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죄 - 법조문의 충돌, 모순
현재 서울시 전역의 육교에 걸려 있는 광고 현수막은 불법인가? 이달 9일에 일부 개정된 <옥외광고물 등 관리법>에 따르면 "그렇다. 그런데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안 된다. 하지만 꼭 안 되는 것만은 아니다"라고 되어 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현재 <옥외광고물 등 관리법>에는 4개의 법조항이 서로 충돌을 일으키고 있다. 이것이 문제의 발단이다.
제10조(광고물등의 표시금지 지역ㆍ장소등) ①법 제4조의 규정에 의하여 광고물등의 표시를 금지하는 지역 및 장소등은 다음과 같다.
11. 교량ㆍ축대ㆍ육교ㆍ터널ㆍ고가도로 및 삭도
제8조(적용배제) 비영리 목적으로서 설치·표시 기간이 30일 이내인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광고물등에 대하여는 제3조 및 제4조(대통령령이 정하는 금지장소 명시)의 규정을 적용하지 아니한다.
1. 관혼상제 등을 위하여 설치·표시하는 광고물등
2. 학교행사 또는 종교의식을 위하여 설치·표시하는 광고물등
3. 시설물의 보호·관리를 위하여 설치·표시하는 광고물등
4. 단체 또는 개인의 적법한 정치활동 또는 노동운동을 위한 행사 또는 집회 등에 사용되는 광고물등
제26조(공공시설물이용 광고물의 표시방법)①광고물을 표시할 수 있는 공공시설물은 다음과 같다.
5. 그밖의 공공시설물중 시ㆍ군ㆍ구조례로 정하는 편익시설물로서 시장ㆍ군수 또는 구청장이 광고물관리심의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인정하는 편익시설물.
제6조(다른 법령 또는 국가등의 광고물 제한)
① (다른 법령 또는 조례에서 이미 특례규정이 있는 때에는 그 규정에 기하여 광고물등을 설치·표시하는 경우를 포함한다)에는 미리 행정자치부장관과 해당 광고물등의 종류, 수량 및 위치 등을 협의하여야 한다.
법조항이 복잡하지만 지자체 담당공무원의 취재 내용을 종합해보면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개정된 법률에서 '육교'는 광고물 금지 구역으로 명시됐다.(제4조의 내용) 그리고 육교 광고물을 게시할 수 있었던 근거는 제8조에 있는데, 개정된 법률에 의하면 금지장소를 규정한(동시에 허용장소도 규정한) 제4조를 적용하지 않도록 했기 때문에 육교 광고가 설 수 있는 기반이 한꺼번에 날아갔다. 담당 공무원의 표현에 따르면 "거의 삭제 수준"의 개정을 했다는 것이다. 제6조와 제26조도 애매하다. 육교광고물 게시는 불허하지만 시군구청의 조례에서 승인하면 불법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는 시군구청이 국법 위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국법이 스스로 증명한 셈이 됐다. 6조 역시 가관이다. 이제까지 허용된 법령에 대해서는 행정안전부장관과 협의를 해서 '허용'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옥외광고물 등 관리법> 한 가지 사례로 추론하기는 어렵지만, 우리나라의 법조문이 얼마나 모순투성이인지 헤아려보기란 어렵지 않다. 하지만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육교광고'를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은 이번 법의 가장 큰 피해자이며, 이들이 구제받을 수 있는 길은 당분간 없다는 것이다.
▲ 강서구 화곡본동 시장 주변의 육교에 '불법' 광고물이 부착됐다. 담당공무원은 서울시로부터 '공문'이 오지 않아서 광고물 부착을 허가했다고 말했다.
시군구청 육교광고물 허용 천태만상
사정이 이러다 보니 국법을 수행하는 지자체 공무원들은 어느 장단에 맞춰서 춤을 춰야 할지 모를 지경이다. 기자는 육교 광고물을 금지하는 <옥외광고물 등 관리법>이 7월 1일 시행된 점을 들어 욕산구 관할인 봉래초등학교 근방의 육교 광고물을 철거토록 만든 바 있다. (7월1일 오마이뉴스 <어른 키높이 광고판 "육교가 감옥 같아요">) 용산구는 이후에도 육교광고물 허가를 내주지 않고 있다. 하지만 강서구청은 법률 개정을 무시하고 육교광고물 허가를 내주었다. 강서구 담당자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서울시에서 법률 시범 운영 자치구 10곳에 공문을 내려보내 강남구는 육교광고를 불허하고 있지만, 강서구는 시범 자치구에서 제외돼 허가를 내리게 됐다"고 말했다. 이건 또 뭔가? 시군구청 조례가 법률을 뛰어넘는 것도 모자라 '공문'이 모든 법 위에 군림한다는 말인가? 서울시 담당관과 통화를 한 결과 "협조공문을 내려보낸 바 있다"는 답변을 얻었다. 그는 <옥외광고물 등 관리법> 제6조의 내용을 들어 "행안부 장관과 협의가 가능하며 문의 결과 '자치구조례에 편의시설물로 포함시키라'는 지침을 얻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자치구조례에 이와 같은 내용을 반영한 곳은 현재 어디에도 없다. 말 그대로 '공문'이 '조례'를 대신한 셈이다.
