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고 넓은 바닷가에...(비록 만 이긴 하지만 바다가 가까운 건 사실이다) 오막살이 집 한 채...(오막살이도 맞다) 고기 잡는 아버지와...(고기가 아니라 장기의 궁!을 잡고 계신다) 철 모르는 딸 있네...(그러네) 내 사랑아 내 사랑아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나의 사랑 이스턴아...) 늙은 아비 혼자 두고 영영 어디 갔느냐...(영영은 무슨, 잠깐 회사 갔도다)
내가 집에 있는 사람이 아니니 아버지는 어쩔 수 없이 한 나절 내내 혼자 지내셔야 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저 멍~하니 앉아만 계시거나 하지 않으셨다. 먼저 집안에서 가장 볕이 잘 드는 코너를 골라 당신의 약병들을 늘어 놓는 것으로 영역표시를 하신 다음, 기본 사양 장착을 위한 요구를 시작하셨다. 물론 대한민국의 부모님답게 자식에게 폐를 끼칠 의도가 전혀 없음을 줄기차게 주장하시면서...
안 쓰는 컴퓨터가 있으면 써도 되느냐? - 임시로 노트북을 드렸더니, ‘이거 내가 쓰다가 고장내면 네가 일하는데 지장이 있을 거 아냐?’...툇짜라는 뜻이다. 최신형 컴퓨터와 왕! 큰 모니터를 사 드렸다. 무선 인터넷을 해 드렸더니, 하루 걸러 연결을 지워 버리셨다. - 할 수 없이 위 층부터 어마어마한 케이블로 계단을 타고 내려와 거실을 가로질러 창가의 아버지 컴퓨터에 연결해 드렸다. 식탁 위에 컴퓨터를 놔도 되겠느냐? - 컴퓨터 책상을 사다 조립해서 창가에 놔 드렸다, 물론 서랍장도. 절대! 춥진 않지만 그래도 전기 장판 같은 거 있으면 너도 쓰고 좋지 않겠냐? - 침대 위에 전기 장판을 깔아 온돌처럼 만들어 드렸다. 어디 못 쓰는 회전 의자 하나 없겠냐? - 사무실에서 가장 좋은 의자를 하나 실어다 드리기까지 무려 네 번을 바꾸었다. 정원에 작은 벤취라도 하나 있으면 너 피곤할 때 앉기도 하고 좋을 텐데... - 모시고 가서 당신 맘에 꼭 드는 나무 벤취를 사 드렸다. 끈을 좀 달라, 행주라도 널게 빨래줄을 걸면 어떠냐... - 동생네 빨랫대가 우리 집으로 이사왔다.
뭐든 샀다가도 맘에 안 드시는 눈치면 다시 바꾸러 갔다. 동생 부부와 내가 석 달 동안 쇼핑과 심부름과 반환을 거듭한 끝에 지난 주 정원 벤취와 빨랫대를 마지막으로 기본 장착은 끝이 난 것 같다.
그리고 드디어 의지의 한국 할아버지 미스터 클레멘타인의 하루 스케줄도 완성이 된 듯 하다. 별로 늦잠을 안 자는 딸내미임에도 불구하고, 내 방 문이 열릴 때까지 방에서 꼼짝도 안 하신다, 만약 화장실에라도 다녀오시던가, 담배라도 피실라 치면, 발끝으로 살곰살곰 다니신다... '네가 깰까 봐...'
아침을 먹고나면 그 몇 개 안되는 설거지도 절대 못하게 하신다... '넌 출근 준비해라, 출근 준비...' 그거나마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도우시겠다는 거다... 10시 쯤 출근길에 근처 공원에 내려 드리면, 야구장이나, 농구장을 빙빙 돌며 산책을 하시곤, 걸어서 집에 오신다... 약 한 시간 반...퇴행성 관절염이 있는 83 세의 노인으로선 충분한 운동량이다...
그리고 나가기 전에 불려 놓은 쌀로 밥을 지으셔서 내가 작은 쟁반에 올려 냉장고에 넣어 놓은 반찬을 내어 점심을 드신다... 식후 커피를 한 잔 하시곤 취미 생활에 몰입하신다... KBS 가요무대나 뉴스 데스크를 배경 음악으로 깔아 놓으시곤, 인터넷 장기를 두시는 것이다...
'요놈, 해 볼래? 까불래? 어디 내 공격을 받아 보시지?' 흡사 모니터 속 장기판 저 편에 상대방이 있는 것처럼, 혼자 중얼거리시며 한나라와 초나라의 전쟁에 빠져 드신다... 장기 10 급인 미스터 클레멘타인의 현재 전적은 105 전 86승 19패... 승패가 숨가쁠 땐 식사 차려 놓고 삼십 분씩 기다려야 할 때도 있다... '아버지, 안 오세요? 난 배고픈데...나 먼저 먹는다?' 사랑하는 맏딸보다, 네모난 모니터에 열중하신 아버지를 오미터 옆에 두고 혼자 먹는 밥상에 짜증이 나서 와인을 두 잔이나 비운 적도 있다...
