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2993
1월2일 [주님 공현 대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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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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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39GZ3qXgaGk (오세민 루드비코 신부님 집전)
**서울주보**
http://pf.kakao.com/_xhGxjBxb/91753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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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선물에 담긴 깊은 의미>
동방박사들이 갓 태어난 아기 예수님께 가져온 선물이 왜 하필 황금, 유향, 몰약이었을까요? 이왕이면 갓난아기에게 당장 필요한 일회용 기저귀나 분유, 장난감이 아니었을까요? 세 가지 선물에는 각각 나름대로의 중요한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예부터 이 세 가지 선물의 의미는 여러 관점에서 해석되어 왔습니다.
2세기경 리옹의 이레네오가 말하길 황금은 아기 예수님의 왕으로서의 위엄을, 유향은 그분의 신성을, 몰약은 언젠가 맞이하게 될 십자가상 죽음을 예표한다고 했습니다. 현대 신학자 칼 라너는 조금 다르게 접근했습니다. 황금은 우리의 사랑을, 유향은 우리의 그리움을, 몰약은 우리의 고통을 의미한다고 해석했습니다.
황금은 여러 광물들 가운데 다이아몬드와 더불어 희소가치가 큰 물질입니다. 이콘을 그리기위해서는 금이 많이 사용되는데, 신분이 고귀한 분일수록 더 많은 금박을 입히기도 합니다. 동방박사들이 황금을 선물로 가져온 것은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신 분, 만왕의 왕이시며, 우리 생명의 주인이심을 고백하는 행위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유향은 예로부터 거룩한 성전에서 제사를 올릴 때 태우던 향료였습니다. 요즘도 부활이나 성탄 대미사 때, 서품식 미사 때, 성체강복 때도 분향을 합니다. 사제는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제단을 향해, 그리스도의 말씀이 선포되는 성경책을 향해, 예수님의 몸이신 성체를 향해 분향합니다. 향은 아무에게나 바치지 않습니다. 부족한 인간이 하느님께 바치는 가장 경건한 봉헌이 향인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이 유향을 선물로 드린 이유는 아기 예수님이 하느님이심을 고백하는 행위였습니다.
몰약(沒藥, Myrrh)은 시신에 바르는 약품으로 죽음을 상징합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합니다. 갓 태어난 아기에게 장례식 때 사용되는 몰약을 바치다니요. 그러나 이 행위는 참으로 예언적 행위입니다. 언젠가 아기 예수님께서 성장하셔서 아버지의 때가 오면, 그분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형에 처해질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이 몰약을 선물로 드린 이유는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해서 처형될 어린 양이심을 고백하는 행위였습니다.
찬란한 황금은 구유에 누운 아기 예수님의 존엄성뿐만 아니라, 우리 영혼이 지닌 고귀한 가치도 가리킵니다.
우리는 모두 이 땅 위에서 살아가는 나약한 인간이지만 동시에 영적 인간이자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의 얼굴은 하느님의 금빛 광채를 반영해야 하며, 우리 영혼은 하느님의 영광을 찬미해야 할 것입니다.
거룩한 성전에서 바치는 향기로운 분향은 우리가 하느님을 향해 올리는 정성스런 기도이자 그분을 향한
큰 그리움의 표현입니다. 분향의 여운은 참으로 그윽합니다. 우리 매일의 삶이 하느님께 드리는 그윽한 향기가 되길 바랍니다.
몰약을 아기 예수님께 바치면서 우리의 쓰라린 상처를 하느님께 보여드립니다. 그 상처는 우리 삶을 온통 헝클어놓지만, 결국 그 상처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 자비와 만납니다. 매번 힘없이 부서지는 우리들, 상처 입은 마음을 다시금 아기 예수님께 바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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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5shWBQBO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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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만 안 하면 절대 외로울 일 없다>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구에게 당신을 드러내 보이시는가?’를 묵상하는 날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동방박사들과 헤로데가 대조되어 나타납니다. 헤로데는 동방박사들에게 “가서 그 아기에 관하여 잘 알아보시오. 그리고 그 아기를 찾거든 나에게 알려 주시오.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마태 2,8)라고 ‘거짓말’합니다. 그는 자신의 경쟁자 메시아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만나려면 먼저 ‘진실해야’ 합니다. 누가 거짓말하는 사람과 사귀고 싶겠습니까?
깊은 산속에 유명한 절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 절의 주지인 혜통대사에게는 두 제자가 있었는데 누구에게 주지 자리를 넘겨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지 스님은 두 제자를 불렀습니다. “오늘 너희에게 곡물 한 포대기를 나눠줄 것이다. 봄이 되거든 이 씨앗을 파종하여 정성껏 길러야 할 것이야. 또한, 가을이 되어 곡식을 거둬들이거든 나에게 가져오도록 하여라.” 주지 스님은 이렇게 분부한 다음 지나가는 말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마 곡식을 더 많이 거둔 사람이 미래 주지가 될 것이야.”
어느덧 시간이 흘러 곡식이 무르익자 제자인 ‘지능’은 곡식을 한 짐 가득 싣고 주지 스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다른 제자인 문원은 빈 지게를 지고 올라오는 것이었습니다. 이 광경을 보고 혜통대사가 물었습니다. “어찌하여 너는 빈손으로 올라오는 것이냐?” “스님, 송구스럽습니다. 제가 파종을 제대로 하지 못한 탓에 곡식이 발아하지 못했습니다. 하여 쌀 한 톨 얻지 못하고 빈손으로 올라오는 길입니다.”
혜통은 그 대답을 듣고 그 즉시 문원을 미래의 주지로 지명했습니다. 이에 다른 제자인 ‘지능’이 그 결과를 인정할 수 없다며 혜통에게 따져 물었습니다. “스님, 분명 곡식을 더 많이 거둔 사람에게 주지 자리를 물려주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어찌 쌀 한 톨 얻지 못한 문원에게 그 자리를 물려주려 하십니까? 저는 스님의 결정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자 혜통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원래 너희 둘에게 준 씨앗은 모두 삶았던 씨앗이다. 그런데 어찌 삶은 씨앗에서 싹이 날 수 있겠느냐?”
장자는 말합니다. “진실로 슬픈 사람은 소리 내지 않아도 슬픔이 느껴지고, 진실로 화를 내는 사람은 성내지 않아도 화가 느껴지며, 진실로 다정한 사람은 웃지 않아도 친근함이 느껴진다.” 이 말은 ‘진실’이 작용하는 공간이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사람의 관계는 육체적 관계, 정신적 관계, 마음적 관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아무리 육체적으로 자주 만나도 정신적으로는 싫은 사람일 수 있고, 아무리 정신적으로 추앙하더라도 심적으로는 멀리하고 싶은 사람일 수 있습니다. 마음으로 관계 맺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친밀한 관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가지 않게 만드는 것이 ‘거짓말’입니다.
‘거짓’이 발동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기 영광’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왕으로 섬기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이 수렁에 빠져있습니다. 이것을 원죄라 합니다. 사람은 본성적으로 다 자기 생각을 먼저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한 행동은 무엇이었을까요? 무화과 잎으로 자신의 몸을 가리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자신은 거짓으로 자신의 영광을 잃는 것을 방어합니다.