서대문구청은 위법 사실을 시인했다. 서대문 관할 굴레방다리 근방의 육교에 불법광고물이 부착돼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담당 공무원은 '격무'를 이유로 일일이 조사하지 못했다는 핑계를 댔다. 뿐만 아니라 "조처 후 알려줄 수 있느냐"는 기자의 요청에 대해서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사실상 거부했다.
▲ 서대문 관할 '굴레방다리' 근처의 육교에 '불법' 광고물이 부착돼 있다. 관할 담당관은 광고물 부착이 불법임을 시인했지만 격무 핑계로 일관하며 공무원의 어두운 그림자를 여지없이 확인시켜 줬다.
육교광고물 업체들 당분간 구제받을 길 없어
이번 법률 개정에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측은 단연 육교광고물 업체 관계자들이다. 시군구청 관계자들에 의하면 업체측에서 관청에 피해를 호소하며 대책 촉구가 빗발쳤다고 한다. 지금 상황에서 이들의 경제 활동은 모두 '불법'이기 때문이다.
말많고 탈많은 서울시의회는 8월26일~9월9일까지 175회 임시회의를 개최한다. 만약 이번 회기에 육교광고물 업체를 구제하는 내용의 <옥외광고물 조례>가 통과된다 하더라도 9월 9일로부터 20일이 지난 9월 29일에나 공포가 된다. 그러니까 업체들은 지금부터 9월 29일까지 대책없이 거리에 나앉든가 범법자가 돼야 하는 신세다.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이번 회기에 서울시는 <옥외광고물 조례>를 상정하지 않을 계획이란 점이다.
그 이유는 경향신문 7월29일자 14면에 잘 나타나 있다.
서울시와 각 자치구는 공공디자인을 전담하는 조직을 만들어 '디자인 서울거리'로 만들고 있다고 28일 밝혔다. 중구는 한국은행~을지로입구 구간의 '남대문로 디자인서울거리'를 9월 말까지 마무리할 예정이다. 강동구도 천호동사거리에서 길동사거리 방향의 천호대로 530m 구간을 고품격 디자인거리로 조성할 계획이다. 구로구는 다세대ㆍ다가구 소규모 공동주택에 대한 디자인 가이드라인을 마련해 신축 건물마다 특색있는 디자인으로 설계되도록 할 예정이다.
- "도시도 이젠 디자인이다"
기사의 내용과 같이 서울시는 <디자인서울거리 조성사업> 때문에 이번 회기에는 육교광고물 부착을 막아야 하는 상황이다. 그러니까 서울의 겉모습을 번지르르하게 만들기 위해서 영세한 광고물 업체의 생계를 팽개친다는 말이다. 갑자기 이명박 전 시장에 의해서 내몰렸던 옛 청계천의 영세 상인들이 떠오르는 이유가 뭘까? 두 사례 모두 전시행정을 위해서 민생을 외면한 대표적인 정책으로 평가받지 않을까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언론의 얕은 사회인식이다. 이른바 '정론매체'라고 부르며 최근 많은 구독자를 모으고 '팬클럽'까지 생긴 경향신문이 <디자인서울거리>의 실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도시도 이젠 디자인이다"는 안이한 제목을 딴 점에 대해서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경향신문은 민영화의 첫 신호탄이 될 수도 있는 제주 영리병원 문제도 전국면에 짤막하게 실었다가 문제가 커지고 나서야 사회면으로 확장한 바 있다. 정론매체의 현주소를 보는 듯하여 씁쓸하다.
취재를 한 지자체 공무원들이 입을 모아 하는 이야기는 "법률 안에 충돌이 너무 많고 예외조항이 많아 난감하다"는 말이었다. 뿐만 아니라 법 전문가들에게서조차 <옥외광고물 등 관리법>은 거의 최악의 법률안으로 평가받고 있다.
오늘이 7월 30일이다. 이번 회기에 <조례안>이 통과된다면 육교광고물 업체는 2개월 동안 법의 사각지대에서 고통을 겪게 된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되지 않는다면 다음 회기까지 기약없이 절망적인 상황에 놓이게 될 것이다. 이번 회기에 반드시 <조례안>이 통과돼야 하는 이유다.
지금 민생이 큰 위험에 처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