안양대학교에서 문화컨텐츠와 색채, 현대문화켄텐츠의 이해, 대중문화와 시각문화를 강의하며 겸임교수로 재직했다.
2013년 2학기~2015년 1학기, 안양대학교 교양대학 겸임교수로 재직했다.
2014년, 단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문화예술 최고경영자 과정을 수료했다.
2014년 1학기~2016년 1학기, 국민대학교 테크노디자인대학원(전문대학원) 조형대학 겸임교수로 재직했다.
2014년 1~2학기, 국민대학교 테크노디자인전문대학원 엔터테인먼트디자인전공 겸임교수로 재직했다.
2015년 3월, 동아일보 인터뷰를 했다. #
2016년 1학기, 국민대학교 조형대학 영상디자인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했다.
2017년 5월 19일, 남편 윤석열이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검사장에 임명되었다.
2019년 6월 17일, 남편 윤석열이 검찰총장이 되었다.
2019년 7월 25일, 남편 윤석열이 문재인 정부의 청와대에서 검찰총장에 임명되어 재임했다.[11]
4.1. 윤석열 대선 출마 선언 이후[편집]
국힘기자회견 김건희
2021년 국민의힘 당사 기자회견
2021년 6월 29일, 남편 윤석열이 대선 출마 선언을 했다.
2021년 7월 30일, 남편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국민의힘에 입당했다.
2021년 12월 13일, 오마이뉴스 인터뷰를 했다. # 또한 YTN 인터뷰를 했다. #
2021년 12월 15일, 연합뉴스 인터뷰를 했다. #
2021년 12월 26일, 여의도 국민의힘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했다.[12]
2022년 1월 23일, 프로필 사진을 촬영했다. #
2022년 2월 14일, 서울특별시 마포구 극동방송국에서 김장환 목사(이사장)과 3시간 가량 비공개로 만났다. #
2022년 2월 17일[13], 서울특별시 강남구 봉은사에서 원명 주지스님과 1시간 가량 비공개로 만났다. #
2022년 2월 26일, 남편 윤석열의 트위터를 통해 뒷모습이 찍힌 사진이 공개됐다. #
4.2. 윤석열의 대통령 당선인 시기[편집]
2022년 3월 10일, 남편 윤석열이 대한민국 제20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대통령으로 재임하면서, 2022년 5월 10일부터 대한민국의 대통령 배우자로 재임했다. 동아일보에 영부인이 아닌 대통령 배우자 표현이 좋다고 짧게 인터뷰했다.
2022년 4월 4일, 자택을 경호하는 경찰특공대와 인사를 나누면서 폭발물 탐지견과 같이 사진을 찍은 것이 공개되었다.
구인사를 찾은 김건희
2022년 5월 3일, 첫 공개 행보로 천태종의 총본산인 단양 구인사를 찾았다.
남편 윤석열이 대통령으로 공식 취임하기 일주일 전의 행보로서, 윤석열이 2021년 대통령 후보 신분으로 구인사를 방문해 상월원각대조사 탄신 110주년 봉축법요식에 참석한 후, 재방문 약속했던 것을 대신 지키기 위해 김건희가 방문한 것이었다.
5. 대통령 배우자 시기[편집]
김건희 김정숙
김건희 박근혜짤
문재인 전 대통령, 배우자 김정숙과 인사
박근혜 전 대통령을 배웅하는 김건희
2022년 5월 10일 오전 0시, 남편인 윤석열의 대통령 재임이 시작되며 김건희도 대통령 배우자가 되었다.
오전 10시, 남편과 국립서울현충원에 함께 참배했다. 이 때는 올블랙 정장을 입었으나, 다음 행사부터는 흰색에 리본으로 묶은 정장으로 갈아 입었다.
오전 11시, 국회에서 남편의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했다. 국회 정문 앞에서 취임식장까지 걸어가면서 남편의 뒤에서 국민들과 주먹악수를 하며 올라갔으며, 올라간 후 남편과 함께 식장에 있는 귀빈과 국민들에게 양쪽으로 90도 인사를 하며 의자에 앉았다.
취임식 후, 문재인 전 대통령 및 그 배우자 김정숙을 찾아 인사를 했다. 또한 박근혜 전 대통령을 찾아 계단을 내려갈 때 직접 팔짱을 끼고 배웅했다.[14] 이명박 전 대통령의 경우, 당시 기결수라서 취임식에 참석하지 못했기 때문에 김건희와 만남을 갖지 못했다.
김건희 윤호중
김건희와 윤호중 더불어민주당 비대위원장
국회를 나오면서도 남편 뒤에서 주먹인사를 하면서 나왔다. 대통령실에 들어가기 직전 용산의 주민들에게 인사를 한 김건희는 기념 촬영을 마치고서 다시 국회로 돌아가 경축연회를 하였다.
저녁엔 신라호텔 영빈관에서 외빈 만찬이 있었는데 해당 자리에 참석했던 윤호중 전 더불어민주당 비대위원장이 김건희의 얼굴을 보고 너무 활짝 웃는 모습을 보여서 이목을 끌기도 했다.
당시 윤호중 의원은 김건희에 대한 비판을 적극적으로 해오던 대표적인 인사인데, 막상 김건희 앞에서 얼굴을 붉히며 손으로 입까지 가리는 모습이 포착되어 민주당원들 사이에서는 좋아 죽는다며 윤호중 사퇴하라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웃지 못할 일화도 있었다.[15]
여담으로 이 날 코바나컨텐츠는 폐업 또는 휴업할 계획으로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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