예수님은 사탄을 “거짓말쟁이이며 거짓의 아비”(요한 8,44)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 나의 영광을 포기하여 진실해지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모송을 바칠 때 항상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이 진실해지기 위해 한 노력이 바로 세 가지 선물을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또 보물 상자를 열고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마태 2,11)
황금은 아기 예수님이 임금이심을 고백하는 것이고, 유향은 예수님이 ‘대사제’임을 고백하는 것이며, 몰약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희생’되실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또한, 몰약은 죽은 이의 몸에 바르는 것인데 곧 육체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유향은 대사제가 성소에서 향을 피울 때 사용하는 것인데, 이는 ‘자기 생각을 봉헌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황금은 지성소에서 하느님 뜻을 상징하는 십계명 판이 들어있는 계약의 궤를 덮는 데 쓰인 것인데 곧 ‘나의 뜻’, 또는 ‘나의 자유와 의지’를 봉헌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동방박사들이 준비한 이 세 가지 선물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당신의 육체와 혼과 영을 내어주셨기에, 우리도 그분을 위해 나의 육체적 욕망과 정신적 교만, 그리고 나의 자유까지도 내어드리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 5,8)라고 하셨습니다.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사람은 거짓말을 하게 되어있고 그러면 사람과 하느님과의 관계를 맺을 수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마음을 닫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주소를 알려주지 않으며 놀러 오라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은 진실하십니다. 그래서 별을 보내셨습니다. 진실하지 않은 사람은 마음을 감추고 나아오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 마음 안에는 누구도 들어갈 수 없어서 외로워집니다.
“오늘 딸기는 산지에 비가 와서 평소보다 덜 달고, 조직이 다소 무릅니다. 수박, 참외는 아직 제철이 아니어서 덜 답니다. 구입에 참조하십시오.” 한 백화점의 식품매장에 실제로 걸려있던 안내문입니다. 이 백화점은 단순히 딸기를 파는 것이 아니라 신뢰를 팔았던 것입니다. 이런 솔직함이 진실한 관계를 원한다는 것을 우리는 다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백화점에 또 가게 될 것입니다.
외로워지고 싶지 않거든 거짓말하지 맙시다. 육체와 정신과 마음의 영광을 포기합시다. 그러면 거짓말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거짓말을 하면 나의 영광을 위해 너를 이용하겠다며 다가가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은 마음이 깨끗한 사람에게 당신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사람이 고립되고 외로워지는 이유는 스스로 거짓의 가면을 쓰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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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이다. 오늘의 전례는 예수님 탄생의 의미를 확인하고 그분이 만민의 주님이심을 공적으로 선포한다. 그래서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진 구원과 교회의 보편성을 장엄하게 선포하는 것이다. 오늘의 주제는 “찬란한 빛”이다. 이 빛은 어둠을 이기고 앞길을 밝히는 희망의 표지이다.
복음: 마태 2,1-12: “별”, 삼왕에게 경배 받은 아기
오늘 복음에서 동방박사들의 동방이란 동쪽 즉 다마스쿠스 쪽을 의미한다. 이곳에서 성서를 열심히 읽으며, “시대의 징표”를 잘 살폈던 히브리인들을 말한다. 별은 사람의 아들의 징표로서 영광의 십자가의 모습이다(24,30). 박사들이 찾아온 아기는 수천 년 기다려온 분이며, 오셔야 할 분으로 성서에 예언된 분이시다.
박사들은 동에서 본 별이 다시 나타났을 때에 그것을 보고 기뻐하였으며, 그 별이 아기가 있는 곳에 이르러 멈추어 빛나는 것을 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이 아기는 왕이며 성서적으로 “구세주”이신 분이시다.
복음에 나오는 박사들의 의미는 깊다. 그들의 고국이 어디든 간에 그리고 그들의 직업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들은 그리스도를 찾아 모여드는 이방인들의 세계를 의미하고 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구원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죄로부터 구원하러’ 오시는 ‘그 백성’은 온 인류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태오 복음을 맺는 ‘선교사명’의 내용이 이미 동방 박사들의 이야기 속에 예고되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라.”(28,19) 즉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모든 시대, 모든 사람들에게 주시는 ‘선물’이시다. 항상 이 선물을 받으면서 그분을 알아 뵈워야하기에 항상 새로운 신비이다. ‘공현’이 우리의 삶 속에 새롭게 이루어져야 한다.
이제 주님께서는 당신을 내어주실 때 당신을 알 수 있는 방법과 수단도 주신다는 것이다. 박사들에게는 별을, 헤로데에게는 “메시아가 태어날 곳이 어디인지”(4절) 성서상의 증거를 주신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신앙의 ‘빛’은 겸손하고 준비된 마음에 의해서만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점이다.
헤로데나 대사제들에게는 성서의 증거도 그들에게 믿음을 갖게 하기에는 부족하였다.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왕들에게는 불확실한 ‘증표’도 도움이 되었다. 은총의 작용에 따랐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들이 찾던 ‘왕’을 베들레헴의 보잘 것 없는 한 아기에게서 발견하였고 경배 드리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11절)
이 등장인물들의 여러 가지 태도는 예수께서 앞으로 당하게 될 운명을 어렴풋이 그려주고 있다. 메시아의 탄생 소식에 “헤로데 임금을 비롯하여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다.”(3절), 헤로데는 이미 그를 죽일 생각을 품는다.(7-8절) 그러나 박사들은 별을 따라 온갖 일들을 해결해 나가면서 고생 끝에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던 그 별을 다시 발견하고 “더없이 기뻐하였다.”(10절)
여기서 우리는 예수께서 제자들로부터 배척을 당하고 십자가의 고통을 통해 죽음을 맞게 되는 그 사건이 암시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동방박사의 이야기는 주님의 공현 축일의 의미가 우리의 매일의 삶 속에서 드러나느냐, 즉 그리스도의 모습이 드러나느냐 아니면 헤로데의 경우처럼 감추어져 있느냐, 더 나아가 그리스도를 제거해 버리려고 하는 삶인가 하는 것의 신비가 될 것이다.
제2독서: 에페 3,2-3a.5-6: 이방인의 구원
그리스도의 신비는 사도들에게 계시되었고. 사도들은, 예언자들은 성서를 설명하며 교회를 이룬다(5절). 이 모든 일은 오직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 이방인들에게도 즉 거룩한 계약이 없는 그들에게도 복음으로 그들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옛 약속에 구원의 공동 상속자, 한 몸이, 동참자가 된다.(6절) 하느님 앞에 이미 성령과 함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람을 구별하는 것은 없다. 모든 사람이 그분의 크신 은총을 받고 있는 것이다.
구세주께서는 이방인들에게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셨다. 시대의 징표를 깨어 기다리던 삼왕들은 구세주를 만났다. 이 삼왕들은 이방인들을 대표하는 사람들이다. 구원을 베푸시는 하느님은 인간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모든 이를 구원에로 부르시는 분이시다. 인간은 모두가 당신의 모상이며 당신과 같은 모습이 되기를, 그분을 닮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자기들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선민사상이 힘을 잃게 된다. 우리도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독선적인 면을 가지고 있지나 않은지 모르겠다. 하느님을 잘 섬기고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러한 독선적인 면이 없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며, 하느님을 전해주려고 하지 그들을 판단하지는 않는다. 하여간에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이라도 삼왕과 같이 깨어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며 그들이 구원받는 것도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즉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구원에로 초대를 받았다는 것(에페 1,4-5), 이것이 하느님의 뜻이고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일, 인류 전체가 하느님께로 되돌아가는 것이 그분의 원하심이다. 그래서 모두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모두 하느님의 자녀로서 형제자매가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복음선포는 매우 중요한 우리의 사명이다.
이제 우리에게는 증거하는 삶이 있어야 한다. 구원자로서 그리스도를 지금, 여기서부터, 나를 통해서, 나 자신을 통해서 드러내 보일 수 있어야 한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이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과제이며 사명이다. 우리만이 아닌 모두가 구원에로 나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공동구원의 의미가 여기에 있다. 그리스도의 몸을 통하여 그 안에서 모두가 구원을 받아야 한다.
