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 고물상 외 4편 /윤혜화
폐지를 싣고 온 노인들
납작하게 접힌 하루를 내려놓는다
마른 입술을 믹스커피 한 잔으로 적시면
웃음 섞인 젊은 날이 절로 흘러나오는 동네사랑방
하루의 이야기가 태양처럼 뜨고 진다
흘러간 소문까지 수거한 손수레
누구도 묻지 않는 안부를 나누는 동안
상처 입고 낡은 것들 한 자리에 모여
재생의 시간을 기다린다
미군기지 공원화 소식 이후
기대 살던 기지 담벼락이 헐리고
오래 조인 허리끈이 풀리자
겹겹이 쌓인 사연이 5톤 트럭 열 대분이다
오십 년 전 끊어진 기차 소리 기억하던
철로변 태양 고물상
삶의 한 모퉁이를 어루만진 낡은 시간이 실려나간다
여름, 20시 /윤혜화
언제부터 이 어둠이 묽어졌을까
가로등 아래 흰색 푸들의 등이 유난히 새하얗고
네 개의 다리가 더 많아 보이는
자전거 바퀴의 장식 전구도 수를 불려 도는 시간
퇴근 대열에서 돌아온 가족들 식사 후
헐렁한 옷차림으로 공원길을 걷는다
저녁 8시,
팽팽했던 하루의 줄을 슬쩍 푸는
가로등도 불을 켤까 말까 망설이는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개와 늑대의 구분이 힘든 시간
네온 불빛이 번지기 시작하고
어둠의 더딘 붓질이 끝나길 기다리는
별의 출근이 늦다
앉은뱅이 저울 /윤혜화
삭힌 고추, 새우젓 , 절인 깻잎 머리에 이면
깐깐해지는 야무진 그녀
삼산 깡 시장 젓갈골목에서 잔뼈가 굵었다
희뿌옇게 아침이 밝아오면
질척한 좌판 바닥 어제 그 자리
기울어진 눈금을 고쳐 앉는다
눈금 페달 살살 밟으면 손님의 올라가는 입꼬리에
매번 맘이 흔들린다
회색구름 가득 낀 하늘 무게는 0
주거니 받거니 흥정 입씨름도 달아보면 0인데
소금기에 찌들어 녹슬고 삭은 몸뚱이는 천근만근이다
젖은 걸레처럼 물기 마를 날 없는 극한직업
날렵한 전자저울에 밀려 언제 해고 될지 알 수 없지만
매순간 0에서 시작하는
늙은 저울의 하루는 날마다 젊다
문어부동산 /윤혜화
방 2 화장실 1
전세금으로 내 집 마련
사거리 전봇대에 붙어있는 문어발 전단지
여덟 개의 발이 바람에 펄럭인다
완두콩 한 사발 팔고
천 원짜리 지폐 귀 맞추는 좌판 노인에겐
눈길도 주지 않는 문어
기름때 묻은 작업복 사내를 유혹한다
주변을 힐끗 살피며 재빠르게 다리를 챙겨
피곤이 담긴 안주머니에 넣고 사라지는 남자
유모차 밀고 가던 여인도
한참을 훑어보고 다리 하나 찢어간다
바람이 중개하는 방2 화장실 1
빨판처럼 달라붙을 시선 고르며
누군가에게 내 집을 마련해주겠다고
남은 다리를 꿈틀거리고 있다
고삐를 놓다 /윤혜화
잘 가꾼 외모와 호탕한 웃음 웃던 그녀
무릎 걱정 주고받던 벗들 하나둘 뜸해지고
상가 옆 벤치에 혼자 앉아있다
신호등 초록불이 몇 차례 바뀌어도 쉽게 떼지 못하는 발걸음
두꺼운 옷 한 겹 벗을 때마다
벚꽃 목련이 팡팡 터지는데
기억의 통로는 좁아져
날짜와 계절이 빠져나오지 못하고 맴돈다
햇볕 좋다며 너른 마당을 들락거리다
거실에서
방으로 들어간 그녀
크게 키운 텔레비전 볼륨 속에 들앉았다
철 지난 옷을 입은 채
햇빛이 창밖에서 기웃거려도
전화벨 소리에도
아랑곳 않고
습관처럼 화투패로 오늘의 운세 떼고는
일진이 어떠냐고 물어도
묵묵부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