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쪽 하늘/ 엄현옥
가을의 문턱에서 양평 ‘세미원’을 찾았다. 연꽃 향이 가득했을 연못은 뒤늦게 핀 몇 송이만이 조심스레 고개를 내밀었다. 갈색으로 변한 연밥은 마른 몸으로 익어갔다. 팔당호가 둘러싼 정원은 가는 곳마다 물줄기가 나타나곤 했다. 그때마다 걸음을 멈추었다. 양수교를 지나는 자동차 소리만이 아득했다.
배다리 옆에 예전에 없던 기와집이 있었다. <세한도歲寒圖>를 실경으로 살려낸 ‘세한정歲寒庭’이었다. 화선지에서 나온 상상 속의 장면이었으나 고풍스러운 맛은 없었다. 둥근 창이 있는 건물 옆으로는 잣나무가 훤칠했다. 추사 선생에 대한 지조를 지킨 이상적을 상징하는 나무였다. 그 옆의 휘고 부러진 나무는 추사 자신이라 했다던가. 지지대에 몸을 기댄 노송은 지친 기색이 완연했다. 그처럼 굽은 나무를 찾는 데 3년이 걸렸다는데 그 노력이 헛되지 않아 보였다. 전시관에는 <세한도>에 얽힌 사연이 전시되었다. 세한정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보편적 가치관을 실천하는 장소’를 인위적으로 조성한 곳으로, 현대인에게는 자칫 진부한 가치로 여겨질 수 있는 의리를 다짐하는 곳을 설정한 착상은 부자연스러웠다. 그러나 조선 지식인의 핏속에 면면이 이어져온 사연을 되살려 낸 것은 그 나름의 의미가 있었다.
선생은 권세에 아부하지 않고 지조를 지키는 것이 도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세상 인심은 달라서, 유배된 그를 찾는 이들이 없었다. 유일하게 제자 이상적만이 중국에서 구해온 서적을 매번 추사에게 보냈고, 이에 선생은 사제 간의 의리를 추운 겨울의 소나무와 잣나무에 비유한 그림을 그렸다. <세한도歲寒圖>는 노쇠한 선생이 세상을 향해 붓끝으로 날린 메시지였다. 고단했던 제주 시절의 선생에게 힐링은 송백松柏과 같은 제자의 의리였으리라.
그곳을 나와 두물머리를 향해 걷는데 몇 명의 젊은이들이 오버랩 되었다. 2011년 오디션 프로그램 ‘슈퍼스타 K’에서 우승한, ‘울랄라 세션(Ulala Session)’이다. 특이한 이름을 가진 그룹의 등장은, 자고 나면 변하는 가요계의 판도를 생각하면 뉴스거리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들은 범상치 않았다. 당시 리더 임윤택은 위암 말기로, 어려운 시간을 함께 견디어 온 멤버들에게 마지막 선물로 오디션 참여를 결정했다. 그들의 음악을 세상에 알리고 떠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우승했고 임윤택의 투병 사실도 명성을 따라다녔다.
‘울랄라 세션’은 음악성도 빼어났다. 장르를 초월한 곡 해석과 완벽한 화음으로 가슴에 파고드는가 하면, 유머와 개성이 돋보이는 퍼포먼스로 무대를 채웠다. 신중현의 <미인>을 국악기와 조화를 퓨전으로 리메이크 했으며, 그중에서도 이승철 원곡인 <서쪽 하늘>은 뭇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세상엔 가혹한 일도 많다. 그들의 인기가 거침없이 오르자, 네티즌은 숙덕거렸다. 병색을 감추고 혼신을 기울인 무대 때문인지, 임윤택의 ‘위암 투병’의 진위 여부를 의심한 악성 댓글이 나돌았다. 말을 아꼈던 그는 진실을 증명하듯 지난 2월 세상을 떠났다. 아내와 돌이 된 딸을 남긴 그의 나이는 고작 서른둘이었다. 이제 세 명인 그들의 인사말은 ‘남성 4인조 울랄라 세션 인사드립니다.’로 변함이 없다.
임윤택이 떠난 자리에 기적이 일어났다. 멤버들은 인터뷰에서 ‘형의 빈자리는 크지만 그럴수록 우리가 밝고 즐겁게 활동하는 게 맞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런 아픔을 딛고 소아암 환아 치료를 지원했고, 임윤택 씨 딸의 양육비를 적립한다고 밝혔다. 그들의 훈훈한 결심은 세파에도 변함없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멤버들은 임윤택을 리더로서 존경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책을 통해 아이디어를 얻었고 글쓰기를 즐겼다고 한다. ‘안 된다고 하지 말고, 아니라고 하지 말자.’ 라는 제목의 책도 남겼다. ‘얼마나 사느냐보다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고 했던 그는 일회적인 생의 속성을 간파한 삶의 전문가였을까. 바람만 불어도 고개를 돌리는 인심을 생각하니, 짧은 생을 치열하게 살았던 그와 동료들의 이야기가 애틋했다. 빼어난 풍광이 감동을 주고 자연이 인간을 치유하는 것만은 아니리라. 사람의 일에 사람만큼 위안이 되는 대상이 있을까.
두물머리의 텃주대감인 느티나무 옆에 앉아 강을 독대했다. 남한강과 북한강은 물밑에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몸을 섞었다. 바람이 불자 건너편의 산이 일렁이는 강물을 핑계 삼아 앉은 채로 손을 내밀었다. 과묵해 보였던 산이 내게 다가오는 것을 보니 은근히 설레였다. 낮은 산과의 만남이 시작되었으나 떠나야 할 시간이었다. 왠지 모를 아쉬움으로 자꾸 뒤돌아보았다. 사람들은 이미 자리를 뜬 뒤였다.
서둘러 용산행 전동차에 앉았다. 팔당에 이르자 서쪽 하늘은 각혈이 시작되었다. 일락서산日落西山의 정경을 바라보며 나는 온몸이 노을에 물드는 황홀한 처절함에 젖었다. 차창에 가득 찬 노을은 청량리에 이르자 제 몸의 신열을 주체하지 못하고 고층 건물에 몸을 비볐다. 수직으로 견고하게 선 빌딩은 끝내 제 몸을 열지 않았다. 노을은 도심의 모든 직선과 함께 어둠에 몸을 섞었다.
서쪽 하늘로 노을은 지고 이젠 슬픔이 돼버린 그대를
다시 부를 수 없을 것 같아
또 한 번 불러보네
소리쳐 불러도 늘 허공에
부서져 돌아오는 너의 이름
이젠 더 견딜 힘조차 없게
날 버려두고 가지
-이승철 사, <서쪽 하늘> 중에서
의리의 아이콘 ‘울랄라 세션’, 그들의 노래가 내 귓전에 노을처럼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