우리 모두가 영광의 주님을 드러내 보이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이러한 삶은 생명의 십자가에서 나타난다. 오늘 이방인들에게 당신을 드러내 보이신 주님은 아기가 아니다. 십자가를 통한 영광의 주님, 구세주로 오신다. 이 신비가 나의 십자가를 통해 드러나서 그리스도가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모습이 더 선명하게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삶을 통하여 우리는 예비자들을,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고, 그들을 하느님께 바쳐드리고 맡기는 행위는 진정 우리의 삶을 더 열심히 하도록 이끌어줄 것이다. 그들에게 모범을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도 기도를 열심히 하게 될 것이다. 예비자들을 인도하여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도록 하자. 여기에 기도와 실행, 희생, 도움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주위에 있는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구체적으로 도움이 되는 일도 하여야 한다. 처음 만나는 사람이라도 한 형제자매임을 느끼도록 하여 하느님께로 인도할 수 있다. 지금부터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교회를 위하여 한다고 생각하고 말이나 몸가짐이나 모든 것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한다고 실천해 나가자. 어려움이 있으나, 용기를 가지고 살 수 있는 은총을 구하자.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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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부르심과 응답>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듣고 헤로데 임금을 비롯하여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다."(마태 2,1ㄴ-3)
동방박사들의 이야기에 대해서 이런 의문들이 생깁니다. ‘그분의 별’을 동방박사들만 보았을까? 밤하늘의 별이 그들의 눈에만 보이고,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안 보였을까? 그 별을 본 사람들이 많았다면, 그 별의 의미를 해석할 능력이 있었던 사람들이 동방박사들 말고는 없었을까? 아니면, 다른 사람들도 그 별을 알아보았지만 무시한 것일까? 그 별은 정말로 별이었을까? 아니면 상징적인 표현일까? 이런 의문들에 대한 답은 예루살렘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헤로데는 하느님을 안 믿었고, 성경 지식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어떤 표징이 주어져도 알아보지 못할 사람이었습니다. 또는 전혀 관심이 없었을 사람이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의 말을 듣고 깜짝 놀라기만 하는 것으로 그친 예루살렘 주민들은, 메시아 강생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던 사람들, 또는 메시아를 기다리지 않은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즉 세속 일만 생각하고(먹고사는 일만 생각하고) 영적인 일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던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메시아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마태 2,5-6), 메시아께서 태어나셨다는 동방박사들의 말을 듣고서도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머리’로만, 또는 ‘입술’로만 신앙생활을 하고, ‘삶’으로는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은 사실상 알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삶으로 실천하지 않는 지식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지금까지 한 말을 요약해서, “부르심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졌지만, 동방박사들만 응답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 실제로 어떤 천문학적 현상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진짜 그런 별이 나타났는지, 아니면 별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어떤 표징이 나타났는지, 아니면 천사를 별이라고 표현한 것인지,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습니다. 어떻든 모든 사람이 다 볼 수 있는 어떤 표징이 나타난다고 해서 모든 사람에게 표징이 되는 것은 아니고,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만 표징이 됩니다. 동방박사들은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응답한 사람들입니다.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했느냐, 아니냐가 중요할 뿐입니다. (신앙인이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 아니라,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탈출했을 때의 일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때 하느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표징’으로 항상 이스라엘과 함께 계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밤낮으로 행진할 수 있도록 그들 앞에 서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 속에서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 속에서 그들을 비추어 주셨다. 낮에는 구름 기둥이, 밤에는 불기둥이 백성 앞을 떠나지 않았다."(탈출 13,21-22) 그렇게 하느님께서 항상 함께 계셨는데도, 이스라엘은 걸핏하면 하느님을 잊어버렸고, 금방 우상숭배에 빠졌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는 것이 눈에 안 보여서 그랬던 것이 아니라, 마음이 다른 데로 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헤로데는 박사들을 몰래 불러 별이 나타난 시간을 정확히 알아내고서는,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 말하였다. ‘가서 그 아기에 관하여 잘 알아보시오. 그리고 그 아기를 찾거든 나에게 알려 주시오.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 그들은 임금의 말을 듣고 길을 떠났다. 그러자 동방에서 본 별이 그들을 앞서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이르러 멈추었다.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또 보물 상자를 열고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그들은 꿈에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다."(마태 2,7-12)
이 이야기를 겉으로만 보면, 헤로데의 의도가 무엇이었든지 간에 헤로데가 동방박사들을 베들레헴으로 인도해 준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것은 아니고, 하느님께서는 처음부터 동방박사들을 베들레헴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왜 중간에 예루살렘을 거치게 하셨을까? 그것은 예루살렘에(이스라엘에) ‘메시아 강생’이라는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사명을 맡기신 것으로 해석됩니다. 또 헤로데를 만나게 하신 것은, 당시의 통치자를 통해서 ‘메시아 강생’을 공적으로 확인하게 하신 일로 해석됩니다. 동방박사들이 예수님께 바친 예물 가운데 ‘황금’은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이신 분’ 이라는 것을 상징하고, ‘유향’은 예수님의 사제직을 상징하고, ‘몰약’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상징한다고 해석합니다. 그런데 동방박사들은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받았나? 그들은 예물을 바치기만 하고 ‘빈손’으로 돌아갔나?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큰 기쁨’과 ‘평화’를 얻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이 예수님께 바친 예물은 ‘작은 것’이고, 그들이 예수님에게서 받은 기쁨과 평화는 ‘큰 은총’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바친 것만 생각하고, 받은 것은 잊어버릴 때가 많은데, 주님은 언제나 항상 우리가 바친 것보다 훨씬 더 큰 은총을 주시는 분입니다.)
공현 대축일은 단순히 동방박사들이 예수님께 경배한 일을 기념하는 날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당신을 드러내신 일을 경축하는 날입니다. 우리가 먼저 예수님을 찾아 나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 예수님을 우리가 잘 맞아들이는 것이 ‘공현’의 진짜 의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비뚤어지고 뒤틀린 이 세대에서 허물없는 사람, 순결한 사람,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십시오."(필리 2,15) 모든 신앙인은 ‘그분의 별’처럼 이 세상을 비추는 하나의 별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 주님에게로 나아가는 일이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을 주님에게로 인도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신앙인답게 살아서 별처럼 빛나는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을 잘 맞아들이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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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985년 신학교 4학년 때입니다. 군에 가기 위해서 ‘신체검사’를 받았습니다. 의무관은 ‘현역’ 판정을 내렸습니다. 그렇게 저는 30개월 군 복무를 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보니 ‘방위, 면제’ 판정도 있었습니다. 방위는 18개월 집에서 출퇴근 하는 군 복무였습니다. 면제는 말 그대로 군 복무를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신체검사를 마치고 친구들끼리. ‘면제는 신의 아들, 방위는 사람의 아들, 현역은 어둠의 자식’이라고 농담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신체는 건강하지만 국가 유공자의 자녀이기에 현역에서 제외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독자도 현역에서 제외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경우에도 현역에서 제외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당시에 저는 국가에서 정한 기준에 대해서 의심해 본적도 없고, 국가에서 정한 기준은 당연히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대학 선발에도 성적을 중심으로 학생을 뽑지만 농어촌 전형, 지역 전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성적만으로 뽑을 경우에는 지역과 농어촌에 사는 학생들이 불리하기 때문에 정한 기준입니다. 미국에서도 대학생을 뽑을 때 이민자들에 대한 배려가 있다고 합니다. 이민자들이 미국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제도라고 합니다.