오후 4시가 되면 한국에 전화를 하셔도 좋다... 저렴한 인터넷 서비스로 입력해 둔 단축번호로 한국의 친지들에게 전화를 하시는 것이다. 간혹 한국에서 걸려 오는 친지들의 전화는 저녁 때 들어간 내게 보고하는 첫 마디가 된다. '아 거, 목소리 가느다란 친구가 전화를 했더라구...' '니 작은 아버지 병세가 많이 좋아졌단다...' '캐나다는 오늘 눈이 왔대...'
아버지의 일과는 그것 뿐이 아니다... 설거지한 그릇과 냄비들을 죄다 벤치에 널어 말려 일광욕을 시키신다. 하루 동안 쓴 행주 또한 백옥같이 빨아 널어 말려 서랍에 개켜져 있다. 쓰레기도 미스터 클레멘타인 담당이다. 수거해 가는 금요일 전 목요일 저녁엔 아버지의 발걸음은 더욱 부산해 진다. 위층의 화장실부터 시작해서 서재, 부엌 쓰레기통, 재활용까지...
2008 년은 내게 '죽음보다 더 잔인한 해' 였다. 오십 남짓 살면서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상상조차도 못 해본 일들이 줄줄이 일어 났다. 고소를 당하고, 엄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위독하시고, 불이 나고, 물이 새고, 전 재산을 날리고, 회사를 닫고, 다시 차리고 등등... 가까운 친구들이 '휴우...너만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 할 정도의 초특급 위기와 스트레스와 어려움에 시달렸다...
그 와중에 아버지를 모시고 집에 돌아 왔다... 내가 어떻게 버텨 낼 지 자신도 확신도 계획도 없는 상태였지만, 그게 유일한 선택이었고, 피치 못할 내 몫이라고만 생각했다.
아버지가 안 계셨더라면 어찌했을까? 그간 아버지는 내게 삶의 목적이자, 지침이자, 버팀목이었다... 눈 앞에 떨어진 엄청난 일들, 해야할 일 100 여 가지 리스트보다 날마다 아버지 건강과 식사 챙기고 외국 생활에, 딸네 집에 적응하시도록 신경쓰는 일이 내겐 당장 더 진지하고 급했었다. 아버지 앞에서 차마 내 문제와 고통을 내색할 수 없어 잠 한 숨 못 자고도 날마다 회사에 나갔고, 어영부영 정리할 건 정리하고, 끄덕끄덕 새로 해야 할 건 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안정을 찾아 간다.
미스터 클레멘타인 화이팅! 끔찍한 2008 년이 내게 준 최고의 상은 내 아버지이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제 곁에 계셔 주셔서...
ps. 행주 빠는 빨래판이 필요하다며 '가장 싸고 작은 거' 를 사셨었다... 오늘 아침에 '이거 보다 좀 크면 좋을 텐데...마켓에서 안 바꿔 주겠지?' 걱정이시다... '네, 물론 바꿔 주죠...' 하고 들고 나왔다... 한 달이나 썼고, 상표며 영수증도 버렸으니 바꿀 길이 없다. 이건 어디다 숨겨놓고 큰 거 사 가지고 들어갈 작정이다... 미스터 클레멘타인은 '역시 미국은 좋구나...' 하며 안심하실 테니...
eastern...(^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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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언제나처럼 대단한 분! 많이 궁금했는데.. 근황 알 수 있어 고맙습니다. 부디.. 좋은 일만 가득하시길... _()_
참으로 오랜만에 들어와서 이스튼님의글을 봅니다 친구분 말씀처럼 제 가슴이 먹먹해짐을 느낍니다 대단한 분임에 틀립없겠습니다 매사에 지혜롭게 대처하시는 모습이......존경스럽기까지 합니다 잘 참으시고 잘 이겨내고 계심에 박수를 보내며 앞으로는 웃을일만 있으시길 기원합니다 모쪼록 연로하신 어른을 모신다는것이 참 어려운 일이며 자처하신 용기에 박수를 보냅니다 모시는 일에 예상치도 못한 복병을 만나기도 하겠지만........ 돌아가신 후에 되돌아보면 제일 잘하신일로 기억되어질테니 ...... 힘내십시요 아자아자!
깔끔하신 분 꼭 우리 아버지와 똑같으시다 이스턴님은 효녀 아무나 할수있는 일이 아니지요 아자!!!... 화이팅~~
주위 어른들이 '아버지 잘 모시고 살아라' 하면 한 번도 '네에...' 공손히 대답한 적이 없습니다. 제 발 저려서...'모시진 못하구요, 그냥 같이 살아요...' 합니다...근데 그 '같이 사는 것'이 참 좋은 일이더라구요...아직도 어리광을 받아 주시는 아버지가 함게 계시다는 게 너무너무 좋습니다...(^_^)
잉? 오늘 댕겨갔수? 반가워라~ ^^*