오늘 문득 ‘공정과 정의’라는 말을 생각해봅니다. 진화론에 익숙한 현대인들은 ‘적자생존, 약육강식, 자연도태’라는 말을 받아들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 사회는 ‘이익’이라는 절대적인 가치와 기준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런 사회에서 정의는 ‘실력, 능력, 업적’으로 평가하는 것입니다. 대학의 선발 기준, 직장의 선발 기준도 철저하게 실력과 능력을 중심으로 정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래야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능력과 실력, 업적에서 뒤떨어지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또 다른 기준이 있습니다. ‘공정’이라는 가치입니다. 노약자와 어린이를 우선 보호하는 제도입니다. 능력과 업적이라는 기준에서는 합당하지 않습니다. 소득이 없거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의료비를 지원하고, 생활비를 지원합니다. 이것도 능력과 업적이라는 기준에서는 합당하지 않습니다. 저도 미국에서 성직자이기에 병원비 일부를 탕감 받은 적이 있습니다. 성직자들을 위한 자선기금이 있다고 합니다. 정의로운 사회가 분명 바람직합니다. 모두가 같은 선상에 있다면 별 문제가 없습니다. 정의로운 사회에서는 반칙과 불법이 통용되지 않기에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은 모두가 같은 출발점에 있지 못합니다. ‘금수저와 흙수저’가 있습니다. 타고난 신체의 능력이 다른 경우가 있습니다. 타고난 정신의 능력이 다른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정의보다는 공정이라는 가치와 기준이 적용되어야 합니다.
오늘은 주님공현 대축일입니다.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님께 경배 드린 것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하느님의 아들로 드러난 것이 아니라, 만민에게 하느님의 아들로 드러나셨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 한 번 공적으로 드러나는 때가 있습니다. 맞습니다.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 받으실 때입니다. 그때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왔고,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주님께서 공적으로 드러난 것은 주님의 성탄, 동방박사의 경배, 세례 때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이유는 정의를 세우기 위해서는 아니었습니다. 정의는 창과 칼, 권위와 권력으로 세울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이유는 공정을 세우기 위해서 였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오늘 성서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오늘 화답송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는 하소연하는 불쌍한 이를, 도와줄 사람 없는 가련한 이를 구원하나이다. 약한 이, 불쌍한 이에게 동정을 베풀고, 불쌍한 이들의 목숨을 살려 주나이다.” 그리고 오늘 제2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다른 민족들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복음을 통하여,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한 몸의 지체가 되며 약속의 공동 수혜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주님의 영광이 네 위에 떠올랐다.” 빛은 정의롭게 비추지 않습니다. 빛은 공정하게 모든 곳을 비추기 마련입니다. 주님의 영광도 정의롭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주님의 영광은 모든 곳에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예수님의 삶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습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지만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합니다. 하느님 나라에서는 성한 사람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 때문에 더 기뻐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리의 기도를 칭찬하셨고,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셨습니다. 세리와 창녀들이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위선과 교만을 질책하셨습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지나가는 것보다 힘들다고 하셨습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고, 중풍병자를 고쳐 주셨고,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갈릴래아의 어부들을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오르신 것은 공정을 위해서 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오늘 에페소인들에게 보내 편지에서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는 것은 혈연이나, 능력, 학벌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삶으로 증거하고, 신앙의 빛으로 비추어야 참된 상속자가 된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많은 성당과 교회는 성탄을 맞으면서 트리를 만들고 그 위에 예쁜 불을 밝히고 있습니다. 도시의 밤에 많은 십자가가 붉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불을 밝히고, 트리의 전구를 밝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바로 우리들의 신앙의 불을 밝히는 것, 희망의 빛을 비추는 것 그리고 사랑으로 세상을 따뜻하게 하는 것이 주님을 드러내는 주님께 경배하는 참된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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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박혁호 미카엘 신부님]
<동참하시는 주님>
새해 첫 주일인 오늘은 ‘주님 공현公顯 대축일’입니다. ‘주님 공현’은 ‘주님께서 당신을 공적으로 드러내신다.’라는 뜻입니다. 즉 이방 민족으로 표현된 동방의 박사에게 예수님께서 경배를 받으심으로서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님이 세상에 드러나셨음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동방박사들은 별을 보고 유다인들의 임금이 태어나실 것을 알아차리고 태어나실 위대한 분을 경배하기 위해 별의 인도를 받아 먼 길을 떠납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이야말로 유다인의 임금이 태어날 곳이라 생각하여 그곳에 갔지만 그곳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별의 인도를 받아 드디어 그분이 태어나신 곳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도착한 곳은 조그마한 마을인 베들레헴, 그것도 가축들의 오물 냄새가 진동하는 마구간이었습니다. 그곳에서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 예수님을 발견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과는 너무나 다른 상황에 많이 놀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이 온 세상의 임금이시며 구원자이심을 받아들이고 경배하며 그들이 가져간 예물을 드린 후 자기 고장으로 돌아갑니다.
아마도 돌아가는 길에 그들은 궁금했을 것입니다. 온 세상을 다스리실 위대한 분이 왜 이스라엘의 중심인 예루살렘이 아닌 유다의 작은 고을인 베들레헴에, 그것도 화려한 궁전 같은 곳이 아닌 초라한 마구간에서 태어났으며, 그분이 누인 곳도 화려한 요람이 아닌 가축들의 먹이통인 구유일까 하고 말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베들레헴은 ‘빵의 집’을 뜻합니다. 그리고 구유는 가축의 먹이통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탄생이 먹히는 삶을 위한 것임을 알려줍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빵이 되어 우리에게 먹히시어 힘을 주시고 우리를 영원히 살리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마구간에 태어나심은 가장 낮은 자리를 차지하셨음을 드러냅니다. 낮은 곳에서 힘들어하고 좌절하는 사람들의 친구로 오셨음을, 그리고 그들의 고통에 깊이 동참하고 계심을 드러내 주는 표징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죄와 고통, 죽음이라는 불쌍한 처지에 있는 우리를 위에서 내려다보시며 동정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의 처지로 내려오시어 고통에 함께 동참하시며 사랑으로 돌보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심지어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우리를 영원히 살리시기 위해 당신 자신을 양식으로 내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이 세상에 오셨고, 지금 여기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주님 공현 대축일은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코로나19로 참으로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시선도 이 어려움에 집중되다 보니 자주 두려움에 휩싸여 평화를 잃어버리곤 합니다. 지금이 바로 기도 안에서 주님께 우리의 시선을 드리고 더 가까이 다가가야 할 때입니다.
내 처지와 상황을 깊이 이해하시고, 이미 우리의 어려움에 동참하고 계시며 우리의 삶을 이끌고 계신 그분을 만나게 될 것이고 깊은 위로와 평화를 얻게 될 것입니다. 이 시기, 기도 가운데 주님과 더욱 자주 만나 힘을 얻는 은총의 시간이 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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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원석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이제는 우리 공현을..>
이 땅과 온 세상은 바이러스와의 전쟁이 한창이고 인간의 삶은 고단하고 피폐하며 두렵기만 합니다. 나약한 인간은 세상의 두려움에 용기를 잃거나 숨거나 눈을 감음으로써 자신과는 무관한 일이라고 무시하려 합니다. 이 두려움은 사람 사이의 거리두기를 하게 만들뿐만이 아니라 하느님과도 더 거리를 두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가난하고 약한 아기의 모습을 가진 주님의 공현은 주님이시기에 언제든지 아무렇게나 할 수 있는 것 즈음으로 생각할지 모르나, 예수님에게 공현은 그저 쉬운 사건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도 많은 두려움을 가지고(마태오 26,39 참조) 세상을 향해 당신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는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에도 우리와 거리를 두지 않기 위해 모든 것을 다 비우시는 큰 결심을 하시고 가난하고 약한 모습으로 오시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세상을 향해 거리는 둘 수 있지만, 오늘 희망을 선포하는 하느님과는 거리를 두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웃과는 거리를 두어야겠지만, 그들을 위한 간섭은 거리를 두어야겠지만, 그들을 향한 뒷담화는 거리를 두어야겠지만, 그들의 고통에는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웃의 슬픔에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여러분을 세상에 드러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리하셨듯이 내가 희망이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희망을 두는 이유입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이 증명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희망이 된 이유는 주님께서 모든 것을 비우시고, 우리의 희망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희망은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희망은 주님처럼 베푸는 것입니다. 희망은 내 안의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 증거 하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오늘 우리 앞에 나타난 아기가 우리의 기쁨이요 희망이 되기 위해서는,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우리가 그 사실을 항상 깨어 믿고 주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나로부터 변화되어 이곳에 하느님 나라를 만들어 가야겠습니다.
하느님은 이제 여러분의 공현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신앙과 말씀으로 세상의 희망이 되는 여러분이 되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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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교구 윤여홍 시몬 신부님]
<기쁜 소식>
찬미 예수님! 부제반 때의 일입니다. 저는 동기 부제들과 함께 졸업여행으로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하루는 베들레헴의 ‘주님 탄생 기념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으로만 듣던 그곳에서 직접 미사를 봉헌하니 감동과 기쁨이 매우 컸습니다. 그런데 미사를 봉헌하던 중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당시 예수님의 탄생을 직접 목격한 동방박사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오늘 복음은 아기 예수님을 뵙기 위해 길을 떠난 동방박사들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와서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단순히 ‘메시아께서 탄생한 곳이 어디입니까?’하고 묻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수님 탄생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즉 메시아의 탄생을 함께 기뻐하자고 초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동방박사들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깜짝 놀라기만 할 뿐, 기뻐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헤로데는 아기 예수님께서 자신의 왕권을 위협한다고 생각하여 죽이려고까지 합니다.
이처럼 똑같이 ‘기쁜 소식’을 들어도 기뻐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은 기뻐하지만, 그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그 소식이 아무리 ‘기쁜 소식’이어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다시 말해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열심히 준비하고 노력한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님을 만난 후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 자신들이 만난 메시아를 이웃들에게 기쁘게 선포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매일의 미사를 통해 예수님을 만나는 우리는 삶은 어떠합니까? 이웃들에게 예수님을 기쁘게 선포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길 간절히 바라고 원해서 예수님을 따라나선 사람들입니다. 또한, 예수님께 날마다 경배를 드리는 신앙인입니다. 그러므로 현세의 삶에 만족하며 안주할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가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얻은 은총과 기쁨을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 어렵고 힘든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동방박사들을 구원으로 이끌어주셨듯, 세상의 모든 사람을 하느님 나라로 인도하는 ‘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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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마태2,2)
<공현의 삶!>
오늘은 세상을 구원하러 이 세상에 태어나신 빛이신 주 그리스도께서 모든 민족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신 것을 기념하는 '주님공현대축일'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려온 유다인들에게 먼저 나타나지 않으시고, 이방인이요 이민족인 동방 박사들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유다 땅 베들레헴에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께서, 유다인들 만에 그리스도가 아니라, 모든 민족들의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루살렘아,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민족들이 너의 빛을 향하여, 임금들이 떠오르는 너의 광명을 향하여 오리라."(이사60,1.3)
그리고 이방인의 사도인 바오로는 에페소 교회를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곧 다른 민족들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복음을 통하여,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한 몸의 지체가 되며 약속의 공동 수혜자가 된다는 것입니다."(에페3,6)
동방 박사들은 동방에서 별의 인도를 받아 구유에 누워 계신 아기 예수님을 만나 경배드리고, 보물 상자를 열어 아기 예수님께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립니다.
'황금'은 예수님께서 '왕 중의 왕'이심을, '유향'은 그분이 바로 '우리의 구세주'이심을, '몰약'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는 '우리의 희생제물'이심을 상징합니다.
우리도 동방 박사들처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경배드리고, 그분께 합당한 예물을 드립시다!
합당한 예물,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받으시고 기뻐하실 예물은, 바로 '우리의 삶인 공현'입니다. 곧 '나의 삶으로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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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린 산양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산양은 늘 슬펐습니다. 자신은 다른 친구 산양과 너무 달랐기 때문입니다. 우선 풀을 잘 뜯어 먹지 못했습니다. 억지로 먹으려 했지만, 소화가 전혀 되지 않았습니다. 또 다른 산양과 달리 너무 날카로운 이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를 보고 다른 산양이 거리를 두고 가까이에 오지 않으려 했습니다.
다른 산양과 어울리기 힘들 정도의 큰 차이 때문에 이 어린 산양은 다른 모습의 자신을 원망했고 또 자기를 낳은 부모를 원망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숲에서 호랑이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산양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호랑이였습니다.
만약 이 호랑이가 계속 산양의 무리에 있으면서 스스로 산양이라고 생각했다면 자신의 재능을 전혀 살릴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제대로 살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누구인지를 찾으면서 제대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지금의 자리에서 능력을 발휘하기 힘들다면 나를 천천히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의 자리에 있는 것인지를 따져 물어야 합니다. 남들의 기대와 사회적 시선 때문에 고민해서도 안 됩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나를 쓰시기 위해 이 땅에 창조하셨습니다. 큰 쓰임새가 있는 우리입니다.
유대 지역은 로마인들에게는 보잘것없는 미미한 지방이었고, 헤로데는 로마 정부의 임명을 받아 그 지방을 다스리고 있었던 소임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속임수에 능하였고 잔인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왕권 노이로제에 걸려서 자기 외의 ‘왕’이란 소리만 들어도 마음이 몹시 불편했습니다.
모든 예언자가 그토록 예언하였고 모든 백성이 그토록 기다리던 구세주가 탄생했을 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고 그 백성들은 그에게 관심을 기울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동방의 현자들이 찾아온 것입니다. 가스팔, 멜키올, 발타샬의 이름을 갖고 있었던 현자들이 유다인의 왕을 찾아왔습니다.
언젠가는 유다인의 왕이 오실 것이라고 믿고 있었는데, 동방의 현자로부터 이 소리를 듣게 되니 온 이스라엘이 들썩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동방의 현자들은 당시의 대국 페르시아의 현자들이었으며 당시의 대 민족 아라비아인들이기에, 보잘것없는 나라라고 생각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두 술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왕권 노이로제에 걸려 있는 헤로데는 어떻겠습니까?
그는 자기 자리를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이기심과 사회적 시선만을 생각하면서 세상에 지워지지 않는 커다란 악행을 저지르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나의 자리를 잘 지켜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을 알아볼 수 있으며 하느님 뜻에 맞게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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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 사슬 증후군>
'코끼리 사슬 증후군'이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충분히 힘을 갖고 있음에도 주어진 한계를 스스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서커스단에서 코끼리를 길들이는 방법에서 유래되었는데 어린 코끼리의 뒷다리를 말뚝에 묶어 놓습니다. 이 말뚝에서 벗어나려고 코끼리는 안간힘을 쓰지만 벗어날 수 없어서 결국 포기하게 됩니다. 이제 시간이 지나 어린 코끼리가 성장한 코끼리가 되었을 때는 어떨까요? 다리가 사슬에 의해 말뚝에 묶여있지 않음에도 말뚝 주변을 벗어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힘을 써도 안 된다고 스스로 규정을 짓고 있기 때문입니다.
코끼리를 말뚝 근처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했던 사슬이 우리 자신에게도 있는 것이 아닐까요? “할 수 없어.”라는 생각을 들게 하는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그 장벽을 뛰어넘어야 자신의 힘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게 됩니다.
안 되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참 많습니다. 그러나 되는 것과 할 수 있는 것도 참 많습니다. 할 수 없다면서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없는 것도 있지 뭐~~”라면서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수 있는 강한 우리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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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물을 바쳐라>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은 사랑이시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에 이 세상에 오셨지만, 주님을 알아보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세상에 구원자 예수님께서 오셨지만, 동방의 박사들이 경배하기 전까지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바로 동방의 박사들을 통하여 주님의 탄생이 공적으로 드러났음을 기념합니다. 이 시간 동방의 박사들이 예수님께 경배드리고 예물을 바쳤듯이 우리에게도 주님을 알아 뵙고 진정한 예물을 바쳐드릴 수 있는 마음을 불러일으켜 주시길 기도합니다.
우리를 죄악으로부터 구원해주실 구세주가 오셨다는 것은 큰 기쁨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분의 탄생을 두려워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누리고 있는 자기의 기득권을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움켜쥔 것을 놓으면 자유를 얻을 것인데 움켜쥐고 있었기 때문에 잃어버립니다. 먼저 주면 잃을 것이 없는데 주지 않으려 하니까 결국은 누가 빼앗지 않아도 빼앗긴 기분입니다. ‘기쁨을 나누면 시기 질투가 되고, 슬픔을 나누면 약점이 된다’는 말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닙니다. 한 임금은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 목숨까지도 내어놓는 임금이고 다른 임금은 자기 자리와 권력을 지키기 위해 모략을 꾸미고 거짓으로 속이며 사람들을 학살하고 말았습니다. 오늘 우리 삶의 현장에서 소위 갑질을 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복음을 보면 동방의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이 말을 들은 헤로데임금을 비롯하여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습니다. 왜 놀랐을까요? 헤로데의 입장에서, 보면 내가 임금인데 감히 어디에 다른 임금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하는 놀라움입니다. 또한, 백성들이 놀란 것은 저 소리를 들은 헤로데가 어찌 나올까? 불똥이 튀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헤로데는 박사들을 몰래 불러 별이 나타난 시간을 정확히 알아내고서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 “가서 그 아기에 관하여 잘 알아보시오. 그리고 그 아기를 찾거든 나에게 알려주시오.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하고 말하였습니다. 이 말은 진심이 아니었습니다. 속셈은 따로 있었습니다. 자기 말고 다른 왕이 나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2살 이내의 남자 아기를 다 죽이고 말았습니다. 권력에 대한 욕심이 큰 죄악을 가져온 것입니다.
사실 헤로데는 로마를 위한 전쟁에 큰 공을 세워서 기원전 47년에 총독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대성전도 짓고 세금정책도 잘 세워서 백성을 위했습니다. 자기 개인 사치품을 팔아서 백성의 식량도 사들이고 하던 선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왕권을 빼앗길까 두려워하면서부터 의심증이 생기고 의처증이 생겼습니다. 결국, 말년에 가서 폭군으로 둔갑하였습니다. 그래서 부인 미리암도 죽이고, 장모 알렉산드라도, 장남 안티파테르도 다 죽였습니다. 장남의 두 아들도 그리고 10명의 부인에게서 난 아들 중에도 왕권을 탐낸다 싶으면 다 죽이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속적인 욕심이 얼마나 큰 재앙을 가져오는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욕심이 많은 사람은 충분한데도 근심합니다.”
야고보서에 보면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가져옵니다.”(야고 1,15) “욕심을 내다가 얻지 못하면 살인을 하고 남을 시기 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면 싸우고 분쟁을 일으킵니다.”(야고 4,2)라고 말합니다. 결국 욕심을 부리면 끝이 좋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욕심을 부리지 마십시오. 욕심은 그나마 지금 처지의 행복마저도 거두어 갑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버림으로써 풍성함과 자유로움을 누리게 됩니다.
술에 만취한 베드로가 한참 비틀비틀 걷다가 전봇대 앞에서 잠시 머뭇거렸습니다. 그러더니 전봇대를 잡고 서너 바퀴 빙빙 맴을 도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는 전봇대에 기대어 땅바닥에 풀썩 주저 앉았습니다. 그리고는 중얼거렸습니다. “큰일 났군, 사방이 완전히 막혀 버렸어!”
살다 보면 사방이 완전히 막혀 버린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길이 없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길이 없어서가 아니라 내가 착각하고 있기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내 욕심이 그 길을 가려서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헤로데는 천년만년 권력을 잡을 줄 알고 욕심을 부렸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없습니다. 그는 죽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내 것을 움켜잡지 말고 하느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행복의 길입니다. 내 뜻을 관철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헤아리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동방의 이방인은 메시아의 탄생을 알아보고 멀리서 귀한 예물을 가지고 경배하러 왔습니다.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 삶의 자리를 옮겼습니다. 하느님을 발견하면, 삶의 태도를 바꿔야 합니다. 끝까지 목적달성을 위해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을 인도한 것이 무엇입니까? 예, 별입니다. 그러나 깊이 보면 별이 아닙니다. 그들의 믿음입니다. 구세주를 기다리는 간절한 믿음이 별을 찾아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박사들이 “그분의 별을 보고” 라고 표현합니다. 별이 믿음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믿음이 그분의 별을 볼 수 있게 한 것’입니다. 대사제들이나 율법학자들도 메시아의 탄생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유다인들은 주님을 주님으로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정말 등잔 밑이 어두웠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알고 있는 지식이 머리에 머물렀지 믿음으로 승화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동방의 박사들(6세기경부터 카스팔, 발타살, 멜키올이라고 불렀습니다)은 믿음이 있었기에 먼길 마다않고 주님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혹 예물과 뇌물의 차이점을 아십니까? 내가 바치면 예물이고, 남이 바치면 뇌물이랍니다. 감사해서 그저 고마워서 바치면 예물이고, 조건이 붙으면 뇌물입니다. 주님, 이것을 해 주시면 제가 이것을 꼭 하겠습니다. 이것은 뇌물이지요. 우리가 봉헌을 할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물을 봉헌해야지 뇌물을 바쳐서는 안 되겠습니다. 먼저 감사하면 나머지는 주님께서 풍성히 주십니다.
어찌 되었든 동방 박사들은 예물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들이 준비한 첫 번째 예물은 황금입니다. 황금은 가장 귀한 것이었습니다. 왕권을 말합니다. 당신을 왕으로 모셔 순종하고 살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당신은 주인이시고 저는 종입니다.’
두 번째의 예물은 유향입니다. 제사장의 권한, 다시 말하면 그분의 신분이 신적 사제인 왕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당신은 하느님이십니다.’ 신성을 말합니다.
그리고 몰약은 썩지 않게 하는 방부제를 말합니다. 왕이 죽음을 감당하는 인성을 지니신 분으로 오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썩지 않게 하는 것이기에 불사불멸을 상징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에 인간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하려고 오셨습니다. 미사 때 사제가 봉헌예물을 준비하면서 포도주에 물을 섞으면서 기도합니다. “이 물과 술이 하나 되듯이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저희도 참여하게 하소서.”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썩지 않는 새 생명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구세주로 오신 주님께 어떤 예물을 드려야 할까?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귀한 선물은 믿음의 사람이 된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는 삶으로 황금을 예물로 드려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거룩함을 유지하는 자기성화의 모습으로 유향을, 또한 불사불멸에 대한, 다시 말하면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고한 믿음의 삶을 몰약의 예물로 바쳐드려야 하겠습니다.
두 번째의 예물은 유향입니다. 제사장의 권한, 다시 말하면 그분의 신분이 신적 사제인 왕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당신은 하느님이십니다.’ 신성을 말합니다.
그리고 몰약은 썩지 않게 하는 방부제를 말합니다. 왕이 죽음을 감당하는 인성을 지니신 분으로 오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썩지 않게 하는 것이기에 불사불멸을 상징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에 인간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하려고 오셨습니다. 미사 때 사제가 봉헌예물을 준비하면서 포도주에 물을 섞으면서 기도합니다. “이 물과 술이 하나 되듯이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저희도 참여하게 하소서.”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썩지 않는 새 생명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구세주로 오신 주님께 어떤 예물을 드려야 할까?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귀한 선물은 믿음의 사람이 된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는 삶으로 황금을 예물로 드려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거룩함을 유지하는 자기성화의 모습으로 유향을, 또한 불사불멸에 대한, 다시 말하면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고한 믿음의 삶을 몰약의 예물로 바쳐드려야 하겠습니다.
그 구체적인 실천 방안 중에, 하나는 선교입니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신을 가졌다면 예비자 인도를 통해 그 믿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빛을 받았지만 많은 사람은 아직 그렇지 못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에게 주님을 증언할 의무가 있습니다. 영생에로 인도된 기쁨은 혼자 누리지 말고 이웃에게도 전해야 합니다. 전교는 우리의 소명이고 그래야 믿음이 성장하고 기쁨도 커집니다. 그러므로 예비자를 인도하시고 인도된 사람이 꼭 영세를 받을 수 있도록 정성을 기울여 열매 맺는 기쁨을 차지하기를 바랍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예수님을 경배한 후 “아기를 찾거든 나에게 알려주시오”한 왕의 부탁보다도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하느님의 지시를 더 중요하게 받아드려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습니다. 여기서 ‘다른 길로 돌아갔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들은 내 길이 아니라 하느님의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내 계획, 뜻을 내려놓고 하느님을 차지하였습니다. 그들은 믿음의 사람,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더 이상 과거에 매인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인도를 받는 사람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인간적인 요구보다도 천상 것을 우선시하고 하느님의 뜻을 더 중요시하는 삶의 방향전환이 꼭 필요합니다. 일상 안에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다가오는 세속적인 욕심을 버리고 하느님의 손길을 꼭 잡으시길 기원합니다. 사람에게 매이거나 세상 것에 묶여 천상을 놓치는 일은 결코 없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여러분 위에 주님께서 떠 오르시고, 그분의 영광이 여러분 위에 나타나기 바랍니다.(이사 60,2)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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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인생 순례 여정>
-목표, 이정표, 도반, 기도-
오늘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인류의 빛이신 주 예수님께서 모든 민족들에게 자신을 드러낸 날입니다. 오늘 대축일 주일이기에 기념하지 못하는 동방교회의 4대교부중 친구관계인 두분인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를 꼭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주님은 이사야 예언자의 입을 빌어 우리 모두 주님을 반사하는 ‘주님의 반사체反射體’로 ‘주님의 빛’으로 살 것을 촉구합니다. 발광체發光體는 주님뿐이고 우리는 다만 주님의 빛을 반사하는 반사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예루살렘아,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주님의 영광이 네 위에 떠올랐다.”
계속되는 성탄축제입니다. 코로나로 인해 두 해나 불러보지 못한 화답송 후렴을 다시 흥겹게 부르니 마음이 활짝 열리는 느낌입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 주님 공현 대축일 화답송 후렴도 신바람 나게 만듭니다. 오늘 하루 짧은 기도 노래로 바치시기 바랍니다.
“하느님 만 백성이 당신께 조배하리이다.”
주님 공현 대축일 화답송뿐 아니라 성탄 낮미사, 성가정 축일 미사, 어제의 성모님 대축일 미사 화답송도 얼마나 흥겨웠던지요! 조배朝拜란 말이 예배禮拜, 경배敬拜, 세배歲拜란 말과 연상되어 새롭게 마음에 와닿습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부분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또 보물 상자를 열고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우리 역시 동방박사들과 함께 아기 예수님께 경배드리고자 이 거룩한 대축일 미사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과연 여러분은 무엇을 예물로 바치겠는지요. 황금과 유향과 몰약대신 여러분의 귀한 예물 믿음, 희망, 사랑의 신망애의 예물을 바치시라 권하고 싶습니다.
‘절’ 배拜입니다. 불가의 고 성철 큰 스님은 자기를 만나러 온 사람들에게 삼천배三千拜를 명했다 합니다. ‘절(拜)’하라 있는 ‘절(寺)’인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절이 사라져 가는 현상과 신앙 약화가 함께 가는 느낌도 드는 시대에 우리 요셉 수도원 수도자들은 성전에 들어오고 나갈 때 마다 경배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제대 앞에 큰 절을 합니다. 참으로 하느님께 대한 흠숭의 표현으로, 또 겸손의 수련에 몸으로 하는 큰 절의 경배보다 더 좋은 수행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새해 한 살을 더 먹었습니다. 어제 저는 새해 첫날 놀랍고 신선한 체험을 했습니다. 대축일 미사후 수도원의 저와 10-30년 동안 관계를 맺고 있는 50-70대 연세의 형제자매들 9분으로부터 뜻밖에 새해 큰절의 세배를 받았고 저도 머리 깊이 숙여 새해 축하 인사를 드렸습니다. 새삼 큰절의 세배가 얼마나 귀한 미풍 양속인지 깨달으며 제 노년 인생에 대해 깊이 성찰했습니다.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오늘 미사시 독서와 복음은 가나다해 즉 매해 똑같습니다. 늘 똑같은 반복이지만 신기하게 마실 때 마다 새롭게 느껴지는 샘물같은 느낌의 오늘 대축일 말씀입니다. 2014년 안식년때 산티아고 순례후 매해 하는 강론은 오늘 말씀처럼 늘 반복입니다. 반복이지만 저에겐 늘 새로운 반복, 거룩한 반복, 중요한 반복입니다.
오늘 동방박사들이 베들레헴에 탄생하신 예수님을 방문한 일화는 그대로 인생 순례 여정을 상징합니다. 산티아고 순례 여정은 대략 30일 안팎으로 끝나고, 동방박사들의 순례 역시 몇 달로 혹은 몇 년 걸려 끝났으리라 생각되지만, 우리 인생 순례 여정은 평생입니다. 죽어야 끝나는 평생 순례 여정입니다. 제가 여기에서 늘 자문하는 물음이 있습니다.
우리 인생 여정을 일일일생 하루로 압축한다면, 또 ‘봄-여름-가을-겨울’의 일년사계로 압축한다면 어느 지점에 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제 경우는 하루로 압축하면 오후 4시, 일년사계로 압축하면 초겨울, 지금쯤 되는 느낌입니다. 이런 성찰이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하루하루 깨어 환상이나 거품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게 합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인생 순례 여정은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 여정입니다. 한해 살았다는 것은 한해 죽을 날이 가까웠다는 것을 뜻하지만, 반면 아버지를 뵈올 날이 한해 가까웠음을 뜻하기도 하니 아버지를 만날 기쁨의 남은 한해한해의 인생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철저徹底한 자각이 우리를 남은 생애, 하루하루 소중한 선물인생을 살게 할 것입니다.
인생 순례 여정에서 손꼽는 네 요소가 1.목표目標, 2.이정표里程標, 3.도반道伴, 4.기도祈禱입니다. 산티아고 순례 여정의 목표는 산티아고 대성전이었고, 오늘 동방박사들의 순례 여정의 목표는 베들레헴의 아기 예수님을 뵙는 것이었으며, 우리의 경우 평생 순례 여정의 최종 목표는 하느님 아버지가 될 것입니다. 말 그대로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 여정 중인 우리들입니다. 이런 궁극의 목표 지점인 하느님이 없다면 애당초 순례 여정이란 말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이런 궁극의 목표 지점인 하느님이 없어 무지와 허무, 무의미의 어둠 속에 헛되이 유령처럼 방황하며 살다가 인생을 마치는 이들도 참 많을 것입니다. 참으로 우선적인 것이 우리 삶의 여정의 궁극 목표 지점은 하느님 아버지임을 늘 깨어 확인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목표를 가리키는 ‘삶의 이정표’입니다. 삶의 목표 다음에 삶의 이정표 순서입니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제 방향으로 제대로 가는 것입니다. 산티아고 순례중에 이정표는 아마 수백개는 될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의 이정표는 무엇입니까? 시종일관 이들 이방의 박사들을 인도한 것은 ‘주님의 별’이었습니다.
누구에게나 보인 객관적 고정불변의 이정표가 아니라 참으로 진리이신 주님을 찾는 구도자들에게 은총의 선물처럼 발견되는 주님의 별 이정표임을 깨닫습니다. 찾을 때 드러나고 찾지 않으면 사라지는 주님의 별 이정표입니다. 참으로 종파, 인종, 국적을 떠나 당신을 찾는 누구에게나 계시되는, 열려있는 구원의 주님이심을 깨닫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깨달은 구원의 신비도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곧 다른 민족들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복음을 통하여,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한 몸의 지체가 되며 약속의 공동 수혜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은혜로운 진리가 어렴풋이 이방의 동방박사들을 통해 계시되고 있습니다. 주님의 별, 이정표는 누구에게나 자명한 것이 아닌 늘 진리에 목말라 깨어 있던 이방의 동방박사들에게 계시되었습니다. 참으로 은총으로 깨어 눈이 열릴 때 곳곳에서 주님의 별을 상징하는 이정표들을 발견할 것입니다.
보십시오. 놀랍지 않습니까! 등잔밑이 어둡다고 지척에 탄생하신 주님을 알아 보지 못한 예루살렘의 사람들을 보십시오. 동방박사들의 출현과 구원자 아기 예수 탄생 소식에 혼비백산 놀라지 않습니까! 도대체 종교인, 신학자, 누구할 것 없이 영적으로 잠들어 있었기에 주님의 별을 발견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의 별, 이정표에 이어 세 번째 도반입니다. 혼자가 아닌 세 도반의 동방박사들입니다. 전설처럼 전해오는 발타살, 가스팔, 멜키올 셋입니다. 어느 분은 세아들을 두었는데 이 세 동방박사들 이름의 세례명을 붙였길래 참 기발하다 싶었습니다. 혼자의 여정이 아니라 더불어의 여정이었습니다. 빨리 가려며 혼자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산전수전 그 험한 순례 여정 혼자 였다면 동방박사들은 필시 도중 하차 했을 것입니다. 산티아고 순례 여정 또한 똑같습니다. 혼자인 듯 하지만 앞뒤로 계속 이어지는 순례자들이 바로 더불어의 도반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순례 여정의 진리가 우리 순례 여정중의 수도공동체나 교회공동체에도 그대로 적용됨을 봅니다.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집이라는 목표지점을 향한 평생 순례 여정 중, 날마다 이렇게 수도형제들, 교우들의 도반들과 함께 하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이 참으로 귀하고 고맙습니다. 새삼 함께 순례 여정중인 도반들과의 우정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천국입장은 개인입장이 아니라 도반들과의 단체입장이라 합니다. 과연 날로 깊어지는 도반들과의 우정의 형제애인지 묻게 됩니다.
동방박사들과 견주었을 때 뚜렷이 부각되는 우리의 자랑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영원한 평생 도반이자 주님이신 파스카의 예수님입니다. 보이는 사람 도반들이 다 죽거나 사라져도 우리와 늘 함께 계신 영원한 도반이신 파스카 주님께서 우리의 도반은 물론 주님의 별이라는 이정표 역할을 하고 계시니 얼마나 큰 구원의 축복인지요! 마태복음 마지막 말마디가 이 진리를 입증합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ㄴ)
그러니 우리의 평생 순례 여정에 영원한 도반이자 주님이신 예수님과의 우정이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참으로 우리의 인생 순례 여정은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 여정이자 동시에 평생 도반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임을 깨닫게 됩니다.
도반에 이은 마지막 결정적 요소가 기도입니다. 이점에서 우리는 이방의 동방박사들 보다 유리합니다. 동방박사들의 간절했던 순례 여정을 보면 분명 이들도 기도했을 것이지만 우리만은 못할 것입니다. 참으로 인생 순례 여정에 항구하고 간절한 끊임없는 기도가 있어야 늘 깨어 목표인 하느님과 이정표들을 발견하고 확인할 수 있겠으며 도반들과의 우정도 날로 깊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저의 산티아고 순례중 배낭에 미사가방을 넣고 800km 2000리를 걸으면서 가장 많이 바친 것이 묵주기도였습니다. 물론 미사도 매일 했고 약식 전례기도서로 성무일도도 꼭 바쳤습니다. 새삼 삶은 기도임을, 걷는 것이 기도임을 깨우쳐준 순례여정의 은총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하루하루가 인생 순례 여정의 압축입니다.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아야 함을 배웁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때 마다 베들레헴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듯 우리 또한 주님께 경배드리며 평생 인생 순례 여정에 필요한 은총을 받습니다. 사실 매일 미사보다 평생 순례 여정에 결정적 도움이 되는 수행은 없을 것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성공적 인생 순례 여정으로 이끌어 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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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XtDSIukrB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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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마태 2, 2)
밖에서 보면
성탄이고
안에서 보면
공현(公顯)이다.
찾아나가는
여정이
비워내는
성탄의
참기쁨이다.
버리지 않고서는
떠날 수 없고
찾을 수 없다.
성탄을 놓아야
성탄이 보인다.
그동안 너무
많은 것들을
움켜쥐며 살았다.
가장 소중한
것까지
내려놓는 법을
다시 배우는
여정이다.
먼저
내려놓으신
하느님께서
비워낸 우리를
기쁘게
맞아주신다.
비워내는 길이
하느님을
만나는 은총의
길이다.
은총이란
채우는 것이
아닌 비우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하느님의
성탄이다.
비워낸 곳이
시작된 곳이다.
비워내야
하느님께
돌려주어야 할
것들을 알게 된다.
동방박사들은
하느님께
돌려주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를
알았기에
하느님께
돌려드린다.
비워야
하느님을
드러낼 수 있다.
비워야
이어질 수 있는
공현의 여정이다.
내려놓아야
깊어지는
사랑이다.
이제 그만
내려놓으라며
내려놓으신
하느님께서
아기의 모습을
드러내신다.
내려놓아야 할
대상이 바로
나자신이라는 것을
깨닫게되는
공현 대축일이다.
내려놓으니
편안한 일상이다.
내려놓으니
욕심이 아닌
성탄이 비로소
보이고
참된
겸손으로
하느님 앞에
다시 무릎을
꿇게 된다.
비우는 것이
성탄이고
나의 뜻을
내려놓음이
공현이다.
이 날을
함께 기뻐한다.
++++++++++++++++++
(2)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마태 2, 2)
모든 이들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구경이 아니라
경배의 시간입니다.
바라보는
이들은 많지만
찾아가는 이들은
참으로 적습니다.
길을 떠나며
많은 것을
깨닫게 됩니다.
느리고
더디어도 우리는
도착하게 됩니다.
아득한 먼길을 돌아
우리는 저마다
여기까지 왔습니다.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에게서
길을 묻게 됩니다.
공현은 하느님
사랑의 방식입니다.
우리 모두를
기쁘게 받아들이시는
하느님의 공현입니다.
받아들임이 있기에
우리자신을
내어드리는
내어드림이
있을 수 있습니다.
먼저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셨듯이
우리또한 우리자신을
하느님께 내어드리는
찬미와 찬양이 되길
기도드립니다.
공현으로
하느님의 탄생을
온 백성이 기뻐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기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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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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